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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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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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005-C002-0632-01_L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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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건상.jpg}}}
출생
1882년[1] 12월 19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신곡리
(현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2]#
사망
1974년 5월 14일 (향년 91세)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3]
자 / 호
찬성(贊成) / 소해(宵海)
부모
아버지 장운원, 어머니 전주 이씨
형제자매
4남 2녀 중 4남
학력
와세다대학 (중퇴)
발프레이조 예비학교 (졸업)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8대 학무장관
1942년 10월 ~ 1945년 3월 18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선거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정치인.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2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신곡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에서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의 10대손인 아버지 장운원(張雲遠)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성학(李聖鶴)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집이 경상도 동래부로 이전하면서 동래부에서 자랐다. 좌천재에서 한문을, 육영재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공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이후 미국 발프레이조 예비 학교,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탈퇴하였다. 1920년 말 베이징 시로 건너가 국민 대표자 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 통일 회의를 조직했다.

1926년 10월 한국 유일 독립당 촉성회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 입각, 국무 위원, 학무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탈퇴, 근로인민당 부위원장과 민족주의 민주 전선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 인민당을 이끌었다.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 협상 기간 중 북한 측의 일방적 협상 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 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4]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5]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혁신동지총연맹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박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사후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편집]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경남 제2선거구[6])

[[무소속|
무소속
]]

26,720(58.87%)
당선 (1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경남 제6선거구[7])

파일:혁총맹.png

16,729(42.46%)
낙선 (2위)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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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동장씨대동보 15권 남산파 269쪽에는 188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인근의 오태동·구평동·황상동·인의동·양호동·구포동·임수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12.12 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과 장세용 구미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남산(南山)파 31세 상(相) 항렬.[4] 이후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미쳐 탈출 하지 못하여 여운홍과 함께 북한과의 악연이 다시 시작됐고 납북당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따돌리는데 성공하여 납북을 피할 수 있었다.[5] 이러한 입각 제의는 먼 친척인 장택상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장건상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자리를 받을 경우 민족 분열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장택상에게 정중히 거절했고 장택상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러한 거절을 전달했다고 한다.[6] 부산시 을[7] 부산시 동구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