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마이닝겐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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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마이닝겐이었다.
1905년 기준으로 면적 2,468 km², 인구 26만 9천가량이었다.
2. 역사[편집]
오늘날 튀링겐 지역에 위치한다.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통의 영지 중 하나로 1680년에 탄생했다. 1826년 에른스트 계통의 영지가 재편성될 때는 힐드부르크하우젠[1] 과 잘펠트[2] 를 얻었다. 베른하르트 2세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드는 바람에 프로이센으로부터 양위를 강요당했다. 이후 북독일 연방을 거쳐 독일 제국에 가입했다.
1918년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서 잠시 작센마이닝엔 자유주가 되었다가 1920년에 튀링겐으로 편입되었다.
3. 왕사(王史)[편집]
- 베른하르트 1세 (1680-1706) -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마이닝엔 궁정 오케스트라(Meininger Hofkapelle)를 창설했다.
- 에른스트 루트비히 1세 (1706-1724)
- 에른스트 루트비히 2세 (1724-1729)
- 카를 프리드리히 (1729-1743)
- 프리드리히 빌헬름 (1743-1746)
- 안톤 울리히 (1746-1763)
- 카를 빌헬름 (1763-1782)
- 게오르크 1세 (1782-1803) - 영국 하노버 왕조의 국왕 윌리엄 4세의 장인이다. 윌리엄 4세의 왕비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가 게오르크 1세의 딸이다.
- 베른하르트 2세 (1803-1866)
- 게오르크 2세 (1866-1914) - 연극 애호가로 세 번째 아내인 여배우 엘렌 프란츠와 함께 마이닝엔 극단(Meiningen Ensemble)을 창설했다.
- 베른하르트 3세 (1914-1918) -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3] 의 장녀 샤를로테 공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수장직은 동생인 에른스트에게 넘어갔다.
3.1. 공위요구자[편집]
- 베른하르트 3세 (1918-1928)
- 에른스트 (1928-1941) : 1859~1941. 게오르크 2세의 차남. 형에게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수장직을 계승했지만 카타리나 옌센(Katharina Jensen)이라는 평민과 귀천상혼하여, 에른스트의 자녀들은 잘펠트 남작(Baron von Saalfeld)이라는 귀족 칭호만 사용할 수 있었다.
- 게오르크 (1941-1946) : 1892~1946. 게오르크 2세의 삼남 프리드리히 요한의 장남. 나치당원이었다. 소련에 끌려가 굴라그에서 사망. 일반 백작가문의 딸과 결혼해 2남 2녀를 뒀지만 장남 안톤-울리히는 프랑스 침공에서 전사한데다, 차남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승계권을 포기하고 카르투시오회의 신부가 됐다. 차녀 레기나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결혼.[4]
- 베른하르트 (1946-1984) : 1901~1984. 게오르크 2세의 삼남 프리드리히 요한의 삼남.[5] 초혼은 평민 딸과 하여 귀천상혼으로 1남 1녀를 두었고, 남작가문의 딸과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 콘라트(1984-) : 1952~. 베른하르트
4세의 후처 소생 아들. 전직 은행원. 어머니가 귀족이라 이복형 프리드리히 에른스트(1935~2004)를 제치고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미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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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스바흐 전투의 신성로마제국군 지휘관이 이 가문 사람이다. 참고로 프랑스 측 지휘관은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으로 희대의 졸장이다.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가는 이 영지조정 과정에서 후사가 끊긴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의 영지 중 알텐부르크를 새롭게 얻어 작센알텐부르크 공가가 된다.[2] 원래 코부르크와 더불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영지였다. 이 영지조정 때 잘펠트를 넘기고 단절된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가 다스리던 고타를 새로 얻는다.[3]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장녀[4] 장녀 마리 엘리자베트는 생후 103일에 요절[5] 프리드리히 요한의 차남은 1차대전 때 전사.[6] 3남(이지만 가문 수장을 이어받은) 프리드리히 요시아스의 딸 베아트리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