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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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자살을 바라보는 인식을 다루는 문서다.

2. 상세[편집]


문화마다 자살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다르다.

일단 뜻을 이루기 위해서, 또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것은 보통 '자결'이라고 하며 일반적인 자살과는 보는 시각이 다르다. 대개 정황상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기 마련인지, 남들에게 선택당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끝내는' 의미가 강하다. 물론 남에 의해 자결'당하는' 경우도 많다. 환경상의 문제라 현대의 자살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다.[1]

사람은 가도 이야기는 남는다. 죽은 사람이야 그것으로 끝이지만 장례를 치르고, 주변 사람은 남은 평생 고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달리게 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다.

3. 시대[편집]



3.1. 고대[편집]


춘추시대 월나라는 전쟁터에서 적군 앞에서 죄수 등을 자살시켜 적을 경악에 빠지게 한 뒤 공격했다. 이는 적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스토아 학파의 영향[2]으로 인해 자살자가 마구 늘어났다.[3]그러자 국가적으로 '자살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민간에서 어설프게 자살 방법을 선택하기보다 극약을 통해 확실하게 죽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정부가 자살 사유를 심사하여 타당하면 햄록[4]을 처방하여 '인간다운 죽음'을 맞게 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나이가 들어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 곡기를 끊고 스스로 굶어서 생을 마감하는 풍습이 있었다.

위에 썼듯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자살이 고통스러운 삶을 마치는 방법으로 여겨져 널리 인정받았지만 노예 자살만은 아니었다. 그건 법으로 막았다. 노예가 자살하면 주인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혔던 까닭이다.

플라톤의 <파이돈>[5]에는 소크라테스가 왜 자살이 나쁜지 설명한 부분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말하면서 자살이 나쁘다고 말했는데, 그는 주인 명령이 없이 자살하는 당나귀를 예로 들어 인간이 주인 명령 없이 자살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나쁘다고 말했다.

플라톤이 내놓은 주장을 보면 같은 맥락에서 왜 노예가 자살하는 일을 금지했는지도 이해될 것이다. 노예는 죽음마저 주인 명령 없이 행할 수 없는 존재였다.


3.2. 중세[편집]


중세 유럽에서 자살을 절대적인 죄악으로 여겼다. 이는 당시 기독교가 영향력이 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살을 신을 향한 모독으로 인식하여 자살금지령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18세기까지 성공한 자살은 불명예스럽게 매장하는 방법으로, 자살 미수는 법정형으로 처단했다. 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교회가 자살=지옥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자살을 금지하고 심지어 자살자의 장례방식도 처벌에 가깝게 차별할 만큼 자살자 수가 많았다는 증거다. 실제로 자살을 지옥으로 공식화함에도 자살자는 꾸준히 나왔고 오히려 종교인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대로 지배층인 일부 귀족들 경우한에서는 명예를 위해서 자살하면 칭송받기도 했다.

3.3. 근현대[편집]


자살을 두고도 무조건 반대하는 시각과 개인의 자유, 선택권, 권리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후자가 극소수였던 19세기 이전과는 달리, 점차 개인주의의 확산, 인권 의식에 대한 인식 향상, 개인의 존엄성과 삶의 질 문제 등이 겹치면서 2차 대전 종전 이후로는 자살도 개인의 자유, 선택권, 권리라는 인식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노인이 오히려 자살을 하는 경향이 타국보다도 압도적으로 많다. 유교적인 가치관 때문에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는데, 자신에게는 남는 것이 별로 없어서 삶을 영위하기가 힘든 것이다. 이런 경향이 강해서 한국이 자살율이 높게 집계되는 것이다. # 의사의 조력자살과 같은 부분에서는 전연령대가 80% 이상 찬성하는데, 20대보다는 60대 이상에서 약간 더 찬성비율이 높다. # 사실 열녀와 같은 부분에서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타 문화권보다 더 자살을 조장하기도 했고, 현세적인 가치관이 조선시대에도 오히려 현세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을 유발하기도 했다. # 특히 국가의 운명과 관련한 민영환과 같은 '자결' 같은 경우도 있었다.

4. 국가[편집]



4.1. 대한민국[편집]


고대 한국, 특히 고구려에서는 해명태자, 호동왕자 등이 부모와 갈등을 빚자 자살을 선택했다.

한국 속담에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사회는 수천년전부터 죽음에 대한 금기가 심한 편이다. 유교의 정신 역시 자살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유교적 색채가 짙은 한국에서는 자식이 먼저 죽는 것 가운데서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최악의 불효라고 하여 매우 나쁘게 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는 부모니까 먼저 사망한 자식이라도 장례는 치러주었다. 다만 먼저 사망한 자체를 불미스럽게 여겨 조상들이 무덤이 있는 선산에 묻히지 못한다든가 하는 장례 절차상의 불이익이 있었다. 자살하거나 사형을 당하여 더욱 불미스럽게 사망한 자식은 화장을 하여 강에 그 재를 뿌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목숨을 끊는 행위(=자결)는 크게 나쁘게 보지 않았고 오히려 의기가 높다고 칭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자살하는 것이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지만 서양에서는 자살하면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로 보며 이러한 가치관 차이 때문에 오해가 빚어지기도 한다.[6]

위에서도 설명했듯 유교 문화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는 자결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자살을 부정적으로 봄과 동시에 금기시했으며,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시선은 거의 불문율 수준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따라서 자살로 죽은 사람의 유족을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시선도 짙은 편이다. 때문에 상을 치르는 이유가 자살일 경우 일반적으로는 장례 분위기가 상당히 어둡다. 다만 현세를 중시하는 가치관에 현세의 삶에 대한 기준이 높아 현세를 살아가지 못할 이유도 많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는 과거에 더 빈번했고, 한국의 경우 노인의 자살이 타국보다 압도적으로 흔한 편이다. 생계형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가 조선시대에도 우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다는 식으로 흔했다. # 자살을 슬퍼하는 이유는 저런 삶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망자의 분이 너무 심하게 쌓인 것에 슬퍼하는 것에 가깝다. 처녀귀신의 경우도 이런 유형의 귀신이라는 설화도 종종 있다.

다만 자살자가 심각한 범죄자[7]인 경우 '인과응보'라면서 그의 자살을 환영하는 사례도 흔히 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그 범죄자가 자살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찜찜하게 여기는 것도 기묘한 노릇. 단, 정말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하는 경우라면, 처벌이나 책임도 피하고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편히 죽는다며 역으로 분노를 살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살 폭탄 테러미국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총기 난사 사건로 무고한 인명을 대량살상하는 경우. 반대로, 정치범이나 경제사범등의 경우 정부의 탄압이나 권력자들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하거나, 혹은 그런 혐의 또는 누명을 써서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 석연치 않은 과정 혹은 행동 이후 자살로 발견되거나, 또는 그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부검이나 사인조사중 의문사 규명도 되기전 서둘러 자살로 발표되는 경우 일명 '자살당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나 마티즈 드립, 사법살인의 피해자, 군 내 의문사등 적지 않은 수의 의문사가 이런 케이스.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주로 산 자에게 부정적 영향만 남기거나 사회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자살 또는 정치적 반대등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비아냥대는 경우가 늘었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에서는 수도 없이 고인드립과 자살자 명예훼손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보다 산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병사들의 수가 더 많았으나 사람들은 그들을 모두 동정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2016년 5월 31일에 투신자살자가 애꿎은 행인을 덮처서 숨지게 만든 곡성 공무원 사망사건이 벌어지면서 자살자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졌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처럼 생활고로 인한 자살 사건인 경우에는 사회의 잘못으로 인한 희생자로 여기고 안쓰러워 하는 시선이 많지만, 이 경우처럼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경우에는 범죄자와 다를 게 없다는 게 세간 인식이다.

경찰, 검찰, 장례업체 실무에서는 자살을 일종의 사고사(변사)로 취급한다. 따라서 자살자의 시신은 탈의되어 부검, 검시를 거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알몸 시신을 촬영한 검시사진 및 관련 서류는 관할 경찰서에 25년 동안 보관된다. 검찰의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장례 진행이 불가능하고 시신에 손을 댈 수 없다.

4.2. 북한[편집]


북한에서도 자살은 부정적인 인식이지만 위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부정적인데, 북한은 스스로를 지상락원이라 선전하고 있는데 그런 지상락원에서 자살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 때문. 실제로는 노예가 사라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래서 북한 정권은 자살행위를 반역이자 배신행위로 간주하고 유가족들을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어 정치적인 불이익을 가한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풍조가 생긴다.#자살 아니어도 굶어죽기 딱 좋다

4.3. 일본[편집]


무사도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할복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자신의 결백함이나 명예를 위해 배를 칼로 긋는 것이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거나 전쟁에서 진 장수가 살아남았을 때에 모든 일의 책임을 지기 위해 이루어졌던 이 행위를 고결한 행위라 하여 근대 일본에선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문학 작가마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할복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 할복 자살 덕분에 일본 내에서 자살이란 행동은 꽤나 숭고한 행위로 여겨졌으며 죄를 지은 인간이라 해도 자살을 했을 경우 명복을 빌어주는 행동을 해주었다. 또한 특공 또는 희생이라 하여 목숨을 버리고 죽음을 맞이하여 후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 중에 성이 함락되었을 때 또는 전쟁에 패했을 때 성주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할복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시바타 카츠이에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해서 할복했다. 이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우키타 히데이에모리 데루모토를 살려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엄청난 대인배인 셈.

흔히 "적이지만 훌륭하다", "훌륭한 최후였다" 라는 식의 대사는 이같은 풍습의 잔재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에서는 위의 사고관이 남아있다보니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중2병 환자들은 "기회만 오면 특공하여 이름을 남기고 싶다" 같은 병맛 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도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행한 카미카제 같은 경우는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고, 숭고한 희생도 아니었다.[8]

서양에서는 위와 같은 일본식의 '불명예를 씻기 위한 자살' 혹은 '자신의 죄를 목숨으로 갚기 위해 하는 자살'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자신이 잘못했으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 잘못을 바로잡을 생각을 해야지 덜컥 죽어버리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불명예를 씻기 위한 자살을 미화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자살이 늘어난다고 해서 좋지 않게 보는 시각도 늘어났다고 한다.

한편 일본은 '불명예를 씻기 위한 자살' 혹은 '자신의 죄를 목숨으로 갚기 위해 하는 자살'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 따른 자살은 결코 좋게 보지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더욱 더 나쁘게 본다. 대한민국에서 범죄자가 아닌 자살자를 '그럴 힘으로 더 오래 살지 그랬냐'와 같은 연민의 시선이 섞인 부정적 태도로 대하고, 유족들에게 대부분 위로의 반응이 나오는 것과 달리 일본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범죄자가 자살한것마냥 일반적인 자살도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지언정 연민의 태도는 거의 전무하며 유족들도 위로받기보다는 비난받는다.[9] 그 이유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길 꺼리는 소위 메이와쿠에 대한 문화가 발달한 것이 크며 자살을 하면 자살을 수습하는 소방관과 경찰들을 비롯해서 가족과 애인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일본 특유의 '메이와쿠' 문화의 영향이라 하겠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자살자가 자살하기 전 유서에서도 자살한 이유보다는 사죄의 말을 주로 쓴다. 생명을 끊어서 미안한 게 아니고 자기가 죽은 후의 뒷수습 등으로 민폐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다.[10]

이런 경우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회적 정체성 차이를 매우 극명하게 드러내는데, 관계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들은 집단주의 사고관이 강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 집단이 곧 '나'라는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집단이 무너지면 그 사람의 자아도 소멸되어 이를 막기 위해 극단적 선택도 감수하거나, 정말로 집단이 무너져 자아가 소멸되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45년 일본의 항복선언후 일어났던 수많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자살. 반면 한국인은 관계주의 문화라 조직,집단내 구성원들간의 관계를 중시하며, 이것이 약하거나 끊어지면 점차 고립되고 최소한의 관계까지 끊어지면 자아까지 끊어져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주의와 집단주의 차이

현재 일본에서는 철로에 투신자살하면 철도회사와 고객들로부터 욕을 먹게 된다.[11] 특히 츄오 쾌속선 같은 조밀한 배차로 운영되는 경우, 그날 다이어는 완전히 박살나고 직장인들은 지각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사상사고나 천재지변, 신호 문제 등으로 지연이 발생할 때는 역에서 지연증명서를 놔두며, 그걸 가져가서 상사에게 확인을 받으면 지각은 잘 해결된다.

철도가 대중교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에서는 철도에서 투신 자살한 사람의 유족에게 벌금을 매기고 있다고 한다. 액수가 꽤 세다.[12] 다만 자살자의 자살 행위에 유족의 의지가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유족에게 벌금을 매기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본 내에서도 여러 논쟁이 오가고 있다.


5. 종교[편집]


거의 모든 종교가 자살을 금기시하며, 다른 금기와 충돌할 경우 다른 금기를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살고 나서 참회하라는 경우도 있다. 모든 민간 종교나 무속인들조차도 자살한 영은 살아있을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다. 죽는다고 힘든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죽어서도 문제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다만 사후세계나 영이 실재하지 않을 경우 이 주장은 거짓이 되어버린다. 어쨌든 존속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자살을 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종교는 사이비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13]

어떤 종교의 교리, 율령이 곧 관습법이거나 국법인 종교 국가들에서는, 그 종교의 율법, 경전을 근거로 자살은 범죄로 규정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고대 시대에 형성되었고, 해당 시대의 관습상 노동력에 해당하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큰 문제였으며[14], 그러한 풍토 하에서 형성된 대부분의 종교들은 자살을 매우 악한 죄로 규정하고 있다. 종교 국가는 아니지만 사실상 보수 기독교가 지배하는 종교 국가에 가까운 미국 남부와 독일의 기독교 성향이 강한 일부 주에서도 자살을 법으로 금지한다.[15]


5.1. 아브라함계 종교[편집]



5.1.1. 기독교[편집]


일단 전체적으로 부정적이며 기독교의 십계명에 대해서도 같은 해석이 있으며 기독교 시각에서 자살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월권행위 혹은 항명행위 내지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살인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단, 이것도 시각이나 정도에 따라서 다르다. 아래 참조.

자신의 중범죄로 인한 사회적 비난이나 법적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자살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본질적으로 자살은 곧 죽을 죄이기 때문이다. 당장 배교를 요구받을 때 기독교 신자들은 자살을 택하지 않는 대신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데 이것도 자살이 금기 사항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기원은 이스카리옷 유다가 회개하지 않고 자살한 것이고, 두번째 기원은 5세기 초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에서는 당시 게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할 때 겁탈을 당하고도 자결하지 않고 살아남은 기독교 여인들을 비난하거나 안 좋게 보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겁탈당하고도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자살은 스스로를 살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 설이 기독교의 정통적인 입장이 되면서 자살이 나쁜 짓으로 규정됐다.

위의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자면 이렇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십계명을 예로 들면서, 십계명 내부의 '이웃에 대한 거짓 증언 금지' 구절과 '이웃 사랑'의 구절을 토대로 그것의 확대해석을 통해 자살 또한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죽여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하여 비록 누구라고 정확히 꼬집지는 않아도 거짓 증언, 이웃 사랑부터가 자기로부터 단초가 되는 구절이라면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포함되는 구절이라고 해석한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근거로 든 것은 모세의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라는 구절이었는데, 사실 이 구절은 말 그대로 남을 살해하지 말라는 뜻일 뿐 자살까지 커버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상 유대교 율법과 전통 상으로도 자살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이런 풍조가 기독교에까지 이어졌다. 현대 신학에서는 예외적인 경우 한정으로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어쨌든 중세까지는(그리고 지금도 보수적인 신자들은) 자살은 최악의 대죄라고 생각했고 자살자는 장례식·장례미사조차 치르지 못하게 했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살인이기 때문에 자살자는 살인자와 마찬가지로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세기에 일종의 편법으로써 사형을 목적으로 중죄(그래도 살인, 강간보다는 반역죄나 절도죄)를 저지르는 간접자살이 유행했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자살을 뜻하는 영어 표현 중에는 'committing suicide', 즉 '자살을 저지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 문화의 흔적이다. 현대에는 suicide, killing oneself 등의 중립적인 표현이 더 흔하다. 프랑스어에는 suicider(자살하다)라는 낱말이 존재한다. 그 영향력이 정통이 되어 기독교의 영향이 강한 서구과 미국에서는 19세기까지는 자살을 거의 좋게 보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 인식의 대표적인 예가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지옥편에 있다.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적 분위기가 매우 강한 단테신곡에서도 자살한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서 점점 썩어가는 고목나무가 되어버린다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자살한 자는 지옥의 8층 폭력의 층의 두 번째 고리에서[16]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되어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최후의 심판 날에도 스스로 육체를 버렸으니 육체를 돌려받지 않고 나무에 걸어놓는다고 한다. 아주 극한 상황에 몰려서 자살한 사람도 '그래도 자살하지 말 걸'이라고 후회할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로마의 카토는 연옥의 뱃사공으로 나오며 고성소에서도 자살로 생을 마친 위인들이 몇몇 나온다. 아마도 단테가 당시 상황과 현재 상황의 차이를 인정해서 그런 듯하다. 사실 단테의 그리스·로마 덕후 기질을 보면 그냥 기독교 문화권은 아닌데 지옥에 넣기 싫은 영웅들을 열외시켜 준 것 같다. 자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의 예와는 반대로 "책임을 통감하여 죽음으로 사죄..." 같은 행위는 오히려 책임 회피 행위로 간주한다.


5.1.1.1. 가톨릭[편집]

알아두면 쓸모있는 교회법 (4) 자살자 장례미사 가능할까?
가톨릭의 경우, 과거엔 자살은 장례 미사도 못 올릴 정도의 사죄(死罪)로 취급했지만 현대에는 모든 상황을 자살로 보지 않는다. "너 배교할래, 죽을래?" 같은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 상황은 자살로 보지 않고 따로 순교라고 칭한다. 그 외의 자살을 죄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로는 스파이가 임무 수행 중 국가를 위해 자살하는 경우, 전쟁 중 특별한 상황이나 조난 같은 극한 상황에서 자기희생과 같은 국가나 공동체를 위해 '불가피하게' 자살하는 경우[17] 등이 있다.[18]

자살에 대해서 보편적인 해석은, 일단 자살은 죄가 맞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죄는 고의에 따라 대죄소죄가 구분되는데, 자살의 경우는 빚 독촉, 따돌림 등 사회적인 압박을 받거나 우울증 등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에 대해서 모종의 방식을 통해 봐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물론 앞서 언급한 부득이한 상황이나 빚 독촉 등 어려움에 처한 상황도 아니고, 누가 봐도 명백히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 100% 자유 의지로만 행한 자살은 거의 해당사항이 없다. 이전부터 예외사항을 두었고 현대에는 웬만하면 자살이라도 범죄에 대한 도피성 자살이 아닌 이상[19] 같은 이유로 병사와 비슷하게 장례 미사는 치러준다.[20]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도 정신병이 인정되어 장례 미사를 치러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냉담자였지만 마찬가지로 치러줬다. 당연히 장례절차 등도 자연사·사고사[21].

또한 구원의 여부는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일임을 근거로 가급적이면 자살자에 대한 처우를 일반적인 사망자와 다르지 않게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자살자가 죽는 순간 회개할 가능성도 생각해서 그 영혼의 구원을 하느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자살한 남편의 아내에게 죽기 바로 직전에 회개해서 연옥에 갔으니 기도해 주라고 말해준 일화도 있다. 물론 절대 장담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긴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하느님만 아는 길로 자살자를 구원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살자의 구원에 대해 절망하면 안 되고 자살을 한 사람도 자살자가 구원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다만 천주교의 경우 자살을 하고 구원받아도 연옥에서 죄값을 치룰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에 대해서도 기도한다.

일단 교리상으로 자살은 살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많으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스스로를 살해하는 선택을 한 행위가 아니라 우울증의 증상이 치닫아 병사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를 확대한다면 우울증 환자는 병자성사를 받을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구원 받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교황청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일부 진보적인 신부들은 우울장애 등의 신경증도 병자성사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5.1.1.2. 개신교[편집]

개신교의 경우 당연히 거의 모든 종파가 부정적이다. 2008년 한국의 안재환 사건에서 보여지듯이 자살이라고 아예 배척하지는 않는 종파도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개신교의 구원에 대한 교리인 이신득의인데, 이에 따르면 자살이라고 해서 딱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니라는 의견이 있고 선택받지 못한 증거라는 의견이 있다.

세계적으로는 개신교 교단 역시 점차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자살을 무조건 지옥행으로 취급하지는 않는 쪽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단 이런 쪽도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지옥이나 천국에 갈거라고 장담은 안한다. 현대 개신교의 경우 우울증에 의한 자살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이뤄진 게 아니라는 이유로 병사로 본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자살하다"가 아닌 "자살당하다"(?)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보기도 하고, 이런 입장이 실제로 신학계에서 상당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사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 또한 누가 자살했다고 해서 함부로 지옥에 간다고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위에 나온 것처럼 꼭 완전히 자기 뜻대로 죽은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논리.


5.1.2. 이슬람교[편집]


간혹 잇따른 이슬람 극단주의 신봉자들의 자살폭탄테러 등으로 이슬람교는 자살을 그다지 터부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실 이슬람교에 있어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행위 중 하나가 바로 자살이다. 쿠란 4장 29절[22]과 17장 33절[23]을 보면 명확하다.[24] 그게 어느 정도냐면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지만 만약에 질병과 사고를 겪어서 아사할 것 같거나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는 뭔가를 섭취해도 된다. 당연히 며칠 정도 살짝 뒤로 미루고 나중에 날짜 채우는 것은 충분히 허용이 된다. 즉, 위험 상황에서 라마단이나 할랄 푸드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아사하거나 먹어야 할 약을 제때 먹지 못해서 사망하는 것도 자살로 처리한다. 즉, 이렇게 목숨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는 설령 이나 돼지고기처럼 쿠란이나 율법, 계율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하람 계열 음식을 입에 대더라도 그 죄는 묻지 않고, 착실히 회개만 하면 된다고 한다. 라마단을 지키는 것이나 할랄 푸드 이외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기지만, 이것을 억지로 지키려다간 사망하는 게 명확한 경우엔 이것도 자살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이 때만은 기존의 금기를 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마단은 나중에 의무를 수행하면 되고 교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음식을 먹은 건 참회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다만 알라를 위해 자살하는 경우는 인정하는 듯하다. '알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그런 신념에서 나온 듯하다. 주류 이슬람 계통 사람들이 말하듯, 이슬람 극단주의에 의한 테러는 이슬람교를 위한 것도, 알라를 위한 것도 아니며 이슬람교를 빌려온 사이비 종교라고 싫어한다. 이들의 자살 폭탄 테러도 세계평화를 망치고 자살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죄악으로 삼는다고... 한마디로 비뚤어진 순교인 셈이다.

또 위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자살에도 여건이 있고 구원은 알라만이 판단한다는 것에 기초하여 무조건 지옥행으로 보지 않기도 하며, 신앙이 있으면 지옥에 가도 시간이 지나면 나올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5.1.3. 유대교[편집]


마찬가지로 십계명을 어기는 살인 행위로 보며 장례도 제대로 안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여건에 따라서 봐준다.


5.2. 동양 종교[편집]



5.2.1. 불교[편집]


불교에서의 주된 해석에 따르면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살인 행위로서 불교의 계명 중 하나인 '살인을 하지 마라'라는 것을 어기는 행동이라고 한다. 즉, 자살을 하면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라 내생에 환생해도 전생의 업에 따른 힘든 생을 겪게 된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이나 빠알리경전을 보면, 자살에 관한 석가의 관대함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죽음이나 지인의 죽음에도 초연한 대인배(?)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불교의 성격과도 관련있다. 한 예로 출가한 가장이 자신을 찾아온 자식과 아내를 버리는 것을 보고 석가가 칭찬하거나, 해탈을 유지하려고 자살한 제자를 석가가 칭찬한 부분이 있다.

고대 인도의 윤회관념에서는, 석가에게 공양한 코끼리나 원숭이도 하늘에 천신으로 태어날 수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태어나게 되는 곳은 지옥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고려한 것이기에, 타인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을 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것은 깨닫는 사람은 분명히 있으며 그들의 수도 많지만 지옥이나 축생 아귀에 태어나는 사람은 있으며 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내생에는 축생계로 환생하며 그 중에서도 최악인 곤충으로 환생하게 된다는 얘기도 있다.


5.2.2. 힌두교[편집]


불교와 마찬가지로 아힘사에 어긋나는 금기이다. 다만 프라요파베샤라고 금식을 통한 종교적인 자살은 인정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남편이 욕먹는 것을 보고 분신자살한 사티 신의 신화를 본따 남편이 죽으면 분신자살을 반쯤 강요하는 악습이 존재한다.현재는 많이 사라졌지만 시골에서는 잊을만하면 터진다.


5.2.3. 자이나교[편집]


유일하게 자살을 인정하고 있는 종교가 자이나교라고도 잘못 알려져 있는데 불교, 힌두교와 마찬가지로 자이나교에서도 일반적인 자살은 살인으로 본다. 살레카나라는 수행을 하고 또 하다가 음식을 먹음으로써 쌓는 업까지 버리기 위해 단식을 통한 죽음을 허용할 뿐 우리가 생각하는 자살을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자살을 용인하는 사실 때문에 고대 때부터 불교의 비판을 많이 받아왔고 육사외도로 분류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6. 철학[편집]


윤리학적 틀에서 볼 때 임마누엘 칸트는 아예 대놓고 하지 말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의무론 계열 학자들은 기독교와 비슷하게 자살이 존재를 발전시키는 (善)을 없애는 것라고 주장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렇게만 언급하면 오해일 수 있는데 "의무론 계열 학자"라고 싸잡기 보다는 "본질주의 철학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이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든지 대부분의 서양 고대 철학자들은 행복을 "그것의 본질을 가장 잘 발현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의 행복은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 달성된다고 본 것이다. 본질주의 철학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사람다움을 포기하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경우는 케바케인데 경우에 따라서 자살하는 것이 더 많은 선을 발생시킬 경우에 자살이 옳다고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에서는 자살 또한 개인의 자유로 여긴다.

결정론적 관점에서도 자살 또한 운명이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오히려 회의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에서 성향에 따라 자살 또한 무가치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알베르 카뮈는 자살을 자유에 대한 도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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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경애왕견훤 때문에 자결했다 그러지, 자살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보통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자살하면 자결이라고 치는 편.[2]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이성에 충실하고 인간다움을 중시했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으로 인한 자살이나 명예에 의한 자살을 권장했다. 심지어 매우 가난하거나 불치병에 걸렸을 경우에도 자살을 권장했다.[3]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자살이 주로 치욕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4] hemlock. 일명 독당근으로 불리는 미나릿과 식물. 소크라테스가 독살 당했을 때 들었던 독약이 바로 햄록이다.[5] 플라톤,'플라톤의 대화편', 최명관 역, 창, 2008[6]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동양권도 추문이 있었을때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 서양과 별반 차이가 없다.[7] 예를 들어 살인, 강간, 식인을 한 경우.[8] 뉴스 참고.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9] 다만, 유족에 대한 비난 문제는 연좌제와 결부되어 최근에는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본 내에서도 강해지고 있다.[10] 할복 문서에서 보이는 카이샤쿠(介錯)에게 할복하는 주인공이 귀찮은 일을 떠맡기게 되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자살이 민폐를 끼치는 행위라는 일본인들의 인식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사무라이 이상의 계급들의 이야기고 평민 계급에서는 자살하여 죽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바다나 자연 등에 투척해버린다는 묘사도 흔하게 볼 수 있다.[11] 이건 사실상 만국공통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애꿎은 시민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건 민폐 그 자체이니 말이다.[12] 물론 철도 회사의 손해 배상 청구는 별도. E233계 전동차같이 경량 스테인리스가 작살나 폐차까지 간다면 액수가 억 단위로 넘어간다.[13] 옛날에는 종교의 영향력이 컸기에 종교에서 대놓고 자살을 권장하면 집단자살로 해당 문명권이 망했을 수도 있으므로. 또한 반대로 종교에서 까지 자살자에 대한 처우가 나쁜것은 옛날부터 자살이 심각성이 인식될정도로 많이 발생했다는 증거다.[14]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로 일부 네티즌은 사회에서 자살을 금하는 이유를 스타에 비유하여 "스타하다가 SCV가 지멋대로 자폭하면 짜증나니깐"식으로 사회에서 자살을 금한다고 비유하기도 한다.[15] 존엄사나 안락사조차 허용하지 않아 일부 말기암환자나 불치병 환자들이 스위스나 핀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등으로 가는 사례도 있다.[16] 폭력의 층은 남에게 해를 끼친 자,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 신과 자연 순리에게 해를 끼친 자로 나뉘어 있다.[17] 브로큰 애로우 요청 등.[18] 그런데 이런 경우는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자살'이 아닌 '남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파이의 경우는 따로 '자결'이라 부른다.[19] 라노벨 읽다가 적발된 걸 비관하여 교정에서 바로 투신자살한 포항 중학생도 장례 미사를 치뤄줬다. 말이 자살이지 사실상 교사의 세치혀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20] 필리핀 같이 가톨릭 문화권이 짙은 곳인 경우, 자살자의 무덤 앞에 검은색 십자가를 세우기도 한다. 공동묘지에 간간히 검은색 십자가가 세워저 있는 경우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21] 검찰, 경찰 계통에서는 자살도 일종의 사고사 취급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교통사고 등과 같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경우다.[22] 믿는 신앙인들이여 너희들 가운데 너희들의 재산을 부정하게삼키지 말라 서로가 합의한 교역 에 의해야 되니라 또 너희 자신들을 살해치 말것이니 하나님은 너 희에게 자비로 충만하시니라.[23] 정당한 이유없이 사람을 살 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금하셨노라 부당하게 살해된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보호자에게 권리를부여하노라 그러나 살해함에 범 주를 넘지 말라 그가 법에 의하 여 보호를 받기 때문이라.[24] 주석을 달자면, 튀르키예 국가종무성의 타프시르에 따르면 4장 29절에서는 자신의 생명과 남의 생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보호받을 가치가 있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17장 33절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