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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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빌헬름 1세의 황후
아우구스타 마리 루이제 카타리나
Augusta von Sachsen-Weimar-Eisen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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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우구스타 마리 루이제 카타리나
(Augusta Marie Luise Katharina)
출생
1811년 9월 30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사망
1890년 1월 7일 (향년 78세)
독일 제국 베를린
배우자
빌헬름 1세 (1829년 결혼 / 1888년 사망)
자녀
프리드리히 3세, 루이제
아버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어머니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
형제
카를, 마리, 카를 알렉산더
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2.2. 결혼
2.3. 말년
3. 대인관계
4.1.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파일:독일 황후 아우구스타.jpg
빌헬름 1세의 아내로 프로이센 왕국의 왕비이자, 독일 제국의 초대 황후.

독일 제국의 2대 황제 프리드리히 3세바덴의 대공비 루이제의 어머니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1811년 9월 30일 바이마르에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와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야는 파벨 1세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의 셋째딸이기에 아우구스타는 파벨 1세와 조피 도로테아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지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괴테는 어머니 마리야에 대해 "그녀의 시대에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여성들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타는 궁정 화가인 루이제 세이들러에게 그림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궁정 밴드 마스터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에게 음악 수업을 받는 등, 종합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2.2. 결혼[편집]


1830년 프로이센의 왕자였던 빌헬름 1세[1] 결혼했다. 결혼 당시 아우구스타가 남편인 빌헬름보다 14살이나 어렸다.

원래 빌헬름 1세는 자신의 6촌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첫사랑 엘리자 라자비우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엘리자의 신분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아우구스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정략적 결혼에다 빌헬름이 평생 엘리자와 결혼 못했다고 아쉬워한 것을 숨기지도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부부 사이는 정말 좋지 않았다.[2] 나이도 많은데다 괴팍하고 상꼰대이기까지 한 남편과의 이런 결혼 생활은 아우구스타의 성격도 비틀어놓았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자식들이 태어나고 어느 정도 자란 후 이혼을 원했지만 장남 프리드리히의 완강한 반대로 평생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모습은 빌헬름 1세의 부모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루이제 부부,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엘리자베트 루도비카 부부, 첫째 여동생 샤를로테니콜라이 1세 부부, 영국의 사돈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 부부, 아들 프리드리히 3세빅토리아 부부, 장손 빌헬름 2세아우구스테 빅토리아 부부가 모두 금슬이 좋았던 것과는 대비된다.[3]

그래도 두 사람은 부부로 남았고, 빌헬름 1세가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뒤를 이어[4], 프로이센의 국왕이 되면서 아우구스타도 프로이센의 왕비가 되었다. 1871년에는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면서 아우구스타 역시 독일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파일:역대 독일 황제, 황후와 마지막 황태자.jpg
남편처럼 증손자들의 출생을 연이어 볼 정도로 꽤 장수했다. 장손 빌헬름 2세의 5남인 오스카 폰 프로이센 왕자가 태어나는 것까지 보게 된다. 빌헬름 2세의 남동생이자 둘째 손자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의 장남 발데마르까지 6명의 친증손자를 보았다.


2.3. 말년[편집]


1888년 3월에 남편인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장남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지만 99일 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면서 남편에 이어 아들도 먼저 보내야 했다. 같은 해 6월에 장손인 빌헬름 2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파일:아우구스타 황후 사망 당시 모습.jpg
이후 태황태후로 지내다가 1890년 1월 7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3. 대인관계[편집]


파일:역대 독일 황후들.jpg
역대 독일 황후들. 왼쪽부터 며느리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아우구스타 황후 본인, 손자며느리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며느리와 손자며느리의 성격, 성향을 잘 반영했다.


3.1. 며느리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편집]


외아들 프리드리히 3세의 아내인 며느리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파일:빅토리아와 아우구스타 황후.jpg
사돈이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아우구스타 황후.(1867년 촬영.)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 부부는 과거 영국에 머물 동안 영국 왕실과 교류를 가졌다. 이때 자유주의자적 성향이 강한 아우구스타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의 주선으로 아우구스타의 외아들 프리드리히 왕자와 앨버트 공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가 결혼했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자녀를 낳고 직접 모유수유를 하자 양가 부모는 다 싫어했고 아우구스타도 며느리와 사이가 멀어졌다. 이후 빅토리아가 장남 빌헬름 2세가 출산 당시 역아로 태어나 왼팔에 장애를 안게 되자, 이를 치료한답시고 온갖 학대를 가하자 이를 보다 못한 아우구스타가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데려와 직접 키웠다. 당연히 고부 관계는 더 안좋아졌고 빌헬름 2세도 어머니 빅토리아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으며, 즉위 후에는 대놓고 어머니의 처소를 폐쇄하고 영국 스파이로 몰 정도로 갈등이 극심해졌다.

이로 인해 아우구스타는 틈만 나면 아들 부부를 은근슬쩍 갈궜다고 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타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을 말리거나 중재하기는 커녕 아내의 편만 들어주면서 가정 불화는 계속 이어졌다.

3.2. 손자며느리 아우구스테 빅토리아[편집]


그러나 며느리와는 반대로 빌헬름 2세의 아내인 손자며느리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는 사이가 좋았다.

원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가문이 통치가문이 아니기에 반대했지만 손자 빌헬름 2세가 결혼하겠다고 밀어붙혔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이 결혼으로 프로이센 왕실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며 둘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에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그래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는 보수적이고 남편에게 순종적이어서 시조부모의 마음에 꼭 들었고 결혼 후 아들만 줄줄 낳는 등 전통적인 가치관에 잘 들어맞는 배우자감이라 매우 예뻐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테 빅토리아는 시할머니와 사이가 좋았지만 시어머니인 빅토리아와는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자녀들에게 할머니의 자유주의 사상이 물들까봐 가급적이면 접촉하지 않게 했다. 하지만 정작 남편 빌헬름 2세에게서는 호구 취급을 당했다.


3.3. 손주들[편집]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의 손주들이자, 프리드리히 3세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독일의 친조부모와 가까웠던 연장자 삼남매인 빌헬름/샤를로테/하인리히 왕자,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더 가까웠던 아래의 빅토리아/조피/마르가레테 세 자매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 황후는 손주들 중에서 첫째인 빌헬름 2세, 둘째인 샤를로테, 셋째인 하인리히 왕자만 예뻐했다. 그러나 이후에 태어난 세 공주들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찬밥 취급했다.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3세 부부의 부적절한 양육을 보다못한 아우구스타 황후가 직접 데려다가 키운 반면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부모가 직접 키웠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빌헬름 2세는 대를 이을 왕위 계승 2위의 장손이고 샤를로테는 첫 손녀인데다 하인리히 역시 차남이지만 왕자여서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 세 딸들은 살리카법으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 공주이고 프리드리히 3세 부부를 향한 빌헬름 1세 부부의 반감도 겹쳐서 더 그랬다.

3.4. 오토 폰 비스마르크[편집]


독일 통일의 주역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와는 꽤 사이가 안 좋은 편이였다. 아우구스타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그 반대였으니 당연히 사이가 안좋을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타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발발에 대한 그의 명분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편인 빌헬름 1세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비스마르크도 의회에서 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등 사이가 안 좋았다.


4.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1831년 10월 18일
1888년 6월 15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슬하 4남 4녀[5]
1녀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
(Louise, Grand Duchess of Baden)
1838년 12월 3일
1923년 4월 23일
바덴 대공국 대공 프리드리히 1세
슬하 2남 1녀[6]

5. 여담[편집]


파일:독일 2대 황제 부부와 황태자 부부.jpg
  • 남편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장남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가 됐을 때 나온 삽화인데 의도치 않게 고인 취급을 당했다. 정작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한 지 99일 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해서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독일 제국의 황후였지만 가톨릭에 대해서는 꽤 우호적이였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우구스타를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다.
  • 전쟁을 싫어했던 아우구스타는 1864년에 전국 여성 협회를 설립했는데, 이 협회는 부상을 입고 아픈 군인들을 돌보고 아이디어를 위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함께 만들었다. 오늘날 독일 외과학회를 포함한 여러 병원 재단들도 아우구스타의 주도로 만든 게 꽤 많다고. 아우구스타는 적십자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아우구스타 기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프로이센 궁정의 많은 구성원들에게 비밀 가톨릭 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며느리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 시어머니인 아우구스타가 "로마 가톨릭 종교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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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프로이센 왕국은 빌헬름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재위하고 있었다. 남편 빌헬름은 아우구스타의 외숙모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작은오빠다.[2] 빌헬름이 첫째 여동생인 샤를로테에게 아우구스타에 대해 불평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3] 더군다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제외하고는 이들 부부는 자녀도 많이 낳았다.[4]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빌헬름이 왕위를 물려받았다.[5]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헤센 방백비 마르가레테 등.[6] 바덴 대공국 대공 프리드리히 2세, 스웨덴의 빅토리아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