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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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대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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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 본기(本紀) ]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유협
10권 「황후기(皇后紀)」
곽성통 · 음여화 · 명덕황후 · 장덕황후 · 효화황후 · 등수 · 염희 · 양납 · 양여영 · 등맹녀 · 두묘 · 효인황후 · 효령황후 · 영사황후 · 복수 · 조절 · 무양장공주 · 열양공주 · 관도공주 · 육양공주 · 역읍공주 · 획가장공주 · 평양공주 · 융려공주 · 평지공주 · 심수공주 · 평고공주 · 준의공주 · 무안공주 · 노양공주 · 낙평공주 · 성안공주 · 무덕장공주 · 평읍공주 · 음안공주 · 수무장공주 · 공읍공주 · 임영공주 · 문희공주 · 무양장공주 · 관군장공주 · 여양장공주 · 양안장공주 · 영음장공주 · 양적장공주 · 만년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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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1권 「광무제기(光武帝紀)」
2권 「명제기(明帝紀)」
3권 「장제기(章帝紀)」
유수
유장
유달
4권 「화제상제기(和帝殤帝紀)」
5권 「안제기(安帝紀)」
6권 「순제충제질제기(順帝沖帝質帝紀)」
유조 · 유륭
유호
유보 · 유병 · 유찬
7권 「환제기(桓帝紀)」
8권 「영제기(霊帝紀)」
9권 「헌제기(獻帝紀)」
유지
유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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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황후기(皇后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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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11권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12권 「왕유장이팽노열전(王劉張李彭盧列傳)」
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인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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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풍석,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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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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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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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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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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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岑彭
(? ~ 35)

후한의 개국공신. 형주 남양군 극양현 출신으로 자는 군연(君然).


2. 생애[편집]


경시 원년(23년), 유연(劉縯)과 유수 형제가 경시제 유현을 옹립하여 기의하였다. 신나라의 극양현장이었던 잠팽은 밀고오는 유수와 등신의 군세를 막지 못해, 가솔들을 데리고 전수대부(前隊大夫) 견부(甄阜)에게로 도망갔다. 견부는 도망쳐온 잠팽에게 노하여 그의 처와 어머니를 붙잡아 구속시키고, '당장 공적을 세우지 못하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며 협박했다. 잠팽은 인질로 잡힌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빈객들을 거느리고 필사적으로 소장안(小長安)에서 유수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견부도 전사하는 바람에 잠팽은 완(宛)으로 퇴각해, 전수이(前隊貳) 엄열(嚴說)과 함께 성을 굳게 지켰다. 그러나 성내 상황도 영 좋지 못해, 군량은 금방 떨어졌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니, 잠팽은 수 개월만에 경시제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경시제의 제장들은 잠팽을 비롯한 항장들을 전부 참해야한다 주장했지만 대사도 유연이 반대하며 말했다.

"잠팽은 군(郡)의 간부로서 절개를 다하여 지켰을 뿐입니다. 지금 거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땅히 의로운 선비를 작위에 봉해 표창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마음놓고 투항해올 수 있도록 권해야 합니다."

경시제는 유연의 말을 옳게 여겨 잠팽을 귀덕후(歸德侯)에 봉하고 유연 휘하에 배속시켰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유연은 경시제에게 살해당했고, 잠팽은 대사마 주유(朱鮪) 휘하의 교위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주유를 따라 신나라의 양주목(楊州牧) 이성(李聖)을 공격해 참하고 회양성(淮陽城)을 함락시켰다. 잠팽은 이때 공을 세워 주유의 천거를 받아 회양도위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경시제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회양군의 군현들을 평정키 위해 입위왕(立威王) 장앙(張卬)과 장군 요위(徭偉)를 보냈다. 그러나 요위가 반란을 일으켜 장앙을 치고 도주하니, 잠팽은 요위를 추격해 격파했다. 경시제는 잠팽의 공을 치하하고 영천(潁川)의 태수로 삼았다. 하지만 일찍이 용릉(舂陵)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무(劉茂)가 잠팽보다 먼저 영천군을 점거하는 바람에 부임지로 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이에 잠팽은 휘하 관원 수백 명을 거느리고 하내태수 한흠(韓歆)에게 의탁했다.

경시 2년(24년), 소왕(蕭王) 유수는 하북을 평정한 뒤 하내로 내려오던 중이었는데, 한흠은 잠팽을 불러 성을 지킬 방법을 논의하고 유수를 막으려 했다. 잠팽은 유수에게 귀순할 것을 제안했지만 한흠이 듣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유수의 군대가 회(懷)에 이르자 한흠은 누구보다 먼저 나아가 광무제를 영접하고, 하내군을 들어 유수에게 바치며 투항했다. 유수는 한흠의 신의없는 태도에 분노하여 그를 처형하고자 중군(中軍)의 북 아래에 매달아 두었다. 유수가 잠팽을 군영으로 불러 만났을 때, 잠팽이 입을 열어 유수에게 말했다.

"오늘날 적미(赤眉)는 관을 넘어 쳐들어오고, 경시제는 위태로우며, 권신들은 방종하여 조서를 사칭하고, 사방에서 군웅이 벌떼처럼 일어나 서로 싸우니, 백성들은 목숨을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듣건대 이제 대왕께서 하북을 평정하시어 왕업(王業)을 여셨다는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하늘이 한나라를 굽어살피신 것이며 선비들의 복이라 생각되옵니다. 이 팽(彭)은 대사도님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그 은혜를 다 갚기도 전에 화를 당하시니, 이는 영원히 제 마음 속에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대왕의 은덕을 입게 되었으므로, 저는 목숨을 바쳐 대왕을 보필하겠습니다."

잠팽은 덧붙여서 한흠이 남양(南陽)에서 유명하던 인물이니 훗날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 당부하였다. 유수는 이를 받아들여 한흠의 처형을 취소하고 그를 등우의 군사(軍師)로 삼았다.

잠팽은 기원(淇園)에 주둔하고 있는 경시제의 대장군 여식(呂植)을 설득해 유수에게 투항시켰다. 유수는 잠팽을 자간대장군(刺姦大將軍)에 임명하고 군대를 배속시켰다. 당시 상서령 사궁(謝躬)이 경시제의 명령을 받아 유수 견제 목적으로 수만 병력을 거느린 채 업(鄴)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수가 하내를 차지하자, 사궁 또한 세력을 뻗치기 위해 하내군 융려(隆慮)에서 도적떼 우래(尤來)를 토벌하려 들었지만 되려 패배하여 다시 업으로 향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던 유수는 즉시 오한과 잠팽을 보내 비어있는 업성을 점거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업성으로 돌아온 사궁은 오한에게 목이 베였고, 잠팽은 남은 사궁의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경시제의 무리를 하북에서 축출했다.

건무 원년(25년) 6월, 호현(鄗縣)에서 황제에 즉위한 광무제는 잠팽을 정위(廷尉)로 삼고 이전과 같이 대장군의 업무를 보게 하였다. 광무제는 하내군 회현으로 다시 행차하여 건위대장군 경엄을 황하 오사진(五社津)에 주둔시키고 대사마 오한, 건의대장군 주우(朱祐), 우장군 만수(萬脩), 집금오 가복(賈復), 정위 잠팽 등 11명의 장수를 보내 현한의 낙양성을 포위케 하였다. 경시제는 장앙 등이 일으킨 정변을 진압하느라 낙양을 구원할 여력이 없었고, 그렇게 현한의 좌대사마 주유는 지원도 없이 낙양성을 굳게 지켰다. 2개월이 지나도 낙양성이 떨어지지 않자, 잠팽은 성벽 앞에 나아가 자신의 옛 상관이었던 주유를 불렀다. 잠팽은 성벽 아래에서 성 위에 서있는 주유와 함께 서로 못보던 사이에 겪은 일들과 고생했던 이야기 등을 한창 떠들었다. 환담을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잠팽이 말했다.

"제가 이전에 채찍을 들고 장군을 시종할 때, 장군의 천거 덕에 발탁되었으므로 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정세를 보건대 적미(赤眉)가 이미 장안을 차지했고, 경시제는 삼왕(三王)의 난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저희 황제께서는 천명을 받으셔서 연(燕)과 조(趙)를 평정하시고,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차지하시니, 백성들이 마음으로 귀의하고 현준한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폐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친히 낙양에 이르신 것입니다. 천하의 일은 앞으로도 이 흐름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공께서 비록 성을 굳게 지킨다 하여도 장차 무엇을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우가 대답했다.

"대사도가 해를 입었을 때 내 그 모의에 관여한 바 있고 또, 경시제께도 소왕(蕭王)의 북벌을 막으라 간언한 바 있으니, 진실로 나의 죄가 깊음을 이미 알고 있소."

잠팽은 군영으로 복귀해 광무제에게 이를 보고하자, 광무제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하는 자는 작은 원한을 마음에 두지 않소. 만약 주유가 지금 투항한다면 벼슬과 작위를 내릴 것이거늘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 마침 하수(河水)가 여기에 있으니, 하수에 두고 맹세하겠네. 나는 한번 약속한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소."

잠팽은 다시 낙양성으로 가 광무제의 말을 전했다. 주유는 성 위에서 밧줄 드리우고는 말했다.

"그대의 말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이라면 이 밧줄을 타고 올라오시오"

잠팽이 머뭇거리지 않고 밧줄을 타고 올라오자 주유는 항복을 결심했다. 5일 후, 주유는 제장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만일 돌아오지 않는다면 군사를 거느려 언왕(郾王)에게로 가라' 일러놓고 날랜 기병들과 함께 잠팽의 안내를 받아 광무제에게 갔다. 광무제는 주유의 포박을 손수 풀어주고 다시 낙양성에 돌려보내니, 성 안에 대기하던 전병력이 나와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주유는 약속대로 평적장군에 임명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해졌다.

건무 2년(26년), 잠팽은 광무제의 명령을 받들어, 형주로 가 주(犨), 섭(葉) 등 10여개의 성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당시 남쪽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남군(南郡) 사람 진풍(秦豐)이 여구(黎丘)를 거점으로 초려왕(楚黎王)을 자칭하며 12개의 현을 점거했고, 동흔(董訢)과 허한(許邯)이 각각 도향(堵鄕)과 행(杏)에서 거병하였다. 또, 남양(南陽)에서 경시제가 파견한 제장들이 제각기 크고 작은 성을 점거한 채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활개치고 있었다.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한의 군대는 지나는 지역마다 약탈한 일이 잦았고, 결국 오한이 신야를 약탈하면서 일은 커지고 만다. 신야 출신인 파로장군 등봉(鄧奉)이 광무제를 알현하고 돌아오는 도중, 오한의 군대가 자신의 고향을 약탈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등봉은 무리를 모아 오한을 격파해 그 치중을 탈취하고, 육양을 근거지로 삼아 동흔 등과 같은 인근 군벌들과 연합했다.

동년 가을, 잠팽이 행을 공격해 군벌 허한의 항복을 받아냈다. 광무제는 잠팽을 정남대장군으로 옮겨 등봉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주우, 경엄, 왕상, 유굉(劉宏), 유가(劉嘉), 경식(耿植) 등을 보내 그를 돕게 했다. 잠팽은 먼저 등봉과 연합한 동흔을 쳤으나, 등봉이 1만여 병력을 이끌고 동흔을 도왔다. 등봉의 군사들은 남양의 정예병이라 잠팽 등이 오히려 패해 가복이 부상당하고, 주우가 사로잡히는 수모를 겪으며 수 개월을 허비하였다.

건무 3년(27년) 여름, 보다못한 광무제가 친히 남정하여 섭(葉)에 이르렀다. 동흔은 자신의 별장에게 수천 병력을 주어 광무제의 길을 막게 하였다. 광무제는 잠팽 등을 지휘해 동흔의 군사를 궤멸시키고 도양(堵陽)에 주둔했다. 등봉은 광무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근거지인 육양으로 도주했으며 동흔은 금새 항복을 선언하였다. 광무제는 잠팽, 경엄, 부준(傅俊) 등을 거느려 등봉을 추격하니, 등봉은 이내 육양을 버리고 도망치다가 소장안에서 따라잡혀 격파당했다. 등봉이 급히 항복을 청하자 광무제는 그가 이전에 세운 공도 있고 반란을 일으킨 사정도 납득이 가능한 정도라 용서해주려 하였다. 이에 잠팽과 경엄이 나서서 간언했다.

"등봉은 배은하고 반역하여, 1년 동안 포악한 군사를 부려 가복을 부상 입혔고 주우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또, 폐하께서 친히 왔음에도 바로 귀순하기는 커녕, 뉘우침 없이 진을 세워 항거하였다가 패한 뒤에야 항복했습니다. 만약 등봉을 주살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악(惡)을 징벌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등봉은 유수와 유연이 극양을 공격하던 시절부터 삼촌인 서화후(西華侯) 등신을 따라 유수를 섬겼던 공신이었음에도 참수되었다.

등봉을 진압한 후, 광무제는 돌아가면서 잠팽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초려왕 진풍을 정벌하라 명하고, 부장으로 부준, 장궁(臧宮), 유굉 등을 남겨 그를 돕게 하였다. 잠팽은 남진해 황우(黃郵)를 쳤으나 초나라의 대장군 채굉(蔡宏)이 성을 굳게 지켰고, 진풍도 등(鄧)에서 출병하여 채굉을 도왔다. 잠팽군이 황우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수 개월간 지지부진하니, 광무제는 서신으로 잠팽을 책망하였다. 한바탕 혼이 난 잠팽은 두려워, 밤중에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다음 날 아침에 산도(山都)를 치겠다'는 군령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일부로 포로들 관리를 소홀히 하여 이 정보가 진풍에게 흘러가도록 하였다. 과연 잠팽의 예상대로 진풍이 총력을 기울여 산도로 방향을 틀자, 잠팽은 경로를 우회해 면수(沔水)를 건너고 아두산(阿頭山)에 주둔해있던 초나라 장수 장양(張楊)을 대파했다. 잠팽은 계곡을 따라 나무를 베고 길을 내며 여구를 급습해 그곳에 주둔한 병력을 격파했고, 이 소식에 깜짝 놀란 진풍은 서둘러 군을 물려서 여구로 돌아왔다. 잠팽의 군대는 동산(東山)에 진영을 벌려놓고 있었는데, 여구에 도착한 진풍과 채굉이 이를 야습했다. 하지만 야습을 예상한 잠팽이 미리 복병을 심어두어 진풍과 채굉을 역습하니, 초군은 크게 패해 흩어졌고 대장군 채굉이 전사하였다. 광무제는 잠팽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를 무음후(舞陰侯)로 개봉하였다.

초나라 승상 조경(趙京)이 의성(宜城)을 바치고 광무제에게 항복하였다. 광무제는 조경을 성한장군으로 삼고 잠팽을 도와 여구를 포위하도록 했다. 이릉(夷陵)에는 군벌 전융(田戎)이 주성왕(周成王)을 자칭하고 있었는데, 진풍의 패전 소식을 듣고 투항하고자 하였다. 전융의 부하 신신(辛臣)이 지도를 꺼내, 팽총, 공손술, 장보, 동헌 등이 차지한 영역을 보여주며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 하였으나, 전융은 '그정도 세력을 거느리던 진풍도 당했는데 나라고 별 수 있냐'며 항복 의사를 전하기 위해 여구로 향했다. 그런데 이릉에 남겨진 신신이 곧바로 전융의 보물을 훔쳐 잠팽에게 전하면서 먼저 항복했다. 신신에게 통수 맞은 전융은 투항을 망설이다가 귀갑으로 점을 쳤다. 불에 달궈진 귀갑은 갈라졌고 항복하기로 한 점괘에서 흉이 나오자, 전융은 그대로 진풍과 군세를 합쳤다. 잠팽은 변심한 전융과 수 개월간 싸워 그 군대를 전멸시켰고, 전융의 대장군 오공(伍公)의 항복을 받아냈다. 패배한 전융은 이릉으로 도주해 변절자 신신을 제거하였다.

건무 4년(28년) 12월, 잠팽이 진풍과 싸우면서 참수한 적군의 수가 9만여 명이나 되었다. 진풍의 군사는 숫자가 크게 줄어 어느덧 1천여 병력 밖에 남지 않았고 양식도 다 떨어졌다. 광무제는 여구에 도착해 잠팽과 휘하 장병들을 위무하고 공훈 있는 백여 명을 봉작하였다. 진풍의 세력이 매우 약소해졌다 판단한 광무제는 주우로 하여금 잠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잠팽과 부준은 이릉으로 가 전융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잠팽은 이릉에서 전융을 크게 격파하고 전융의 처자와 전융군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전융은 수십 기만 대동한 채 촉 땅의 공손술에게 도주해 익강왕(翼江王)에 봉해졌다.

건무 5년(29년), 잠팽은 전융도 추격할 겸 공손술까지 정벌하기 위해 촉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지형이 험난하여 진군하기 힘들고 보급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라 판단해 포기하였다. 그는 강주(江州)에 위로장군 풍준(馮駿), 이릉에 도위 전홍(田鴻), 이도(夷道)에 영군 이현(李玄)을 보내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진향(津鄕)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사 배치를 끝낸 잠팽은 항복해 오는 자는 광무제께 아뢰어 제후에 봉해 주겠노라고 주변 지역에 군벌들에게 알렸다. 당초, 교지목 등양(鄧讓)과 친분이 있었던 잠팽은 편지를 보내 광무제의 위덕을 설명하고, 편장군 굴충(屈充)으로 하여금 형주를 돌아다니면서 격문을 뿌리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江夏), 무릉(武陵), 장사(長沙), 계양(桂陽), 영릉(零陵), 창오(蒼梧), 교지의 태수들이 모두 앞다투어 귀순해왔다. 태수들은 사신을 보내 광무제에게 강남의 진기한 보물을 헌납하였고, 이들은 모두 열후에 책봉되었다. 봉작된 형주의 태수들은 자신의 자제들과 병력을 잠팽에게 보내 지원하였다.

건무 6년(30년), 광무제는 잠팽을 수도로 불러들여 후히 상을 내렸다. 그리고 명을 내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묘를 돌보고, 모친에게도 안부를 물을 수 있게 하였다.

건무 8년(32년), 광무제를 따라 천수(天水)에서 외효의 군대를 격파했고, 외효는 서성(西城)으로 패주하였다. 광무제는 잠팽과 오한에게 서성 포위를 맡기고, '서성 공략이 끝나거든 곧바로 촉으로 진격하라'는 명을 남긴 채 돌아갔다. 하지만 광무제의 기대와 달리, 잠팽과 오한이 서성 공성에 애를 먹으면서 전투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마침내 식량이 떨어지고 탈영병이 하나둘 늘어가자, 잠팽은 조급해져 계곡의 물을 막아 수공으로 서성을 함락시키려 하였다. 서성이 거의 물에 잠길 즈음, 갑자기 외효의 장수 행순(行巡)과 주종(周宗)의 구원병이 나타나니, 오한과 잠팽은 서성 공략을 포기하였고 외효는 장수들의 호위를 받아 기성(冀城)으로 들어갔다. 이에 상규(上邽)에서 공손술의 원군을 막고 있던 갑연과 경엄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외효는 추격병을 보내 후퇴하는 한군을 쳤으나 잠팽이 부대 최후미에서 용감히 싸워 추격병들을 무찔렀다.

건무 9년(33년), 공손술이 장수 임만(任滿), 전융, 정범(程汎)에게 수만 병력을 주고 강관(江關)으로 내려가게 했다. 임만 등은 풍준, 전홍, 이현을 전부 격파하고 이도, 이릉, 형문(荊門), 호아(虎牙)를 함락시켰다. 공손술의 군사들은 부교(浮橋)와 누각을 강 곳곳에 설치하고, 강에 찬주(欑柱)를 박아 물의 흐름을 막으면서 광무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잠팽은 여러 차례 형문에서 이들을 쳤으나 이기지 못해, 곧장 누선과 전함 수천 척을 건조하였다.

건무 11년(35년) 3월, 잠팽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출정을 준비하였다. 때마침 병주에 있던 대사마 오한, 주로장군 유륭(劉隆), 보위장군 장궁, 효기장군 유흠도 광무제의 명을 받아 이동해 잠팽과 합류했다. 잠팽이 형주에서 6만 명의 노젓는 인력과 5천 필의 군마를 추가로 징집하자, 오한은 6만 명이 추가로 소비하는 군량이 너무 많다며 불평하였다. 이에 잠팽이 광무제에게 서신을 보내 의견을 물으니, 광무제는 '그대는 오한보다 수전에 능하니, 그대 알아서 하라'는 답장을 보냈다.

잠팽은 여러 전함과 누선을 거느리고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형문을 쳤다. 잠팽군이 공손술군의 부교 하나를 점령하자 잠팽은 적진에 제일 먼저 오르는 자에게 최고상을 내리겠다 선언했다. 편장군 노기(魯奇)가 선봉에 자원하여 누선을 타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노기의 배가 통제를 잃고 공손술군의 찬주에 걸려 나아가지 못했다. 노기는 기지를 발휘해 불화살을 쏘아 적들의 누각에 불을 붙혔다. 불은 강풍을 타 금방 번졌고, 공손술군의 누각은 모두 불 타 없어졌다. 갑작스런 화계에 공손술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잠팽은 전군을 들어 총공격을 명했다. 임만이 전사하고 정범이 사로잡히면서 공손술군은 전멸했고, 물에 빠져 익사한 자만 수천이나 되었다. 전융은 겨우 살아서 강주로 도망쳤다.

잠팽은 유륭을 남군태수로 천거하여 형주에 남게 하고, 장궁, 유흠 등과 함께 이어서 전융을 추격해 익주로 들어갔다. 잠팽은 군령을 엄히 내려 병사들이 감히 약탈하지 못하게 막았고 지나가는 현마다 장로들을 만나 안심시키니, 익주의 백성들이 사방에서 투항해왔다. 마침내 강주에 도착한 잠팽은 전융의 식량이 풍족한 것을 보고 빠른 시일 내에 함락하기 힘드리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풍준을 남겨 전융의 동향을 감시케 하고 자신은 지름길을 이용해 강을 건너 평곡(平曲) 쳐 함락시켰다. 잠팽이 강주를 우회하여 진격해오자, 공손술은 위기를 감지하고 자신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동생인 공손회(公孫恢)와 연잠, 왕원, 여유(呂鮪)를 보내 광한(廣漢)과 자중(資中)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또, 후단(侯丹)에게 2만 군사를 주어 황석(黃石)에 주둔시켰다. 잠팽은 진영에 허수아비를 많이 설치해 장수 양흡(楊翕)과 장궁에게 공손회의 대군을 막게 하고, 자신은 정예기병으로 후단의 진영을 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연이어 진격해 무양(武陽)을 함락하고 광도(廣都)에 이르니, 공손술이 무척 놀라 공포에 질렸다.

팽망(彭亡)에 주둔하던 잠팽은 뒤늦게 그 지명을 알고 무척 불길하게 여겨 주둔지를 옮기려 했으나 날이 저물어 실행하지 못했다. 그 날 저녁, 공손술이 보낸 자객이 도망쳐 온 노비를 가장하고 잠팽에게 접근해 칼로 찔러 죽였다. 일찍이 공곡왕 임귀(任貴)가 잠팽의 명성을 듣고 투항해온 적이 있었는데, 광무제는 임귀가 바친 공물을 모두 잠팽의 처자식에게 하사하고 시호를 '장(壯)'이라 하였다. 촉 땅 백성들은 잠팽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양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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