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 요구자/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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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작위 요구자

1. 등재 기준
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2.1. 그리스
2.1.1. 국가
2.1.1.1. 카이세리 룸
2.1.1.2. 그리스 국왕
2.1.1.3. 스파르타 공작
2.1.2. 지방
2.1.2.1. 네오파트라스 공작
2.1.2.2. 아테네 공작
2.2. 나바라(나바르)[1] 국왕
2.3. 네덜란드
2.3.1. 호르네 백작
2.3.2. 홀란트 국왕
2.4. 독일
2.5. 라트비아
2.5.1. 쿠를란트-젬갈렌 공작
2.5.2. 발트 연합 공작
2.6. 러시아 황제
2.7. 루마니아
2.7.1. 국가
2.7.1.1. 루마니아 공작
2.7.1.2. 루마니아 국왕
2.7.2. 지방
2.7.2.1. 트란실바니아 공작
2.8. 룩셈부르크 공작
2.9. 리투아니아
2.9.1. 리투아니아 대공
2.9.2. 리투아니아 국왕
2.10. 몬테네그로 국왕
2.11. 벨기에
2.11.1. 플란데런 백작
2.11.2. 브라반트 공작
2.11.3. 에노 백작
2.1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왕
2.13. 불가리아
2.13.1. 불가리아 공작
2.13.2. 불가리아 차르
2.14. 세르비아
2.14.1. 국가
2.14.1.1. 세르비아 차르
2.14.1.2. 세르비아 국왕
2.14.1.3. 유고슬라비아 국왕
2.14.2. 지방
2.14.2.1. 보이보디나-바나트 공작
2.15. 스위스
2.15.1. 합스부르크 백작
2.15.2. 뇌샤텔 공작
2.15.3. 루체른 자치주 군주
2.16. 스페인
2.16.1. 국가
2.16.1.1. 스페인 국왕
2.16.1.2. 아스투리아스 공작
2.16.2. 지방
2.16.2.1. 아라곤 국왕
2.16.2.2. 카스티야 국왕
2.16.2.3. 갈리시아 국왕
2.16.2.4. 그라나다 국왕
2.17. 슬로베니아
2.17.1. 일리리아 국왕
2.17.2. 카르니올라 공작
2.18. 아르메니아 국왕
2.19. 아이슬란드 국왕
2.20. 아일랜드
2.20.1. 국가
2.20.1.1. 에린 지고왕
2.20.1.2. 아일랜드 영주
2.20.1.3. 아일랜드 국왕
2.20.2. 지방
2.20.2.1. 렌스터 국왕
2.20.2.2. 먼스터-데스몬드 국왕
2.20.2.3. 먼스터-소몬드 국왕
2.20.2.4. 얼스터 국왕
2.20.2.5. 코노트 국왕
2.21. 안도라 공동대공
2.22. 알바니아
2.22.1. 알바니아 공작
2.22.2. 알바니아 국왕
2.23. 영국
2.24. 오스트리아
2.24.1. 국가
2.24.1.1. 오스트리아 대공
2.24.1.2. 오스트리아 황제
2.24.2. 지방
2.24.2.1. 상오스트리아 대공
2.24.2.2. 하오스트리아 대공
2.24.2.3.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2.24.2.4. 잘츠부르크 공작
2.24.2.5. 케른텐 공작
2.24.2.6. 포어아를베르크 백작
2.25. 우크라이나
2.25.1. 크림 칸
2.25.2. 카자크 대수령
2.25.3.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2.25.4. 부코비나 공작
2.25.5. 우크라이나국 군주
2.26. 이탈리아
2.27. 조지아
2.27.1. 카르틀리-카케티 국왕
2.27.2. 압하지야 공작
2.28. 체코
2.28.1.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2.28.2. 모라비아 변경백
2.28.3. 보헤미아 국왕
2.28.4. 트로파우 공작
2.29. 크로아티아
2.29.1. 달마티아 국왕
2.29.2.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왕
2.29.3.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2.30. 포르투갈
2.30.1. 알가르브 국왕
2.30.2. 포르투갈 국왕
2.31. 폴란드
2.31.1. 국가
2.31.1.1. 폴란드 국왕
2.31.2. 지방
2.31.2.1. 바르샤바 공작
2.31.2.2. 폴란드 차르
2.31.2.3. 크라쿠프 대공
2.31.2.4. 노이데크 영주
2.32. 프랑스
2.33. 핀란드
2.33.1. 핀란드 대공
2.33.2. 핀란드 국왕
2.34. 헝가리 국왕


1. 등재 기준[편집]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유럽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편집]



2.1. 그리스[편집]


그리스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1.1. 국가[편집]



2.1.1.1. 카이세리 룸[편집]

파일:오스만 제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만 황제(파디샤)
술탄
칼리프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
작위 요구자
하룬 오스만오을루[2]
전임자
뒨다르 알리 오스만오을루
계승 실패 원인
1922년 오스만 제국 멸망
'카이세리 룸(Kayser-i Rûm)'은 오스만 제국 황제가 그리스인 등 자국 내 기독교인들 앞에서 쓰던 칭호로, 튀르키예어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메흐메트 2세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조국의 새 수도로 정하면서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칭하여 카이세리 룸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후대 황제들도 카이세리 룸이라는 칭호를 쓰며 오스만 제국 치하의 기독교인들을 다스렸다. 근대에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가 민족에 따라 그리스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여러 나라로 쪼개져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현대 튀르키예처럼 이스탄불이 속한 동트라키아만 남게 되었지만 이 때도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는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 황제는 아시아 이슬람 제국파디샤이자 칼리프로서도, 유럽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에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가 있는데 왜 굳이 본 문서에도 기재했냐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오스만 제국 역대 황제들은 청나라 역대 황제들과 비슷하게 여러 작위를 동군연합 형식으로 가지고 있었다.[3] 이러한 작위들 중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이 유럽 군주로서의 칭호였으므로 여기에 기재한다.

현대 그리스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왕정복고파들 중 정교회를 믿는 대다수는 상술한 것처럼 그리스 왕국 글뤽스보르 왕조 왕위 요구자를 지지하고 소수의 무슬림들(특히 민족 정체성이 튀르키예인인 튀르키예계 그리스인들)은 본 문단에 나온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를 지지한다. 하지만 글뤽스보르 왕조의 재건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에서, 소수의 튀르키예계 무슬림들을 제외한 현대 그리스 국민 대다수에게 침략자의 수괴로 취급받는 오스만 제국 황실의 후손이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 칭호를 쓰며 군주정이 부활한 그리스의 군주로 즉위할 가능성은 사실상 완전한 0%에 가깝다.[4]


2.1.1.2. 그리스 국왕[편집]

파일:그리스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그리스 국왕
작위 요구자
(글뤽스부르크 왕조)
파블로스
(비텔스바흐 왕조)
프란츠 폰 바이에른(프란기스코스)[5]
전임자
콘스탄티노스 2세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후임자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6]
막스 폰 바이에른
계승 실패 원인
1862년 오톤 퇴위(비텔스바흐 왕조)
1973년 군주제 폐지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가문의 콘스탄티노스 2세는 1973년 왕위에서 내려왔다. 2023년 콘스탄티노스 2세가 사망하면서 왕위 요구자의 지위는 그의 장남인 파블로스가 승계했다.

그리스의 민족주의자 중 일부는 그리스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왕가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위를 계승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는 국민뿐 아니라 왕가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스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왕가부터 덴마크 왕가의 분가 출신이라 제국주의 열강들의 낙하산이었기 때문에 이는 극우 민족주의자 사이에서조차 그다지 인기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의 극우 민족주의자들[7]은 글뤽스보르 왕가는 가짜 그리스인이니까 쫒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연고권을 요구하거나 아테네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별칭하자는 견해도 있다.

글뤽스보르 왕조 이전의 비텔스바흐 왕조에서도 여전히 그리스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유일한 국왕이었던 오톤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오톤 사후 그의 동생 루이트폴트에게 명목상의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 왕위가 넘어갔다가 훗날 루이트폴트의 장남 루트비히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국왕 루트비히 3세로 즉위하면서 바이에른 왕국의 왕위 요구자가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왕위 요구자를 겸하게 되었다. 다만 그리스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왕정복고파들은 대부분 글뤽스보르 왕조를 지지하는지라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가 재건될 가능성은 그리스 글뤽스보르 왕조가 재건될 가능성보다도 더욱 희박하다.


2.1.1.3. 스파르타 공작[편집]

그리스 왕세자 문장
관련 칭호
스파르타 공작
그리스 왕세자
작위 요구자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8]
전임자
파블로스
계승 실패 원인
1973년 군주제 폐지
스파르타 공작은 1868년 이래로 그리스 왕국의 왕세자에게 주어진 작위였는데, 1973년에 군주제가 폐지되어 그리스 왕위가 박탈되면서 스파르타 공작위도 함께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 왕위의 차기 요구자는 자동적으로 스파르타 공작위의 현 요구자가 된다.

비텔스바흐 가문 계통의 그리스 왕국 왕위 요구자들은 스파르타 공작위가 창설되기 6년 전에 오톤이 폐위되었으므로, 스파르타 공작위의 요구자가 아니다.


2.1.2. 지방[편집]



2.1.2.1. 네오파트라스 공작[편집]

네오파트라스 공국 국장
관련 칭호
네오파트라스 공작
아라곤 국왕
스페인 국왕
작위 요구자
펠리페 6세
전임자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390년 공국 멸망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는 아래의 아테네 공위와 더불어 네오파트라스 공위도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 국왕의 네오파트라스 공작 칭호는 1379년에 라틴 제국이 고용한 나바라 용병대가 네오파트라스를 점령한 후 아라곤 국왕이 네오파트라스 공작을 겸하게 되면서 이어져온 것이며, 1390년에 네오파트라스 공국이 멸망한 뒤에도 아라곤 국왕의 네오파트라스 공작 칭호는 계속 이어져 통일왕국 스페인의 역대 국왕들도 스페인의 전신들 중 하나인 아라곤으로부터 네오파트라스 공작 칭호를 이어받게 되었다.


2.1.2.2. 아테네 공작[편집]

아테네 공국 국장
관련 칭호
아테네 공작
아라곤 국왕
스페인 국왕
작위 요구자
펠리페 6세
전임자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381년 공가 교체
1458년 공국 멸망
아테네 공국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의 아테네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였다. 아테네 공국은 여러 나라의 속국을 거치면서도 자치권을 유지했으나, 1458년에 오스만 제국에 복속당했을 때는 그러한 자치권마저 박탈당하여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아라곤의 왕들을 거쳐 통일왕국 스페인의 왕들까지 명목상의 아테네 공작 칭호가 이어지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라곤 국왕이 아테네 공위를 차지하게 된 건 1311년에 아테네 공작 겸 브리엔 공작 고티에 5세가 아라곤의 카탈루냐 용병대를 배신하자 그에 대한 복수로 고티에 5세를 죽이고 아테네 공국을 아라곤 왕국과의 동군연합으로 만들면서부터였다. 1381년에 시칠리아 왕국이 아테네 공국을 점령하면서 아라곤 왕실은 아테네 공국을 상실했지만 이후로도 아테네 공작 칭호를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사용했다.


2.2. 나바라(나바르)[9] 국왕[편집]


파일: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국장.svg 파일:나바라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나바라 국왕
양시칠리아 국왕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 요구자
(프랑스 직할령 나바르)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10]
(나바라 왕국)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11]
전임자
알퐁스 2세[A][B]
카를로스 마리아 알폰소 마르셀로
후임자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하이메
계승 실패 원인
1643년 프랑스에 완전 병합(나바라 왕국)
1830년 왕조 교체 및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 완전 폐지
루이필리프가 나바르 국왕 칭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프랑스 국민의 왕' 을 칭호로 사용함에 따라 더 이상 프랑스의 군주가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를 쓰는 일이 없어지면서[12] 나바라(나바르) 국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프랑스 본토의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은 나바라(나바르)의 왕위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스페인 보르본 왕가 쪽 프랑스 왕위 요구자와 칼라브리아 계통 쪽 양시칠리아 왕위 요구자가 나바라(나바르)의 유이한 왕위 요구자다.

스페인 보르본 왕가 쪽 왕위 요구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루이 14세 때부터 시작되고 루이 16세 때 폐지되었다가 부르봉 왕정복고로 부활하여 7월 혁명 때까지 이어진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 칭호를 요구한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 때부터 아버지인 루이 13세 때까지 동군연합 형식으로 각각 따로 존재했던 프랑스 왕위와 나바르 왕위를 통합하여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라는 칭호를 만들었으며 그에 따라 나바라(나바르)를 프랑스의 직할령으로 완전히 병합함으로써 명목상의 동군연합을 폐지했다. 이후 루이 16세가 프랑스 국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가 폐지되었다가 프랑스 제1제국 멸망 후 부르봉 가문의 왕정복고로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칭호가 부활했으나, 7월 혁명으로 즉위한 루이 필리프 1세가 프랑스 국민의 왕 칭호를 부활시키면서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양시칠리아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칼라브리아 계통의 수장은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루이 13세 때까지 명목상 프랑스 왕국의 왕위와 별개로 존재했던 나바라 왕국의 왕위를 요구한다.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가는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분가인데, 스페인 보르본 왕가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분가이므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입장에서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가는 분가의 분가다.


2.3. 네덜란드[편집]


네덜란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3.1. 호르네 백작[편집]


호르네 백국 국장
관련 칭호
호르네 백작
작위 요구자
에드워드 비니아크
계승 실패 원인
1795년 백국 멸망
호르네는 네덜란드 림뷔르흐에 속한 지역 이름이다.


2.3.2. 홀란트 국왕[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7px-Coat_of_Arms_of_the_Kingdom_of_Holland_%281808%29.svg.png
관련 칭호
홀란트 국왕
프랑스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
작위 요구자
샤를 나폴레옹[13]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14]
전임자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후임자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15]
루이 나폴레옹[16]
계승 실패 원인
1810년 왕국 멸망
홀란트 왕국프랑스 제1제국의 위성국이었으며 지금의 네덜란드 땅에 세워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들 중 1명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홀란트 왕국의 왕이 되었는데 나폴레옹의 정책이었던 대륙 봉쇄령을 루이가 거부하자 결국 루이는 퇴위당했으며, 이후 루이의 아들이자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루이가 홀란트 왕국의 2대 왕으로 즉위했으나, 그로부터 불과 10일 만에 홀란트 왕국이 프랑스 제1제국에 합병되어 멸망했다.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의 자식들 중 가장 오래 살았던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아들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가 차례대로 홀란트 왕국의 왕위 요구권을 물려받았으나, 루이 외젠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홀란트 왕실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고[17] 육촌인 빅토르 보나파르트에게 왕위 요구권이 넘어갔다. 현 왕위 요구자인 샤를과 장-크리스토프 또한 빅토르의 후손이다.


2.4. 독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독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5. 라트비아[편집]


라트비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5.1. 쿠를란트-젬갈렌 공작[편집]


파일:쿠를란트-젬갈렌 국장.svg
관련 칭호
쿠를란트-젬갈렌 공작
작위 요구자
(호엔촐레른 왕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비론 왕조)
에른스트 요한 비론
전임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카를 비론
후임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미하엘 비론
계승 실패 원인
1795년 공국 멸망(비론 왕조)
1918년 공국 멸망(호엔촐레른 왕조)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은 오늘날 라트비아의 남부지역인 쿠르제메(Kurzeme)와 젬갈레(Zemgale)에 있었던 나라다. 케틀레르 공가 시절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신국이었는데 케틀레르 공가 단절 후 비론 공가가 들어서면서 러시아 제국의 괴뢰국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1795년에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어 멸망했다. 현재 비론 공가의 초대 공작 에른스트 요한 폰 비론의 후손인 에른스트 요한 비론이 공위 요구자다. 에른스트 요한 비론은 아들이 없고 딸만 2명이기 때문에 그의 동생 미하엘 비론이 차기 공위 요구자다.

1918년에 독일 제국의 괴뢰국으로 세워진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또한 공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해당 국가는 독일 제국의 황제가 쿠를란트-젬갈렌 공작을 겸하는 동군연합이었는데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본토의 군주제가 폐지되고 토착민인 라트비아인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결국 독일군이 독일 본토로 돌아가고 라트비아가 독립하면서 멸망했다.


2.5.2. 발트 연합 공작[편집]


파일:발트 연합 공국 국장.png
관련 칭호
발트 연합 공작[18]
작위 요구자
하인리히 8세
전임자
보이츨라바 페오도라
후임자
하인리히 20세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멸망
발트 연합 공국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지금의 라트비아 땅과 에스토니아 땅을 영토로 하여 세운 괴뢰국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망함에 따라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차례대로 독립하면서 발트 연합 공국은 멸망하였다. 현 공위 요구자는 첫 공작인 아돌프 프리드리히[19]의 외손자 하인리히 8세로, 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의 주동자인 하인리히 13세의 맏형이다.


2.6. 러시아 황제[편집]


파일:러시아 제국 대형 국장.png
관련 칭호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라이닝겐 공작[카를]
작위 요구자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전임자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20]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키릴 폰 라이닝겐[21]
후임자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22]
에미히 폰 라이닝겐[23]
계승 실패 원인
1917년 제국 멸망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마지막 가문의 이름이며 올덴부르크 왕조의 분가이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모스크바, 키예프, 블라디미르, 노브고로드, 전(全)러시아(동슬라브 3국인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황제"로 시작해 각국의 차르, 대공 등 여러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24]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연금되었으며, 1918년 적백내전 중에는 결국 일가가 볼셰비키에 처형된다.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도 이 때 죽었다.

니콜라이 2세 사후 키릴 블라디미로비치가 다음 러시아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는 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사촌으로, 빅토리아 멜리타의 남편이기도 한데 1938년 죽었다. 그의 외아들인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1992년에 죽었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 마리아 블리디미로브나는 왕가 내의 계승 법칙에 따라[25] 후사가 없으므로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겠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니콜라이 1세의 후손인 러시아 공작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등의 반발을 불렀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파벨 1세 이후 여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마리아 대공녀 계열의 황위 요구는 논쟁이 있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이후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동생 콘스탄틴의 후손은 러시아 혁명 시 사망 혹은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이 없었고[26], 니콜라이 1세의 3남 니콜라이의 증손자인 니콜라이 로마노비치가 황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니콜라이 로마노비치는 러시아 황실 종친회에서 선출된 회장으로, 종친회장으로는 대대로 니콜라이 1세의 후손인 남성 황족들이 선출되었다. 니콜라이는 마리아의 아버지 블라디미르가 종친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블라디미르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는 2014년에 죽었고, 동생인 공작 드미트리 로마노프가 뒤를 이었으나 2년 뒤인 2016년 죽었다. 드미트리의 뒤를 이은 것은 1923년생 러시아계 미국인 공작 앤드류 로마노프다. 앤드류는 니콜라이 1세의 4남인 러시아 대공 미하일의 증손자로 미국 민주당 의원 앤드류 로마노프와는 다른 인물이다.

앤드류 로마노프는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전부 남계를 두지 못하였다. 앤드류 로마노프 계열 이후에는 그의 5촌 조카인 1985년생 로스티슬라프에게 후계가 이어질 전망이다.

마리야 여대공은 프로이센의 왕자 카를 프란츠와 혼인해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를 낳았는데, 게오르기가 왕위를 요구하게 되면 호엔촐레른-로마노프 가문으로 이름이 바뀐다. 여담으로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는 로이스-그라이츠 공작 하인리히 22세의 후손이다.

라이닝겐 공국 공위 요구자였다가 귀천상혼으로 동생 안드레아스에게 라이닝겐 공국 공위 요구자 자리를 넘겨준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27] 또한 러시아 황제위를 요구하고 있다. 이쪽은 레이닌겐-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니콜라이 3세를 자칭한다. 이 사람은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의 큰 누나인 마리아 키릴로브나가 라이닝겐 공녀로 시집가면서 이어진 라이닝겐 공작 계열에서 러시아 황위를 요구하고 있다.


2.7. 루마니아[편집]


루마니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7.1. 국가[편집]



2.7.1.1. 루마니아 공작[편집]

파일:1280px-Principality_of_Romania_-_1872_CoA.svg.png
관련 칭호
루마니아 공작
몰다비아 공작
왈라키아 공작

작위 요구자
디미트리에 칼리마치
계승 실패 원인
1866년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강제 퇴위
루마니아 연합공국의 공작이었던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농노들을 해방시켰으나 이로 인해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결국 1866년에 퇴위당하고 독일 제국하이델베르크로 망명했다. 이후 카롤 1세가 루마니아의 새로운 공작이 되었으며 1881년에는 루마니아를 왕국으로 격상시켜 루마니아의 국왕이 되었다.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자녀는 사생아인 두 아들 밖에 없었는데 장남인 알렉산드루 알 이오안 쿠자는 카롤 1세 치세의 루마니아 호엔촐레른 왕조에 맞서 루마니아 공작위를 요구했지만 결혼한지 1년 만에 아이를 얻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으며 차남인 디미트리에 쿠자는 아예 미혼인 상태로 요절하여 결국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직계혈통은 단절되었다. 현재 루마니아의 공위 요구자는 쿠자 가문의 여계후손인 디미트리에 칼리마치이며 그는 마리아 쿠자의 후손이다.


2.7.1.2. 루마니아 국왕[편집]

파일:루마니아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루마니아 국왕
작위 요구자
(로므니에 가문)
마르가레타 왕세녀
(루마니아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 가문)
파울 필리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본가)
카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전임자
미하이 1세
후임자
엘레나 아 로므니에이
카롤 페르디난드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
알렉산더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성립
1989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붕괴, 루마니아 제1공화국 수립
1947년 소련에 의해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당시 국왕이었던 미하이 1세(1921~2017)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퇴위를 하게 되었고, 이후 망명을 간 사이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 이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정신나간 악마가 등장하면서 루마니아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차우셰스쿠총살형을 당한 후 귀국했는데,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자 미하이 일가를 반기는 사람들의 수가 무려 10만 명이 넘었으며 당시 대통령 이온 일리에스쿠는 정권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고 다시 입국을 금지시켜 버렸다(...). 이후 1997년 에밀 콘스탄티네스쿠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하이 1세는 시민권을 회복하고 루마니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원래는 남성의 상속권만을 인정하는 살리카 법을 적용하였으나, 미하이 1세와 루마니아 의회가 왕위 계승의 법칙을 변경하여 여성 상속권도 인정하게 되었다.[28] '루마니아 왕실 관리인(Custodele Coroanei Române)'이라는 어정쩡한 칭호를 쓰고 있다. 단순히 왕위 요구자가 아닌 것이, 루마니아 정부 사이트 뉴스에서도 현 당주인 마르가레타 왕세녀에게 폐하(Majestatea Sa Margareta)라는 경칭을 사용하고 있다.루마니아어 영어

2017년 12월 5일, 미하이 1세96세로 타계하면서, 첫째 딸이자 왕세녀였던[29] 마르가레타 왕세녀(1949~)가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단, 마르가레타 왕세녀 부부는 자녀가 없어[30] 후임자는 미하이 1세의 둘째 딸이자 마르가레타 왕세녀의 큰 여동생인 엘레나 공주(1950~)이며, 이후로는 엘레나의 큰아들(이자 마르가레타 왕세녀의 장조카) 니콜라에(1985~)가 왕가를 잇게 되어야 하지만 니콜라에는 2015년에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유로 왕위계승권에서 배제되고 왕족 지위도 박탈당했다. 고로 다음 계승순위는 엘레나 공주의 딸인 엘리자베타 카리나(1989~)에게로 돌아간다지만 오빠와 달리 루마니아에 관심이 있는지는 의문.

미하이 1세 사후 루마니아 왕실의 또 다른 인물인 파울 필리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31]도 왕위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본가인 독일 본토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에서도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울 필리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은 일단 돈세탁, 직권남용 공모 등의 혐의로 루마니아 당국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고 국외 도피 중인 범죄자인지라 루마니아에서 왕으로 인정해줄 리가 없다.


2.7.2. 지방[편집]



2.7.2.1. 트란실바니아 공작[편집]

파일:트란실바니아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트란실바니아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해체
1920년 루마니아에 합병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작이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한 뒤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트란실바니아 공작 칭호를 쓰면서 트란실바니아 공작 계보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트란실바니아 공작 계보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이후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 왕국에 합병되었다.[32]


2.8. 룩셈부르크 공작[편집]


파일:룩셈부르크 가문 문장.svg
관련 칭호
룩셈부르크 공작
스페인 국왕
작위 요구자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3]
후임자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룩셈부르크 공작을 겸했으므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왕위 요구자인 도미닉은 룩셈부르크 공국의 공위도 요구할 수 있다.


2.9. 리투아니아[편집]


리투아니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9.1. 리투아니아 대공[편집]


파일:Coat_of_Arms_of_the_Polish-Lithuanian_Commonwealth.svg
관련 칭호
작센 국왕
바르샤바 공작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작위 요구자
(작센-게사페 가문)
알렉산더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다른 친족)
뤼디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미하엘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전임자
마리아 에마누엘
후임자
게오르크 필리프
다니엘
(임시)
레오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34]
(장래)
안드레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계승 실패 원인
1795년 대공국 멸망
폴란드 왕국과의 동군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되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결국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왕국과 함께 멸망했다. 현 대공위 요구자들은 작센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2.9.2. 리투아니아 국왕[편집]


파일:리투아니아 국기.svg
관련 칭호
리투아니아 국왕
우라흐 공작
작위 요구자
빌헬름 알베르트 폰 우라흐
전임자
카를 안젤름 폰 우라흐[35]
후임자
카를 필리프 폰 우라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왕국 멸망
리투아니아 왕국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가 독일 제국의 귀족 빌헬름 폰 우라흐[36]를 국왕 민다우가스 2세로 추대하면서 세워졌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의회에서는 국왕의 선출 과정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고 군주제에 반대한 몇몇 의원들이 사퇴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하자 결국 리투아니아 의회는 국왕 추대 철회를 결정하였으며 그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현대에는 민다우가스 2세의 후손인 빌헬름 알베르트 폰 우라흐가 리투아니아 대공위 요구자인 알렉산더와 뤼디거에게 맞서 명목상의 리투아니아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2.10. 몬테네그로 국왕[편집]


파일:몬테네그로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몬테네그로 국왕
작위 요구자
니콜라 페트로비치-네고시
전임자
미차엘 페트로비치-네고시
후임자
보리스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합병되어 왕호 폐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나라를 합치며 왕은 세르비아의 페타르 1세가 되었다. 몬테네그로 왕국의 마지막 왕[37] 니콜라 1세와 그 후손은 몬테네그로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장남인 왕세자 다닐로 알렉산다르(1872~1939)는 1921년에 아버지 니콜라 1세의 사망 이후 약 일주일간 왕위요구자의 지위를 이어받았으나 스스로 그 지위를 포기하고, 그 지위는 바로 조카인 미차엘(1908~1986)[38]에게 넘어갔다.[39] 그리고 미차엘 사후 계승권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 니콜라(2세)(1944~)는 세르비아에서 몬테네그로를 독립시키는 국민투표에 앞장선 인물이다.

참고로 왕정복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쪽은 이 항목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실제로 요구하던 왕위에 즉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케이스다. 이미 몬테네그로 정부와 국민들은 페트로비치-네고시 가를 자국의 왕가로 대우하고 있고, 실질적인 수도인 체티녜에 새 왕궁을 건설하였으며, 몬테네그로 대통령과 함께 외국의 귀빈을 맞는 업무까지 하고 있어서 왕정복고가 '사실상' 성공한 상태다. 문제는 이를 헌법에다 못을 박으려고 시도는 하고 있으나, 가난한 나라 살림 꾸리느라고 자꾸만 이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현실은 시궁창[40][41]

게다가 이 나라 왕실은 살리카법에 따라 남계 계승만을 인정하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왕위 계승할 사람이 없어서 왕가가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 공화국 의회가 2011년 통과시킨 '페트로비치-녜고시 왕조의 후손들에 대한 지위법' 5조를 보면 '왕가 수장의 지위는 남계 남자로 잇는다'고 했는데, 니콜라(2세)의 외아들 보리스(1980~)는 아직 두 딸밖에 없다. 니콜라(2세) 왕자도 외아들이고 증조할아버지 니콜라 1세 기준으로 다른 남계 후손도 없다.[42] 그래서 기껏 왕정복고를 시켜줬더니 왕가가 단절돼서 도로 공화정으로 되돌아가야 되는 엿같은 상황이 나올 수도 있어서, 정치권에서 왕실의 부활에 대해 망설이는 것도 있다. 다만, 이 문제 때문에 살리카법을 폐지한 루마니아의 예도 있으니 향후에 이 법을 손보면 딱히 상관은 없을 것이다.[43]


2.11. 벨기에[편집]


벨기에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11.1. 플란데런 백작[편집]


파일:플란데런 백국 문장.svg
관련 칭호
플란데런 백작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스페인 국왕
작위 요구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706년 백작위 포기(보르본 왕조)
1794년 백국 멸망(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플란데런 백국부르고뉴 공국에 병합된 이래로 부르고뉴 공작이 대대로 플란데런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현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보르본 왕가에서 대대로 플란데런 백작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2.11.2. 브라반트 공작[편집]


파일:브라반트 공국 문장.svg
관련 칭호
브라반트 공작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스페인 국왕
작위 요구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714년 공위 포기(보르본 왕조)
1795년 공국 멸망(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브라반트 공국부르고뉴 공국에 병합된 이래로 부르고뉴 공작이 대대로 부르고뉴 공작이 브라반트 공작을 겸하게 되었다. 현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보르본 왕가에서 대대로 브라반트 공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2.11.3. 에노 백작[편집]


파일:에노 백작 문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크라쿠프 대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95년 백국 멸망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에노 백국은 1795년에 프랑스 제1공화국에 합병되어 멸망하였다. 에노 백국 멸망 직전까지 에노 백국의 영토였던 지역 대부분은 현재 벨기에령이 된 상태이고, 프랑스령으로 넘어간 에노 백국의 영토(에노-프랑세즈)는 현재는 오드프랑스[44] 레지옹의 행정구역인 노르 주로 존재하고 있다.


2.1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왕[편집]


파일:397px-Coat_of_arms_of_Bosnia_and_Herzegovina_(1889–1918).svg.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왕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45]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은 1878년에 베를린 회의에 따라 지금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땅 중 일부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되면서 성립된 나라다. 명목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으로 통치했던 해당 국가는 1908년에 지금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미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 되면서 영토가 확장되었으나, 이로 인해 세르비아가 반발하면서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지금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땅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13. 불가리아[편집]


불가리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13.1. 불가리아 공작[편집]


불가리아 공국 국장
관련 칭호
불가리아 공작
작위 요구자
아젠 폰 바텐베르크
계승 실패 원인
1886년 퇴위
1887년 왕조 교체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개편
불가리아 공국은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이 자국 치하에 있던 불가리아인들의 자치를 허용함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으로 세워진 국가다. 바텐베르크 가문의 알렉산더가 초대 공작이었지만 1886년, 러시아의 압력으로 알렉산더가 퇴위한 뒤 이듬해인 1887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으로 공가가 교체되었으며,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인 페르디난트 1세가 1908년에 스스로를 차르로 승격시킴에 따라 불가리아 공국은 불가리아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2.13.2. 불가리아 차르[편집]


파일:512px-Coat_of_arms_of_Bulgaria_(1927-1946).svg.png
관련 칭호
불가리아 차르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공작
작위 요구자
시메온 2세[46]
전임자
보리스 3세
후임자
보리스 카르다모프 삭스코부르고츠키
계승 실패 원인
1946년 왕국(차르국) 멸망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는 1937년생으로, 1943년 즉위 당시 만 6세의 나이였던 시메온 2세였다. 아버지 보리스 3세가 급사하고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3년 후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왕국이 멸망하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성립된다. 불가리아 차르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역시 망명중인 처지였던 전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만나기도 한다. 1990년 인민 공화국은 붕괴하고 여론이 전 왕가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시메온은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돌아왔으며, 2001년 선거에서 승리해 불가리아 총리가 된다.

본래 시메온 2세의 후임자는 장남인 카르담 시메오노프 삭스코부르고츠키였으나 2008년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2015년 4월 7일에 끝내 아버지인 시메온 2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현 후임자는 시메온 2세의 장손이자 카르담의 장남인 보리스 카르다모프 삭스코부르고츠키다.


2.14. 세르비아[편집]


세르비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14.1. 국가[편집]



2.14.1.1. 세르비아 차르[편집]

세르비아 제국 국장
관련 칭호
세르비아 차르
작위 요구자
안토니예 조우파노시
계승 실패 원인
1371년 세르비아 제국 해체
스테판 우로시 5세가 1371년에 35세에 후계자 없이 서거하면서 세르비아 제국은 해체되었다. 현재 안토니예 조우파노시가 위의 세르비아 왕위 요구자들에게 맞서 명목상의 세르비아 차르위를 요구하고 있다.


2.14.1.2. 세르비아 국왕[편집]

파일:세르비아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세르비아 국왕
유고슬라비아 국왕[알렉산다르]
몬테네그로 국왕[니콜라]
작위 요구자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알렉산다르 왕세자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오브레노비치 왕조)
프레드라그 야코블리에비치
(오브레노비치 왕조)
니콜라 페트로비치-네고시
전임자
페타르 1세
게오르게 오브레노비치
미차엘 페트로비치-네고시
후임자
필리프

보리스
계승 실패 원인
1903년 왕조 교체(오브레노비치 왕조)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합병되며 왕호 폐지
1941년 왕국 멸망
1945년 망명 정부 해체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2006년 몬테네그로 분리
오브레노비치 왕조에서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로 넘어온 상황에서, 밀란 1세의 사생아 밀란 게오르게 오브레노비치가 1925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 요구자였다. 게오르게가 물려받은 재산에 의존해 어두운 인생을 살다 젊은 나이에 죽은 후 오브레노비치 가문에서는 한동안 세르비아 왕위 요구자가 더 나오지 않고 있었으나, 현재는 프레드라그 야코블리에비치[47]가 새롭게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몬테네그로 왕국 왕위 요구자인 니콜라도 세르비아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왕위를 요구하고 있는데,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의 내재종여동생이 니콜라의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에서는 1918년부터 페타르 1세가 세르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합치면서 세르비아 왕 대신 유고슬라비아 왕 칭호를 사용한다. 구 세르비아 왕가는 유고슬라비아 왕호를 사용하다 1941년 나치 독일에 왕국이 망하자 영국으로 망명한다. 페타르 2세는 유고슬라비아 왕위를 요구했는데, 페타르 2세의 독자인 왕세자 알렉산다르의 대에서 왕호에 문제가 생긴다.[48]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연합"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사라졌다. 거기다 2006년에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일부인 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유고슬라비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석이었던 "세르비아 왕"을 2003년부터 새로이 요구하게 되었다. 알렉산다르 왕세자 본인은 왕정복고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자신이 "세르비아 왕세자"라면서 왕실이 회복될 때까지 왕세자 칭호를 고수한다.

2022년 4월 27일 알렉산다르 왕세자의 장남 페타르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세르비아 국민의 64%가 왕정 복고에 찬성한다는 점에서 정말 왕이 될 수 있을지도..


2.14.1.3. 유고슬라비아 국왕[편집]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장.png
관련 칭호
세르비아 국왕
유고슬라비아 국왕
작위 요구자
알렉산다르 왕세자(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전임자
페타르 2세
후임자
필리프
계승 실패 원인
1941년 왕국 멸망
1945년 망명 정부 해체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2006년 몬테네그로 분리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2003년부터 세르비아 왕위를 새롭게 요구하는 것과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왕국 왕위 요구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은 상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에도 지금의 세르비아 지역이 세르보크로아트어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 기재한다.


2.14.2. 지방[편집]



2.14.2.1. 보이보디나-바나트 공작[편집]

파일:보이보디나 자치주 문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이보디나-바나트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49]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해체
1920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
보이보디나-바나트 공국은 오늘날 세르비아 북부 보이보디나 자치주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를 군주로 섬기는 조건으로 독립하여 세워진 보이보디나 공국이 이후 바나트와 합병되면서 성립한 나라다. 한동안 자치권을 누렸던 보이보디나-바나트 공국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하면서 헝가리인들에게 자치권을 빼앗기고 헝가리화를 강요당하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가 결국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협상국에 붙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진지 2년 후인 1920년에 보이보디나가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되면서 보이보디나-바나트 공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에도 보이보디나는 계속 세르비아령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2.15. 스위스[편집]


스위스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15.1. 합스부르크 백작[편집]


파일:COA_Habsburg_early_crest.svg.png
관련 칭호
합스부르크 백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펠리페 6세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315년 영지 상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 라트보트는 지금의 스위스 아르가우 합스부르크를 기반으로 삼아 합스부르크 성을 쌓고 초대 합스부르크 백작이 되었다. 그러다가 1315년에 스위스가 독립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영지인 합스부르크를 상실하고 오스트리아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다. 현재 명목상의 합스부르크 백작 칭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계 후손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과 스페인의 보르본 왕가에서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2.15.2. 뇌샤텔 공작[편집]


파일:522px-Wappen_Neuenburg.svg.png
관련 칭호
프로이센 국왕
뇌샤텔 공작
작위 요구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전임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후임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계승 실패 원인
1857년 공국 멸망
뇌샤텔 주는 스위스의 다른 주와 달리 영주가 다스리는 공국이었다. 본래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방계가 뇌샤텔 공작을 배출하였으나, 해당 공가가 단절되자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뇌샤텔 공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1848년에 일어난 혁명의 결과로 1857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뇌샤텔 공위에서 물러남에 따라 뇌샤텔 주는 스위스의 다른 주들처럼 공화제가 되었다.


2.15.3. 루체른 자치주 군주[편집]


파일:Wappen Luzern.png
관련 칭호
독일 황제(카이저)
프로이센 국왕
루체른 자치주 군주
작위 요구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전임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후임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군주제 폐지
스위스의 루체른 주는 과거에 프로이센 왕국과의 동군연합 형식인 입헌군주제 자치주였다. 그러다가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프로이센 왕국 등 독일 제국을 구성하던 여러 제후국들도 함께 멸망하면서 루체른 주 또한 입헌군주제가 폐지되었다.


2.16. 스페인[편집]


스페인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16.1. 국가[편집]



2.16.1.1. 스페인 국왕[편집]

파일:스페인 국왕 휘장.svg 파일:758px-Greater_Arms_of_Charles_I_of_Spain,_Charles_V_as_Holy_Roman_Emperor.svg.png
관련 칭호
스페인 국왕
에트루리아 국왕
파르마 피아첸차 공작

양시칠리아 국왕
칼라브리아 공작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카를로스주의)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50]
(자유주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전임자
하비에르[51]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52]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53]
카를로스 마리아 알폰소 마르셀로
알퐁스 2세[A][B]
후임자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잔도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하이메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는 자기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830년 살리카법을 폐지했다. 왕위 계승 1순위였던 페르난도 7세의 동생 카를로스 대공은 이에 반발했고,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타나 그 후손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현재 카를로스 지지 세력 중에는 보르본-파르마 가문의 수장 관련 가문이 있다.[54] 지지 세력 대다수는 무시하는 압스부르고-보르본 가문[55]에서도 계승을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의 후손이다. 그 외에도 보르본-도스 시칠리아스 가문의 양시칠리아 왕위 요구자도 분가로서 스페인 왕위 요구에 참여한다.[56][57] 스페인 자유주의 세력은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를 지지한다. 문제는 스페인에서 공화정 전환 요구가 날로 높아지고 있어서 현 국왕마저 이 항목에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2.16.1.2. 아스투리아스 공작[편집]

파일:아스투리아스 기.svg
관련 칭호
아스투리아스 공작
스페인 왕세자
지로나 공작
세르베라 백작
몽블랑 공작
발라게르 공작
비아나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로스주의)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압스부르고 왕조)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카를로스주의)
하이메
(자유주의)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전임자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58]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
스페인아스투리아스 자치 지방은 아스투리아스 공이 명목상의 비주권 군주로 다스리는 스페인 왕국의 봉신국으로, 아스투리아스 공위는 1311년 이래로 스페인의 왕세자들에게 주어진 작위다. 따라서 스페인 왕위 요구자의 후임자들은 전원이 아스투리아스 공위 요구자가 된다.

카를로스파의 분파인 카를로스 정통주의[59] 계열은 스페인 왕위 요구자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대외적으로 공표된 바가 없어서, 이쪽 계열의 아스투리아스 공위 요구자를 알 수 없으므로 이 문단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2.16.2. 지방[편집]



2.16.2.1. 아라곤 국왕[편집]

파일:아라곤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스페인 국왕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작위 요구자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후임자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716년 왕국 멸망


2.16.2.2. 카스티야 국왕[편집]

파일:카스티야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스페인 국왕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작위 요구자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후임자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715년 왕국 멸망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이 합쳐져 통일 스페인 왕국이 되었는데 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요구자가 따로 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두 국가 왕위 요구자의 성씨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명목상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군주만 같은 별개의 나라였으며 그에 따라 카스티야 국왕 칭호와 아라곤 국왕 칭호가 스페인 국왕 칭호와 별개로 존재했던 압스부르고 왕조의 왕위 요구자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으로 잉글랜드 국왕 칭호와 스코틀랜드 국왕 칭호가 폐지된 걸 인정하지 않는 자코바이트파와 비슷한 케이스다.


2.16.2.3. 갈리시아 국왕[편집]

파일:Coat_of_Arms_of_Galicia_(Spain),_16th_Century.svg.png
관련 칭호
스페인 국왕
갈리시아 국왕
작위 요구자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하비에르[60]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61]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2]
후임자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카를로스주의)
1833년 왕국 해체
갈리시아는 과거에 갈리시아 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국가였던 적이 있다. 알폰수 3세 대왕의 세 아들에게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레온을 분할 상속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왕국이 되기도 했으나 오르도뉴 2세부터 알폰수 4세까지의 20여년에 그쳤으며, 이후 갈리시아를 기반으로 베르무도 2세에 의해서 잠시 독립국이 되기도 했지만 베르무도 2세 자신이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레온을 통합하자 다시 레온 왕국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레온 왕국은 페르난도 1세 이후 카스티야와 사실상 합쳐졌으며, 페르난도 1세의 상속 과정에서 포르투갈과 함께 가르시아 2세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페르난도 1세가 죽자 포르투갈 공작 누누 멘데스가 갈리시아의 왕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국력을 소진한 갈리시아는 가르시아 2세의 큰형인 카스티야 왕 산초 2세에게 공격을 받아 카스티야에 흡수당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산초 2세가 암살당하고 원래 레온의 왕이었던 둘째 알폰소 6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후에 포르투갈의 독립 여론은 점점 강해져 갔고 결국 알폰소 6세 사후 포르투갈은 갈리시아에서 떨어져 나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갈리시아는 카스티야 왕국의 일부로 확정되었고, 갈리시아 왕 작위는 카스티야 왕에게 대대로 계승되는 명예직에 가까운 왕위가 되었다가 183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된 1700년과 페르난도 7세가 자기 딸 이사벨 2세를 후계자로 정한 1830년은 갈리시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1833년보다 앞선 시기이므로, 압스부르고 왕조 왕위 요구자와 카를로스주의자들은 갈리시아 왕국의 해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2.16.2.4. 그라나다 국왕[편집]

그라나다 왕국 국장
관련 칭호
스페인 국왕
그라나다 국왕
작위 요구자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하비에르[63]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64]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5]
후임자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카를로스주의)
1833년 왕국 해체
그라나다 왕국은 1492년에 그라나다 아미르국레콩키스타로 멸망하면서 그라나다 아미르국의 뒤를 이어 그라나다에 세워진 나라로, 스페인 왕국과의 동군연합이었다.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된 1700년과 페르난도 7세가 자기 딸 이사벨 2세를 후계자로 정한 1830년은 그라나다 왕국이 하비에르 데 부르고스의 행정 구역 분할에 의해 여러 주로 나뉘어져 해체된 1833년보다 앞선 시기이므로, 압스부르고 왕조 왕위 요구자와 카를로스주의자들은 그라나다 왕국의 해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2.17. 슬로베니아[편집]



2.17.1. 일리리아 국왕[편집]


파일:일리리아 왕국 국장.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일리리아 국왕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6]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849년 왕국 해체
일리리아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이 대불동맹을 통해 프랑스 제1제국을 무너뜨린 후 프랑스로부터 일리리아를 빼앗아 세운 나라였다. 일리리아 왕국 영토가 1849년에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로 재편되면서 일리리아 왕국은 폐지되었으나, 명목상의 일리리아 국왕 칭호만큼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계속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2.17.2. 카르니올라 공작[편집]


파일:카르니올라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카르니올라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7]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카르니올라 공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는 나라였으며 지금의 슬로베니아 중부에 있었던 슬로베니아의 전신격 국가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카르니올라 공국이 멸망하고 지금의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2.18. 아르메니아 국왕[편집]


아르메니아 바그라투니 왕조 문장
관련 칭호
아르메니아 국왕
작위 요구자
(콘스탄티네 2세의 후손)
다비드 바그라티오니
(기오르기 11세의 후손)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
전임자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68]
페트레 그루진스키[69]
후임자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70]
계승 실패 원인
1045년 왕국 멸망
아르메니아 왕국 바그라투니 왕조는 1045년에 셀주크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바그라투니 왕조 직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현재 방계인 카르틀리-카케티 왕국 왕위 요구자 가문이 이론상의 아르메니아 왕국 바그라투니 왕조 왕위 요구권을 가지고 있다.


2.19. 아이슬란드 국왕[편집]


파일:아이슬란드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덴마크 국왕
아이슬란드 국왕
작위 요구자
마르그레테 2세
전임자
프레데리크 9세
후임자
프레데리크 안드레 헨리크 크리스티안
계승 실패 원인
1944년 왕정 폐지
아이슬란드가 덴마크와의 동군연합을 청산함으로써 덴마크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후 두 나라가 수교한 현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슬란드 왕국의 왕위 요구자가 존재할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덴마크 왕실이 공식적으로 아이슬란드 국왕 칭호 폐지를 선언한 것은 아니라서 여기에 등재되었다.


2.20. 아일랜드[편집]


아일랜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20.1. 국가[편집]



2.20.1.1. 에린 지고왕[편집]

파일:ireland_celtic_symbol_eri.png
관련 칭호
에린[71] 지고왕(아르드리)
작위 요구자
코너 마일즈 존 오브라이언
계승 실패 원인
1198년 왕국 멸망
지고왕(아르드리)은 중세 에린(아일랜드) 전역을 지배했던 군주로, 본 문서에 있는 중세 아일랜드 부족 국가 군주들보다 상위에 있었다. 먼스터-소몬드 왕국 왕위 요구자인 코너 마일즈 존 오브라이언은 에린 지고왕 칭호도 쓰고 있다.


2.20.1.2. 아일랜드 영주[편집]

아일랜드 영지 문장
관련 칭호
아일랜드 영주
작위 요구자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전임자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계승 실패 원인
1485년 영주 가문 교체
1542년 아일랜드 왕국으로 개편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아일랜드는 아직 아일랜드 왕국으로 개편되기 전인 아일랜드 영지였다. 따라서 요크 왕조의 역대 왕위 요구자들은 아일랜드 영주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2.20.1.3. 아일랜드 국왕[편집]

파일:452px-Arms_of_Ireland_(historical).svg.png
관련 칭호
아일랜드 국왕
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바이에른 국왕
작위 요구자
프란츠 폰 바이에른[72]
전임자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후임자
막스 폰 바이에른
계승 실패 원인
1688년 제임스 2세 폐위
1714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801년 영국에 합병
아일랜드는 헨리 8세의 주도로 잉글랜드에 정복되어 아일랜드 켈트족의 여러 소왕국들이 모조리 멸망한 후 1542년부터 아일랜드 왕국이라는 이름의 동군연합으로 존재하다가 1801년에 동군연합이 폐지되고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다만 자코바이트파는 이를 쿠데타로 즉위한 정통성 없는 왕이 제멋대로 한 거라고 주장하므로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는 아일랜드 왕국의 왕위 요구자로 간주된다.


2.20.2. 지방[편집]



2.20.2.1. 렌스터 국왕[편집]

관련 칭호
렌스터 국왕
작위 요구자
윌리엄 버틀러 카바나
계승 실패 원인
1198년 왕국 멸망


2.20.2.2. 먼스터-데스몬드 국왕[편집]

관련 칭호
먼스터-데스몬드 국왕
왕위 요구자
리엄 트랜트 맥카시 모어
계승 실패 원인
1198년 왕국 멸망


2.20.2.3. 먼스터-소몬드 국왕[편집]

관련 칭호
먼스터-소몬드 국왕
작위 요구자
코너 마일즈 존 오브라이언
계승 실패 원인
1198년 왕국 멸망


2.20.2.4. 얼스터 국왕[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Flag_of_Ulster.svg.png
관련 칭호
얼스터 국왕
작위 요구자
휴고 리샤르디 오닐
계승 실패 원인
1198년 왕국 멸망


2.20.2.5. 코노트 국왕[편집]

관련 칭호
코노트 국왕
작위 요구자
데스몬드 로더릭 오코너
계승 실패 원인
1198년 왕국 멸망
아일랜드의 왕위 요구자 문단에 있는 중세 아일랜드 부족 국가들의 왕위 요구자들은 대대로 이 작위를 상속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7세기까지 하이랜드 지역 한정으로 부족 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스코틀랜드[73]에도 '~의 부족장'(Chieftain of ~)이라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꽤 있다.


2.21. 안도라 공동대공[편집]


파일:안도라 국장.svg
관련 칭호
안도라 공동대공
프랑스 국왕[장][루이스]
나바르 국왕[루이스]
프랑스 황제[샤를][장-크리스토프]
베스트팔렌 국왕[샤를][장-크리스토프]
작위 요구자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장 도를레앙
(부르봉 왕조 본가)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세고비아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74]
(보나파르트 왕조)
샤를 나폴레옹[75]
(보나파르트 왕조)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76]
전임자
앙리 7세
알퐁스 2세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후임자
가스통 도를레앙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77]
제롬 나폴레옹[78][79]
계승 실패 원인
1830년 왕조 교체(부르봉 왕조 본가)
1848년 프랑스 왕국 멸망(부르봉-오를레앙 왕조)
1870년 프랑스 제2제국 멸망(보나파르트 왕조)
부르봉 가문의 나바라 국왕 헨리케 3세가 프랑스 국왕을 겸하여 앙리 4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까지 통치하게 되면서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프랑스와 나바라의 국왕이 안도라의 공동대공을 겸하게 되었으며 훗날 보나파르트 왕조프랑스 제국도 안도라 공작을 겸했다. 프랑스의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된 현재 안도라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스페인의 우르헬 주교가 공동군주로 군림하고 총리가 실권을 가진 입헌공동군주국이 되었다.


2.22. 알바니아[편집]


알바니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22.1. 알바니아 공작[편집]


파일:알바니아 공국 국장.png
관련 칭호
알바니아 공작
비트-노이비트 공작
작위 요구자
막시밀리안 폰 비트-노이비트
전임자
카를 폰 비트-노이비트[80]
후임자
프리드리히 폰 비트-노이비트[81]
계승 실패 원인
1925년 공국 멸망
1914년 당시 비트-노이비트 공국의 공위 요구자였던 프리드리히 폰 비트-노이비트의 남동생은 빌헬름 폰 비트-노이비트로 알바니아 공국의 초대 공작이 되었으나 1925년 퇴위했고, 그 아들 역시 후손을 보지 못하면서 1973년 계보가 단절되었다. 그로 인해 비트-노이비트 공위 요구자 가문 직계로 알바니아 공위 요구권이 넘어가게 되었다.[82] 후술할 알바니아 조구 왕가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처럼 토착민계 왕조였던 것과 달리 본 문단의 알바니아 비트-노이비트 공가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의 경우처럼 서구 열강의 낙하산이었던 것은 물론 그나마도 재위 기간이 단 11년으로 짧았기 때문에 오늘날 그나마 있는 왕당파 알바니아인들은 조구 왕가를 지지하지 비트-노이비트 공가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루마니아 호엔촐레른 왕조(프로이센), 불가리아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영국),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덴마크)처럼 강대국의 방계 가문인 것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루마니아 호엔촐레른 왕조의 초대 국왕 카롤 1세의 아내 엘리사베타 왕비가 본래 비트-노이비트 공가 출신으로, 빌헬름 폰 비트-노이비트에게는 고모가 된다. 이외에 빌헬름의 어머니는 빌럼 1세의 손녀이기에, 부분적으로 네덜란드 왕가의 피가 흐르기도 한다.

사실 밑에 나올 조구 1세도 원래는 알바니아 공국의 마지막 총리였다.


2.22.2. 알바니아 국왕[편집]


파일:알바니아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알바니아 국왕
작위 요구자
레카 2세(레카 조구 2세)
전임자
레카 1세(레카 조구)
후임자
-[83]
계승 실패 원인
1939년 이탈리아 침공
1997년 알바니아 왕정복고 실패
1939년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면서 알바니아의 초대 국왕이었던 조구 1세는 왕후와 생후 이틀이 된 레카 1세(1939 ~ 2011) 왕세자와 함께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1945년 종전 이후 다시 돌아가려 했으나,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실패했다.

이후 1961년 조구 1세가 세상을 뜨면서 외동아들 레카 1세(레카 조구)가 왕위 요구자가 되었고, 1993년, 레카 1세는 54세의 나이로 조국 알바니아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 극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레카 왕자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상당히 높은 것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에 의해 입국이 거부되기도 했다. 이후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으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왕정복고를 주장하며 무력시위를 하다가 실패하여 망명했다가 2002년 알바니아로 되돌아왔다.

2011년 72세로 레카 1세가 사망한 후, 레카 1세의 외동아들인 레카 2세(1982 ~ )가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 결혼하여 아직 차기 계승자는 없다. 심지어 아버지인 레카 1세도 외동아들이었기 때문. 2020년 레카 2세 슬하에 1녀가 출생했으나 여자이기에 상속권은 없다. 이후 레카 2세가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할 경우, 여성의 왕위 요구권 계승을 허용하는 쪽으로 바뀐다면 레카 2세의 딸이 (아버지인 레카 2세보다 먼저 사망하는 경우가 아닌 한) 명목상의 알바니아 여왕이 될 것이고, 계속 남성의 왕위 요구권 계승만 인정한다면 조구 1세의 형의 후손인 6촌 남계가 왕위를 잇게 될 것이며, 어느 쪽으로도 확실히 정해지지 못할 경우 레카 2세 사후 레카 2세의 딸과 6촌 남계가 알바니아 왕위 요구권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여 대립 왕위 요구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단, 현 왕가 구성원들의 관계가 나쁘지 않고 6촌 친척들도 왕정복고에 적극 찬성하고 협력하는 것을 보면 레카 2세의 딸과 6촌 남계의 후손들이 혼인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23. 영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영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4. 오스트리아[편집]


오스트리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이긴 하나 동군연합의 성격이 강했던 오스트리아의 특성상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를 제외하곤 전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이 요구자이다.


2.24.1. 국가[편집]



2.24.1.1. 오스트리아 대공[편집]

파일:오스트리아 대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대공
신성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스페인 국왕
작위 요구자
펠리페 6세
전임자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521년 동군연합 해체
1804년 대공국 분열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카를 5세(카를로스 1세)가 1521년에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물려주고 1556년에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왕위를 물려줌과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 황위에서도 스스로 물러나면서 스페인어권과 독일어권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후신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현재는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의 여계후손인 스페인 보르본 왕가에서 명목상의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를 쓰고 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개편된 후에도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 자체는 명목상 계속 이어졌으며 그에 따라 아래의 오스트리아 황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도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를 쓰고 있으나, 애초에 오스트리아 제국 때부터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상오스트리아 대공국하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현재로서 기존의 통일국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위를 요구하는 인물은 현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뿐이다.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가 오스트리아 역대 황제들로부터 이어졌으며 엄밀히 말하자면 카를은 상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하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위 요구자인 반면, 펠리페 6세의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 겸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를 동군연합 해체 후에도 스페인 왕실이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쓰면서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전임 오스트리아 황위 요구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의 왕정을 부활시킬 당시 스페인 국왕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24.1.2. 오스트리아 황제[편집]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문장(1815).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84]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제국 해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고, 카를 1세는 제위에서 내려왔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제국의 구성원들은 독립한다. 카를 1세는 헝가리 왕위를 요구하며 복위를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포르투갈로 망명해 1922년 사망한다. 카를 사후 전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다음 제위 요구자가 된다. 오토는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오스트리아 제국 재건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지만, 미국에서 이를 거부한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설립될 때부터 꾸준히 제정과의 단절을 시도해 복벽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오토는 결국 제정복고를 포기하고 공화국 시민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2011년 오토가 죽고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제위 요구자가 되었다. 카를은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4개국에서 미디어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2.24.2. 지방[편집]



2.24.2.1. 상오스트리아 대공[편집]

파일:상오스트리아 대공국 국장.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하오스트리아 대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대공국 해체


2.24.2.2. 하오스트리아 대공[편집]

파일:하오스트리아 대공국 국장.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상오스트리아 대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대공국 해체
본래 한 나라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오스트리아 대공 문단에 나온 것처럼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각각 상오스트리아 대공국하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갈라졌다. 이러한 행정 체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어서, 두 대공국의 영토는 각각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와 니더외스터라이히 주로 이어지게 되었다.


2.24.2.3. 슈타이어마르크 공작[편집]

파일: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국장.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해체, 오스트리아에 합병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은 1180년에 케른텐 공국 동쪽 지역이 분리되어 형성된 국가다. 1192년에 오스트리아 공국의 통치가문인 바벤베르크 가문이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래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은 사실상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에는 오스트리아 본토에 완전히 합병되어 오스트리아 공화국 슈타이어마르크 주로 이어지고 있다.


2.24.2.4. 잘츠부르크 공작[편집]

파일:잘츠부르크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잘츠부르크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해체, 오스트리아에 합병
잘츠부르크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있었던 공국이다. 잘츠부르크 공국의 전신인 잘츠부르크 선제후국은 1805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1848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을 계기로 1849년에 잘츠부르크 공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면서 잘츠부르크 공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에는 오스트리아 본토에 합병되어 오늘날의 잘츠부르크 주로 이어지게 되었다.


2.24.2.5. 케른텐 공작[편집]

파일:케른텐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케른텐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해체, 오스트리아에 합병
1335년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토 4세가 케른텐 공작을 이어받으면서 케른텐 공국은 사실상 오스트리아와 한 나라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만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합병되지는 않았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진 후에도 명목상 멸망한 나라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으로 계속 존속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분적으로 분할 상속의 관습이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상속 문제의 편의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여 해체된 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출범하고 나서야 케른텐은 오스트리아의 직할령으로 흡수되었다.


2.24.2.6. 포어아를베르크 백작[편집]

파일:포어아를베르크 주 국장.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포어아를베르크 백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후백국 해체
포어아를베르크 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며 이름처럼 오늘날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에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에는 명목상의 독립국 지위를 상실하고 오스트리아의 한 지방이 되었다.


2.25. 우크라이나[편집]


우크라이나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25.1. 크림 칸[편집]


파일:크림 칸국 국장.svg
관련 칭호
크림 칸
작위 요구자
사히브
계승 실패 원인
1783년 칸국 멸망


2.25.2. 카자크 대수령[편집]


돈 카자크 문장
관련 칭호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라이닝겐 공작[카를]
카자크 대수령
작위 요구자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전임자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85]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키릴 폰 라이닝겐[86]
후임자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폰 라이닝겐[87]
계승 실패 원인
1917년 대수령 계보 단절
카자크인들이 러시아 치하에 놓인 이후 러시아의 군주는 카자크 대수령이라는 칭호를 쓰며 카자크인들을 다스렸다. 러시아 치하에서 러시아의 용병이 된 카자크인들은 러시아 군주 겸 카자크 대수령의 친위세력으로서 많은 혜택을 받았으며, 러시아와 대립하는 다른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카자크 대수령 칭호를 쓰는 군주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2.25.3.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편집]


파일: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크라쿠프 대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88]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왕국 해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제1차 폴란드 분할갈리치아에 세워진 국가이며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이었다. 훗날 크라쿠프 자유시가 오스트리아에 합병되면서 크라쿠프 자유시의 후신인 크라쿠프 대공국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일부로 존재하기도 했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해체된 현재 갈리치아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영토이며 북서쪽 일부는 폴란드 영토다.


2.25.4. 부코비나 공작[편집]


파일:부코비나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부코비나 공작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89]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해체
부코비나 공국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있었던 국가이며 1775년에 합스부르크 가문몰다비아 공국 북서부를 합병하면서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으로 신설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구성국들과 함께 멸망한 뒤에는 루마니아 왕국에 합병되었다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에 합병되면서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25.5. 우크라이나국 군주[편집]


파일:1280px-Alex_K_Ukrainska_Derzhava.svg.png
관련 칭호
헤트만
우크라이나국 세습군주
작위 요구자
올렉산드라 스코로파즈카-오트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군주국 멸망
헤트만은 본래 폴란드 왕국,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대공국 그리고 이 셋의 동군연합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국왕 다음의 지위를 지닌 군 사령관직의 호칭이었다. 그러다가 1918년에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보수파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을 건국하여 헤트만 직위를 부활시켰으며, 파블로 스코로파즈키가 헤트만 자리에 올랐다. 파블로 스코로파즈키는 우크라이나국의 세습군주를 겸하여 자신의 자식에게 우크라이나국의 국가원수 자리를 물려주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국의 건국을 도왔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재건되면서 우크라이나국은 멸망했다.

우크라이나국의 현 군주위 요구자인 올렉산드라 스코로파즈카-오트는 파블로 스코로파즈키의 손녀다.


2.26. 이탈리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이탈리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7. 조지아[편집]


조지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90]


2.27.1. 카르틀리-카케티 국왕[편집]


파일:COA_-_Royal_House_of_Bagrationi.png
관련 칭호
카르틀리-카케티 국왕
작위 요구자
(콘스탄티네 2세의 후손)
다비드 바그라티오니
(기오르기 11세의 후손)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
전임자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91]
페트레 그루진스키[92]
후임자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93]
계승 실패 원인
1801년 왕국 멸망
1801년에 오늘날의 조지아에 위치했던 나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카르틀리-카케티 왕국이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어 멸망한 후, 현재 이 나라를 다스렸던 바그라티온 왕가가 둘로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8년 현재 조지아 내에선 바그라티온 왕가의 복위를 희망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지만, 왕가의 분열 문제 때문에 복위가 다소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의 딸이자 차기 계승자인 안나와 다비드 바그라티오니가 결혼해서[94] 두 계통의 통합된 후계자인 기오르기(2011 ~ )를 낳았다.


2.27.2. 압하지야 공작[편집]


압하지야 공국 국장
관련 칭호
압하지야 공작
작위 요구자
안드레아 니키티치 셰르바시드제
계승 실패 원인
1864년 공국 멸망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자치를 누렸던 압하지야 공국은 이후 러시아 제국에 점령되고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도 자치를 누렸으나, 1864년에 자치권을 잃고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어 멸망했다. 현 공위 요구자 안드레아 니키티치 셰르바시드제는 압하지야 공국의 마지막 공작 미하일의 후손이다.


2.28. 체코[편집]


체코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28.1. 슈바르첸베르크 공작[편집]


슈바르첸베르크 공국 국장[95]
관련 칭호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크룸로프 공작
작위 요구자
카렐 슈바르첸베르크
계승 실패 원인
1789년 공국 멸망
현 공위 요구자 카렐은 마지막 공작 요한 1세의 후손이며 체코의 외무장관 겸 제1부총리였다. 원래 바이에른 주의 프랑켄이 거점이었으나 이후에 체코프라하로 옮겨갔다. 슈바르첸베르크 성도 프라하에 존재.


2.28.2. 모라비아 변경백[편집]


파일:800px-Coat_of_arms_of_Moravia.svg.jp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모라비아 변경백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96]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변경백국 해체
모라비아 변경백국은 지금의 체코에 있었던 국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됨에 따라 모라비아 변경백국은 또다른 체코계 국가인 보헤미아 왕국과 함께 멸망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다.


2.28.3. 보헤미아 국왕[편집]


파일:보헤미아 왕국의 국장.svg.pn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97]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왕국 해체
보헤미아의 다수민족이었던 체코인의 민족주의는 본래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다. 보헤미아 왕국이 500년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로 존재하면서 체코인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점차 오스트리아에 가까운 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헤미아 지배가 전형적인 식민지배가 아니라 비독일계인 체코계 주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에 기반했기 때문이다.[98] 그러다 보니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보헤미아의 체코인들은 계속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민으로 남고 싶어했으며 그나마 독립을 원하는 이들도 대부분 보헤미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처럼 합스부르크 왕조를 섬기는 자치국가가 되는 걸 원했다. 보헤미아에서 극소수에 불과했던 강경파 분리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의 기색을 보이면서부터였으며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이 더 이상 어느 나라의 군주도 배출하지 못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트리아 공화국, 헝가리 민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등 여러 나라로 쪼개짐에 따라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28.4. 트로파우 공작[편집]


트로파우 공국 국장
관련 칭호
트로파우 공작
리히텐슈타인 공작
작위 요구자
한스 아담 2세
전임자
프란츠 요제프 2세
후임자
알로이스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공국 멸망
트로파우 공국은 오늘날 체코의 오파바에 있었던 국가이며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다스렸다. 트로파우 공국이 있었을 당시 리히텐슈타인 공가는 트로파우 공국 영토가 주된 영지였고 지금의 리히텐슈타인 땅은 변방에 불과했으나,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트로파우 공국을 멸망시키고 오파바를 합병하면서 리히텐슈타인 공가는 중심지를 지금의 리히텐슈타인 땅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악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은 체코슬로바키아가 해체된 뒤에도 2009년까지 해당 국가의 후신인 체코 및 슬로바키아와 수교하지 않았으며 오파바 반환을 요구하는 등 리히텐슈타인 공작의 트로파우 공작 칭호가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유지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이 두 나라와 수교한 현재도 리히텐슈타인 공가에서 공식적으로 트로파우 공작 칭호를 포기하지는 않은 상태다.[99]


2.29. 크로아티아[편집]


크로아티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29.1. 달마티아 국왕[편집]


파일:달마티아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달마티아 국왕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00]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달마티아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며 지금의 크로아티아 남부 해안 지역에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에 달마티아 왕국 영토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2.29.2.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왕[편집]


파일: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왕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01]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으로 크로아티아 왕국과 슬라보니아 왕국이 합쳐져서 생겨난 나라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국이라는 이름의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며, 이내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2.29.3.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oat_of_arms_of_the_Independent_State_of_Croatia.svg.png
관련 칭호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아오스타 공작
작위 요구자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102]
전임자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후임자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103]
계승 실패 원인
1943년 토미슬라브 2세 퇴위
1945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멸망[104]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었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를 토미슬라브 2세 국왕으로 추대했다. 토미슬라브 2세는 바돌리오 내각이 연합국에 항복한 1943년에 왕위에서 물러났으며[105] 그로부터 3년 후 이탈리아의 왕정이 폐지되어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본가가 해외로 추방됨에 따라 분가인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수장이었던 토미슬라프 2세도 아르헨티나로 추방되어 1948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외아들 아마데오는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수장이 되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였다. 2021년 아메데오가 사망한 뒤에는 그 아들인 아이모네가 아오스타 공작위와 이탈리아 왕위 요구권을 계승하였다.


2.30. 포르투갈[편집]


포르투갈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30.1. 알가르브 국왕[편집]


알가르브 왕국 국장
관련 칭호
포르투갈 국왕
알가르브 국왕
브라간사 공작[두아르트]
스페인 국왕[펠리페]
작위 요구자
(브라간사 왕조)
두아르트 피우
(압스부르구 왕조)
펠리페 6세
전임자
두아르트 누누
후안 카를로스 1세
후임자
아폰수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계승 실패 원인
1640년 동군연합 해체(압스부르구 왕조)
1834년 폐위(브라간사 왕조)
1910년 왕정 폐지, 포르투갈에 합병
포르투갈 왕국과의 동군연합이었던 알가르브 왕국은 1910년에 포르투갈의 왕정이 폐지됨에 따라 포르투갈 왕국과 함께 멸망하여 포르투갈 본토에 합병되었다. 따라서 포르투갈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며 포르투갈 브라간사 가문의 수장인 두아르트 피우는 알가르브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브라간사 왕조 이전의 압스부르구 왕조 또한 여전히 알가르브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포르투갈 독립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국과 알가르브 왕국이 스페인 왕국과의 동군연합을 청산하고 자신들끼리 브라간사 왕조의 동군연합이 되면서 스페인 왕실은 포르투갈 국왕 칭호를 폐지하였으나, 알가르브 국왕 칭호만큼은 오늘날의 보르본 왕조에서도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이어지고 있다.


2.30.2. 포르투갈 국왕[편집]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장.svg파일:포르투갈 왕국 대형 국장.svg
관련 칭호
포르투갈 국왕
알가르브 국왕
브라간사 공작
작위 요구자
두아르트 피우
전임자
두아르트 누누
후임자
아폰수
계승 실패 원인
1834년 폐위
1910년 왕정 폐지
미겔 1세는 폐위되어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객사한다. 미겔 1세의 아들인 브라간사 공작 미겔을 시작으로 미겔계 후손들은 대립왕으로서 왕위 요구자가 된다. 그런데, 1910년 포르투갈 왕국 국왕 마누엘 2세가 왕위에서 쫓겨나 후사가 없이 1932년 7월 2일 영국 런던에서 사망한다. 미겔 1세의 손자 두아르트 누누는 대립왕으로서 왕위 요구자이자 마누엘 2세에게 지명된 후임으로서의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두아르트 누누는 1976년에 사망했고, 장남 두아르트 피우가 차기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두아르트 피우는 미겔 1세의 후손인 브라간사 왕가 구성원에 대한 포르투갈 입국 금지 법령 때문에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106] 포르투갈 시민권은 출생 당시부터 갖고 있었다. 이후 1950년에 입국 금지가 풀려 1952년에 포르투갈로 영구 귀국하였다. 두아르트 피우의 어머니인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장녀 이자베우의 맏아들인 페드루의 차녀이기 때문에, 두아르트 피우는 페드루 4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한편 두아르트 피우는 동티모르의 독립 운동에 나선 공로로 2012년에 동티모르 정부로부터 국적을 받아 동티모르 시민권도 갖고 있다.

두아르트 피우는 1995년에 50세의 나이로 21살 연하의 포르투갈인 귀족 여성과 결혼했으며 현재 이들의 장남 아폰수가 명목상의 왕세자다. 포르투갈 왕가가 포르투갈인과 결혼하는 것은 1862년 루이스 1세의 혼인 이후 처음이다.


2.31. 폴란드[편집]


폴란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2.31.1. 국가[편집]



2.31.1.1. 폴란드 국왕[편집]

파일:Coat_of_Arms_of_the_Polish-Lithuanian_Commonwealth.svg
관련 칭호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작센 국왕
바르샤바 공작
작위 요구자
(작센-게사페 가문)
알렉산더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다른 친족)
다니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미하엘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전임자
마리아 에마누엘
뤼디거
마리아 에마누엘
후임자
게오르크 필리프
게로
(임시)
레오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107]
(장래)
안드레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108]
계승 실패 원인
1795년 왕국 멸망
1815년 바르샤바 공국 멸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위 요구자인 알렉산더와 다니엘 그리고 미하엘은 작센 왕국의 왕위와 바르샤바 공국의 공위 또한 요구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독일인인데, 폴란드인들의 반독감정을 감안하면 이들 중 누군가가 폴란드 왕위에 올라 폴란드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0%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왕위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도 선거군주제였고... 게다가 본 문단의 폴란드 왕위 요구자들 중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위 요구자는 개신교 신자이다 보니 폴란드 국왕은 가톨릭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설령 작센 왕위는 획득하더라도 폴란드 왕위는 시스템적으로 상속이 불가능하다. 물론 만약 폴란드에서 왕정복고가 일어난다면 변수에 따라서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위 요구자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기 위해 가톨릭으로 회심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폴란드 공화정이 완전히 자리잡아 폴란드 국민들 사이에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여론이 완전히 사라진 현 상황에서는 그저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


2.31.2. 지방[편집]



2.31.2.1. 바르샤바 공작[편집]

파일:바르샤바 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작센 국왕
바르샤바 공작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작위 요구자
(작센-게사페 가문)
알렉산더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다른 친족)
다니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미하엘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전임자
마리아 에마누엘
뤼디거
마리아 에마누엘
후임자
게오르크 필리프
게로
(임시)
레오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109]
(장래)
안드레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110]
계승 실패 원인
1815년 공국 멸망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국인 바르샤바 공국으로 재건되었던 폴란드는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패하여 1815년 빈 회의에서 폴란드 재분할이 결정됨에 따라 다시 멸망했다. 바르샤바 공국은 작센 왕국과의 동군연합 형식이었기 때문에 바르샤바 공위를 요구할 수 있는 이들 또한 작센 왕가의 후예들이다.


2.31.2.2. 폴란드 차르[편집]

파일:폴란드 입헌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라이닝겐 공작[카를]
폴란드 차르
작위 요구자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전임자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111]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키릴 폰 라이닝겐[112]
후임자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폰 라이닝겐[113]
계승 실패 원인
1832년 자치권 박탈
1867년 러시아 제국에 완전 병합
1915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러시아령 폴란드 강탈
1917년 러시아 제국 멸망
1918년 폴란드 군주정 완전 폐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폴란드 차르[114]를 겸하는 동군연합이었던 폴란드 입헌왕국은 1832년에 자치권을 박탈당하였으며 1867년에는 명목상의 동군연합마저 폐지되고 러시아의 직할령이 되면서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 대전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되어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이름의 괴뢰국이 되었고 러시아 본토의 군주정은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졌으며 이듬해인 1918년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독립하여 폴란드의 군주정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러시아령 폴란드가 동군연합 형식의 자치령에서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바뀐 뒤에도 러시아 황제의 폴란드 차르 칭호는 명목상 계속 이어졌으며, 러시아 제국 멸망 후에도 러시아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에 의해 폴란드 차르 칭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치하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인들에 의해 엄청나게 탄압을 받은 역사를 감안하면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황실 후손들 중 누군가를 자신들의 군주로 추대할 가능성은 완벽하게 0%다. 무엇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점으로 폴란드의 반러 감정이 더더욱 극에 달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 황제위 요구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명목상의 폴란드 차르로만 남게 될 것이다.


2.31.2.3. 크라쿠프 대공[편집]

파일:크라쿠프 대공국 국장.jp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크라쿠프 대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15]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대공국 해체
1919년 폴란드에 합병
크라쿠프 대공국은 1846년에 크라쿠프 자유시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아 황제 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이 크라쿠프 대공을 겸하는 동군연합 체제로 세워진 나라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후신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여 해체되면서 크라쿠프 대공국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구성국들과 함께 멸망하였으며, 이듬해인 1919년에는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크라쿠프가 폴란드 제2공화국에 합병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자일뿐더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실이 크라쿠프 대공국을 포함한 여러 구성국들의 자치권을 많이 보장했기 때문에 아래의 폴란드 왕위 요구자들과 폴란드 차르위 요구자들에 비하면 폴란드인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오스트리아도 엄연히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폴란드와 역사적 악연이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폴란드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크라쿠프의 오스트리아계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나 지지를 받을 뿐, 토착 폴란드인들에게는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과 러시아의 로마노프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증오의 대상이며, 그에 따라 크라쿠프 대공국이 재건될 가능성은 0%다.[116]


2.31.2.4. 노이데크 영주[편집]

문장
관련 칭호
노이데크 영주
작위 요구자
게르트루트 폰 힌덴부르크
전임자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5년 폴란드에 합병
독일령 시절 노이데크로 불렸던 오그로지에니에츠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배출한 힌덴부르크 가문의 영지였다. 독일 11월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힌덴부르크 가문은 독일의 봉건제 폐지로 인해 영지였던 노이데크를 상실했으며,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노이데크가 폴란드령 오그로지에니에츠가 되면서 힌덴부르크 가문이 해당 지역을 다시 소유할 가능성은 0%가 되었다.


2.32. 프랑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프랑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3. 핀란드[편집]


핀란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참고로 이중에 스웨덴 왕족은 없다. 애초에 스웨덴 치하의 핀란드는 자치령이나 식민지(possession)가 아니라 내지(land) 취급이었다.[117] 그에 따라 당시 스웨덴 국왕은 핀란드 관련 칭호를 별도로 쓰지 않았다.


2.33.1. 핀란드 대공[편집]


파일:핀란드 대공국 국장.svg
관련 칭호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라이닝겐 공작[카를]
핀란드 대공
작위 요구자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전임자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118]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키릴 폰 라이닝겐[119]
후임자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에미히 폰 라이닝겐[120]
계승 실패 원인
1917년 대공국 멸망
핀란드 대공국은 1809년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가 스웨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프레드릭스함 조약에 따라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 땅을 넘겨받으면서 세워진 나라다.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핀란드의 대공을 겸했는데 비슷한 케이스였던 폴란드 입헌왕국과 달리 러시아의 제정이 폐지되는 순간까지 공식적으로는 자치권이 박탈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만 그럴 뿐 러시아 본토와의 갈등은 엄연히 존재했는데 특히 알렉산드르 3세(알렉산테리 3세)와 그의 아들이자 후임자인 니콜라이 2세(핀란드 대공으로서의 칭호도 동일)가 핀란드인들을 러시아 문화에 동화시키는 강압정책을 펼치면서 핀란드인들의 반러감정과 민족주의가 강해졌으며 그로 인해 핀란드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되기까지 했다. 결국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군주제도 폐지되자 핀란드 대공국 의회도 니콜라이 2세의 폐위와 핀란드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만약 니콜라이 2세가 적어도 핀란드인들에게만큼은 좋은 군주였다면 러시아 혁명 당시 핀란드로 망명하여 핀란드 대공위라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핀란드는 칼레발라 이래로 민족주의가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노동계급도 꾸준히 성장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기 직전인 1916년 총선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파들도 절반이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퀴외스티 칼리오 같은 공화주의자였고,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같은 왕당파도 친독파였기 때문에, 핀란드에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족이 발붙일 땅은 전무했다. 더구나 니콜라이 2세가 핀란드로 망명하여 핀란드 대공위를 유지한다면 그 존재 자체가 러시아의 공산정권이 핀란드를 침공할 좋은 명분이 되는데[121], 핀란드인들이 이를 좌시했을 리가 없다.[122] 오히려 니콜라이 2세의 대공위 퇴위를 선언한 핀란드인들에 의해 러시아에 넘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경우 그나마 핀란드 대공가(러시아 황가)를 지지하던 일부 핀란드인들은 해외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2.33.2. 핀란드 국왕[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1px-Coat_of_Arms_of_Kingdom_of_Finland_%281918-1919%29.svg.png
관련 칭호
핀란드 국왕
카렐리아 국왕
올란드 공작
라플란드 대공
칼레발라와 포흐욜라의 주인
작위 요구자
하인리히 도나투스 폰 헤센[123]
전임자
모리츠 폰 헤센[124]
후임자
모리츠 폰 헤센[125]
계승 실패 원인
1919년 왕국 멸망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그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가 점점 밀리며 항복하자 핀란드 국왕이며 동시에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매제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은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현재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의 후손인 하인리히 도나투스와 필리프가 명목상의 핀란드 왕국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이 공식적으로 왕호를 받기 전에 퇴임했으므로[126], 하인리히 도나투스와 필리프의 핀란드 왕위 요구가 정당한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2.34. 헝가리 국왕[편집]


파일:헝가리 왕국 국장.svg
관련 칭호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작위 요구자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27]
전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후임자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계승 실패 원인
1918년 왕국 해체
1921년 복위 무산
1946년 군주정 완전 폐지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 헝가리 땅에 민주주의 국가인 헝가리 민주 공화국과 사회주의 국가인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차례대로 잠시 세워지기도 했으나 이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헝가리 보수파들 및 이들과 연합한 루마니아군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이후 헝가리가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에 의해 '왕 없는 왕국' 이 된 후 그의 섭정으로 통치되다가[128]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헝가리가 패하여 헝가리의 군주정이 완벽하게 폐지되고 헝가리 제2공화국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차례대로 세워졌으며, 냉전 종식 이후의 민주화된 헝가리도 여전히 공화정을 표방하고 있다. 독립국가 헝가리의 마지막 국왕 러요시 2세의 누나 안나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하여 후손을 남기면서 헝가리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고 그에 따라 법적으로 헝가리의 국왕이었던 마지막 군주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카로이 4세)였기 때문에 현재는 오스트리아의 왕위 요구자가 헝가리의 왕위 요구자를 겸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제정복고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지금 상태에서 만약 헝가리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오스트리아 본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가가 따로 분리되어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 시즌 2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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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바(Navarra)는 스페인어 명칭이며 나바(Navarre)는 프랑스어 명칭이다.[2]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성이 없었으나 1932년 터키의 성씨법 제정 이후로 편의상 오스만 1세의(Osman) 자손(Oğul의 3인칭 한정형인 oğlu)'이라는 의미로 오스만오을루(Osmanoğlu)라는 성을 쓰고 있다.[3] 그래서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에서도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 문단과 이슬람수니파 칼리프위 요구자 문단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오스만 제국 황제위(파디샤), 수니파 칼리프위, 로마 제국 황제위(카이세리 룸)는 명목상 제각기 별개의 작위였다.[4] 진실의 눈과 머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마이너 갤러리 등 21세기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혐한에 미친 일뽕 정신병자들조차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에 일본의 천황을 국가원수로 하는 새로운 군주국을 세우자는 미친 소리는 대놓고 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일본의 경우 명목상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지만 어차피 황실에 실권이 없는 점에서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와는 도긴개긴이다.[5]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6] 파블로스의 장남[7] 그리스 해법, 황금새벽당, 스파르타인당[8] 그리스 왕국 왕위 요구자인 파블로스의 아들이자, 명목상의 그리스 왕세자[9] 나바(Navarra)는 스페인어 명칭이며 나바(Navarre)는 프랑스어 명칭이다.[10] 루이스 알폰소 곤살로 빅토르 마누엘 마르코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11]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A] A B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당피에르[B] A B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아버지로 카디스 공작(Duque de Cádiz)이었다.[12] 프랑스 제1제국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2세 그리고 프랑스 제2제국나폴레옹 3세는 나바르 국왕 칭호를 쓰지 않았다.[13]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14] 장-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15] 샤를 나폴레옹의 장남[16]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장남[17]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있는데, 이게 맞다면 홀란트 왕실의 직계 혈통은 나폴레옹 3세 이전에 이미 단절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나폴레옹 3세 문서 참고.[18] 보이츨라바 페오도라의 남편 하인리히 1세가 1935년 당시 로이스-게라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45세의 양자가 되어 그의 재산과 부동산을 상속받았지만 공위는 계승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로이스-게라 공위 요구자는 아니다. 더불어 보이츨라바 페오도라는 하인리히 45세의 외조카이기도 하다.[19]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공주 마리의 3남. 더불어 이들의 4남은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남편 하인리히/헨드릭이다.[마리아] A B C D 러시아 여대공[앤드류] A B C D 황태자 전하, (러시아) 공작[카를] A B C D 귀천상혼으로 라이닝겐 공위 요구 포기[20]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21]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22] 앤드류 안드레예비치의 아들.[23] 카를 에미히의 아들.[24] 러시아 제국 기본법 37조에 따르면 «Божіею поспѣшествующею милостію, Мы, NN, Императоръ и Самодержецъ Всероссійскій, Московскій, Кіевскій, Владимірскій, Новгородскій; Царь Казанскій, Царь Астраханскій, Царь Польскій, Царь Сибирскій, Царь Херсониса Таврическаго, Царь Грузинскій; Государь Псковскій и Великій Князь Смоленскій, Литовскій, Волынскій, Подольскій и Финляндскій; Князь Эстляндскій, Лифляндскій, Курляндскій и Семигальскій, Самогитскій, Бѣлостокскій, Корельскій, Тверскій, Югорскій, Пермскій, Вятскій, Болгарскій и иныхъ; Государь и Великій Князь Новагорода низовскія земли, Черниговскій, Рязанскій, Полотскій, Ростовскій, Ярославскій, Бѣлозерскій, Удорскій, Обдорскій, Кондійскій, Витебскій, Мстиславскій и всея сѣверныя страны Повелитель и Государь Иверскія, Карталинскія и Кабардинскія земли и области Арменскія; Черкасскихъ и Горскихъ князей и иныхъ наслѣдный Государь и Обладатель; Государь Туркестанскій, Наслѣдникъ Норвежскій, Герцогъ Шлезвигъ-Голстинскій, Стормарнскій, Дитмарсенскій и Ольденбургскій, и прочая, и прочая, и прочая»(대략 일부만 번역하자면 전 러시아의 황제이자 군주로서 카잔, 아스트라한, 폴란드, 시베리아, 크림반도, 그루지야의 왕이며 프스코프의 영주이자 스몰렌스크와 리투아니아와 볼히니아, 포돌리아와 핀란드의 대공이자 에스토니아,리보니아, 크룰란드 등등의 공작과 영주이자 모든 북방국가의 주인이며 노르웨이의 후계계승자 및 슐레스비히 공작 등.[25] 러시아 제국의 황위 계승법은 엄밀히 말하면 준살리카법이라, 남자 계승권자가 없는 경우에 한해 딸의 계승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러시아 황실의 남계후손은 모두 본인이나 조상이 비왕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러시아 황실의 남계후손이 없으므로 본인이 적법한 계승자라라고 주장한 것.[26] 사실 한 명 있긴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6남 파벨의 장남 드미트리의 아들 폴 로마노프-일린스키(1928-2004)가 알렉산드르 2세 계열의 유일한 계승권자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황위 요구를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었으며, 미국에 정착하여 플로리다의 팜비치라는 소도시의 시장을 3선할 정도의 정치가였으니 후에 러시아 황위를 요구하기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아들 둘, 딸 둘에 친손녀 넷을 두었다.[27] 러시아어 이름은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레이닌겐-로마노프(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Лейнинген-Романов)[28] 폐지된 왕실의 계승 문제에 왜 공화국인 루마니아의 국회가 간섭하느냐면, 루마니아 정부가 미하이 1세의 가족들을 비공식적으로 자국의 왕가로 모시기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근데 왜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이냐면, 나라가 가난해서 왕실을 공인하는 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명목상의 왕실 신세를 못 벗어날 듯 하다.[29] 미하이 1세는 딸만 5명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딸 이리나가 미국에서 마약 범죄를 저질러 제명되었다(...).[30] 마르가레타 왕세녀는 결혼을 40이 넘어서 하였다. 참고로 배우자인 라두 두다는 왕족/귀족이 아니며, 부인보다 11세 연하다.[31] 미하이 1세의 이복형 카롤 람브리노의 아들이다.[32] 트란실바니아는 본래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는데 루마니아 왕국은 트란실바니아의 주민 과반수가 루마니아인임을 근거로 내세워 합병하였다. 당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헝가리인에게 지독하게 탄압을 당했기 때문에, 루마니아인 입장에선 하루빨리 헝가리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숫자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으며, 루마니아 합병으로 헝가리인이 졸지에 고립되어버리다 보니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터키-그리스 관계 만큼 최악이다.[33]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4] 미하엘의 딸. 살리카법 때문에 정식적인 수장은 되지 못한다.[35] 현재는 귀천상혼으로 왕위 요구권을 박탈당한 상태다.[36] 뷔르템베르크의 마지막 국왕 빌헬름 2세(뷔르템베르크)와는 사촌지간이다. 모나코 공위 계승이 유력시되었으나, 이후 열강의 조정에 따라 알바니아 공국의 초대 공작으로 거론되기도 했고, 최종적으로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추대된다.[37] 정확히는 첫 왕이자 마지막 왕, 유일한 왕이다. 왜냐면 그 전까지는 몬테네그로 공국이었고, 니콜라 1세의 삼촌이 본래 공작이었으나 후세없이 암살당하면서 공작직위를 니콜라가 물려받았고, 그 공작직위를 물려받은지 50년이 되던 1910년에 스스로 왕을 자칭하면서 왕국의 초대왕이 된 것이다.[38] 니콜라 1세의 차남, 미르코(1879~1918)의 아들[39] 니콜라 1세는 3남 9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장남 다닐로와 삼남 페테르(1889~1932)는 모두 결혼은 했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사실상 적손은 미차엘뿐이었다. 그렇기에 당시에 이미 40세를 넘긴 다닐로의 부인 밀리차(1880~1946)의 상황 등을 고려하여 계승권을 넘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뒷이야기가 있고, 다닐로가 정략결혼에 의해 일부러 아이를 낳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우치고 왕위계승을 포기한 체 그녀를 찾아 떠난다는 스토리의 영화도 존재한다.[40] 일단 몬테네그로내각책임제 국가라서 대통령은 단순한 명예직에 불과하다. 따라서 왕정복고를 법적으로 명문화하려면, 그냥 대통령직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왕실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면 된다. 절차상의 문제는 없는 것이다.[41] 위의 루마니아의 옛 왕가도 비공식적으로 자국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루마니아의 왕실로 대접받고 옛 왕궁을 돌려받기까지 했지만, 나라 살림이 어려워서 자꾸만 자신들의 지위를 공식화해달라는 요구가 개무시당한다(...). 왕정복고를 반대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지금 그 문제를 굳이 거론해야겠냐는 논리다. "나중에 살림 좀 나아지면 해줄테니까 보채지 마" 게다가 몬테네그로는 정치권과 국민들의 왕정복고 여론이 드높은데 반해, 정작 그 수혜자가 될 왕실이 그 문제에 대해 영 시큰둥한 반응이라서(...), 왕정복고 논의가 지지부진한 탓도 있다. 뭔가 뒤바뀐 것 같지만, 신경쓰지 말자[42] 이름이 자꾸 2대에 걸쳐 반복돼서 헷갈리겠지만 정리하자면, 니콜라 1세는 여자형제만 둘 있고, 혼자 외아들이었다. 니콜라 1세는 3남 9녀를 두었는데, 첫째와 셋째는 자녀가 없다. 유일하게 자녀를 둔 미르코 왕자는 다섯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단명하고 사실상 외동인 미차엘 왕자를 두었다. 그리고 미차엘 왕자는 아예 외동으로 니콜라(2세)왕자를 낳았다. 니콜라(2세) 왕자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그 아들이 보리스다. 사실상 보리스는 5대 독자인 셈이다. 그런 그가 딸만 둘이고, 보리스의 아내는 연상이다. 보리스가 80년생이니 그의 아내가 연하였다면 2022년 기준으로도 아직 남계 계승의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아내는 76년생으로 사실상 자녀를 더 낳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니 애초에 니콜라나 보리스는 왕정복고에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관심이 있었다면 어떻게서든 아들을 낳았겠지[43] 참고로 보리스의 누나, 알티나이는 2009년 5월에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와 결혼하여 2009년 9월(!!)에 득남했다. 여담으로, 보리스의 장녀가 알티나이의 외동아들보다 1살 많다.[44] 오드프랑스 레지옹 출범 이전엔 노르파드칼레(Nord-Pas-de-Calais) 레지옹 소속[45]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46] 시메온 보리소프 삭스코부르고츠키[알렉산다르] 왕세자 전하[니콜라] 몬테네그로의 명목상의 국왕[47] 초대 국왕인 밀로시 1세(Miloš I)의 이부형제 야코브(Jakov)의 6세손으로 현재 남은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후예는 모두 야코블리에비치(Jakovljević) 계통이다. 참고로 야코브의 친부의 이름이 바로 오브렌(Obren)이며, 밀로시 1세의 친부 테오도르(Teodor) 사후 가문명을 테오도로비치(Teodorović)에서 오브레노비치(Obrenović)로 바꿨기 때문에 현재 왕위 요구자인 프레드라그는 초대 국왕인 밀로시 1세와 부계로 혈연관계가 없는 복잡한 가정사를 갖고 있다.[48]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구별상 문제가 될 건 없는 게, 만약 왕실이 복고되면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2세'로 즉위할텐데,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는 구별되기 때문.[49]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50]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51]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52]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53]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54] 더 가까운 보르본-도스 시칠리아스 가문을 건너뛰고 보르본-파르마 가문을 지지하는 이유는, 1759년의 나폴리 국사조칙에 의해 스페인 국왕의 양시칠리아 국왕 겸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겸임 금지가 규정된 시기가 이사벨 2세의 즉위 이전이므로 카를리스타도 이를 따라야 한다.[55] 마지막에서 두 번째 수장인 하이메 3세의 누나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토스카나 분가로 시집가서 만든 가문이다. 그런데 카를리스타 자체가 여계 계승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졌기에 만약 압스부르고-보르본 가문이 카를리스타 가문을 계승한다면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56]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 카를로 7세의 후손이다. 또한 현 수장 페드로의 외할머니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딸 이자베우의 손녀라서, 페드루 2세의 할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를 통해 카를로스 4세의 여계후손이기도 하며,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를 통해 알폰소 12세의 여계후손이 되기도 한다.[57] 본래 1759년 나폴리 국사조칙에 의해 스페인 국왕과 양시칠리아 국왕은 겸임이 불가능하지만, 분열된 양시칠리아 왕가의 두 계통 중 카스트로 계통의 입장에 따르면 다른 계통인 칼라브리아 계통은 양시칠리아의 왕위 계승권이 없으므로, 이론상으로는 카스트로 계통을 양시칠리아 왕가의 적통으로 인정할 경우 칼라브리아 계통의 수장이 카를리스타 왕위요구권을 갖는 것이 가능해진다. 다만 칼라브리아 계통 쪽은 명목상의 양시칠리아 왕위를 주장하는 집안이라 스페인 왕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58]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59] 카를로스파 계열 작위 요구자들 중의 한 분파인데, 귀족 가문으로선 이례적으로 가문 차원에서 극좌 성향을 띄는 특징이 있다.[60]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61]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62]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3]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64]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65]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6]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7]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8] 다비드의 아버지[69] 누그자르의 아버지[70] 다비드 바그라티오니가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의 딸인 안나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이다.[71] 아일랜드의 아일랜드어 명칭인 에이레를 영어로 표기한 것이다.[72]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73] 로우랜드 지역은 10세기 경부터 이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있었다.[장] [루이스] A B [샤를] A B [장-크리스토프] A B [74]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세고비아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75]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76] 장 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77] 샤를 나폴레옹의 장남[78] 제롬 그자비에 마리 조제프 빅토르 나폴레옹[79]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남동생.[80] 막시밀리안의 아버지.[81] 막시밀리안의 동생.[82] 루마니아의 사례를 보면 중간에 계보가 단절되었을 때 본가 수장의 차남이 그 계보를 계승한다. 그러나 카롤 빅터 사망 당시 가문의 수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장남인 알렉산데르는 2000년 비트-노이비트 공작의 계승을 포기하고 현 가문의 수장인 차남 막시밀리안에게 작위를 넘겼기 때문에 둘은 동군연합이 이뤄진다.[83] 레카 2세가 아직 남계 자녀가 없는 관계로, 굳이 찾으려면 할아버지 조구 1세의 형제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84]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85]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들,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86]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87] 카를 에미히의 아들.[88]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89]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90] 참고로 조지아는 지리적으로는 종종 아시아로 간주되기도 하나, 이 문서에서는 유럽으로 간주하기로 한다.[91] 다비드의 아버지[92] 누그자르의 아버지[93] 다비드 바그라티오니가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의 딸인 안나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이다.[94] 현재는 이혼.[95] 꽤나 무시무시하게 생긴 문장인데, 변발을 튼 채로 잘려 있는 튀르키예인의 목에서 까마귀을 파먹는 그림이 문장 오른쪽 아래에 그려져 있다(...).[96]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97]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98] 비슷한 케이스로 로마 제국 치하의 그리스인들이 라틴족에게 크게 우대를 받으면서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라틴족처럼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진 바 있다.[99] 물론 그런다고 해서 진짜로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오파바를 돌려받는다면 현임 공작인 한스 아담 2세히틀러의 환생(...) 취급을 받게 될 것이며, 반환을 승인해준 체코의 대통령과 총리는 매국노로 취급받고 탄핵될 수도 있다. 오파바 시가 트로파우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에는 독일인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일계 주민들이 싹 추방당하고 그 자리에 원주민인 체코인들이 대거 이주했기 때문에, 이제와서 오파바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나라 자체가 입헌군주제의 탈을 쓴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의 역대 공작들은 한스 아담 2세 이후로도 계속 명목상의 트로파우 공작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100]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01]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02] 아이모네 움베르토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루이지 아메데오 엘레나 마리아 피오렌초 디 사보이아-아오스타[103] 피에몬테 공. 아오스타 공작의 아들.[104] 토미슬라브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실권자였던 안테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완전한 1인 독재자가 되어 '수령' 칭호를 얻었다. 그래봤자 2년 후에 크로아티아 독립국 자체가 무너졌지만...[105] 물론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이 공식적으로 조상 대의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칭호를 부정한 적은 없다.[두아르트] 브라간사 공작[펠리페] 스페인 국왕[106] 이 법령은 1834년에 제정되었지만 공화정 전환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공화정 전환 후에는 마리아 2세페르난두 2세의 후손인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왕가 구성원도 별도의 법령으로 입국이 금지되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이쪽 계통이 단절되어 해당 법률은 그대로 사문화되고, 남은 포르투갈 구왕족들의 입국 금지는 포르투갈 입국은 왕정 시기 제정된 미겔 1세의 후손에 대한 입국 금지 법령을 근거로 하였다.[107] 미하엘의 딸. 살리카법 때문에 정식 수장은 되지 못한다.[108]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현 수장,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가 단절되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에서 명목상의 대공위를 계승하게 된다.[109] 미하엘의 딸. 살리카법 때문에 정식 수장은 되지 못한다.[11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현 수장,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가 단절되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에서 명목상의 대공위를 계승하게 된다.[111]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들,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112]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113] 카를 에미히의 아들.[114] 루스 차르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러시아에서 차르는 황제를 뜻하는 단어에서 국왕을 뜻하는 단어로 격하되었다. 그 영향인지 훗날 불가리아가 독립하여 불가리아 왕국이 되었을 때 불가리아 군주가 차르 칭호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에서 차르는 국왕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반면 세르보크로아트어권에서 차르는 여전히 황제를 뜻하는 단어다.[115]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16] 단, 예외적으로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폴란드를 자신의 모국으로 여기고 폴란드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폴란드인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그의 자손들은 폴란드 내 작위 요구의 명분이 충분히 있는 편이다. 허나, 카를 알브레히트가 생전에 폴란드 내의 그 어떤 작위도 자칭한 적이 없었던지라, 그의 후손들은 크라쿠프 대공국의 공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117] 현재 스웨덴 국토인 남부 스코네와 북부 옘틀란드는 근세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 땅이었기에 오히려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118]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들,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119]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120] 카를 에미히의 아들.[121] 동아시아의 비슷한 케이스로는 북송의 망명 왕조인 남송, 원나라의 망명 왕조인 북원, 명나라의 망명 왕조인 남명,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지만 일단 명목상 청나라의 망명 왕조를 칭했던 만주국이 있다. 해당 망명 왕조들 모두 망명의 원인을 제공한 세력(남송은 금나라, 북원은 명나라, 남명은 청나라, 만주국은 중화민국)과 지속적으로 대립했으며, 금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남송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그러한 대립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도 대만으로 망명한 중화민국 정부와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정부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티베트를 점령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있다.[122] 이는 위에 있는 폴란드 차르 문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혁명을 피해 러시아령 폴란드로 망명하여 폴란드 차르위를 유지했다면 러시아의 공산정권은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을 것이며, 이 경우 러시아령 폴란드는 자본주의 국가인 폴란드 제2공화국이 아니라 러시아 공산정권의 괴뢰국이 들어서거나 아예 러시아 공산정권의 직할령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123] 하인리히 도나투스 필리프 움베르토.[124] 하인리히 도나투스의 아버지.[125] 하인리히 도나투스의 장남. 할아버지와 동명이인이다.[126] 임시로 핀란드 국왕 프레데리크 칼레 1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핀란드 왕국 문서도 참조.[127]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28] 마지막 왕 카로이 4세가 헝가리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호르티 미클로시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