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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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브렐
Jacques Brel


본명
자크 로맹 조르주 브렐
Jacques Romain Georges Brel
예명
위대한 자크
Le Grand Jacques | The Great Jacques
출생
1929년 4월 8일
벨기에 브뤼셀 스하르베크
사망
1978년 10월 9일 (향년 49세)
프랑스 보비니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배우, 감독
장르
샹송, 프렌치 팝
악기
보컬, 기타
활동
1953년 ~ 1978년
배우자
테레제 미힐센
자녀
3명
종교
무종교(무신론)[1]
서명
파일:Jacques_Brel's_signature.gif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벨기에 출신의 가수. 샹송의 대부이자 프랑스어권 대중음악계 시대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프랑스어권뿐만 아니라 카바레 팝으로 대표되는, 복고지향적 팝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데이비드 보위스콧 워커, 톰 웨이츠, 디바인 코미디 같은 영미권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


2. 생애[편집]


자크 브렐은 1929년 4월 8일 브뤼셀 북쪽에 있는 스하르베크(Schaerbeek)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생비아퇴르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그는 학창시절 적응도 잘 하지 못하고 그다지 착한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을 비롯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보수적인 아버지와 학업에 의해 점차 그것들을 잊는다. 아버지는 20여년의 세월을 콩고에서 보낸 후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듯이 가톨릭 미션스쿨인 생루이 학교로 진학했지만,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등생에 속하게 된다. 이 당시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허먼 멜빌, 잭 런던, 조지프 콘래드, 쥘 베른 등의 소설을 애독하며 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때 그에게 다가온 교사가 바로 데샹(Deschamps) 신부이다. 그는 자크를 학교에 적응하게 하고 열등생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수학과 같은 과목들을 직접 가르치거나 인생상담을 해주며 은사가 되어준다.

1944년 봄에 자크는 그의 친구와 함께 사설극단에 들어가는데, 이 때 그들의 계획에 도움을 준 것도 바로 은사인 데샹 신부이다. 이것이 자크의 연극 경력의 시발점이다. 이로써 그의 아버지는 18살짜리 아들의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후에 Brassen이 "사제 Brel" 이란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도 바로 아버지와 가톨릭의 영향 아래 성장한 탓이다.

1년 동안 자크는 극단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서서히 연극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1947년 12월에 당시 젊은층의 운동인 la Franche Cordee의 주창자인 엑토르와 잔 브룅동크를 만난다.

이 모임은 그의 가치관과 감성에 맞았고 여기서 그는 첫번째 노래를 작곡하게 되고 부르게 되며, 미래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또한 그의 노래가사가 대부분 반은 시적이고 반은 철학적인 것도 이 모임에서의 영향이었다.

1950년 자크는 미셸 미힐선(Miche Michielsen)과 결혼해서 1951년 첫째딸 샹탈을 53년 둘째딸인 프랑스를 그리고 나중에 둘째부인으로부터 58년 이자벨을 낳는다.

1952년 그는 la Franche Cordee의 동료들과 같이 어울리며 자주 노래를 불렀는데. 그는 브뤼셀에 있는 흑장미 카바레의 주인 루이 레뒤와 친하게 지냈고, 레뒤에게 그가 작곡한 노래를 자주 보여줬다.

마지막곡은 제법 쓸만했고 여기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경력을 쌓는다. 이후로 그는 자주 파리로 가서 오디션에 응했고 여러번 떨어진다. 1953년 자크 카네티가 마침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파리의 Trois Baudets에 있는 카네티의 극장에서 데뷔한다.

1954년 자크 카네티와 손잡고 첫번째 데뷔 앨범을 낸다.

이 당시에 그의 노래는 약간 어두운 느낌이 있었고, 이 분위기에서 탈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그에게 클라크 게이블과 같은 멋진 콧수염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 점차 자크는 6~7군데의 카바레를 돌며 3~4곡의 노래를 부를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2]

여기서의 성공이 그로 하여금 그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그는 가족소유의 공장을 떠나 주요 활동지였던 파리에 자리잡는다. 한편 첫번째 음반의 성공으로 그는 Sidney Bechet, Dario Moreno, Philippe Clay, Catherine Sauvage, Poiret et Serrault, Raymond Devos처럼 지방의 유력한 예술가로 자리잡는다.

55년도는 그에게 JOJO라 불리는 Georges Pasquier와 만나는 커다란 행운을 준 한 해였다. Jojo는 자크와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 된다. Cannetti에 의해 기획되었던 56년 7월의 Grenoble공연에서 이제 막 알제리에서 돌아온 젊은 피아니스트인 Francois Rauber를 만났고 이 둘은 금방 친해져서 둘이서 자동차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이후로도 Rauber는 계속 자크의 작곡을 돕는다.

한편 Canetti는 25cm음반 시장을 점령해 나갔는데, 그는 57년 Charles Cros Academie에서 Quand on a que l'amour로 그랑프리를 획득한다. 1958년에 Philips는 3번째 앨범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그의 노래는 계속 유럽 음악시장에서 대성공한다.

특히 Ne me quitte pas는 잊지못할 샹송 장르의 불후의 명곡으로 남는다. 공연도 계속 성공적이어서 한 해에 300여 회의 공연을 했던 해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테스트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모든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꿈의 무대라 할 l'Olympia 에서 의 공연으로 1961년 10월에 있었다. 이 때 당시 샹송계의 대모이자 아이콘이었던 에디트 피아프가 자크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샹송은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라고 크게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에디트가 예견한 대로 자크는 무대에서 큰 성적을 올리며 이때를 기점으로 단순한 당대의 인기가수를 넘어 국민가수이자 아이콘 반열에 들게 되었다.

1964년은 그에게 여러가지로 기록할만한 한해였는데, 그의 부모가 사망했다. 또한 이 해에 l'Olympia 에서의 대성공을 기록한 해였다. 이 당시 모든 관객이 서서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 공연에서 그는 관객앞에서 Amsterdam이란 노래를 즉석에서 만들어내서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이 때의 실황앨범 'l'Olympia 64'는 그해의 앨범상을 수상했고, 브렐 자신은 최고가수상을 수상한다. 1966년 은퇴 선언 직후 이뤄진 1966년 l’Olympia의 공연은 그의 은퇴를 믿지 못하는 수많은 팬들이 극장의 2천 석을 채웠다. 68년말에 그의 마지막 앨범을 발표한다. 이 l'homme de la Mancha는 마치 그의 인생을 옮겨 적은 것 같았다.

1967년부터는 영화 감독에 자신의 재능을 쏟아부었는데 1967년 영화 《직업의 위험》 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의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1971년에는 자신의 영화 《프란츠》를 감독하며 영화 감독으로서의 명예도 얻는다. 그러나 1972년 자신의 두 번째 영화 《머나먼 서부》의 실패로 결국 1973년 영화계를 은퇴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자크는 더 이상 단순한 가수도 코메디언도 아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주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어린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화려했던 연예계 생활을 잠시 미뤄두고 비행기와 배에 전념한다. 1973년에는 2달 여정의 대서양 항해를 떠나기도 했다. 1974년에 요트를 사고 그 배로 멀고도 어려운 태평양 항해에 나선다. 타히티 근처에까지 가서 Hiva Oa에 있는 폴 고갱이 묻혀 있는 묘지 근처에 집을 빌려서 산다.[3]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로운 앨범을 기다리고 있었고 드디어 1977년 가을에 자크는 새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 그는 녹음을 위해 폴리네시아에서 나와 작업을 마치고 다시 되돌아 가곤 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점차로 약해져서 섬에서 나오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결국 1978년 10월 9일 암투병을 거치다 화려했던 일생의 막을 내렸다. 위대한 예술가는 또 다른 위대한 예술가 머나먼 지구끝에서 빛에 컬러를 입히던 고갱을 만나러 떠났다. 고갱이 묻혔던 것처럼 Atuona에 안장되었다.

소소하지만 깊은 여담으로, 자크는 말년(1977년)에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장 조레스의 삶에 대한 노래이자 반전 가요인 "Jaurès"를 남기기도 하였다. - https://youtu.be/lkRlCLF0w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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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ris Tinker, "George Brassens and Jacques Brel : personal and social narratives in post-war chanson" (2005), 36쪽, #[2] 지금 기준으로 대학행사나 축제등에 초대되는 인지도 있는 인기가수급 반열에 올라선것과 같다.[3] 자크 브렐은 평소에 관심있고 존경하는 아티스트로 고갱을 뽑은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