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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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 전투
라틴어: Proelium Zamense
그리스어: Μάχη της Ζάμας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d45813923146f213552046ad3c0b949e.jpg
시기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장소
북아프리카 튀니지 실리아나 주 자마
원인
제2차 포에니 전쟁기 후반, 로마의 대반격.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massyli_mon_256.png 마실리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파일:masaesyli_emblem_256.png 마사이실리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파일:massyli_mon_256.png 마시니사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니발 바르카

병력
총원
35,500 명
총원
40,000 명
로마 보병
23,000 명
보병
36,000 명
로마 기병
2,500 명
카르타고 기병
2,000 명
누미디아 보병
6,000명
누미디아 기병
2,000 명
누미디아 기병
4,000명
전투코끼리
80 마리
피해
전체
4,000 ~ 5,000 명
전체
33,500 명 ~ 전멸
로마군 사망
1,500 ~ 2,500 명
사망
20,000 명
누미디아군 사망
2,500 명
포로
20,000 명
결과
로마 공화정의 승리, 제2차 포에니 전쟁 종결.[1]
영향
로마, 지중해 패권 장악.

1. 개요
2. 배경
2.1. 강화 회담
3. 양군의 배치와 전력
4. 진행
5. 후일담
6. 자마 전투의 이름이 붙은 튀니지의 자마(실리아나)
7. 그 외



1. 개요[편집]


"그대들의 과거의 전투를 가슴에 새기고,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의 조국에 부끄러움 없이 용감히 싸우라. 그대들의 눈앞에 이것을 그려라. 만약 그대들이 적을 무찌른다면 그대들은 의심의 여지없는 아프리카의 지배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 자신과 조국을 세계 위에 군림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가 그렇지 않다면, 조국을 위해 용감히 쓰러져간 사람들은 영원히 영광 속에 묻히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남은 인생을 비참함과 치욕 속에 보낼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그대들이 안전한 곳은 없다. 그리고 만약 카르타고군 손에 떨어진다면 그대들에게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두들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대들 중에 누구도 그런 운명을 맞지 않기를 나는 기도한다. 지금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대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단지 생에 대한 애착으로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겁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보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 나가서 적과 싸우라. 우리 앞에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전투에 나가는 군대는 항상 승리한다."

전투를 앞둔 스키피오의 연설[2]


BC 202년 10월[3] 19일,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격돌한 결전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전투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모두 고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명장들인 데다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두고 벌인 포에니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실제 활용된 전술 역시 명장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전투로 알려져 있다.


2. 배경[편집]


한니발은 BC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로마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으나, 전략적인 목표였던 로마 연합[4]의 와해는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로마가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 양상으로 전략을 바꾸면서 전황은 지지부진해졌다. 본국 카르타고에서의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적지에 고립된 한니발은 거듭된 소모전으로 초반의 기세를 잃어가며 점점 이탈리아 남부 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바르카 가문의 이베리아 거점인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하고(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격파하는 한편, 시칠리아 섬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 본국이 침공당하자 카르타고는 급히 한니발을 소환했다. 한니발은 15,000명의 정예부대와 함께 귀환한 뒤,[5] 최대한 카르타고와 가까운 곳에서 스키피오와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동맹시들을 압박해 들어가자 카르타고 의회는 한니발을 닦달하여 동맹시들을 구원하러 출동시켰다. 결국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5일 거리 떨어진 자마에서 스키피오군과 마주쳤다.


2.1. 강화 회담[편집]


폴리비오스에 의하면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전투 직전에 만나 강화협상 겸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최고의 라이벌 관계에 놓인 장군들끼리 정면 대결을 벌여 전략을 겨룬 것도 인류 역사상 드문 일인데, 그 호적수들이 전투 직전에 대화를 나눈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회담은 강화협상뿐만이 아니라 묘하게도 두 사람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둘은 통역병을 데리고 만났는데, 한니발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밖에, 카르타고인들은 리비아 밖에 영토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오. 이들은 둘 다 고귀한 제국이고 자연에 그리 선택되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먼젓번엔 시칠리아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우린 적이 되었고, 이제는 이베리아를 둘러싸고 그런 일이 벌어졌소. 불행이 가져다 주는 교훈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우리는 서로 자신의 영토를 짓밟고 짓밟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완고한 적대감정을 버리는 것이 전부요.
나는 그럴 용의가 있소이다. 왜냐하면 나는 운명의 여신이 세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움을, 그녀가 크나큰 은총을 한 쪽에 내렸다가 별 시답잖은 구실로 반대쪽에 그 은총을 돌려버리며 인간을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는 사실을 내 몸으로 겪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걱정되는 것은 그대 스키피오요. 그대는 아직 젊은이이고 이베리아와 리비아에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모두 성취해 왔기 때문이오. 당신은 여태 운명의 썰물을 맛본 적이 없소. 그렇기에 나는 내 충고가 당신에게 닿지 않을까 두렵구려.
(...)
나는 한니발이오! 칸나에 전투 이후 거의 이탈리아 전토의 주인이 되었으며 로마를 향해 진군했고 도시의 성벽에서 40스타디온[6]도 채 안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었소. 그러나 지금 나는 리비아에서 당신과 토론하고 있지 않소.
(...)
당신이 이긴다 한들 당신의 명예에는 그닥 중요한 것이 더해질 것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일을 그르치면 당신은 여태까지 이룬 모든 영예를 잃게 되오. 그러면 여태까지 당신을 설득하려 한 나는 뭐가 되겠소?
그러므로 나는 제안하오. 여태까지 로마와 분쟁의 대상이 되었던 모든 지역 -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베리아, 그리고 리비아와 로마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섬들-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카르타고는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이오. 이런 조약은 카르타고인들에게도 가장 안전하며 로마인들과 당신에게 가장 큰 영예가 될 것이오.

한니발은 크게 두 가지 논리를 구사하며 스키피오에게 호소했다. 1.당신이 이길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전투는 피아간에 큰 손해를 동반한다. 강화가 이득이다. 2.당신은 운명의 변덕을 모르며, 오만에 차 있다.[7] 개인적으로 당신이 오류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니발의 웅변에 스키피오는 심플하고 자신만만한 대답을 날렸다.

시칠리아나 이베리아의 전쟁 둘 다 로마측이 아니라 카르타고인들이 먼저 공격했소. 이 사실은 한니발 당신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오. 신들도 이런 명분 없는 침략을 감행한 사람 편을 들지 않으시고, 자위를 위해 일어선 사람 편을 드셔서 승리를 안겨주신 것입니다.
(...)
당신이 로마인이 리비아로 넘어오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물러나서 그런 조건을 제안했다면 당신 협상에 만족스런 결과를 안겨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리비아를 침공하고 당신 나라를 정복했기에 퇴각을 강요당한 입장이니 조건이 전혀 다르지 않소?
(카르타고인이 1차 협정을 깬 것을 언급) 내게 무슨 선택이 남아있단 말입니까? 내 입장이 돼서 생각해보십시오.
(...)
그대들 전군이 카르타고와 함께 항복하든가, 아니면 우리를 전장에서 꺾으시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니발의 웅변은 공적으로 볼 때 전투와 강화협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키피오라는 인물을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그의 미래를 예언한 것이 되었다.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어 자신에 차 있었던 스키피오는 정적들의 견제를 받으며 서글픈 말년을 보내게 된다.

3. 양군의 배치와 전력[편집]


파일:external/www.the-romans.eu/Zama-1.jpg
한니발은 카르타고군 보병 대열을 3개 대열로 정돈했다.1열은 리구리아(지금의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의 갈리아인), 켈트, 이베리아인에 마우레타니아인까지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용병부대로 12,000명, 2열은 리비아와 카르타고 시민병 14,000명, 3열은 한니발 자신의 최정예인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기병은 좌•우로 나누어서 우익에는 카르타고의 시민기병 2,000명, 좌익에는 누미디아 기병 2,000명을 배치시켰다. 여기에 추가로 전투 코끼리 80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보병 숫자는 이렇게 보면 40,000명이지만 기록들이 좀 들쑥날쑥한 관계로 대체로 36,000~5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고대 기록치고는 꽤나 정확하게 일치하는 편이다.

카르타고 1열의 리구리아인과 켈트인들은 모두 켈트식 무장과 전술에 익숙했고, 이베리아 용병 역시 투창과 검을 사용하는 병사들로 켈트계와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전술을 사용하지만 멀리서 온 용병들이다보니 로마군의 맞수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8] 마우레타니아인은 북아프리카 서부의 병사들로 전체적인 면에서 누미디아군과 비슷한 투창을 든 경보병이었다.

2열의 카르타고 시민병과 리비아 보병은 둥근 원형 방패와 창을 이용해 밀집 대형을 구사하며 싸우는 보병들로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와 유사하게 싸우는 병사들이었는데, 카르타고 시민병은 로마 시민병과는 전혀 달랐다. 카르타고는 피로스 전쟁 이후부터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시민병을 그다지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타고인 사령관의 경호를 위해 따라붙는 극소수의 호위병을 제외하면 카르타고인의 실전 경험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리비아 보병들은 그래도 무장상태나 훈련에서는 나았지만 여전히 산전수전 다 겪은 로마군의 베테랑을 상대로는 무리가 있었다.

3열의 병사들이야말로 한니발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부대로,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티인', 즉 이탈리아 남부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많은 수는 처음부터 한니발을 따라왔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이들은 무려 16년 동안 피레네 산맥과 론 강과 알프스 산맥을 넘고 이탈리아 반도를 싹쓸이하며 다닌 괴물들이었다. 종합하면 한니발의 3열은 한니발이 로마 원정을 나설때 따라나선 베테랑 용병에 이탈리아 남부 출신 병사들이 섞인 구성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기병들은 카르타고 시민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이 각각 2,000명씩이었는데, 카르타고 시민 기병은 원래 하급 귀족들에게서 징집되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역시 오랫동안 제대로 된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기병들이었다. 누미디아 기병은 친 시팍스파가 끌고 온 병력이었는데, 시팍스도 누미디아의 두 왕 중 한 명이었던 만큼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했겠으나, 왕이 직접 참전한 마시니사 측 병력보다는 수적으로 열세였다.

코끼리는 80마리나 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때까지 한니발이 써왔던 코끼리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2년 이상 조련시켜야 하는 부대를 급조한 것이다보니 훈련이 잘 되지 않은 것은 그렇다치고 성장조차 끝나지 않은 어린 개체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생물 자체로서의 전투력도 상당한 코끼리를 80마리나 모았던 만큼 최소한의 역할은 해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카르타고의 이점은 병력의 양과 핵심 보병진의 풍부한 경험, 그리고 코끼리 부대의 존재였고, 단점은 베테랑 병력을 제외한 카르타고 시민병들의 형편없는 질과, 기병 전력의 열세였다. 한니발이 기병 전력이 열세인 상태에서 전장에 나선 건 자마가 처음이었다. 결국 한니발은 줄곧 써 왔던 기병 대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전력인 15,000명의 정예 보병대 중심으로 전술을 짜게 된다.

로마군은 4개 군단과 이탈리아 및 기타 동맹군으로 이루어졌는데,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보병 23,000명, 기병 2,500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가 보병 6,000명, 기병 4,000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따라서 로마군의 숫자는 보병 29,000명, 기병은 6,000~6,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스키피오는 로마의 전통대로 1열은 하스타티, 2열은 프린키페스, 3열은 트리아리를 배치했다. 좌익에는 로마군 기병이, 우익에는 마시니사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이 배치되었다.

로마군 1열의 하스타티는 주로 젊은 신병들로 구성되었고 2열의 프린키페스는 보다 나이를 먹은 고참들로 구성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둘의 무장은 큰 차이가 없었으나 굳이 따지자면 적을 지치게 만드는 하스타티보다 지친 적을 본격적으로 격멸하는 프린키페스 쪽이 조금 더 중무장을 갖추는 경향이 있었다. 3열의 트리아리는 규정상 숫자도 하스타티나 프린키페스보다 적은 편이었고 나이도 많은 편이라 전면전에 투입되지는 않았고, 대신 노련한 경륜을 살려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국면에 예비대로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은 3m에 이르는 긴 창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체력을 보충하다가 적이 끈질기게 버티거나 아예 아군이 패배했을 때 최후의 방어부대로 투입되었다. 당시 로마 속담 중에 '트리아리까지 왔다'는 말은 사실상 패배의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기병 전력인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은 뛰어난 기병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자마 전투에서 주력끼리 격돌해서 이베리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을 쳐부순 쪽은 로마 기병이었고, 누미디아 기병은 경무장 보조전력에 가까웠다.

종합적으로 보면, 로마군은 양적으로도 카르타고군에 크게 밀리지 않았고, 질적으로는 오히려 훨씬 우위에 있었다. 특히 이전까지와 달리 기병 전력이 크게 우세했고, 보병 전력도 양과 질을 모두 따지면 카르타고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계속된 승리로 사기 또한 절정이었다.

4. 진행[편집]


한니발은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정예부대의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제대로 조련되지 않은 코끼리나 처음부터 열세였던 기병, 실전 경험이 적은 풋내기들로 구성된 1,2열의 보병들은 어디까지나 로마군의 예봉을 꺾고 지치게 만드는 역할이었으며,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역할은 오직 3열에 배치된 정예병들의 몫이었다. 한니발은 이 날 승부의 열쇠를 맡긴 정예병들을 아예 1, 2열로부터 150m 정도 후방에 배치해 쓸데없이 교전에 휘말릴 가능성조차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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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되자 한니발은 80마리의 코끼리를 로마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한니발이 그 자신보다 뛰어난 장군이라고 호평한 에페이로스의 국왕 피로스 1세는 코끼리를 좌•우익에 배치해서 기병전의 예비대로 활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었지만 한니발은 이러한 전술을 펼치지 않았다. 피로스 1세를 그토록 높게 평가한 한니발이 그의 전술을 몰라서 따라하지 못했을 리는 없고, 코끼리들의 훈련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코끼리 자체의 힘과 무게를 이용해 보병진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기병들, 특히 투창에 능숙하고 재빠른 누미디아 기병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전투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이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 기병에게 도전했으나 로마 기병들은 기동력으로 코끼리를 농락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바 있었다.


따라서 코끼리들은 로마군의 보병 대열을 향해 돌진했으나, 스키피오는 코끼리 부대에 대한 대처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군의 통상적인 전법에 따라 체스판 방식으로 부대를 배열하는 것과는 달리 선두에 경보병을 세우고, 그 뒤쪽의 중보병들은 코끼리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틔워버린 것이다. 몸이 가벼운 경보병들은 재빨리 흩어져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코끼리는 로마군 대열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거나 투창과 나팔소리에 놀라 카르타고 기병을 향해 달아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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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기병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린 로마군 기병은 공세에 나서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했고,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이때 카르타고 기병들은 전선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났는데, 이는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하고 되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한니발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제 양측 모두 보병들만 남은 상황이 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보병 중 1, 2열만 투입했다. 1열은 로마군 선두인 하스타티에게 쉽게 밀려났고, 2열은 지친 하스타티를 상대로 선전하긴 했으나 프린키페스가 나서자 이내 패퇴했다.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후방에서 이들의 이탈을 막자 1, 2열 부대는 자연스럽게 정예부대의 양익에 위치하게 되었다. 한니발은 이 시점에서 최후의 승부수를 투입했다.

한편, 스키피오의 하스타티들은 비록 1, 2열 부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키긴 했지만 적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완전히 지쳤고, 프린키페스도 체력을 상당히 소모한 상태였다. 이때 한니발의 정예가 전진해오자 스키피오는 대열을 재편성하여, 지친 하스타티는 측면으로 비켜세우고 2, 3열의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를 합친 다음 좌•우로 길게 늘어뜨린 상태로 한니발의 정예보병들과 교전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데, 우선 전사가인 리델 하트는 '최대 횡진이 최대 화력을 보장한다'는 명제에 충실한 행동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부대를 펼쳐 일종의 반포위 대열을 형성하여 한니발이 출격시킨 정예보병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무력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해석으로는 한니발의 1, 2열 부대가 재정렬되어 양익으로 펼쳐서 공격해왔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열을 길게 늘렸다는 것이다.

한편 한니발쪽에서 이런 재편성을 유도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한니발이 부대를 넓게 펼쳐서 다가온다면 스키피오 역시 대열을 길게 늘리는 것이 최선인데, 적이 당장 150m 앞에서 전진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최전방의 하스타티보다는 조금이라도 뒤쪽에 배치된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가 측면으로 기동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경우, 이미 지칠대로 지친 하스타티가 한니발의 정예병을 정면에서 막아내야 한다. 심지어 로마군은 코끼리 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평상시보다 더 많은 공간을 두고 느슨하게 배열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보병들로 얇아진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해석을 맞다고 가정해 보면 한니발은 후방에 있던 정예보병을 망치로 쓰고, 전방에 흩어져 있던 1, 2열 병사들을 늘여뜨려 모루로 쓰려고 했던 것이었으며, 그것을 스키피오에게 강요했다. 스키피오 입장에서는 전열을 늘리지 않으면 한니발군에게 포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역시 전열을 늘렸고, 최대한 로마 기병이 오는 시간까지 모루의 역할로써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망치인 로마 기병의 후방 타격이 한니발의 계획보다는 조금 더 빨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니발의 참패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 설명에 따르던 스키피오의 병력 재배치는 그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장기였던 망치와 모루 전술을 시도했다면, 한니발은 기병 전력이 열세일 때가 많았던 로마 측 주요 전술인 보병전의 우세를 통한 중앙 돌파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양 측 모두 실수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고, 더 충실한 전력을 갖춰 온 스키피오가 이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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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는데, 지친 하스타티들도 전열을 유지하며 분전했고, 반대로 카르타고의 1, 2열 부대도 질적으로 명백히 열세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로마군의 공세를 버텼다. 그러나 한니발의 정예보병은 로마 기병이 복귀하기 전에 중앙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고, 이윽고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기병을 완전히 패퇴시킨 후에 전장에 복귀해 포위망을 완성했다. 용병들은 항복하거나 도망쳤으나 한니발의 정예보병들은 항복을 거부하며 이 전투에서 모조리 전멸했다.

로마 기병이 적시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카르타고가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없진 않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고 실제로도 로마 보병은 한니발의 승부수를 붕괴 조짐없이 끝까지 견뎌냈다.

카르타고 측의 전사자는 한니발의 정예 15,000명 전원이 전사한 걸 포함해 도합 20,000명이었으며, 부상자와 포로까지 합치면 40,000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로마군의 전사자는 1,500~2,500명이었지만 누미디아군의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합치면 손실은 약 5,000명에 달하는 격렬한 혈전이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가 장군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했지만 단지 스키피오가 더 뛰어났을 뿐이었다고 한다. 한니발 자신도 나중에 스키피오와 만났을 때 한 말을 보면 어지간히 아쉬웠던 모양이다. 한니발이 동방의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망명하고, 스키피오가 동방 원정을 왔을 때 둘이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최고의 명장을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위대하고 다음이 에페이로스의 국왕 피로스 1세이며 그 다음이 자신이라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스키피오는 당신은 자마에서 나한테 패배했는데 어째서 세 번째 가는 장군이라고 자처하냐며 묻자 한니발은 만약 자신이 자마에서 이기기라도 했으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참고로 이 발언은 기록자 리비우스에 의하면 한니발이 스키피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보다 뛰어난 자신이 뛰어넘어야했던 '최종보스'로 스키피오를 지목한 카르타고식 화술이었다고 한다. 즉, 나는 위대한 명장이고 그 위대한 명장을 이긴 너도 명장이다는 말로, 한니발 자신과 스키피오를 동시에 칭찬하는 재미있는 화법이었던 셈이다.

5. 후일담[편집]


한니발도 포로가 될 뻔 했지만 살아남은 카르타고 기병과 보병들이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고 후퇴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군대가 참패한 이상 한니발 혼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최후의 희망이었던 한니발까지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 조약은 카르타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 사실상 카르타고의 모든 군사력을 제한하고 해외 식민지를 빼앗은 것이었다. 여기서 카르타고의 평화라는 말이 나왔는데, 패자에게 가혹한 평화조약을 가리킨다.

한니발은 이후 카르타고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카르타고도 로마와 비슷하게 두 집정관이 해마다 선출되었고 한니발이 이것에 선출된 것이었다. 한니발이 자마 회전에서 졌을 때의 나이가 고작 45세였으므로 아직 완전히 활동을 접을 나이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정력적으로 일했으나 정적들에 의해 한니발이 로마에 복수하기 위하여 세력을 회복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이 로마에 알려졌고,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한니발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한니발은 망명길에 나섰고 이후 시리아로 가서 군사고문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대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했다. 워낙 명성이 높은 장군이라 안티오코스 3세도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맡겼다. 카르타고 장군이 해전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한니발은 수십 년 동안 로마를 육지에서 괴롭힌 장군이었다. 그러고 육군을 제대로 지휘해서 이겼으면 모르겠는데, 안티오코스 3세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처절한 삽질만 거듭하며 동방 최강의 군대를 말아먹었다(...) 그렇게 셀레우코스 왕조와 로마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한니발은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이번에는 비티니아 왕의 군대를 조련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나, 여기까지 들어온 로마군이 비티니아 왕에게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을 격파한 것으로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원로원이 지나치게 위대한 개인을 견제한 때문에 말년은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고, 아예 로마를 떠나 시골에서 살다가 기원전 1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도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짐작이 간다.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세력이 축소되던 중에 로마의 사주를 받은 누미디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감행했으나 이는 기회만 노리던 로마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카르타고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처참하게 멸망했다.


6. 자마 전투의 이름이 붙은 튀니지의 자마(실리아나)[편집]


자마는 현재 튀니지 북부의 실리아나(Siliana)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자마라는 지명은 그 이후에 로마군의 숙영지가 생기면서 붙은 이름이었고, 4세기의 푸팅거 지도에서 이같은 지명이 확인된다. 현대의 마을 실리아나는 1905년에 생겨났다.

그런데 자마 전투는 흔히 자마로 알려진 곳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를 지은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이 자마에서 처음 야영을 한 후, 전투 직전에 다른 야영지로 옮겼다고 말했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역사가인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전투가 벌어진 스키피오의 진지가 튀니지와 알제리 국경에 있는 오늘날의 사키에트 시디 유세프(Sakiet Sidi Youssef)에 위치한, 전쟁 당시에는 나라그라(Naraggara)라고 불리던 마을 부근에 있었다고 말했다. 즉 자마는 전투 장소는 아니었고 한니발의 첫 숙영지였던 셈이다.

7. 그 외[편집]


카르타고의 신성 기병대가 도착해서 한니발을 구출했다거나, 한니발을 견제한 정적들의 음모로 자마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라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 카르타고 역사에 신성 기병대 및 신성 보병대가 존재했던 적은 있으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인 기원전 310년 시칠리아 섬의 친로마파 도시국가들과 치른 전투에서 전멸당한 이후, 이러한 카르타고의 신성 군대는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시작되는 오페라 <한니발>의 리허셜 장면이 자마 전투 하루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처음 겪은 검투사 경기가 이 자마 전투를 주제로 했다. 하지만, 막시무스가 속한 검투사 무리는 카르타고군 역할을 맡아 무기와 장구가 열악한 반면, 로마군 역할로 나온 상대측은 휘황찬란한 갑옷 및 낫전차와 궁수까지 동원했기에 보병 vs. 궁기병의 구도로 일방적인 학살극이 연출될 예정이었으나, 막시무스는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전투가 끝난 뒤 황제 콤모두스가 '이상하군. 원래는 로마군이 이기지 않았나?'라고 경기를 주최한 귀족에게 핀잔을 주자, 귀족은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황제는 곧 '괜찮아. 반전이 있어서 오히려 재미있군.'이라며 넘어간다. 로마의 검투사 경기에는 과거의 전투를 재현하는 경기들이 있었지만, 고증을 지키기보다는 관중들의 흥미가 우선이었고, 영화 속 경기장의 관중들도 본래 목적은 카르타고군 역할을 맡은 검투사 무리의 일방적인 학살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작중 극중극의 고증오류가 오히려 실제 고증에 충실했던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검투사 무리가 역전해서 승리를 거두며 반전과 더 큰 재미를 선사하자 콤모두스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고, 직접 검투사들을 치하하러 경기장에 내려간다. 그리고 여기서 막시무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역사적으로나 전쟁사 전투•전술 연구에도 중요한 전투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되었고, 조지 S. 패튼의 전기영화인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도 패튼 장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작전 중에 이 자마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지역을 부관과 함께 시찰할 때, 사라진 카르타고와 한니발의 흥망성쇠를 회고하며 감상에 젖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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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키피오에게는 '아프리카누스' 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2] 출처는 폴리비오스. 리델 하트의 저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서 간접 인용했다.[3] 같은 기원전 202년, 동양에선 해하 전투로 서초 패왕 항우가 몰락했다. 당대 동양 최강이던 항우와 서양 최강이던 한니발이 같은 해에 몰락했고, 훗날 동•서양 고대 제국의 모범이 된 로마 제국한나라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만들어 준 전투들이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는 건 우연이지만 꽤나 흥미로운 사실이다.[4]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동맹[5] 원래 수만 명이 넘는 부대가 있었으나 상황이 급하기도 했고 전 병력을 배에 태울 수가 없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기 이전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던 베테랑들만 데려왔다. 나머지 병사들이 제발 데려가 달라고 배에 들러붙는 걸 억지로 떼어내면서...[6] 1 스타디온은 약 180m.[7] 한니발은 그리스식 교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스키피오에게 지나친 성공으로 인한 과신이나 오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휘브리스(Hubris, ὕβρις)라고 하며, 지중해 세계에서는 미덕 문제라기보단 신들을 모욕하는 종교적인 불경함으로 간주되었다. 즉 인간 주제에 오만하게 굴면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었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내용이기도 하고, 현실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어처구니없게 몰락하는 현상들을 신의 분노로 해석하는 개념이었다. 현대 영어에서도 비슷한 단어로 쓰인다.[8]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로마군이 알프스 산맥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하는 동안 켈트족이 자주 로마군을 패배시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