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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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윌리엄 4세의 왕비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Adelheid von Sachsen-Meiningen


파일:Adelaide_of_Saxe-Meiningen.jpg

이름
독일어
아델하이트 아말리 루이제 테레제 카롤리네
(Adelheid Amalie Luise Therese Caroline)
영어
애들레이드 아멜리아 루이즈 테레사 캐롤라인
(Adelaide Amelia Louise Theresa Caroline)
출생
1792년 8월 13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마이닝겐 마이닝겐
사망
1849년 12월 2일 (향년 57세)
잉글랜드 미들섹스 벤틀리 수도원
장례식
1849년 12월 13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배우자
윌리엄 4세 (1818년 결혼 / 1837년 사망)
아버지
작센마이닝겐 공작 게오르크 1세
어머니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루이제 엘레오노레
형제
이다, 베른하르트 2세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Signature of Queen Adelaide of the United Kingdom and Hanover in 1837.jpg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유년기
3.2. 결혼
3.3. 왕비
3.4. 말년
4. 여담



1. 개요[편집]


영국의 국왕 윌리엄 4세의 왕비. 빅토리아 여왕의 백모이자, 작센마이닝겐 공국의 공작이었던 베른하르트 2세의 누나이다.


2. 작위[편집]


파일:Coat_of_Arms_of_Adelaide_of_Saxe-Meiningen.svg.png
문장
  •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 전하 Her Serene Highness Princess Adelaide of Saxe-Meiningen (1792년 8월 13일 ~ 1815년 6월 18일)
  •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 전하 Her Highness Princess Adelaide of Saxe-Meiningen (1815년 6월 18일 ~ 1818년 7월 11일)[1]
  • 클래런스와 세인트앤드루스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Clarence and St Andrews (1815년 6월 18일 ~ 1830년 6월 26일)
  •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830년 6월 26일 ~ 1837년 6월 20일)
  • 애들레이드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Adelaide (1837년 6월 20일 ~ 1849년 12월 2일)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1792년에 작센마이닝겐 공작 게오르크 1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180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남동생이 공작위를 물려받으면서 아델하이트는 섭정이 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 당시 작센마이닝겐 공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아델하이트는 열약한 상황 속에서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동시에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델하이트는 여러 언어를 구사했으며 예술 전반에 소양이 있었다.

3.2. 결혼[편집]


1818년에 영국의 클래런스와 세인트앤드루스 공작 윌리엄 왕자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윌리엄 왕자는 씀씀이가 헤프며 정부와 오랫동안 동거를 해 여러 자식을 둔 남자였다. 나이도 적지 않았던 그가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은 직계 왕위 계승자인 샬럿 공주가 요절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영국 의회는 국왕의 남자 형제들에게 빚을 갚아주는 대가로 적법한 결혼을 해 자식을 낳을 것을 종용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곤란한 상황이었던 윌리엄은 정부와 헤어지고 적절한 신붓감인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윌리엄은 52세, 아델하이트는 25세였다. 윌리엄은 맏아들에게 아델하이트에 대해 "가엾고 순진한 어린 처녀가 나의 아내가 된다니 그녀는 불운하구나."라고 말했다.

1818년 6월 20일에 아델하이트는 영국에 도착했다. 1818년 7월 11일, 윌리엄 왕자와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는 큐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윌리엄의 동생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의 결혼식과 합동으로 치러졌다.

결혼 이후 윌리엄은 외도를 그만두고 씀씀이와 술도 줄였으며, 어린 아내인 애들레이드에게도 잘 대해줬다. 애들레이드 또한 다정하고 가정적인 성격에 헌신적인 아내였으며, 남편 윌리엄의 사생아들에게도 어머니처럼 잘 대해주었다. 형식적인 이유로 한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러나 자식 복은 없었는지 여러 차례 아이를 임신했지만, 전부 사산되거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이가 죽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애들레이드는 자신의 아이를 갖진 못했지만 훗날 빅토리아 여왕이 되는 시조카딸 빅토리아 공주를 매우 예뻐했다.

3.3. 왕비[편집]


1830년에 조지 4세가 사망하면서 남편 윌리엄이 윌리엄 4세로 즉위하였다. 왕비가 된 애들레이드는 자애롭고 검소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애들레이드는 공식적으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토리당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휘그당의 공격 대상이 되어 개혁안이 좌절될 때마다 왕비의 뒷공작 때문이라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번은 토리당의 당수인 하우 경과 불륜 사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애들레이드를 아는 이들은 아무도 이 스캔들을 믿지 않았다.

애들레이드와 윌리엄 4세 부부는 아끼는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인 빅토리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의 딸 빅토리아를 맘대로 휘두르려는 켄트 공작부인의 견제로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한번은 윌리엄 4세와 켄트 공작부인이 크게 싸운 이후로 빅토리아는 더욱 궁정에 오지 않게 되었다. 애들레이드는 사랑하는 조카를 자주 못 보게 되자 매우 슬퍼했다.

3.4. 말년[편집]



말년의 애들레이드, 1849년

1837년 6월에 남편 윌리엄 4세가 사망하였다. 왕대비가 된 애들레이드는 조용한 삶을 영위했다. 여왕이 된 빅토리아는 애들레이드를 친어머니처럼 따르며 잘 대해주었다.

1849년 12월 2일에 벤틀리 수도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애들레이드의 유해는 남편이 안장된 성 조지 성당에 안장되었다.

4. 여담[편집]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주도 애들레이드케임브리지셔에 위치한 마을 퀸 애들레이드, 소행성 525번 애들레이드가 모두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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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 말로 하면 이전 작위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1815년에 독일 연방이 출범하면서 작위가 약간 달라지게 되었는데, 전자인 Serene Highness는 유럽 대륙의 제후와 그 가족에 대한 존칭이고 Highness는 독일계 공국의 공작과 그 가족에 대한 존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