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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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5년 자르 투표
1.1. 개요
1.2. 기원
1.3. 전개
1.4. 결과
2. 1955년 자르 투표
2.1. 결과
3. 관련 문서


자르 국민투표(Saar status referendum)는 1935년, 1955년 2차례 있었다.




1. 1935년 자르 투표[편집]



1.1. 개요[편집]


1935년 1월 13일, 자르 분지 지역에서 이루어진 국민투표로서 이 투표의 결과로 자르 위임통치령이 독일국에 합병됐다.

1.2. 기원[편집]


자르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의 약 2500 제곱킬로미터의 지방이다. 자르는 그리 큰 지방은 아니었지만 프랑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지역의 자원에 탐을 냈고 자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독일에서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으로 분리되어 프랑스는 자르의 석탄 광산의 독점권을 얻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자르 보호령이 조약 조인 이후 15년간의 국제연맹의 감찰을 받고 국민투표를 통해 그 후의 향방을 결정할 계획이었다.[1]

1.3. 전개[편집]


1934년 말, 자르 위임통치령에는 예정된 국민투표 기간동안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연맹에서 회원국의 군대를 파견한다. 자르의 주민들은 독일에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집권하기 전에는 독일로의 편입을 전반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나치의 대두와 독일에서의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탄압과 종교의 탄압이 알려지자 노동자들, 그리고 가톨릭 교단들 사이에서는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으로 남자는 의견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불안해진 나치 독일은 지역민들에 대한 압력과 뒷공작을 펼치면서 투표가 진행된다.

1.4. 결과[편집]


독일 편입
477,089
90.73%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46,613
8.87%
프랑스 편입
2,124
0.40%
부정표
2,161
-
독일 편입파의 압승 프랑스 지못미 1탄

물론 나치의 뒷공작도 엄연히 존재했고, 실제 지역 여론보다 독일 편입파의 표수가 뻥튀기된건 사실이나, 당시 자르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일인으로 인식하지 프랑스인으로는 인식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경제수탈에 대한 반감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나치의 뒷공작이 없었어도 자르 주민들은 독일로의 편입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히틀러와 나치의 입장에서 자르 국민투표를 어정쩡한 표차로 승리하는 것보다 압승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기에 뒷공작을 펼친것.

이리 탈도 많았던 국민투표였지만 국제연맹은 자르 위임통치령이 나치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고, 1935년 3월 1일, 독일의 일부가 되었다.

2. 1955년 자르 투표[편집]



1957년 자를란트 반환식 관련 Pathe의 영상[2]

1955년 10월 23일, 프랑스 보호령이던 자르 보호령에서 있었던 국민투표.

이 국민투표는 프랑스가 제안한 "프랑스와의 경제동맹을 유지한 채 현상유지"에 대한 것이다.


2.1. 결과[편집]


찬성
201,973
32.29%
반대
423,434
67.71%
부정표
15,725
-

독일 편입파의 승리 프랑스 지못미 2탄[3]

프랑스는 자신의 제안이 부결되자 투표 3일 뒤 서독과 자르 조약을 체결하여 1957년 1월 1일에 자를란트가 공식적으로 서독으로 반환되었다. 이리하여 자를란트는 하나의 연방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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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투표로 자르 주민들은 독일로 편입되거나,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으로 남거나, 아니면 프랑스로 편입될 수 있었다.[2] 콘라트 아데나워의 연설 일부와 독일 국가[3] 사실상 이 주민투표에 대한 반대는 주민들의 서독과의 재통일 의사로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