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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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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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張都暎 | Chang Do-young

파일:장도영.jpg
출생
1923년 1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사망
2012년 8월 3일 (향년 89세)[1]
미국 플로리다 주 오렌지 카운티 올랜도 시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

강룡(岡龍)
재임기간
제14대 육군참모총장
1961년 2월 17일 ~ 1961년 6월 5일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A]
1961년 5월 20일 ~ 1961년 7월 2일
제12대 국방부장관
1961년 5월 20일 ~ 1961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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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백형숙
자녀
아들 장효수, 장경수, 장진수, 장완수
딸 장윤화
친인척
처종숙부 백인제, 백붕제
6촌 처남 백낙환
학력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토요대학 (사학 / 중퇴)
육군보병학교 (졸업)
미시간 대학교 (정치학 / 석사·박사)
종교
개신교 (감리회)
경력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A]
제12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 교수
군사 경력
임관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44년~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1961년 8월 22일
최종 계급
소위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 제6보병사단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2군사령관
참전
6.25 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초년
2.2. 군인의 길에 들어서다
2.3. 6.25 전쟁: 6사단장 시절
2.4. 5.16 군사정변과 그 이후
2.5. 말년
3. 대중매체에서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군인.

2. 생애[편집]



2.1. 초년[편집]


1923년 1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일본군 학병으로 장준하와 함께 중국 쉬저우에 주둔했던 쓰카다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독립운동 여정을 담은 수필 '돌베개'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책에는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모 장군'이라고 칭하고 실명을 밝히지는 않는다. 당시 일본군 병사였던 모 장군은 일본인 고참병들이 남긴 음식을 혼자 먹기 위해 더러운 손을 밥그릇에 넣어 뒤돌아 혼자 먹는 추태를 보인다. 조선인 탈주병이 생겨 부대 내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생활이 고달퍼지자 조선인들이 모여있는 내무반 안에서 조선인 동료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고는 "이제 또 누가 도망치겠느냐? 이제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죽일테다!"라고 호통치는 등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장도영의 자서전 '망향'에서는 조선인 탈주병들이 여럿 나왔으며, 이후 같은 부대의 장준하가 탈영했는데 그가 탈영병 1호였고 당시 성공하기를 기원했다며 담담하게 나온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장도영하면 가장 떠올리는 군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유년 시절에는 군대 체질과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신의주고보 재학시절 스파르타식 교육과 맞지 않았던 탓에 학교생활에도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고 자서전 ‘망향’에 나온다. 게다가 일본군에 징집될 때도 처음에는 반항을 해보았으나 형사들이 워낙 강압적으로 나온 탓에 억지로 응했는데 관부연락선 안에서 취조받을 때 직접 얻어맞기까지 했다고.

'망향'에서 이 부분이 앞뒤가 안 맞아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돌베개'에서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쉬저우 쪽에서 조선인 6~7명의 탈주병(훗날 고려대총장 김준엽 등)이 발생했고 이에 여러 부대에 있던 조선인들을 몽땅 한번도 탈주병이 없었던 '쓰카다 부대'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계속 탈출하여 무려 24명이나 성공했다. 장준하는 훈련을 받으며 주변 지리를 익힌 후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44년 7월 7일에 동료 학병 3명과 함께 탈출했다.

같은 부대에서 한번에 4명씩 탈출했으면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을 텐데 사실관계를 모호하게 기술한 것은 그가 조선 동포들의 사정에 관심 없었거나, 당시 '딴 사람 다 탈출했는데 너만 뭐했냐?'라는 소리 들을까봐 그런 듯하다.

2.2. 군인의 길에 들어서다[편집]


1945년 8.15 광복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발생한 후 월남하여 미군정청 군사 고문으로 있던 이응준의 권유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는데 그 아래 북한반장 김종필과 문관 박정희가 있었으며 삼팔선이 위험한 상태인 것을 알고 계속 경고했지만 위에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박정희의 결연한 인품과 불쌍해 보이는 어깨를 보고 상부에 건의하여 현역으로 복귀시켜 준다. 숙군 작업 중 걸려 총살형에 처해질뻔한 것을 구해준 것은 같은 만주군 라인인 백선엽이었고 박정희를 데리고 있다가 현역으로 복직시켜 준 것은 장도영이었다. 이 때를 포함하여 5.16 군사정변까지 장도영과 박정희는 총 5번 상하 관계로 함께 근무한다.

2.3. 6.25 전쟁: 6사단장 시절[편집]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하여 부상을 당한 김종오 장군의 뒤를 이어 제6사단장을 맡았다.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부터 선전한 정예 부대였으나 1951년 4월에는 부대의 가장 흑역사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일격을 받아 참패를 당했다.

사창리 전투의 패배로 완전히 체면을 구긴 장도영은 절치부심하여 1951년 5월 중공군의 공세 당시 사창리 전투의 패배에서 특히 책임이 컸던 제2연대의 주 저항선 후퇴를 불허하고 북한강 남안 고지에서 사주 방어에 나서도록 한다. 이는 자칫하면 연대 전체를 포위 섬멸당할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과도 같은 용병술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제2연대의 방어 진지를 주 저항선으로 오인하고 전 병력을 쏟아부은 중공군 제63군의 실책이 겹치면서 한국군의 최대 대승으로 꼽히는 용문산 전투파로호 전투로 반전되었다. 이 시기는 군인으로서 그의 최전성기였으며, 6.25 전쟁 중 사단장으로서 손꼽힐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3년 휴전 후 육군참모차장, 2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2]

2.4. 5.16 군사정변과 그 이후[편집]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3]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앞두고 장면은 장도영에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고 하였으나 장도영은 장면에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그를 안심시켰다.[4] 하지만 정작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진압하는 것도 아니고 적극 가담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여[5]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당시 군사정변에 가담했던 장교의 평가 본인은 훗날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이에 대해 극구 부인했는데 방첩대장 이철희[6]가 계속해서 박정희 쪽은 아니며 오히려 족청 세력에서 쿠데타 위협이 있다는 역정보를 보고해서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장도영의 주장은 윤보선 대통령이 "계엄령은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며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말라!"라고 하여 쿠데타 세력이 주장한 계엄령을 합법적이 되도록 지원하고 무력 진압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에 따랐다는 것이다.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만 외치다가 결국 사태 수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쿠데타 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은 쿠데타 진압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헌법상 국군통수권을 가진 대통령 윤보선은 유혈진압을 거부한 상황이었고 정부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 장면은 도망가서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할 게 없었다는 것이고, 서울로 밀고 들어온 대한민국 해병대대한민국 해군 소속이고 제6군단 포병대는 주한미군 소속이었기에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고, 장도영의 지시에 따르는 병력은 헌병대 일부와 30사단 내 1개 중대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쿠데타가 발생하고 육군본부까지 장악된 이후 수습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음을 피력한 것이고, 5.16 이전에 쿠데타 계획이 여러 차례 누설되고 박정희가 그 세력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음에도 박정희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고, 5.16 당시 쿠데타 시도가 파악되었음에도 쿠데타 세력이 모인 6관구 사령부에 헌병 병력을 보내 해산을 종용할 뿐 적극적인 진압 및 체포를 명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도영이 과연 쿠데타를 막을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5.16 이전에도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수차례 보고하고 5.16 당시 30사단에서 쿠데타 계획이 적발되자 곧바로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 시도임을 파악하고 보고하였던 서울지구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이 처음부터 쿠데타에 가담한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장도영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포섭되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으나, 한달 반 만인 1961년 7월 2일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 의해 전격 체포되면서 숙청되었다.# 공판 사진 1962년 3월 10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상 반혁명 행위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나 1962년 5월 2일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고 바로 미국으로 떠난다. 1968년에 잠시 귀국하여 박정희와 만났다고 전해진다. #

2.5. 말년[편집]


도미 후 미시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69년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가 1971년부터 1993년 정년을 맞을 때까지 웨스턴미시간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2001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과 직접 인터뷰를 했으며 2011년 서울신문과 인터뷰도 했었다.#

은퇴 후 치매파킨슨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 2012년 8월 3일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향년 89세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그냥저냥 미적미적하는 걸로 묘사되었으며 스스로 박정희의 꼭두각시라고 발언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노주현이 연기했다. 비열한 인물로 등장하며 장도영이 전작보다 깎아내려진 <제3공화국>의 경우 장도영 본인이 직접 인터뷰한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다. 장도영이 인터뷰에서 한 해명을 나레이션이 직접 비판하는 장면까지 있다.

  • 1994년 개봉한 영화 <증발>에서는 배우 남석훈이 연기했다.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역시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6. 25 당시 잠시 등장에 그쳤다.



4. 둘러보기[편집]






[1]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A] 내각수반 겸직[2] 2군 사령관 당시 예편할 위기에 처해있던 박정희를 공석이었던 2군 부사령관으로 기용하였다.[3] 후임인 김종오 중장이 육군참모총장 임기 중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참모총장은 대장이 부임하게 된다. 마지막 중장 육군참모총장인 셈이다.[4]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장도영을 포섭하고자 직접 혁명 계획서를 전달했다고 한다.[5] 중앙일보 2015. 4. 6 김종필 소이부답 기사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4월 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 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정변 세력의 편을 들어준 줄 알았더니 갑작스럽게 5·16 새벽이 되자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하더니 갑작스럽게 오후에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서는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등.[6] 장영자의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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