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물랭

덤프버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s_Clayes_sous_Bois_Monument_Jean_Moulin.jpg
레클레스부아에 세워진 그의 추모 비석
Jean Moulin (장 물랭)
1899년 6월 20일 ~1943년 7월 8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2차 대전: 레지스탕스의 상징
2.3. 죽음
3. 배신자는 누구인가?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 내부의 레지스탕스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지도자. 드골의 정치적인 은인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99년 프랑스 남부의 베지예에서 지질학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가 평생토록 유지한 정치적 신념인 공화주의는 바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1918년 막바지에는 공병으로 입대하였지만 그가 기초 훈련을 받는 사이에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종전 후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지방에서 행정경험을 쌓기도 했는데 1925년에는 당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군수에 임명되는 기록을 쌓기도 했다. 게다가 미적으로도 꽤나 재능이 충만했는데[2] 이 소질을 잘 살려서 신문에 정치적인 풍자 만화들을 연재하기도 했다.


2.2. 2차 대전: 레지스탕스의 상징[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로 물랭은 기갑부대에 입대신청을 했지만 시력과 공직자라는 그의 신분이 문제시되어 불합격한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단 6주만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을 당시 그는 에르-외-루아르의 시장으로 재직중이었다. 1940년 7월에 게슈타포는 그를 체포하여 구금하는데, 그가 세네갈에서 온 외인부대민간인들을 학살했다[3]라는 거짓된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그 이유. 감옥에서 그는 부러진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 기도를 하는데, 이 때 생긴 흉터를 감추기 위해 늘 목에 두르고 다녔던 스카프는 그와 레지스탕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해임[4]된 물랭은 낙향하여 레지스탕스에 가입한다.

1941년 9월 몰래 런던으로 잠입한 물랭은 그 곳에서 샤를 드 골을 만나고 정치적 이념에 따라 사분오열되어있던 레지스탕스를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라는 임무를 수여받는다. 1943년 5월 27일 모든 정치 계파가 참여한 가운데 파리에서 열린 전국저항평의회로 물랭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레지스탕스의 통합과정과 배경 및 결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해당 링크를 참조하자.


2.3. 죽음[편집]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둔지 불과 한 달 정도가 지난 1943년 6월 21일에 그는 리옹 교외의 어느 집에서 비밀 회의를 열다가 다른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다. 리옹 내 게슈타포의 총 책임자였던 클라우스 바르비에 의하여 가혹한 고문[5]을 받은 그는, 추가 심문을 위해[6] 독일로 이송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7]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그의 가묘가 1964년 팡테옹으로 이장된다.


3. 배신자는 누구인가?[편집]


그 날 게슈타포의 습격을 가능하게 했던 레지스탕스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날 물랭과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된 르네 하디가 배신자로 지목되었지만 본인이 부인하였고 재판에서도 그는 무혐의를 선고받았다. 또한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 골의 대변자 역할을 맡았던 물랭과 자주 갈등을 빚은 공산주의 계열을 배신자로 지목하는 주장이 최근에는 힘을 얻고 있다.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클라우스 바르비 본인도 전쟁 40년후 프랑스로 인도되어 재판을 받던 중에 당시 레지스탕스 내 공산계열 지도자였던 레이몽 오브라가 밀고자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정확한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4.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콜뤼슈
6위
7위
8위
9위
10위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장 가방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볼테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루이 뤼미에르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샤를 트르네
미셸 사르두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다비드 두이예
앙리 살바도르
쟝 자끄 골드만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야니크 노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시몬 베유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리오넬 조스팽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5 12:15:52에 나무위키 장 물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좌우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레지스탕스의 회합에서 드골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추대하기로 이끈 것이 바로 물랭[2] 특히나 에칭같은 판화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3] 당연히 실제로는 독일군이 행한 짓.[4] 정확히 표현하자면 비시 프랑스가 모든 좌익 계열의 시장들로 하여금 사임할 것을 요구하자 물랭이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비시 정부는 쿨하게 그를 짤랐다.[5] 두들겨패는 건 당연히 기본이고 손톱 밑에 못을 쑤셔넣는다던지 손을 문 틈에다 끼워넣고 관절이 으스러질때까지 계속 찧는 행위도 자행됐다.[6] 여담으로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받던 와중에도 레지스탕스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7] 후일 체포된 클라우스 바르비는 자기의 고문 탓이 아니라 전에 행했던 자살로 인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헛소리네'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