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희(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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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장두희
張斗熙[* 1919년 5월 23일 수형인명부에는 張斗로 기재되어 있다.]


광필(光必)
본관
안동 장씨[1]
출생
1883년[2] 12월 1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 성곡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3][4]
사망
1930년 2월 6일[5]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신양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장기봉경무대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은 그의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2. 생애[편집]


1883년 12월 1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 성곡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장안식(張安植, 1857 ~ 1908. 1. 2)과 어머니 진성 이씨(? ~ 1924. 1. 26)[6]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안동군 임하면 오대리 122번지[7]이주해 본적을 두었다가, 풍북면 신양리 성촌(현 안동시 풍산읍 신양1리 834번지 잿말마을)로 재차 이주해 본적을 옮겼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해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웃 주민인 손영학(孫永學)·김정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 등과 협의해 3월 21일 길안면 천지리 장날을 만세시위 일자로 정하고 이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했다.

3월 21일이 되자 아침 일찍부터 그는 손영학·김정연 등과 미리 제작해 둔 태극기를 장터에 나아가 광목을 사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어 놓고 군중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경, 4백여명의 군중이 모이자, 천지리 장터 중앙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들이 이에 호응해 만세를 부르자, 오후 6시 그는 4백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길안면 면사무소로 달려가 길안면장 권중연(權重淵)과 면사무소 서기들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재소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그는 격분한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문을 파괴한 후 다시 장터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손영학·김정연·김정익이 주재소를 습격할 것을 제의하자 그는 이에 찬성하여, 오후 9시 5백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나아가 그곳을 포위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군중들은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과 문을 파괴하였다.

자정이 되자 주재소 내에서 일본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고, 군중들은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 뒤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업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1심 판결에 대해 공소했으나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다만, 그 뒤 1919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받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30년 2월 6일 별세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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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양공(莊襄公)-화성군(花城君)-철공계(哲公系)-이강공(以綱公)-의공계(儀公系)-흠공파(欽公派)-춘파파(春坡派) 35세 희(熙) 항렬.[2] 안동장씨대동보 권5 3359쪽에는 188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1919년 5월 23일 수형인명부에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동이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4] 인근의 금계리와 함께 안동 장씨 집성촌이다. 마을 내 264번지에 장두희의 9대조이자 성곡리 입향조 장흥효(張興孝)의 종택인 경당고택(敬堂古宅)이 남아 있다.[5] 음력 1월 8일.[6] 이강주(李綱周)의 딸이다.[7] 또다른 수형인명부에는 123번지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