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r2019031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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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기표 (張基杓, Jang gi pyo )
출생일
1945년 12월 27일
출생지
미군정 경상남도 밀양군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소속 정당
무소속
경력
민중당 정책위원장
개혁신당 대표
민주국민당 당원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녹색사회민주당 대표
사회민주주의포럼 운영자
신문명연구원 대표
1. 개요
2. 생애
2.1. 재야 운동가
2.2. 정치 입문
3. 저서
4. 선거 이력


1. 개요


1945년 12월 27일 출생. 마산공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재야 노동 운동가였으며 현재는 재야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은 14대부터 18대까지 계속 도전하였지만 모두 낙선했다(...)
오랫동안 정치에 도전하면서 그의 정치관에 공감하는 열성 지지자들도 소수나마 얻었지만, 정당의 결성과 해체를 너무 많이 해서 '창당 전문가', '창당과 해체 전문' 등의 부정적 꼬리표도 따라다닌다.[1]

2. 생애



2.1. 재야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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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부인 조무하씨, 오른쪽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여사
김문수, 이재오, 조영래, 이광택 등과 함께 원조 재야운동가 였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의 단과대 학생회장이 였으며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 운동의 관심을 보여 서울대학교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뤄주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이후로 여러번 복역과 가석방, 석방을 거쳤는데 위 사진도 그 당시 가석방 되며 찍힌 사진이다.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자 전태일 사후 적극적인 노동운동가가 된 이소선 여사[2]는 죽는 날까지 장기표와 김문수를 아들로 여기며 살았는데[3], 1977년 민청학련 당시 잡혀간 장기표의 재판에서 장기표가 박정희 유신정권의 잘못된 점에 대해 긴 연설에 가까운 변론을 하자, 당황하여 고압적으로 장기표의 말을 끊던 검사와 판사에게 분노한 이소선 여사가 호통을 쳤다가 법정모욕죄로 잡혀가서 징역 1년을 살았던 적이 있다. 첫번째 재판에서 검사가 장기표에게 "당신 노동운동 때문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북한에 유리해지는 거 아니냐, 그러다가 북한군이 침투하면 어쩔거냐'며 어이없는 종북 프레임을 걸자, 방청석에 있다가 분노한 이소선이 "(노동자들이) 배고파서 임금인상을 하라는데, 그게 이북하고 무슨 상관이냐!"며 소리를 질러서 재판정을 싸하게 만들었고, 두번째 재판때 판사가 연설하던 장기표에게 "피고인! 간단하게 얘기하라구요!"라고 하며 말을 끊자, "판사나 검사나 다 똑같은 놈이구만, 판사라캐서 검사랑 다른 게 있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한술 더 뜨네!"라고 다시 소리를 질러 재판을 중지시켰는데, 그 후 며칠 뒤 밤에 갑자기 경찰들이 집에 들이 닥쳐서 '장기표 재판정에서 검사와 판사를 모욕한 혐의로 연행한다'며 잡아가서 재판을 받게 되고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소선은 이미 노동운동을 시작한 뒤라서 그 재판 이전에 노조를 데리고 노동청 건물 앞으로 가서 시위를 한 적이 있었고, 그것때문에 정부의 눈엣가시였는데 재판문제로 건수가 잡혀 간 것으로 본인은 생각했다.

2.2. 정치 입문


1990년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등과 함께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기치로 재야의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을 모아서 민중당을 창당하였으나 1991년 지방선거, 1992년 14대 총선에서 모두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장기표도 서울 동작(갑)에 출마해서 21%를 득표했지만 3위로 첫번째 낙선한다.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자동해산되었고,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4]
1993년 최초의 문민정부를 내세우면서 집권한 김영삼이 여당(민주자유당) 물갈이를 염두에 두고 과거 민중당 출신들과 재야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들을 대거 영입할 때도 합류하지 않았다. 이때 민중당 시절의 동료였던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와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손학규, 박형준 등이 모두 민주자유당으로 줄줄히 입당하는데도 따라가지 않았다. 이 시점이 되면 과거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제도정치권에 진출한 상태였다.
결국 장기표는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는 통합민주당에 합류해서 서울 동작(갑)에 출마했지만 이번에도 3위로 두번째 낙선 그리고 선거 직후 탈당한다. 당시 통합민주당은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민주당 잔류파(이기택, 노무현, 이부영, 제정구, 김원기 등등)와 시민운동 세력이 주도한 개혁신당의 합당으로 출범했는데 집권 김영삼의 민주자유당과 강력한 고정지지층을 가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치이면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3위로 밀려났다.
선거 직후 민주당을 탈당하고 한동안은 제도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신문명연구원"이란 자신의 연구소를 만들어서 집필과 강연에만 주력하였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독자적인 진보정당, 깨끗한 개혁정당으로 일관된 노선을 걸었지만 이후부터는 오로지 국회의원 금뱃지를 위해서 정치권을 기웃기웃하며 정계 진출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진보던 보수던 간에 끌여들여 선거때마다 신당을 급조해서 출마를 하는 철새 행태를 보여서 사람들의 비난을 사게된다.
우선 낙천낙선운동이 거세게 몰아닥친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보수 정치인들이 만든 민주국민당 창당에 느닷없이 가담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사실 이때 민주국민당은 말 그대로 여야에서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이 오로지 금뱃지를 달겠다는 일념하에 뭉친 급조 정당으로 뚜렷한 이념도, 확실한 정치노선도 없는 말 그대로 잡탕이었다. 장기표는 전국구 3번으로 출마했으나, 세번쨰 낙선 그리고 선거 직후 탈당했다.
이때쯤 부터는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에서는 멀리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저 선거때마다 이당 저당 기웃거리는 정치낭인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2002년에는 8월8일 재보선을 앞두고 갑자기 집권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서 서울 영등포(갑)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네번째 낙선 그리고 선거 직후 탈당했다.[5] 그리고 또다시 제도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집필과 강연활동으로 돌아갔다. 2002년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권영길이 맞붙은 15대 대선에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2004년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국노총이 급조한 한국사회민주당[6]의 대표를 맡았는데 녹색정치를 주장하던 녹색평화당과 합당해서 녹색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녹색사회민주당 후보로 서울 동작(갑)에 다시 출마했으나 득표율 4.8%, 5위라는 안습의 성적으로 다섯번쨰 낙선하였다. 녹색사민당은 정당법상 등록요건이 미달되면서 선거 직후 자동해산되었다.
이후로는 언론에서 기사조차 거의 안나올 정도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간간히 책만 내면서 지내다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권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보수이론가로 유명한 박세일[7] 교수와 손잡고 국민생각을 창당하더니 얼마안가서 다시 뛰쳐나와서는 갑자기 동교동계 원로들이 대놓고 호남지역주의를 표방하면서 창당한 정통민주당에 합류했다. 그리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역시나 여섯번째 낙선하였다. 정통민주당은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를 분산시켜서 새누리당에게 총선승리를 안겨주는 역할만을 하고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채 자동해산되었다.[8]
한국노총의 주도로 만들어진 한국사회민주당의 대표를 맡은 후 녹색사회민주당의 대표를 맡고 사민포럼을 주도하는 둥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자유주의적 좌파가 되어간다(...) 김문수의 안티테제[9] 싶더니만, 보수 인사인 박세일 전 의원과 손잡고 중도 정당 국민생각을 만들려다가 결국 반목하여 이탈,[10] 보수적 호남 지역주의 성향의 정통민주당에 합류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게 장기표는 진보 성향이 강하지만 보수적인 측면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녹색사회민주당 당시에도 정강정책에 '이대로 성장률이 떨어진다면, 우리나라는 남미(그 중에서도 아르헨티나)처럼 될 것이다.'라고 명시할 정도였다(게다가 당시는 노무현 정권 때였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북한이나 중국 등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북한에 대해 온건하게 대처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에도 매우 비판적이었다.[11]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었으나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3. 저서


1. 통일 초코파이(한반도 통일전략), 2016년, 도서출판 꿈과 의지, ISBN 9788983010513
2. 지못미 경제(청소년 경제 교과서), 2009년, 도서출판 시대의 창, ISBN 9788959401703
3. 불안없는 나라 살맛나는 국민(자아실현정치론), 2016년, 도서출판 구사, ISBN 9788996818519
4. 참된 진보정치를 선언하며(녹색사회민주주의), 2015년, 도서출판 글통, ISBN 9791185032160
5.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1995년, 백산서당, ISBN 9788973271078
6. 한반도 통일과 중국, 2013년, 사회와 연대, ISBN 9788989097457
7.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2013년, 백산서당, ISBN 9788973274857
8. 장기표의 신문명 국가비전, 2007년, 밀알, ISBN 9788941802587
9. 대통령님 나라 팔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1999년, 신문명, 절판
10. 새벽노래(에세이), 1988년, 미래사, 절판
11. 신문명 국가비전, 2001년, 신문명, 절판
12. 신문명 경제시론, 2001년, 신문명, 절판
13. 한국 경제 이래야 산다, 2006년, 도서출판 명상, 절판
14. 북한 위기의 본질과 올바른 대북정책, 2007년, 신문명, 절판
15.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에세이), 2007년, 도서출판 밀알, 절판
16. 구국선언, 1998년, 신문명, 절판
17. 문명의 전환, 1997년, 미래 M&B, 절판
18.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 1998년, 형성사, 절판
19. 사랑의 원리, 1996년, 한길사, 절판
20. 해방의 논리와 자주 사상, 1988년, 도서출판 친구, 절판
21. 민중 시대의 정치와 운동, 1991년, 한길사, 절판
22. 80년대의 상황과 실천, 1991년, 한길사, 절판
23. 대통령 대 국민, 2004년, 신문명, 절판
24. 한국사회개혁론(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 1), 1991년, 한길사, 절판
25. 지배의 논리와 해방의 논리 1,2, 1991년, 한길사, 절판
26. 창살의 노래 햇살의 노래, 1991년, 한길사, 절판
27, 우리 사랑의 기쁨으로(에세이), 1991년, 한길사, 절판
2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세이), 1991년, 한길사, 절판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민중당
21,181(21.5%)
낙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통합민주당
18,851 (19.1%)
낙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3번)
민주국민당
695,423 (3.7%)
낙선

2002
2002년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새천년민주당
14,419 (37.7%)
낙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녹색사회민주당
5,202 (4.9%)
낙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번)
정통민주당
48,624 (0.2%)
낙선


[1] 사실 대한민국의 정당 구조가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불안정한 편이라 주요 대권 주자들이 창당을 밥 먹듯이 했지만 그들에게는 창당 전문가라는 딱지는 안 붙는다. 그들은 국회의원들은 기본으로 다수 당선시키며 본인도 대통령까지 된 경우가 많기 때문. 하지만 장기표에게 창당 전문가라는 딱지가 붙은 건 안타깝게도 주요 선거에서 본인을 포함한 후보들을 당선 못 시키면서 창당 많이 했기 때문이다.[2] 훗날 노동운동 관련으로 감옥을 두번이나 갔다. 한번은 본인의 친아들이자 전태일의 친동생인 전태삼과 함께 감옥에 간 것이었다. 당시 전태삼이 결혼하여 손자손녀도 있던 시기였는데, 갓 태어난 손자 이름도 못 짓고 그 아버지와 할머니가 감옥에 잡혀간 것이었다.[3] 장기표건 김문수건 사실 전태일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녀는 가까워진 후 그들에게 '우리 아들이 대학생 친구를 그렇게 사귀고 싶어 했는데 왜 이제 왔느냐'며 눈물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한 세월 속에, 그들이 그녀를 어머니로 여기게 되고, 자신도 그들을 아들로 여기게 된다. 세월이 흘러 그녀의 말년 시절, 김문수가 신한국당, 한나라당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본 뒤에도, 인터뷰를 하다가 김문수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운 자식이지만 효도하던 아들이 불효한다고 어미가 내칠 수 있느냐, 회초리를 들건 어르고 달래건 옳은 길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게 어미다. 기표도 문수도 내 아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으로 국회의원 한번 못해본 장기표가 너무 안타깝고 속상하다며 '기표도 정 안 되면 문수처럼 다른 데 가서 대가리 한번 숙이더라도(신한국당이라도 들어가는 굴욕을 겪고) 국회의원 좀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민주화운동가 출신 작가 오도엽의 책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내용 중 발췌)[4] 이때 그래도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다시 도전한게 노회찬. 이들은 몇년동안 진보정치연합, 진보정당건설추진위원회의 간판을 달고 활동하다가 결국 민주노총과 손잡고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5] 이때 2000년 민주국민당에 같이 참여했던 김상현(1935)은 민주당 후보로 광주 북구에 출마해서 당선된다.[6] 민주노총과 노회찬이 주도해서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4년간의 꾸준한 활동 끝에 17대 총선에서 원내진입이 유력시 되자, 경쟁관계였던 한국노총이 선거 직전에 급조한 정당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꾸준히 연대를 제안했지만 민주노총과의 경쟁심리 때문에 한국노총은 독자 정당 창당에 나선것이다.[7] 김영삼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세계화 선언을 기초하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도입한 인물이다.[8] 실제 정통민주당 후보들은 지역구마다 3~5%를 득표했는데, 이보다 근소한 차이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이 태반이었다. 특히 수도권.[9] 둘다 재야운동가로 시작하여서 김문수는 점점 권위주의적 우파가 되어갔고 장기표는 반대이다[10] 장기표 본인은 자유무역협정(FTA), 특히 당시에 시끄러웠던 한미 FTA와, 역시 시끄러웠던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노동 운동을 하던 인물이라 FTA에 비판적이었고 환경 운동을 했기에 제주해군기지에 비판적이었던 것. 반면 박세일은 보수 스탠스에 충실해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에 긍정적이었고 그의 입장이 당론으로 관철되었다. 이런 식으로 장기표 입장에서는 계속 본인의 신념이 배치되는 당론이 형성되니 회의감을 느꼈는지 결국 국민생각 창당준비위원회를 떠났다. 그 결과 국민생각은 그냥(...) 별 특징 없는 보수 성향 군소 정당이 돼 버렸고, 전여옥을 영입해 잠시 원내 정당이 되었지만 총선에서 폭망해 사라졌다.[11] 그런데 앞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장기표는 군사적으로 대비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적극 찬성했으면서도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조치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그의 이런 스탠스가 널리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는 의문스러운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