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 자히르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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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왕국 제4대 국왕
모하마드 자히르 샤
محمد ظاهر شاه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Zahir_Shah_of_Afghanistan_in_1963.jpg

출생
1914년 10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카불
사망
2007년 7월 23일 (향년 92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카불
재위기간
아프가니스탄 국왕
1933년 11월 8일 ~ 1973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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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바라크자이 가문
아버지
모하마드 나디르 샤
어머니
마파르와르 베굼
배우자
후마이라 베굼
자녀
7남 2녀
학력
하비비아 고등학교 (특별반 / 졸업)
인판테리 군사학교 (졸업)
몽펠리에 대학교
종교
이슬람 (수니파)
신체
185cm


1. 개요
2. 생애
2.1. 퇴위
2.2. 귀환과 죽음
3. 여담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6대 국왕이자,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시기부터 존속해온 바라크자이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2. 생애[편집]


자히르 샤는 1914년 10월 15일 모하마드 나디르 샤(1883~1933)의 아들로 카불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때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중고등 교육을 마친 다음 이스티클랄 대학에 진학해서 졸업했다.

1933년에 부왕 모하마드 나디르 샤가 암살되자 19살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의 집권 초기에는 삼촌인 모하마드 하심 칸과 샤 마흐무드 칸이 총리직을 맡았고, 1953년부터 63년까지는 사촌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총리를 맡아 국정을 맡았다. 다우드 칸은 파슈툰 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해 파키스탄과 적대하고[1] 친소 정책을 폈으며 내부적으론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는데[2], 파키스탄과의 분쟁이 경제 위기로 이어지면서 자히르 샤는 다우드 칸을 해임한다. 이후 1964년 자히르 샤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채택하고 왕족이 고위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의 치세 때 아프가니스탄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안정기를 맞았다. 자히르 샤는 2차대전 이후 미소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외국 고문들을 고용하여 국가를 근대화하려 하였고, 분파주의와 정치 투쟁에도 불구하고 1964년에 새 헌법을 채택하여 자유선거와 의회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군사분야 역시 상당히 발전했는데, T-55 전차랑 MiG-17 전투기 같은 소련제 무기를 도입해 국방력을 키워 나갔다.


2.1. 퇴위[편집]


모하마드 자히르 샤의 호시절은 1973년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라지게 된다. 1973년 7월 17일 안질과 요통 치료를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체류하고 있는 틈을 타 쿠데타가 성공하자 자히르 샤는 졸지에 폐위당하여 떠돌이 신세가 되어 수십년간 이태리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한편, 쿠데타에 성공한 다우드 칸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성립했지만, 정작 다우드 칸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마냥 강력한 권력을 쥐기 위해 반이슬람/반공을 내세우며 양쪽에 어그로를 끌던 다우드 칸은 1978년 인민민주당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참고로 이때 자히르 샤는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귀국 의사를 요청했지만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인민민주당 정권 측에게 거부당해 귀국하지 못했다.

아프간 입장에서 진짜 문제는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번엔 무신론에 기겁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이 여파로 다음해부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무자헤딘 간의 아프가니스탄 내전 등 십수년간 나라가 혼란으로 빠져들게 된다. 21세기 들어서도 탈레반북부동맹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망명 중이던 1991년에는 포르투갈 언론지의 기자를 사칭한 의문의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 부상을 입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고령의 노인이라 치료 과정에서 많은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2.2. 귀환과 죽음[편집]


파일:zahir shah.jpg
2002년, 축출된 지 2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귀환한 샤
샤의 아프가니스탄 귀환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게도,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끝판왕 미국이 개입하여 탈레반 정부가 괴멸되고 나서야 이뤄지게 된다. 2002년 겨우 조국의 땅을 밟게 되었고, 이후 2004년에는 국부 칭호도 받았다.[3]

한편, 훗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이 되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던 2002년 모하마드 자히르 샤를 추대하는 입헌군주제 왕정복고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도 너무 많았고(당시 만 87세) 미국도 비협조적인데다 찬성 여론이 과반을 넘지 못했던지라 실행되지 못했다. 본인도 개인적으론 입헌군주제 복고를 원하기는 해도 국민 과반수가 반대하는 마당에 무리하게 원하진 않는다고 했다.[4]

2007년 7월 23일 카불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난 저세상에 가면 알라께 벌을 받을 것이오! 아름답던 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5]


자히르 샤의 장례식에는 여러 정치인들과 대통령이 참석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때 그를 기억하는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쓸쓸한 몰락과 죽음을 슬퍼했으며, 이때 당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권과 대립하던 탈레반 측도 전 국왕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자히르샤 전 국왕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례식장을 겨냥한 게릴라 전 및 테러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일:tomb of shah.jpg
자히르 샤의 무덤은 카불 동쪽 언덕 위에 세워졌다.


3. 여담[편집]



  • 수줍음이 많고 겸손하며 말도 굉장히 부드럽게 하는 등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 아내이자 왕비 후마이라 베굼은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아서 왕비로 있을 때 남편에게 여성 인권을 확립하고 성차별을 근절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 참고로 후마이라 베굼은 남편, 자식, 손주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한 지 1년 뒤인 2002년에 사망했는데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83살로 남편만큼 상당히 장수했다.

  • 여러 민족들로 이뤄진 다민족 사회의 국가에서 민족 갈등과 대립을 억제하고, 자신의 치세 동안 평화를 유지해오다가 폐위/사망한 이후에 나라가 내전으로 사분오열되거나 최악의 분쟁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냉전 시기에 지구 반대편 동부유럽에 존재했던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한다.[6]

  • 민족 간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등 복잡한 다민족 사회의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적으로 다스린 명군이지만 동시기 이웃나라 이란의 마지막 군주인 팔라비 2세에 비해 그의 존재가 많은 역덕후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경우가 가히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팔라비 2세가 통치하던 이란이 자히르샤의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력이 크고 인구도 많은 대국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란 혁명으로 축출되기 이전까지 모하메드 모사데크 전 총리의 석유 국유화 시도와 백색혁명을 통한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 등 많은 주요 사건들을 남긴 팔라비 2세의 이란에 비해 자히르샤 치세의 아프가니스탄은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당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주요 사건들이 전무한 평화의 시기였던 것도 있다.

4. 매체에서[편집]



  • 파일:Mohammed Zahir Shah(Hearts of Iron IV).jpg
    Hearts of Iron IV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시대에 맞게 프로필은 20대 시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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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듀랜드 라인 문서 참조.[2] 빠르게 근대화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절박감이 있었다고 한다.[3] 여담으로 평화유지군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 동안 재직한 채수문 중령은 이 당시, 1973년 왕정폐지 이후 전쟁과 내전, 탈레반의 학살로 파괴된 조국의 모습을 거의 30년만에 귀국하여 본 자히르 샤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현지에서 들었다고 한다.[4] 사족으로 자히르 샤가 사망한 이후 자히르 샤의 아들이나 손자를 앞세운 왕정복고 여론도 있긴 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그러다 2021년에 다시 탈레반이 수도권 일대를 차지하면서 국가가 혼란에 빠지자 자히르 샤의 치세가 다시 재조명되면서 탈레반보단 차라리 왕정복고를 하자는 여론도 조금씩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탈레반이 막장이다보니 캄보디아의 사례처럼 다시 왕정이 들어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5] 그래도 이 때는 그나마 탈레반 세가 줄어있었을 때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6] 단, 티토는 파슈툰, 타지크, 우즈베크 등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민족들을 막론하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사이에서 긍정적 평가가 많은 자히르샤 아프가니스탄 국왕과 달리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었던 동유럽권 국가들 내부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최근에는 구 유고 연방이 참혹한 민족, 종교간의 유혈참극을 겪으며 분열, 해체가 됐던 직접적인 원인으로 밀로셰비치나 투지만, 카라지치 등 유고 연방 말기에 민족주의 노선을 내걸며 민족 및 연방 분열을 선동하며 전쟁과 학살을 저지른 당시 구 유고권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보다 살아 생전 티토의 억압적인 공산당 1인 독재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