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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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궁 뜨깜타인(紫禁城 | Tử Cấm thành)에 대한 내용은 후에 황궁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금성(紫禁城) 또는 중국 국내 명칭인 고궁(故宮)은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에 위치한 궁궐로, 현존하는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1421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년 동안 명나라·청나라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높이 11 m 성벽과 너비 52 m, 깊이 6 m인 호성하로 둘러싸인 동서 760 m, 남북 960 m, 면적 72만 m², 건물 980채, 8,707칸[8] 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4년 이래 궁전의 기능을 상실한 뒤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Palace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어로는 오래 전부터 'Forbidden City' 등으로 의역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주로 '고궁(故宮)'이라고 부른다. 봉건적인 유적과 유물을 구 왕조의 상징이라 부정적으로 여기던 문화대혁명 전후 중국에서는 고궁이라는 이름도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해서 폐궁(廢宮)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곧 공공시설의 이름에 폐(廢)자를 쓰는 건 좋지 않다 해서 고궁으로 낙점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중국 당국에서 2020년 춘제 당일인 1월 25일 이후로 무기한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가 5월부터 예약자에 한해서 관람할 수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천자의 거처가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에 있어 그곳을 기점으로 우주가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이를 상징하는 뜻에서 '자(紫)'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금(禁)'을 사용해 자금성이라 명명했다. 이런 자세한 내력을 모른 명나라 시대 유럽 선교사들은 '금할 금(禁)'자와 '성 성(城)'자를 각각 '금지된'과 '성벽을 둘러친 도시'란 뜻으로 직역하면서 서양에는 '금지된 도시'라는 뜻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영어로는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금지된'에만 주목한 결과로 엄밀히 말해서 오역이다.
영락제는 1406년(영락 4년) 자신이 중심지로 삼았던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난징의 궁전을 모방해 베이징에 궁전을 짓도록 했다. 이후 1420년(영락 18년)에 완공되니 그 결과물이 바로 자금성이다. 14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장인들과 1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갈아넣어서 건설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자재는 중국 윈난성 지역의 밀림에서 벌채한 남목(楠木)[9] 수십만 그루와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금전(金磚)[10] 1억 개, 각종 유리기와 2억 개 등이었고, 기와를 만드는 도토는 안후이성 타이핑에서, 채화의 연료는 서남부의 각 성에서 징발했으며,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한백옥은 50km 바깥의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보통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해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판 다음 겨울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불타버렸다. 자금성의 역사
천도에 대한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고 전소되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다시 난징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영락제는 난징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명을 처형하고 나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 정벌을 위해 출병하던 중 원정지에서 객사하고 베이징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된 다음 능묘에 매장되었다.[11]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19년의 세월이 흐른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다. 이곳이 오늘날의 베이하이와 중난하이이다. 그중 중난하이는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로 사용되어 자금성의 뒤를 잇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1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12] 첫 번째 화재와는 달리 2번째 화재에서는 진화되자마자 바로 중건에 들어가 1561년에 공사가 끝났다.
그리고 30여년 뒤인 1597년(만력 25)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3대전이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황제 일가의 사적 공간인 후3궁도 불타는 등 자금성 완공 이래 명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파괴된 전각 모두를 한꺼번에 지을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옥좌가 있는 정전인 태화전만은 무리를 하면서 간신히 중건했다.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당시 황제는 당대 최악의 황제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다.[13]
3번째 화재로 불탔던 태화전이 중건된 건 30년이 지난 1627년(천계 7)이었다. 천계제의 재위 7년째 되던 해로 이 해에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해 갓 지은 옥좌에 앉았으나 20년을 못넘기고 1644년(숭정 17)에 명나라가 망했다.
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청나라는 베이징을 장악한 후 바로 중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40년간 남쪽과 서쪽의 남명, 정성공, 이자성, 준가르와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삼번의 난이 터져 한가하게 궁전을 새로 지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주족들은 베이징에 입성해 본 자금성의 화려함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굳이 비용이 많이 들고 백성의 원성을 들을 게 뻔한 새 궁전을 짓는 대신 자금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청나라는 이자성의 난 때문에 자살한 숭정제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오삼계가 이 명분으로 산해관을 열어줘 청군이 이자성군을 베이징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기존의 궁궐을 쓰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자금성을 그대로 쓰면서 원래 청나라의 정궁이었던 선양고궁은 행궁으로 격하되었다.
만주족이 자금성을 재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때 발생한 3번의 화재 이후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는데, 위와 같은 명말청초의 여러 혼란한 사정 때문에 한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전면적인 개보수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국대륙내에서 반청세력들을 모두 일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강희제 때인 1683년(강희 22)에 공사에 들어가 1695년(강희 34)에 다시 지어졌다. 건륭제의 재위기간 동안 황제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이 갖춰진 전각과 화원을 여러번 고쳐 짓기를 60년 내내 반복했다. 건륭제의 취향이 반영된 이 정원은 '건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청조의 전성기였던 건륭제 사후 점차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자금성의 권위에도 영향을 미쳐 1813년(가경 18)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에 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근위병들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친왕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쏴서 천리교도 격퇴에 일조한 게 이때의 일이다.
명나라 때의 3차례 대화재 이후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큰 화재 없이 2백년 동안 무사했으나 1886년(광서 14) 광서제의 국혼을 앞두고 태화문 인근에서 화재가 시작되어 태화문과 정도문, 소덕전 등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다. 비록 6년 뒤에 중건되긴 했지만 황제의 결혼이라는 국가적인 경사를 목전에 두고 터진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려 온 서구 열강을 주축으로 한 8개국 군대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신해혁명의 불길이 중국을 뒤덮은 1912년(선통 4)에 청나라가 망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지만 자금성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허락되어 황실 가족들은 외국 황실의 대우로 청 왕조 시절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으로 황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1923년 건복궁에 불이 나더니 1924년 2차 직봉전쟁 와중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를 아예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궁전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어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1913년에 선양고궁과 승덕피서산장에 소장된 보물도 모두 자금성으로 이관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던 중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이 베이징 코앞까지 다가오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화북 침략으로 인한 유물 파괴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선별해 1만 3491개 상자에 나누어 수도 난징과 상하이 일대로 옮겼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난징과 상하이가 연이어 함락되자 이 유물들을 다시 쓰촨성 오지로 대피시켰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유물들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고 추후 베이징으로 다시 옮기려고 했으나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계획이 연기되었다. 오히려 베이징이 공산군에 함락되기 직전에 베이징에 남아있던 중요한 유물을 추가로 난징으로 옮겼다. 그후 국민정부가 타이완섬으로 망명할 때 장제스는 난징에 보관된 유물들 중 가장 가치있는 유물들이라 판단한 3,000여 상자 정도만 추려 선박으로 타이완섬 지룽항으로 보냈고, 타이완으로 가져온 이 유물들로 1965년 새로운 고궁박물원을 개관했다.[14]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는 엄선된 것으로, 대만에는 알짜배기가 있고 대륙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당시 대륙에서 이송한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숫자는 69만 7000여 점에 달한다. 수백만 점이었던 유물들이 여러 곳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라졌음에도 이 만큼 남았다. 자금성이 명청시대의 궁궐이라 국민당이 가져간 유물도 명청시대의 궁중유물 위주였다.
2010년 12월 집계된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의 소장품 종류와 숫자는 다음과 같다.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옮겨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9년 베이징을 점령한 후에도 자금성은 무사했으며 1950년대 이후 수리 및 복원 계획이 세워져 국가적인 문화재로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쳐 홍위병들이 과거의 명승 유적들을 '타파해야 할 부르주아 반동의 폐습'이라고 외치며 닥치는대로 파괴하자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동원해서 자금성을 지켜냈다.[15]
특히 중세 봉건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자금성은 문화대혁명 때 크게 파괴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았던 전 중국민주동맹 간부인 장보쥔의 딸 장이허가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예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금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집무실을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시 도시계획도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천안문, 오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중앙 당사를 그 자리에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이허 작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에다가 붉은색 천을 줄줄이 걸어놓거나 노동자의 동상을 거대하게 세워놓겠다는 흉측한 발상들도 연이어 나왔으나, 문화재 보호주의자였던 저우언라이의 절박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폭로했다. 저우언라이가 보호를 위해 애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때 자금성이 밀려나가고 공산당 당사가 들어섰다면 중국은 문화적으로도, 관광산업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70년대가 지나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수그러들자 다시 문화재의 중요성이 재평가받으며 자금성도 점차 파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중국 정부는 이후 자금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 개보수 작업을 계속했는데, 한편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자극받은 중국 정부는 자금성에 있던 기존의 소장품에 새로이 전국에서 수집한 미술품 수만여 점을 더해 이전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양적인 측면에서는 베이징 고궁박물원도 타이완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2011년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 소장 유물은 약 180만 7558건이라고 한다. 그중 국가에서 지정한 1, 2, 3급 문물 즉 진귀문물은 168만 4490건, 일반문물은 11만 5491건, 표본은 7577건이라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비록 많은 유물이 대만으로 건너갔지만 이후 많은 문물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으고, 국가에서 수집하거나 기증받고, 중국 재벌들이 자비로 환수하여 기증한 것들도 많다.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의 3대전과 그 양쪽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이 있으며, 내정은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건청궁(乾清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의 후3궁으로 되어 있다.
곤녕궁 북쪽에는 어화원(御花園)이 있고 후3궁 동서 양쪽에 황후와 후비들이 거주하던 6개의 궁이 각각 있어 동서6궁으로 칭하는데, 동6궁은 경인궁(景仁宮)·승건궁(承乾宮)·영화궁(永和宮)·종수궁(鍾粹宮)·경양궁(景陽宮)·연희궁(延禧宮), 서6궁은 영수궁(永壽宮)·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장춘궁(長春宮)·익곤궁(翊坤宮)·저수궁(儲秀宮)·함복궁(咸福宮)이다. 서6궁 남쪽의 양심전(養心殿)은 황제가 평소 거주하던 곳이고, 동6궁 남쪽의 재궁(齋宮)은 큰 제사를 앞두고 황제가 머물며 재계하던 장소다. 그리고 동서6궁 북쪽의 처소들은 황자들의 거처, 서6궁 서쪽은 황태후의 거처다.
자금성 주변은 황성(皇城)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나서 베이징 시가 도시 정비 계획을 추진할 때 동서 교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철거해 현재는 천안문 양 옆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외성(外城)도 같은 논리로 철거되었다. 이곳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자금성 정면 양쪽에 세워진 태묘(太廟)와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현 모주석기념당[25] 자리에 있던 문이며 베이징 내성 남문인 정양문과 천안문사이의 어도[26] 에 있던 문이여서 황후가 혼인하러 궁궐로 들어올때 이문으로 들어왔다. 명나라땐 대명문이었고 청나라땐 대청문으로 고쳤고 중화민국때 중화문이 되었다가 모주석기념당 짓는다고 헐렸다.
전한의 정궁인 미앙궁은 대지면적 약 4.8 km²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궁궐이었고, 수나라의 정궁인 태극궁은 대지면적 약 1.92 km², 당나라의 정궁인 대명궁은 대지면적 약 3.11 km²로 대지면적이 0.72 km²에 불과한 자금성보다 훨씬 넓었다고 하지만, 이는 낭설이며 오해다.
지금 우리가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위 지도에서 빨간색 부분 뿐이지만 사실 빨간색 부분은 당대에는 궁성이라고 불리었고 당대인들은 빨간색 영역과 분홍색 영역을 합친 황성 권역을 전부 자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중 좌측의 호수부분인 중난하이는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청사로 활용되어서 떨어져 나가고 ,북해와 사직,경산은 공원이 되고 태묘는 개조되어 공산당 공연장으로 떨어져 나가 진짜 황성 권역 중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부분은 궁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들은 궁성 부분만 자금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덕분에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나 황성의 정문이냐는 식의 논쟁이 많이 벌어지는데 명청시대에는 황성이 곧 자금성이었으로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직접 연행길에 올라 베이징을 갔다온 후에 자금성의 4문 중 남문으로 천안문을 꼽았다. 오문은 원래는 자금성 전체의 정문이 아니라 궁성의 정문이었다.
원래의 규모에 비해 크게 축소된 지금의 자금성 역시 성벽이 오래되어 심하게 훼손된 부분이 많다. 부식·풍화·균열·침하 등 으로 망가진 상태라 폭우가 쏟아지거나 할 경우 무너져 내릴 상황이라고. 결국 2016년 11월부터 중국정부가 정부수립 후 최대의 수리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 관광객의 입장이 중지된 것은 아니지만 성벽만은 오문(午門)에서 동화문(東華門)에 이르는 약 500 m 구간만 관람 가능하다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무대로 놀랍게도 촬영장이 아닌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이례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 다만, 엘리자베스 2세가 촬영 중 방중했는지라 자금성 방문은 못했다고.
가상의 중국왕조가 그 배경이 되는데 황궁으로 자금성이 등장한다. 지도를 보면 명나라인데 극중의 황궁에서의 등장인물들의 복식은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궁중 옷차림으로 빠짐없이 나온다.
16화에서 레이와 마오와 펼쳐진 경기장이 자금성으로 등장한다.
문명 3에 처음 등장한 이래 문명 6까지 출연 중. 문명 3에서는 새로 추가된 탓인지 Forbidden Palace를 그대로 "금지된 궁전" 으로 오역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공식 매뉴얼에서조차 이렇게 표기되어 있다. 다행히도 문명 4부터는 제대로 번역되고 있다. 문명 3부터 5까지는 Forbidden Palace였는데 6에 들어와 Palace가 아니라 City가 된 것도 특이한 점.
KOF 2002를 기반으로 중국에서 이것저것 뜯어 고쳐 개작한 해적판인 KOF 2004 스페셜 에디션에서 자금성 스테이지가 나온다.
중세시대 불가사의로 등장하며, 불가사의인 동시에 도시로 취급되기 때문에 도시 영역 안에 불가사의를 또 지을 수 있다. 그 밖에 기본적으로 채집하는 식량과 목재가 많고 수도 탈환 타이머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세계 정복 캠페인일 경우 적의 수도 탈환 타이머는 반으로 줄어들고 자신의 타이머는 두 배로 늘어난다.
고전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불가사의/자금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자금성(紫禁城) 또는 중국 국내 명칭인 고궁(故宮)은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에 위치한 궁궐로, 현존하는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1421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년 동안 명나라·청나라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높이 11 m 성벽과 너비 52 m, 깊이 6 m인 호성하로 둘러싸인 동서 760 m, 남북 960 m, 면적 72만 m², 건물 980채, 8,707칸[8] 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4년 이래 궁전의 기능을 상실한 뒤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Palace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어로는 오래 전부터 'Forbidden City' 등으로 의역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주로 '고궁(故宮)'이라고 부른다. 봉건적인 유적과 유물을 구 왕조의 상징이라 부정적으로 여기던 문화대혁명 전후 중국에서는 고궁이라는 이름도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해서 폐궁(廢宮)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곧 공공시설의 이름에 폐(廢)자를 쓰는 건 좋지 않다 해서 고궁으로 낙점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중국 당국에서 2020년 춘제 당일인 1월 25일 이후로 무기한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가 5월부터 예약자에 한해서 관람할 수 있다.
2. 이름의 유래[편집]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천자의 거처가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에 있어 그곳을 기점으로 우주가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이를 상징하는 뜻에서 '자(紫)'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금(禁)'을 사용해 자금성이라 명명했다. 이런 자세한 내력을 모른 명나라 시대 유럽 선교사들은 '금할 금(禁)'자와 '성 성(城)'자를 각각 '금지된'과 '성벽을 둘러친 도시'란 뜻으로 직역하면서 서양에는 '금지된 도시'라는 뜻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영어로는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금지된'에만 주목한 결과로 엄밀히 말해서 오역이다.
2.1. 명나라[편집]
2.1.1. 대륙의 기상[편집]
영락제는 1406년(영락 4년) 자신이 중심지로 삼았던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난징의 궁전을 모방해 베이징에 궁전을 짓도록 했다. 이후 1420년(영락 18년)에 완공되니 그 결과물이 바로 자금성이다. 14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장인들과 1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갈아넣어서 건설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자재는 중국 윈난성 지역의 밀림에서 벌채한 남목(楠木)[9] 수십만 그루와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금전(金磚)[10] 1억 개, 각종 유리기와 2억 개 등이었고, 기와를 만드는 도토는 안후이성 타이핑에서, 채화의 연료는 서남부의 각 성에서 징발했으며,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한백옥은 50km 바깥의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보통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해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판 다음 겨울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2.1.2. 잇따른 화재[편집]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불타버렸다. 자금성의 역사
천도에 대한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고 전소되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다시 난징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영락제는 난징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명을 처형하고 나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 정벌을 위해 출병하던 중 원정지에서 객사하고 베이징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된 다음 능묘에 매장되었다.[11]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19년의 세월이 흐른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다. 이곳이 오늘날의 베이하이와 중난하이이다. 그중 중난하이는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로 사용되어 자금성의 뒤를 잇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1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12] 첫 번째 화재와는 달리 2번째 화재에서는 진화되자마자 바로 중건에 들어가 1561년에 공사가 끝났다.
그리고 30여년 뒤인 1597년(만력 25)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3대전이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황제 일가의 사적 공간인 후3궁도 불타는 등 자금성 완공 이래 명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파괴된 전각 모두를 한꺼번에 지을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옥좌가 있는 정전인 태화전만은 무리를 하면서 간신히 중건했다.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당시 황제는 당대 최악의 황제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다.[13]
3번째 화재로 불탔던 태화전이 중건된 건 30년이 지난 1627년(천계 7)이었다. 천계제의 재위 7년째 되던 해로 이 해에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해 갓 지은 옥좌에 앉았으나 20년을 못넘기고 1644년(숭정 17)에 명나라가 망했다.
2.2. 청나라[편집]
2.2.1. 이례적인 재사용[편집]
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청나라는 베이징을 장악한 후 바로 중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40년간 남쪽과 서쪽의 남명, 정성공, 이자성, 준가르와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삼번의 난이 터져 한가하게 궁전을 새로 지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주족들은 베이징에 입성해 본 자금성의 화려함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굳이 비용이 많이 들고 백성의 원성을 들을 게 뻔한 새 궁전을 짓는 대신 자금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청나라는 이자성의 난 때문에 자살한 숭정제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오삼계가 이 명분으로 산해관을 열어줘 청군이 이자성군을 베이징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기존의 궁궐을 쓰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자금성을 그대로 쓰면서 원래 청나라의 정궁이었던 선양고궁은 행궁으로 격하되었다.
만주족이 자금성을 재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때 발생한 3번의 화재 이후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는데, 위와 같은 명말청초의 여러 혼란한 사정 때문에 한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전면적인 개보수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국대륙내에서 반청세력들을 모두 일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강희제 때인 1683년(강희 22)에 공사에 들어가 1695년(강희 34)에 다시 지어졌다. 건륭제의 재위기간 동안 황제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이 갖춰진 전각과 화원을 여러번 고쳐 짓기를 60년 내내 반복했다. 건륭제의 취향이 반영된 이 정원은 '건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2.2.2. 왕조의 마지막 순간[편집]
청조의 전성기였던 건륭제 사후 점차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자금성의 권위에도 영향을 미쳐 1813년(가경 18)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에 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근위병들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친왕 시절의 도광제가 직접 총을 쏴서 천리교도 격퇴에 일조한 게 이때의 일이다.
명나라 때의 3차례 대화재 이후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큰 화재 없이 2백년 동안 무사했으나 1886년(광서 14) 광서제의 국혼을 앞두고 태화문 인근에서 화재가 시작되어 태화문과 정도문, 소덕전 등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다. 비록 6년 뒤에 중건되긴 했지만 황제의 결혼이라는 국가적인 경사를 목전에 두고 터진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려 온 서구 열강을 주축으로 한 8개국 군대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신해혁명의 불길이 중국을 뒤덮은 1912년(선통 4)에 청나라가 망했다.
2.3. 중화민국[편집]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지만 자금성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허락되어 황실 가족들은 외국 황실의 대우로 청 왕조 시절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으로 황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1923년 건복궁에 불이 나더니 1924년 2차 직봉전쟁 와중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를 아예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궁전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어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1913년에 선양고궁과 승덕피서산장에 소장된 보물도 모두 자금성으로 이관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던 중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열하사변으로 일본군이 베이징 코앞까지 다가오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화북 침략으로 인한 유물 파괴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선별해 1만 3491개 상자에 나누어 수도 난징과 상하이 일대로 옮겼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난징과 상하이가 연이어 함락되자 이 유물들을 다시 쓰촨성 오지로 대피시켰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유물들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고 추후 베이징으로 다시 옮기려고 했으나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계획이 연기되었다. 오히려 베이징이 공산군에 함락되기 직전에 베이징에 남아있던 중요한 유물을 추가로 난징으로 옮겼다. 그후 국민정부가 타이완섬으로 망명할 때 장제스는 난징에 보관된 유물들 중 가장 가치있는 유물들이라 판단한 3,000여 상자 정도만 추려 선박으로 타이완섬 지룽항으로 보냈고, 타이완으로 가져온 이 유물들로 1965년 새로운 고궁박물원을 개관했다.[14]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는 엄선된 것으로, 대만에는 알짜배기가 있고 대륙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당시 대륙에서 이송한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숫자는 69만 7000여 점에 달한다. 수백만 점이었던 유물들이 여러 곳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라졌음에도 이 만큼 남았다. 자금성이 명청시대의 궁궐이라 국민당이 가져간 유물도 명청시대의 궁중유물 위주였다.
2010년 12월 집계된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의 소장품 종류와 숫자는 다음과 같다.
- 서화: 1만 2066점
- 원나라 이전의 회화(繪畫): 574점
- 원나라 이전의 서법(書法): 155점
- 청동기: 6056점
- 선진(先秦) 시대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 약 500점
- 도자기: 2만 5506점
- 공예품
- 서적
- 청나라 황실 관련 문헌: 38만 6729책
- 만주어·몽골어 문헌: 1만 1501점
- 수집 서적: 20만 604책
2.4. 중화인민공화국[편집]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옮겨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9년 베이징을 점령한 후에도 자금성은 무사했으며 1950년대 이후 수리 및 복원 계획이 세워져 국가적인 문화재로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쳐 홍위병들이 과거의 명승 유적들을 '타파해야 할 부르주아 반동의 폐습'이라고 외치며 닥치는대로 파괴하자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동원해서 자금성을 지켜냈다.[15]
특히 중세 봉건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자금성은 문화대혁명 때 크게 파괴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았던 전 중국민주동맹 간부인 장보쥔의 딸 장이허가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예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금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집무실을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만들어진 베이징시 도시계획도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천안문, 오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중앙 당사를 그 자리에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이허 작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에다가 붉은색 천을 줄줄이 걸어놓거나 노동자의 동상을 거대하게 세워놓겠다는 흉측한 발상들도 연이어 나왔으나, 문화재 보호주의자였던 저우언라이의 절박한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폭로했다. 저우언라이가 보호를 위해 애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때 자금성이 밀려나가고 공산당 당사가 들어섰다면 중국은 문화적으로도, 관광산업적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70년대가 지나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수그러들자 다시 문화재의 중요성이 재평가받으며 자금성도 점차 파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중국 정부는 이후 자금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 개보수 작업을 계속했는데, 한편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자극받은 중국 정부는 자금성에 있던 기존의 소장품에 새로이 전국에서 수집한 미술품 수만여 점을 더해 이전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양적인 측면에서는 베이징 고궁박물원도 타이완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2011년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 소장 유물은 약 180만 7558건이라고 한다. 그중 국가에서 지정한 1, 2, 3급 문물 즉 진귀문물은 168만 4490건, 일반문물은 11만 5491건, 표본은 7577건이라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비록 많은 유물이 대만으로 건너갔지만 이후 많은 문물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으고, 국가에서 수집하거나 기증받고, 중국 재벌들이 자비로 환수하여 기증한 것들도 많다.
- 서화: 14만여 점
- 원나라 이전의 회화(繪畫): 420점
- 원나라 이전의 서법(書法): 310점
- 청동기: 1만 5천여 점
- 선진(先秦) 시대 명문이 있는 청동기: 약 1600여점
- 고대 화폐: 약 1만여 점
- 동경(銅鏡): 약 4천여 점
- 인장(印章): 약 1만여 점
- 도자기: 35만여 점
- 1급 문물: 1100점
- 2급 문물: 5만 6천여 점
- 공예품
- 옥기: 2만 8461점
- 칠기, 법랑, 유리, 대나무·나무·상아·뿔 조각, 문방구 등: 10만 1845건
- 분재: 1442점
- 서적: 19만 5천여 책
3. 주요 건축[편집]
3.1. 소개[편집]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의 3대전과 그 양쪽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이 있으며, 내정은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건청궁(乾清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의 후3궁으로 되어 있다.
곤녕궁 북쪽에는 어화원(御花園)이 있고 후3궁 동서 양쪽에 황후와 후비들이 거주하던 6개의 궁이 각각 있어 동서6궁으로 칭하는데, 동6궁은 경인궁(景仁宮)·승건궁(承乾宮)·영화궁(永和宮)·종수궁(鍾粹宮)·경양궁(景陽宮)·연희궁(延禧宮), 서6궁은 영수궁(永壽宮)·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장춘궁(長春宮)·익곤궁(翊坤宮)·저수궁(儲秀宮)·함복궁(咸福宮)이다. 서6궁 남쪽의 양심전(養心殿)은 황제가 평소 거주하던 곳이고, 동6궁 남쪽의 재궁(齋宮)은 큰 제사를 앞두고 황제가 머물며 재계하던 장소다. 그리고 동서6궁 북쪽의 처소들은 황자들의 거처, 서6궁 서쪽은 황태후의 거처다.
3.2. 궁성[편집]
3.3. 외조[편집]
3.3.1. 3전 3각[20][편집]
3.3.2. 자금성 동남부[편집]
3.3.3. 자금성 서남부[편집]
3.4. 내정[편집]
3.4.1. 후3궁[편집]
3.4.2. 내정 서쪽[편집]
3.4.3. 동6궁[편집]
3.4.4. 서6궁[편집]
3.4.5. 내정 동쪽[편집]
3.4.6. 서궁 권역[편집]
3.4.7. 영수궁 권역[편집]
3.4.8. 중화궁 권역[편집]
3.4.9. 화원[편집]
3.5. 유명한 장소[편집]
4. 자금성 주변[편집]
자금성 주변은 황성(皇城)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나서 베이징 시가 도시 정비 계획을 추진할 때 동서 교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철거해 현재는 천안문 양 옆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외성(外城)도 같은 논리로 철거되었다. 이곳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자금성 정면 양쪽에 세워진 태묘(太廟)와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4.1. 태묘(노동인민문화궁)[편집]
4.2. 사직단(중산공원)[편집]
4.3. 경산공원[편집]
4.4. 중난하이[편집]
4.5. 베이하이공원[편집]
4.6. 중화문[편집]
현 모주석기념당[25] 자리에 있던 문이며 베이징 내성 남문인 정양문과 천안문사이의 어도[26] 에 있던 문이여서 황후가 혼인하러 궁궐로 들어올때 이문으로 들어왔다. 명나라땐 대명문이었고 청나라땐 대청문으로 고쳤고 중화민국때 중화문이 되었다가 모주석기념당 짓는다고 헐렸다.
5. 관광 팁[편집]
- 입장료는 일반인이 11월~3월까지 40 위안, 4월부터 10월까지는 60 위안. 외국인은 기본적으로 일반인 요금의 적용 대상이다. 가이드 비용은 최소 200 위안이지만 오디오 투어(40 위안)가 훨씬 더 싸고 믿을만하다. 휠체어는 500 위안을 맡겨두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그 외 일부 구역에서는 15 위안 이내에서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 관광 가능 시간은 11월~3월에는 오전 8시 30분~오후 4시 30분, 4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 8시 30분~오후 5시.
- 춘절, 노동절, 국경절 연휴에는 사람이 어마무지하게 많이 몰리며, 다른 공휴일에도 사람들이 몰리는건 마찬가지다. 다른 유명한 관광지들도 마찬가지지만, 천안문에서부터 만원전철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정도. 상징성이 워낙 큰 유적이다 보니 경찰이 통제하고 있지만[27] 그래도 조심하자.
- 베이징 시내가 거의 그렇지만, 이곳도 경찰이 거의 100 m 간격으로 있고 중국 인민해방군도 배치되었다.
- 보통의 배낭여행자들은 오문으로 입장했다가 신무문으로 나온다. 이 신무문 밖, 경산공원 사이가 헬 오브 헬이다. 특히 성의 폐관시간이 다가오는 4시 30분이 넘어가면 버스를 타려는 이들과 우왕좌왕하는 관광객들, 그리고 후퉁 관광을 가자고 하는 인력거꾼과 호구를 찾아 다니는 사기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경찰까지 정말 가만히 있어서 정신이 혼란해진다. 문제는 신무문 밖에서 지하철까지의 거리가 꽤 된다는 것이다.
- 배낭여행객들에게 추천하는 바는 절대 여기서 지하철, 버스 이외의 것을 타지 말라는 것. 오토바이 개조한 이상한 교통수단을 탔다가는 호구를 넘어 강도를 당하기도 십상이다. 이는 경산공원도 마찬가지. 택시를 타도 택시기사들이 미터기를 끄고 값을 배 이상으로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버스를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거나 큰 대로로 나가 택시를 타는 것이다. 다리가 튼튼하다면 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 자금성은 지금도 보수 중이다. 구역 중 하나를 출입 통제하고 몇년 간 복원 및 보수한다고 한다.
6. 자금성의 크기[편집]
전한의 정궁인 미앙궁은 대지면적 약 4.8 km²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궁궐이었고, 수나라의 정궁인 태극궁은 대지면적 약 1.92 km², 당나라의 정궁인 대명궁은 대지면적 약 3.11 km²로 대지면적이 0.72 km²에 불과한 자금성보다 훨씬 넓었다고 하지만, 이는 낭설이며 오해다.
지금 우리가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위 지도에서 빨간색 부분 뿐이지만 사실 빨간색 부분은 당대에는 궁성이라고 불리었고 당대인들은 빨간색 영역과 분홍색 영역을 합친 황성 권역을 전부 자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중 좌측의 호수부분인 중난하이는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청사로 활용되어서 떨어져 나가고 ,북해와 사직,경산은 공원이 되고 태묘는 개조되어 공산당 공연장으로 떨어져 나가 진짜 황성 권역 중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부분은 궁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들은 궁성 부분만 자금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덕분에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나 황성의 정문이냐는 식의 논쟁이 많이 벌어지는데 명청시대에는 황성이 곧 자금성이었으로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직접 연행길에 올라 베이징을 갔다온 후에 자금성의 4문 중 남문으로 천안문을 꼽았다. 오문은 원래는 자금성 전체의 정문이 아니라 궁성의 정문이었다.
원래의 규모에 비해 크게 축소된 지금의 자금성 역시 성벽이 오래되어 심하게 훼손된 부분이 많다. 부식·풍화·균열·침하 등 으로 망가진 상태라 폭우가 쏟아지거나 할 경우 무너져 내릴 상황이라고. 결국 2016년 11월부터 중국정부가 정부수립 후 최대의 수리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 관광객의 입장이 중지된 것은 아니지만 성벽만은 오문(午門)에서 동화문(東華門)에 이르는 약 500 m 구간만 관람 가능하다고.
7. 여담[편집]
- 자금성 전체의 크기는 광대하지만, 단일 목조 건물로 비교하면 태화전은 일본의 다이부츠덴보다 작다.
- 자금성 안에 자객이 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금성 안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위 위성사진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자금성 안에는 녹지가 상당히 많이 있다. 물론 오문에서 태화전을 타고 이어지는 중심축 건물 부분에는 나무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후원과 부속건물 부분에는 나무가 많이 있다.
- 한때 고궁박물원 당국이 자금성 관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일환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스타벅스(星巴克)를 입점시킨적이 있었다. 위치는 건청문 광장 오른쪽이었는데 2000년 9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CCTV 간판 아나운서였던 루이청강(芮成钢)이 "자금성의 존엄과 중국 문화의 전통을 해친다" 라는 항의성명과 더불어 비판여론으로 결국 2007년 7월 매장을 철수하였다.
- 2011년 들어서 유달리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 량이창 박물관의 특별전이 열리던 성숙전(誠肅殿)에 전시된 예술품이 도난당하는 소동이 일어나고, 송나라 때의 국보급 청자 접시가 직원의 실수로 깨진 걸 은폐하려다가 언론에 폭로되는가 하면, 건복궁(建福宮)을 갑부를 위한 회원제 클럽으로 운영하려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는 등 고궁박물원의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
- 흔히 경복궁은 소박하고 검소한 궁궐이고 자금성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궁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부에 건축되면서 기존 전각들의 대다수가 철거되었고, 광복 이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복원작업이 진척을 보이지 않아서 소박한 궁궐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지 실상 고종때부터 일제 초기까지의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해 화려함이 덜하고 규모가 작을지언정 결코 소박하고 검소한 궁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괜히 경복궁을 중건할 비용 마련하려고 당백전을 발행했다가 물가상승을 초래했던 것이 아니었다.[28]
- 샤오미에서 미믹스3 공개를 진짜 자금성에서 했다. 그 때문인지 자금성 에디션도 같이 공개를 했다.
- 2020년 1월 2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이는 근 40년 만이다. #
- 자금성의 큰 규모를 표현하는 야사가 하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말기, 서양의 외교관이 자금성을 방문하는데 청나라 측에서 제공한 가마를 타고도 한참을 가서 문이 열리고, 또 문이 열리고를 반복한 끝에야 겨우 자금성 본궁에 들어오자 이에 질려서 '너무나 큰 궁궐이며, 너무나 큰 나라이구나. 이런 나라를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는 이야기. 사실은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한 이야기이다.
- 자금성의 정문이 천안문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꽤 되는데, 자금성을 둘러싼 황성도 자금성의 일부로 포함되었던 명청시대 기준으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천안문은 현재 기준으로는 자금성 앞에 위치할 뿐 정문은 아니다.(현재 기준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며, 천안문은 자금성을 둘러싼 황성의 정문이다.)
- 중국의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자금성 장면들은 둥양시 세트장에서 찍는다. 원채 자금성에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위낙에 많은데다가, 국가중요시설과 인접해있으니 자연히 스케줄과 보안이 빡빡할 수밖에 없는데다가 문화재 보호법이 강화되면서 아예 사극을 세트장에서 찍는 것이다. 한국사극작품들이 2000년대 초반까지는 경복궁이나 창덕궁같은 진짜배기 궁궐에서 찍는 경우가 많았다가 문화재법이 강화되면서 따로 세트장을 지어서 촬영하는것과 판박이다.
- 자금성에 있는 용머리 1,142개가 배수구 역할을 하여 폭우에도 끄떡없었으나, 2023년 8월에 태풍 독수리가 동반한 폭우에 600년만에 침수되었다.
8. 매체에서[편집]
8.1. 영화[편집]
8.1.1. 마지막 황제[편집]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무대로 놀랍게도 촬영장이 아닌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이례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 다만, 엘리자베스 2세가 촬영 중 방중했는지라 자금성 방문은 못했다고.
8.2.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8.2.1. 천공의 옥좌[편집]
가상의 중국왕조가 그 배경이 되는데 황궁으로 자금성이 등장한다. 지도를 보면 명나라인데 극중의 황궁에서의 등장인물들의 복식은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궁중 옷차림으로 빠짐없이 나온다.
8.2.2. 탑블레이드[편집]
16화에서 레이와 마오와 펼쳐진 경기장이 자금성으로 등장한다.
8.3. 게임[편집]
8.3.1. 문명 시리즈[편집]
문명 3에 처음 등장한 이래 문명 6까지 출연 중. 문명 3에서는 새로 추가된 탓인지 Forbidden Palace를 그대로 "금지된 궁전" 으로 오역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공식 매뉴얼에서조차 이렇게 표기되어 있다. 다행히도 문명 4부터는 제대로 번역되고 있다. 문명 3부터 5까지는 Forbidden Palace였는데 6에 들어와 Palace가 아니라 City가 된 것도 특이한 점.
- 문명 3: 문명마다 하나씩 지을 수 있는 국가 불가사의로 등장했다. 약간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며, 이 불가사의가 있는 도시는 두 번째 수도 구실을 한다. 문명 4까지는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는 유지비가 많다거나 생산력에 손해를 본다거나 하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실제 수도로부터는 멀지만 이 불가사의가 있는 도시로부터는 가깝다면 그만큼 손해를 덜 본다는 것. 기술 조건은 따로 없으며 일정 수 이상의 도시를 영유해야 한다는 조건만 있기에 일찍 지을수록 이득이지만, 다른 문명을 멸망시키고 원래 수도였던 도시에 세우게 될 때가 많다. 시작 지점인지라 개발도 잘 되어 있고 웬만큼 중앙에 위치해 있을 것이기 때문.
- 문명 4: 역시 국가 불가사의로 등장하며, 위대한 스파이 점수와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변 도시들의 유지비를 깎아 준다. 당장의 이득도 이득이지만, 기업의 유지비도 깎아 주므로 게임 후반에 가서도 쓸 만 하다.
- 문명 5: 게임상에 단 하나만 지어질 수 있는 불가사의로 승격되어 나온다. 후원 정책을 개방해야 건설할 수 있으며, 세계 의회에서 두 표를 추가로 행사할 수 있고 합병했는데 법원을 아직 짓지 않은 도시를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시민의 수로 인한 불행을 10% 감소시킨다. 세계 의회에서의 추가 표는 각 문명당 투표권이 적은 르네상스 시대에 큰 힘을 발휘하며, 10%는 수치상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이 불가사의를 지을 수 있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 즈음에는 주민의 수가 적지 않으므로 행복이 꽤 늘어난다.
- 문명 6: 매 턴 문화를 제공하고, 모든 정부 체제에 와일드카드 슬롯 하나를 더해 준다. 여러모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를 한 장 추가로 꽂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강력하며, 확장팩에서 추가된 암흑기 정책 카드나 정부 유산 정책 카드 모두 와일드카드로 분류되는지라 가치가 더더욱 높아졌다. 문제는 도심부 인근의 평지라는 굉장히 널널한 조건을 요구하기에 웬만한 AI가 다 지으려고 달려든다는 점.
8.3.2. KOF 시리즈[편집]
KOF 2002를 기반으로 중국에서 이것저것 뜯어 고쳐 개작한 해적판인 KOF 2004 스페셜 에디션에서 자금성 스테이지가 나온다.
8.3.3.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편집]
중세시대 불가사의로 등장하며, 불가사의인 동시에 도시로 취급되기 때문에 도시 영역 안에 불가사의를 또 지을 수 있다. 그 밖에 기본적으로 채집하는 식량과 목재가 많고 수도 탈환 타이머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세계 정복 캠페인일 경우 적의 수도 탈환 타이머는 반으로 줄어들고 자신의 타이머는 두 배로 늘어난다.
8.3.4. 도미네이션즈[편집]
고전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불가사의/자금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4. 기타[편집]
- 뉴에이지 음악가 야니가 1997년 5월 30일 서양인 음악가로는 최초로 이곳에서 공연을 가졌다. 조명비 160만 달러, 총 무대비용 400만 달러, 스탭 200명, 준비기간 2년이 소요된 이때의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이 'Tribute'. 그리고 1998년 9월 5일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고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가 자금성 특설무대에서 공연되었다. 두 공연 모두 정확하게 따지면 자금성 앞 태묘(노동인민문화궁)에서 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통칭해서 자금성 공연이라고 부른다.
9.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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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명나라는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화개전(→중극전)·무영전·문화전·문연각·동각·근신전(→건극전) 등 4전 2각에 대학사를 두고 전각대학사라 칭했는데 청나라도 이를 받아들여 중화전(→체인각)·보화전·문화전·무영전·문연각·동각 등 3전 3각에 대학사를 두었다.[8] 일반적으로 9,999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양기가 최고조에 달한 극양(極陽)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다.[9] 목질이 매우 단단해 당시에도 희귀한 재목으로 손꼽혔으나 남벌이 심해져 쓰촨성 오지의 밀림 깊숙한 곳이 아니면 찾기 어려웠다. 이걸 잘라서 대운하를 통해 물에 띄워 베이징까지 운반하는데 4년이 걸렸다.[10] 흙을 체로 수없이 쳐서 미세하고 고운 입자만을 골라낸 뒤 반죽해 불에 구워서 만든 벽돌[11] 아직 중건 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12] 참고로 이때 발생한 화재로 황후의 거처인 곤녕궁에도 불이 옮겨 붙었는데, 아직 안에 있는 황후를 구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주청했다. 그러나 당시 황제였던 가정제가 이를 물리치고 문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여 아내를 타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야사라는 주장이 있어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13] 이때 재건을 위해 대운하를 통해 베이징으로 수송되던 막대한 규모의 자재들의 행렬을 목격한 마테오 리치는 한 도시를 건설할 만한 규모라고 표현하였다.[14] 이때 화재진압에 쓰는 방화수를 담아두던 쇠항아리의 금박까지 벗겨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15] 취푸의 공묘, 티베트의 포탈라궁도 비슷한 방법으로 지켜냈다. 다만, 자금성 외성과 황성은 없어졌고, 2환로가 외성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16] 황성에 포함되지 않았던 대명문(大明門)은 청대에 이르러 대청문(大淸門)으로 바뀌었다가 청 멸망때 쯤에 중화문(中華門)으로 다시 한번 바뀐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천안문 광장 조성 때 철거되었다.[17] 정확히는 적군이 성을 탈취하지 못 하도록 화재를 일으켰다.[18] 과거엔 장제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19] 1등, 2등, 3등[20] 명나라는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화개전(→중극전)·무영전·문화전·문연각·동각·근신전(→건극전) 등 4전 2각에 대학사를 두고 전각대학사라 칭했는데 청나라도 이를 받아들여 중화전(→체인각)·보화전·문화전·무영전·문연각·동각 등 3전 3각에 대학사를 두었다.[21] 세칭 진비(珍妃).[22] 융유황태후.[23]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 1876~1900)[24] 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1873~1924)[25] 마오쩌둥의 엠버밍된 시신이 있는곳.[26] 황제가 행차하던 길이며 이 어도는 일반인들이 못 지나다니게 해서 베이징의 동서교통에 불편을 가져다 주었다.[27] 천안문 광장은 아예 들어가는 입구란 입구는 전부 경찰이 관리하는 검색대가 있고, 이곳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28] 정도전이 처음 경복궁을 건설할 때는 390칸 정도의 매우 작은 부지를 가지고 있어서 소박한 궁궐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여러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소실 직전쯤엔 5천 칸 정도 되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법궁인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 앞에 의정부와 6조등 주요관청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의 권위와 직결된 궁궐의 규모가 390칸 정도인 것은 너무 작았다. 그러나 5천 칸 정도가 소실된 이후에는 한번에 다시 재건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후기 내내 재건하지 못 할 정도였다. 사실 외곽의 크기를 지도에서 보면 창덕궁과 창경궁이 거의 하나의 궁궐이나 다름없음을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을 수는 있지만, 궁성인 경복궁과 궁궐인 창덕궁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7천 칸은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의 차원에서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결과이다. 즉 나라 사정이 좋았을 때는 작은 크기였지만 나라 사정이 안 좋아지자 이를 만회하고 왕실 권위도 세울 겸 일을 지나치게 벌려서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