잊혀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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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원인
2.1. 제한전
2.2. 어정쩡한 결말
3. 베트남 전쟁과의 비교
3.1. 미디어
3.2. 전쟁 기간 및 미군의 피해
3.3. 이벤트성 부족
3.4. 참전 명분
4. 사후 관리
5. 미디어 및 대중문화
6. 언급



1. 개요[편집]


우리가 귀국했을 땐 퍼레이드 따위가 전혀 없었다. 그냥 제대해서 직장으로 갔다.

한국전참전용사협회 회장 샐 스칼래토

Forgotten War. 6.25 전쟁의 별칭. 한국은 물론 수많은 UN군과 미군을 비롯한 국가들이 모여들어 피를 흘린 전쟁이지만, 베트남 전쟁제2차 세계 대전에 비하여 주목을 받지 못해 생겨났다.

America's Forgotten war이라 하면 미영전쟁을 칭하는 호칭이 된다. 미영전쟁은 전쟁을 벌인 당사자인 미국과 영국 둘다 관심 밖이고 오히려 캐나다에서 훨씬 관심이 높다.

문서 제목인 잊혀진 전쟁은 이중 피동 표현이다. 그래서 잊힌 전쟁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대안으론 '잊어지다'를 활용한 '잊어진 전쟁'도 있다.


2. 원인[편집]


6.25 전쟁은 참전국의 수나 사상자의 규모, 전투기간으로 따지면 2차대전 이후의 전쟁 중에서는 매우 커다란 전쟁이었다. 미군의 경우 연인원 약 1,789,000명이 투입되었고,

36,574 사망<ref>전투 중 사망자: 33,739 / 비전투 중 사망자: 2,835 -


2021년 미국 제대군인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통계 기준 1,789,000명이 참전하여 36,574명(전투 중 사망자: 33,739 / 비전투 중 사망자: 2,835 의 미군 사망자가 나왔으며, 103,281명[1]이 부상을 입었고, 약 7,200명이 포로가 되고 1000여명이 실종자로 처리되었다. 베트남 전쟁보다는 여러모로 규모가 적지만,[2] 미군의 베트남 전쟁 기간은 최초 전투부대 파병인 1965년부터 마지막 전투부대 철군인 1973년까지로 8년인 것을 감안해야 하고 걸프전, 이라크전, 아프간전을 모두 합쳐도 6.25 전쟁 수준의 사망자, 부상자 규모는 나오지 않는다.

냉전 시기에는 베트남 전쟁이, 그 이후에는 이라크 전과 아프간 전이 이목을 잡아서 그렇지, 미군 장병 입장에서는 6.25 전쟁이 제일 험난하였으며, 나쁘게 표현하면 '지랄맞은' 전장이었다. 하다못해 기후도 최악이었는데, 차라리 사시사철 아열대인 베트남, 사막 지형인 아프간, 이라크와 달리, 한반도는 4계절이 뚜렷해서 여름에는 여름대로, 겨울에는 겨울대로 최악이었다.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CG-65에는 '초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는 현세 한빙지옥이었던 장진호 전투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미군이 겪은 굵직한 전쟁에 비해서, 6.25 전쟁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끝난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은 명목상 휴전으로 현재 진행형이나, 미군 참전은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을 기준으로 끝났다.[3] 2001년 벌여서 2021년 끝난(약 20년) 아프간전, 2003년 벌여서 2011년 끝난(약 8년) 이라크 전에 비하면 아득히 짧다. 베트남 전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군은 통킹만 사건(1964년 8월 2일)을 근거로 1964년 8월 4일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고, 1973년 1월 27일의 파리 평화 협정(Paris Peace Accords)[4]으로 개입을 종료했다. 약 8년 5개월 전쟁을 벌인 것이다.

즉 6.25 전쟁은 베트남 전쟁의 약 1/3 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하지만 명예 훈장은 6.25 전쟁에서 146개,[5] 베트남 전쟁에서 261개[6] 수여, 추서되었다. 관련 미군 사망자 수도 6.25 전쟁은 약 36,574명이고, 베트남 전쟁은 약 58,000명이다. 기간 비율로 따지면 6.25 전쟁에서 수여, 추서된 명예 훈장의 수와 사망자 수는 베트남 전쟁의 그것의 1/3 수준이 되어야 하나, 실제로는 1/2을 초과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힌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미국에서 관심이 없는 것에는 몇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2.1. 제한전[편집]


6.25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마치고 나서 5년도 지나지 않아 터졌고, 잘못하면 3차 대전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컸다. 미국도 엄청난 전비를 써서 나치 독일에 이겼기 때문에 지옥같은 2차 대전에서 벗어난 미국인들이 이제야 여유를 찾았으며 더 이상 전쟁같은 건 하지 말자라는 반전주의가 일어나던 마당에 또 해외에서 전쟁을 크게 치른다고 하면 전비 지출이 막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명분은 있었지만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이 참전을 Total War가 아니라 Police Action으로 축소했고, 소련도 확전을 막으려고 개입을 숨겼는데 미국과 달리, 당시 소련은 지옥의 총력전독소전쟁을 겪은 후라[7] 그냥 국가 자체가 만신창이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북한, 더글러스 맥아더 개인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미국, 중국, 소련)가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6.25 전쟁은 무슨 외교적 수를 쓰건 한반도 밖으로 확전시키지 않는다라는 자세로 전쟁에 개입했었다. 문제는, 공간적으로만 제한전이었을 뿐 끝장을 보자는 당사자들의 존재로 인해 51년 이후에는 지옥과도 같은 소모전 양상이 되어 도저히 제한전이라고 하기 힘들어진 상황이 된 것.


2.2. 어정쩡한 결말[편집]


6.25 전쟁은 완전한 승전도, 완전한 패전도 아닌 휴전으로 끝났다. 이렇게 '어정쩡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승패가 명백한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다루기가 애매하다. 흔히 2차대전은 미국의 영웅같은 면모가 부각되고,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자성하는 성찰이 부각되어 다루기 쉬우나, 6.25 전쟁은 감동으로도 성찰용로도 다루기 어쩡쩡하다. 이기지 못한 전쟁을 미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것은 별로 비판받을 건덕지가 없다. 미국도 상당한 전비를 치러야 했고, 결과적으로 승리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휴전이 선언되어 뭐라 자랑할만한 여지도 못 만든 전쟁이 되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상 그렇다는 것이다. 6.25 전쟁에서 김일성이 수립한 작계'한반도 적화통일'이고, 공산권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적화시켜 극동 자본주의 세력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민의 피와 돈, 병기를 갈아넣어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을 막아내어 대한민국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아직 6.25 전쟁이 휴전 중이라고는 해도 미국과 대한민국이 이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북한을 제외하면 이 전쟁에서 가장 손해를 본 세력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진먼 포격전만 봐도 알 수 있듯, 중국은 대만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있었으며,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국민당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중국에서의 공산 혁명이 진정 완성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동중국해남중국해의 장악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대만의 완전한 합병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가장 큰 숙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 자체를 원치 않아 김일성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부했었다. 러시아에서 공개한 기밀문서에도 그러한 면모가 덧보인다. 아무래도 기밀문서를 공개한 쪽이 소련의 후신을 자처하는 러시아인 만큼 러시아가 정말 민감한 부분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하는 시각도 여럿 존재하나, 니키타 흐루쇼프가 회고록에서 밝힌 부분을 고려하면[8] 스탈린이 6.25 전쟁에 회의적이었고, 미국과 마찰을 벌이느니 그냥 북한을 대한민국에 줘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확고해 보인다.

사실 체면이고 뭐고 알 바 아니고, 일단 미국과의 마찰은 피하고 보자는 식의 '스탈린식' 외교, 즉 일국사회주의는 당시 소련의 상황과 미소간의 국력 격차를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역당 서기장으로 활동했던 흐루쇼프와 달리 스탈린은 소련의 서기장으로서 미국의 파워를 직접적으로 확인한 인물이었다. 독소전쟁 당시에 보았던 미국의 마술만 해도 오버로드 작전, 무기대여법, 태평양 전쟁, 원폭 투하가 있다. 전후 미국은 마셜 플랜을 벌이며 한없이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전후 서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서방의 역량을 보겠다고 베를린 봉쇄를 시도했으나,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무제한 공수작전으로 응수했다.

독소전쟁으로 자국민 2천만명을 잃고 산업 기반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 핵무기 격차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런 나라와 전쟁 직전까지 가겠다는 것은 그냥 미친짓이고, 최소한 스탈린은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된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북한 문제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모습을 두고 '스탈린은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미국을 두려워했다.'라고 평가했고, 흐루쇼프 본인도 미국을 다소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어 보였는데, 흐루쇼프는 결국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의 쓴맛을 톡톡히 보게 된다.

여튼, 흐루쇼프가 속으로 낮잡아 보든 어쨌든 당시 스탈린은 동구권의 교황이자 소련 최강의 권력자인 '강철의 대원수'였다. 동구권에서는 스탈린 '동지'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그래서 적화통일에 눈이 먼 김일성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여기서 김일성에게 일종의 지급보증을 서 주면서 스탈린의 허락을 끌어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마오쩌둥이다.

사실 소련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친서방 국가가 들어서도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가 비교적 더 위험해지기는 하겠지만, 이미 소련은 베링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대치하는 중이었다.[9] 거기에 완충지로 중국이 있는 상황이니 하나 쯤 더 친서방 국가가 생긴다 해서 크게 손해를 보진 않는다. 또한 소련의 역량은 모스크바를 위시한 서부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 위기감이 그리 클 리 없었다.[10]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는 달랐다. 한반도에 친서방 국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곧 중국 동북부, 더 나아가 베이징이 심대한 군사적 위협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부산광역시와 베이징 간 직선거리는 고작 1,200km 내외이며, 신의주시와 베이징 간 직선거리는 고작 700km 내외이다. 신의주를 비롯한 북한 서북부에서 베이징을 타격하려면 단거리 탄도 미사일 수준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물론 1950년에는 미사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했지만, 냉전식 전면전 기준으로도 700km는 그리 멀다고 할 수 없는 거리이다.[11] 일단 서방과 각을 진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불침항모 한반도에서 날아오는 미합중국 공군의 공습, 황해제7함대, 천혜의 교두보 한반도에 상륙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하는 미합중국 육군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여튼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일종의 '중공군 보증수표'를 써 주었고, 실제로도 충실히 이행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UN군1.4 후퇴를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펑더화이와 같이 있던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공습으로 전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 6.25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겪어야 할 대가는 엄청났다. 1950년 10월, 11월에 약 27만을 투입한 것에만 알 수 있듯, 어마어마한 인원을 동원하였는데, 자연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물자를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상자가 적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비전투손실까지 고려하면 약 90만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 더해 주한미군(당시 유엔군사령부)이 한국 땅에 주저앉았고, 제7함대의 비중도 커지는 등 미국이 중국을 크게 경계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6.25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인해 북한이라는 완충지는 지켰으나 대만을 포기해야만 했다. 육참골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대만을 점령하지 못하는 바람에 완전한 중공 혁명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발휘할 수 있는 패권도 익히 줄어들었다. 물론 중국공산당에게는 아직까지도 대만 합병이 숙원 중의 숙원인지라 하나의 중국 원칙을 필두로 하여 호시탐탐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럴수록 중국의 인상만 나빠지는 악순환만 반복되는 상태이다.

결국 미국은 6.25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을 직접적으로 살려냈고, 대만을 간접적으로 살려냈으며, 일본의 회생을 도왔다. 이 세개의 국가는 극동아에서 확실한 미국의 편을 들어주고 있고, 미국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중국을 강하게 견제하고 있다. 또한 3개 국가 모두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거나(일본, 대한민국), 거의 선진국에 도달하였기에(대만)[12] 미국 입장에서 '도와주길 잘 했지? 우리 말 잘 듣고 우리편 되면 이렇게 된다!' 라며 자랑할 만한 거리도 있다.


3. 베트남 전쟁과의 비교[편집]


6.25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를 겪고 난 나라에서 냉전의 일부로써 발생한 전쟁이며, 미국이 대대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에서 베트남 전쟁과 유사하다. 6.25 당시의 한국이나 베트남전 당시의 베트남이나 미국 일반인 입장에서는 사실상 '처음 보는 나라' 취급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6.25 전쟁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았다.


3.1. 미디어[편집]


6.25 전쟁 당시에는 미디어의 발달이 아직 미흡해, '미디어 전쟁'으로까지 불린 베트남 전쟁에 비해서 언론의 관심이 적었다. 전쟁 보도의 대부분은 여전히 2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관 뉴스와 신문, 라디오가 주력이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이전이라서 주요 보도매체로써의 가치는 약했고, 이미 1920년대에 일반화된 라디오 뉴스면 몰라도 화면까지 보이는 영상뉴스는 영화관 상영이 주였다. 대한뉴스도 이런 식으로 방송되었다. 1950년대에는 TV가 일반 가정에 막 보급될 무렵이었다. 사실 TV방송이 시작된건 1939년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과 높은 TV가격으로 보급이 미진했다. 컬러방송은 1950년에 시작되었기는 하지만 컬러방송이 중단되다가 송출방식을 변경하여 1954년에 재개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1960년대가 되어서야 전국적인 보급이 이루어졌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나 6.25 전쟁에서나 전장 전역을 가로질러 폭격을 쏟아부었다. 6.25 전쟁 당시, 어메트 오도넬 소장은 제15공군 B-29를 이용해 대단위 폭격작전을 시행했다.[13] 6.25 전쟁 당시 오도넬이 지휘했던 제15공군은 미합중국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SAC)) 산하 비행대였고, 미합중국 전략공군사령관은 태평양 전쟁에서 소이탄 전략폭격으로 도쿄를 송두리째 구워버린 커티스 르메이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커티스 르메이와 이미 합을 맞춘 적이 있던 어메트 오도넬은 커티스 르메이의 전략폭격 사상에 아주 충실한 장군이었다. 미군의 폭격은 조선인민군이 '있겠다 싶은 곳'에 쏟아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커티스 르메이의 사상을 철저히 이어받은 미합중국 공군은 한반도를 완전히 구워버렸다. 예외라 할 수 있는 지역은 전쟁기간 동안 조선인민군이 발을 못 들였던 낙동강 전선 이남 경상 지역 뿐이었다. 소녀의 절규는 머나먼 월남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6.25 전쟁까지는 보도통제가 가능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 두어장, 라디오에서 들리는 전황은 그저 피상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전쟁이 늘어지다보니 자연히 종군기자들도 훨씬 많이 왔다갔고, 미합중국 정부의 보도통제에 동의하지 않는 저널리스트들이 TV 브라운관에 전쟁 상황을 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소녀의 절규, 사이공식 처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물 건너 후진국의 일이었을 뿐이나, 그것이 영상화되어 눈 앞에 들이밀어지니 일반적인 국민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자연히 반전여론이 무럭무럭 자랄 수 밖에 없었다.


3.2. 전쟁 기간 및 미군의 피해[편집]


규모 면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비교할 만 한데, 참전병력/전사자는 각각 6.25 전쟁 - 약 179만(연인원)/약 3만6천, 베트남 전쟁 - 약 270만(연인원)/약 5만8천으로 6.25 전쟁이 베트남 전쟁의 60퍼센트 수준이지만 수백만명 참전/40만명 전사인 2차대전과는 확실히 다른 급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베트남 전쟁(미군 참전 기준)은 위에 언급된 것과 같이 6.25 전쟁 기간의 약 3배 수준이었다.

6.25 전쟁의 3년 1개월에 비해, 베트남 전쟁은 무려 8년 반동안 지속되었다. 6.25 전쟁에 약 179만 병력을 3년간 투입하는 동안 130만명이 자원, 150만명이 징집됐었는데, 그 두 배의 병력을 3배의 기간동안 유지하려면 총 징집된 인원수는... 베트남 전쟁은 전장에서 돌아온 베테랑들이 PTSD로 고생하면서 사회문제화 되고,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한 살육을 비판하는 평화 반전주의 운동이 일어나며, 이게 또 동시대의 문화적 미디어의 발달로 끊임 없이 음악, 영화 등을 통해 재생산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기억된 전쟁이다. 특히 동시대에 일어난 히피문화가 베트남 전쟁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 전쟁이 6.25 전쟁처럼 2~3년안에 끝났더라면 그렇게 널리 기억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사상자 수를 비교해봐도, 6.25 전쟁은 개전 초 월 1~2천명대였던 미군 사상자 수가 1951년 이후부터는 월 700명 선으로 내려간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사상자가 해가 지날수록 늘어났던 것과는 큰 차이점이다.


3.3. 이벤트성 부족[편집]


6.25 전쟁 초기 1년의 극과 극을 달리던 전장 상황도 미국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극적하지도, 그렇다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애매한 상황의 연속이어서 이야기 거리가 되기에 어려운 면이 많다. 많은 전투가 드라마가 될만한 치열한 공방전보다는 모랄빵이나 상대를 가볍게 여긴 전략적인 판단 실수에 따른 일방적인 결과로 끝나버렸다. 일단 미군/연합군이 참전한 시기부터만 따져도 스미스대대의 전멸, 대전전투로 인한 사단의 궤멸, 장진호 전투에서의 전멸 위기는 미군 최상층부의 과신과 적을 얕잡아 본 전략적인 실수가 원인이었다. 여기에 초기에 경남 지역까지 밀렸다 반대로 단 두달 남짓만에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다시 두 달도 되지 않아 1.4 후퇴로 서울을 빼앗긴 그 과정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가 초기 한국군, 조선인민군, 중공군의 모랄빵으로 인한 전선붕괴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고 베트남 전쟁 수준으로 미군의 전쟁범죄나 프래깅 문제가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보통 사람이 관심을 가져볼만한 매력이 떨어진다. 미국 입장에서는 기껏해야 장진호 전투 정도나 졌지만 잘 싸웠다 정도로 다룰법한 전투다.


3.4. 참전 명분[편집]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내세운 명분은 지속적으로 공격을 당했다. 직접적 명분이었던 통킹만 사건만 해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14] 설상가상으로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되며 반전 여론이 크게 확산되었다.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문제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 대 프랑스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프랑스가 쭉 베트남을 지배하라는 의미에서 해 준 지원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당시 냉전 논리에 따라 해 준 지원이었다. 하지만 결국 '압제자' 프랑스를 도왔던 것이었기에 미국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은 그 명분이 뚜렷했다. 일단 대한민국 자체가 미국이 일본 제국을 때려잡은 결과 독립할 수 있었던 국가였으며, 미국은 미군정을 설치하여 대한민국을 일시 통치하였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해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을 도왔다. 미국과 자유 월남의 관계 수립 과정에서 프랑스가 있었던 것과 달리, 미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훨씬 직접적이었다.

38도선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미국소련은 한반도의 정부 수립 절차에서도 마찰을 빚었다. 미국은 한반도 총선거를 주장하였으나, 소련은 '감독할 UN의 중립성이 의심된다.'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UN이 강대국, 특히 미국의 앞잡이라는 시각이 없진 않으나 실제로는 당시 남한과 북한의 인구차이'가 소련이 총선거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된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인구는 약 2,500만 명이었는데, 남한이 약 1,600만 명, 북한이 약 9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고,[15] 그래서 남북한 총선거를 하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낮았다. 한반도는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이라는 하나의 나라였기에 미국의 명분이 꿀리지는 않았다. 제국주의가 종말을 맞이한 당시 상황에서 UN이 의심된다며 민주주의 총선거를 거부한 소련의 명분이 처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에 대대적으로 남침하였다. 선전포고 없이 새벽에 벌인 비열한 기습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의 후견인인 미국이 참전하기에는 명분이 여러모로 충분했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베트남 전쟁은 참전 명분부터가 꾸준히 의심을 받아왔으며, 이에 대한 분석과 비평도 활발했다. 하지만 6.25 전쟁의 참전 명분은 굳이 후대에 평가할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확고하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6.25 전쟁이 언급될 이유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4. 사후 관리[편집]


어쨌든 미국에서 인식이 이렇게 미비한 탓에 정작 참전 미군들은 PTSD 등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사후관리나 주변의 이해를 얻지 못해 힘든 삶을 산 이들이 많다. 참혹한 전쟁이기도 했던 탓에 귀국한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거나 혼자 살아남았다, 혹은 전쟁이지만 같은 사람을 죽였다는 식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흔한 듯. 이때의 기억 때문에 귀국한 후에 한국에 대해 일절 관심을 끊고 산 참전군인들도 많다고 한다. 감사해야 할 한국으로서도 이러한 이들에 대해 뒤늦게 관심을 가졌기에[16] 무관심과 전쟁 후유증에 고통받다 죽은 참전 미군이 많다.[17]

한국 정부에서는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다른 UN군 참전국가 군인들을 초청해서 한국 관광을 시켜주는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그깟 관광 따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의외로 PTSD 치료에 도움이 되는 듯한데, 이전까지 몇십 년간 사람들에게는 잊혔지만 자신은 잊지 못한 전쟁의 악몽으로 괴로워하던 참전 군인이 한국에 와서 그 발전상을 보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자신과 동료들의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많은 참전용사들이 한국 정부가 시행하는 보은 행사에 초청되어 한국의 현재 상황을 보고 '정말 목숨 바쳐 지켜낸 보람이 있는 나라다'라며 감격해 한다고 한다. 아울러 참전용사 가족들에게도 그들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들이 존경을 받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K-POP이나 한류의 나라로만 알고 있던 후세대로서는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청춘을 바쳐 지켜냈던 나라였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동먹은 것, 어떤 군인은 수십 년간 6.25 전쟁의 악몽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생활하다 의사의 권유로 한국 정부의 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한국을 방문한 뒤 놀랄 만큼 병증이 좋아져 의사가 놀랄 정도였다고. 수십 년간 자신이 죽인 적군의 악몽을 꾸던 한 군인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2020년 5월에 한국 정부는 22개국 참전용사들에게 코로나 19 대응을 위한 마스크 100만장[18]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5. 미디어 및 대중문화[편집]


6.25 전쟁 문서의 관련 작품도 참조.

픽션에서도 그다지 소재로 쓰이지 않아서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특히 하필이면 오! 인천이라는 괴작의 존재가 있어서…[19]

물론 그래도 영화에서 꽤 다뤄졌다. 하지만 서부전선, 태평양 전쟁,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걸작들에 비해서는 인지도나 완성도가 한참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중심소재가 아닌 경우도 많다.

원한의 도곡리 다리와 Heartbreak Ridge(단장의 능선)[20]는 수작이지만 최고의 전쟁영화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며 야전병원 매쉬(M.A.S.H)는 배경만 6.25 전쟁이지 실은 베트남 전쟁을 풍자한 것이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1962년판)는 오프닝에만 한국전이 아주 짧게 나오고 대부분 배경은 미국이며, 그저 공산주의와 대립을 위해 설정으로만 나왔을 뿐이다.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바우트 원(Bout One)작전의 책임자인 딘 헤스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1957년작 영화 배틀 힘(Battle Hymn, 전송가)의 경우 위의 영화들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만 수익금을 한국 고아들의 복지 확충을 위해 기부하기로 하고 만든 영화라 일반적인 상업영화는 아니다.

2014년에 영국에서 간만에 6.25 전쟁 관련 영화가 하나 나왔다. 제목은 (Queen and Country)퀸 앤드 컨트리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로한은 한국으로 안 온다. 존 부어맨 감독.

한국에서는 당연히 강하게 박혀 있다. 2004년 한국 천만 관객 돌파 영화태극기 휘날리며도 있고, 2014년의 천만 관객 돌파 영화인 국제시장도 6.25 전쟁을 다룬다. 그 외에도 웰컴 투 동막골, 고지전, 포화 속으로, 빨간 마후라, 스윙키즈,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인천상륙작전 등 수도 없이 많은 영화들이 한국 전쟁을 다룬다.

2007년 중국 영화 순위 1위를 차지했던 영화 '집결호'에서도 국공내전에 이어 6.25 전쟁이 다뤄지고 있다.[21]

팔콘과 윈터 솔져에서 흑인 슈퍼 솔져 '아이제아 브래들리'가 참전해서 윈터 솔져와 고양시에서 맞섰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전쟁 후 미 정부는 지속적으로 은폐와 부정을 했고 아이제아에게 생체실험을 행했으며, 이로 인해 미 정부와 쉴드 모두를 불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오랜만에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 제목은 디보션으로 장진호 전투를 다룬다. 주인공은 미 해군 최초의 흑인 파일럿 제시 L. 브라운으로 해당 역할은 조너선 메이저스가 맡았다. 제시 브라운의 파트너인 해군 파일럿 톰 허드너는 글렌 파월이 연기했다. 북미 기준으로 2022년 11월 23일에 개봉한다. [22] 하지만 디보션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왜 할리우드에서 한국전쟁 영화를 만들지 않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남게 되었다.

6. 언급[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그랜 토리노는 주인공이 한국전 참전경력이 있고 중요하게 나오지만 역시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같은 감독의 라스트 미션(2018) 또한 주인공이 한국전 참전용사로 나오는데 실제로 모델이 된 실존인물이 한국전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이렇게 드라마나 영화에서 멀쩡한 노인에게 '알고보면 6.25 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해두는 설정은 의외로 자주 나오고 있다.[23] 아무래도 참전자들이 대부분 죽을 때가 된 제2차 세계 대전보다는 덜 오래되었고,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우울한 측면' 혹은 '부끄러운 측면'이 없는 전쟁이기 때문인듯 하다. 또한, 한국과 북한 자체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경향도 있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주인공이 한국 전쟁 참전용사인데다, 조역 중 하나로 6.25 전쟁으로 피난온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등장하기 때문에.

미 해병대의 실화를 다룬 테이킹 챈스에서 영화 후반부 주인공이 사무직에 있으며 죽어가는 전우들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자아비판을 할때 옆에서 듣고있던 노인이 "그런말 하지 마시오 중령. 당신은 자랑스러운 미 해병대원임을 잊지마시게." 라고 하는데 이 노인이 6.25 참전용사이다. 처음 만날때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라고 밝힌다.

지금까지 세계사적으론 잊힌 전쟁이었으며 끝나지 않는 한반도 안에서의 냉전의 잔재 정도의 취급이었지만, 최근 미중갈등의 확대로 다시금 6.25 전쟁이 복기되는 경향을 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이 첫발을 끊고 있으며, 미국에 대항해 자국민을 결집시키고 반미감정을 환기하는데 활용되고 홍보되고 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6.25 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하여 미제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한동안 한중관계를 의식해 이를 강조하지는 않았는데, 2010년대 후반부터 항미원조전쟁 프로파간다를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인과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앞으로도 계속 격화되고, 신 냉전수준으로 치닫는다면 영미권에서도 중국을 확실한 잠재적 적국으로 두고 한국전쟁을 복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추세에 따라, 2021년 한미정상회담에 맞춰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70여년 전 6.25 전쟁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던 랄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등 미국 역시 한국전쟁을 복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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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차례 이상 중복부상자 11,150명을 각각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이며, 1명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는 92,134명[2] 미국 제대군인부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총 참전 미군 인원은 약 270만명이다. 미국 제대군인부 공식 홈페이지 출처. 미국 제대군인부에 따르면 6.25 전쟁 총 참전 미군 인원은 약 1,789,000명이다. 'America's Wars' 출처.[3] 실제로 미국 제대군인부는 그렇게 보고 있다. 미국 제대군인부 공식 홈페이지 출처.[4] 영어 위키백과 Paris Peace Accords 출처.[5] 영어 위키백과 'List of Korean War Medal of Honor recipients' 출처. 훈장 수여, 추서는 그 특성상 최신화가 늦을 수 있으므로 미국 제대군인부가 아니라 위키백과의 자료를 근거로 함.[6] 영어 위키백과 'List of Medal of Honor recipients for the Vietnam War' 출처. 훈장 수여, 추서는 그 특성상 최신화가 늦을 수 있으므로 미국 제대군인부가 아니라 위키백과의 자료를 근거로 함.[7] 독소전쟁에서 사망한 소련 민간인 사망자만 약 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련 해체 직전, 상당히 불어난 소련 인구가 약 2억 9천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걸 기준으로 해도 약 7%의 인구가 전쟁 단 한 번에 죽은 것이다. 반면 미국은 하와이를 제외한 본토는 전화에 휩쓸린 적이 없어 참전 미군만 죽었다.[8] 중앙일보 '소 흐루시초프가 밝힌 「한국전쟁 비화」' 출처. 예전에는 흐루쇼프를 흐루시초프로 불렀다. '탱크 1개사단만 더 있었더라면 그(김일성)는 저지선(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으며 전쟁을 끝냈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덧붙인 것을 볼 때, 흐루쇼프는 6.25 전쟁과 관련한 스탈린의 판단에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폭이 약 80km인 베링 해협은 대한 해협(약 200km)보다 폭이 좁다. 정확히는 쓰시마 섬이 없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공군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전력 격차가 있음에도 '육군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압도적이니까 쓰시마랑 규슈는 점령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말이 나오곤 하는데, 미소간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일도 아닌 문제가 된다.[10] 반대로 이것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다. 당시 기준으로, 미국은 튀르키예, 이탈리아에 배치된 핵무기를 이용해 즉각적으로 모스크바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었으나, 소련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11]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군은 약 3개월 보름만에 모스크바 코 앞까지 진격하는 것에 성공했다. 당시 독일과 소련으로 분할된 폴란드 중심 기준으로 약 1,100km이다.[12] 1인당 GDP는 대만이 대한민국보다 약간 높지만 실질적인 임금의 괴리가 크다.[13] 미합중국 공군 'GENERAL EMMETT O'DONNELL JR.' 참조.[14] 1차 공격은 북베트남, 미군 모두 북베트남의 공격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문제는 2차 공격이다.[15] 국가기록원 인구정책 어제와 오늘 '1940-1950년대' 출처.[16] 국가 차원으로서 미국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야 많지만, 군인 개개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건 한참 뒤인 90년대경부터였다. 물론 50~60년대에는 관심을 기울이긴 커녕 관심을 받기도 모자란 후진국이었고, 그나마 부흥기에도 1970~80년대 미군은 커녕 자국 군인들의 후유증조차 제대로 관심 갖지 않는 군사정권 치하였기에...[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의 미군 참전용사보다는 나은 편이다. 찬사를 받지 못하고 아무도 관심을 안가져줬을지언정 유아 살인마라는 비난을 듣지는 않았고 세월이 흐른 후에나마 자신들이 지켜낸 국가의 감사와 보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브 그로스먼의 <살인의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18] 미국 50만 장, 그 외 국가 50만 장[19]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6.25 전쟁을 배경으로 둔 영화들이 끊겼다는 괴소문도 생겼다.[20] 국내 개봉명은 승리의 전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주연/감독작이다. 6.25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베테랑 하이웨이 중사가 해병대 캠프에 배정되어 전사로 키워내 그레나다 침공에 투입된다는 내용이다.[21] 하지만 중국 영화 소재를 보면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며, 드라마와 소설도 빠지지도 않는다. 한국전쟁과 두 전쟁을 비교하면 너무 대조적.[22] 21세기 최초로 할리우드 에서 제작한 한국전쟁 영화다. 물론 20세기때 다룬적은 있었지만 21세기 이후로는 언급만하고 참전용사가 나오는 정도로만 나왔다. 이때까지 언급만 하다가 전투를 다루는건 이번이 처음이다.[23] 실제 미국 대도시 교외의 공동묘지에 가면 6.25 전쟁 참전용사들이 의외로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