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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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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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로고(1961-74).svg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심볼.svg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70
1971
1972
1979
198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3 KBO 리그 베스트 1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3 KBO 리그 다승왕

보유 기록
시즌 최다 선발
44경기[1]
시즌 최다 완투
36경기
시즌 최다 이닝
427⅓이닝[2]
시즌 최다 승리
30승
시즌 최다 선발승
28승
시즌 최다 완투승
26승
최다 연속 경기 완투승
8승
경기 최다 피안타 승리
16피안타
시즌 최다 패전
25패
시즌 최다 연패
15패
특정팀 상대 연패
10패(vs MBC 청룡)
시즌 최다 피안타
388피안타
시즌 최다 실점
175점
시즌 최다 자책점
145점


장명부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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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1528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34번}}}
결번

장명부
(1983~1984)


신태중
(1985~1986)
{{{#ffffff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청보 핀토스]] 등번호 18번}}}
김유동
(1984.7.2.~1984)

장명부
(1985)


이광근
(1986)
{{{#ffffff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19번}}}
팀 창단

장명부
(1986)


조용호
(1987~1989)




파일:external/sports.donga.com/40330692.7.jpg

후쿠시 히로아키
福士敬章[1] | Hiroaki Fukushi

한국명
장명부 (張明夫)[2]
본명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3]
출생
1950년 12월 27일
일본 돗토리현 야즈군 치즈초
본적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실옥리[4]
사망
2005년 4월 13일 (향년 54세)
일본 와카야마현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1950~1974)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1974~2005)[5]
학력
돗토리현립 돗토리니시고
신체
183cm, 90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8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요미우리)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8~1972)
난카이 호크스 (1973~1976)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82)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3~1985)
빙그레 이글스 (1986)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1988)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 (1990)
본관
나주 장씨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후
4.1. 사망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삼미 슈퍼스타즈의 에이스 장명부.jpg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숭의야구장에서 역투하는 장명부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장명부가 죽은 곳에서 발견된 자필 문구.


한국계 일본인 출신의 야구인으로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83시즌 무려 427이닝을 투구하여 20승을 넘어선 단일시즌 최다승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만년 꼴찌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1983년 돌풍을 이끈 수호신이자 무리한 혹사로 인해 반짝 활약만 남긴 채 사라진 비운의 투수이다. 등번호는 34번(1983~1984)→18번(1985)→19번(1986).


2. 선수 경력[편집]


장명부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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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이 스타일[편집]


기교파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장명부는 NPB 시절에도 당시 리그에서 손에 꼽을 파이어볼러였다. 1979년 최고구속 149km를 기록하였는데, 같은 시기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직구 평균구속이 140km 정도였고 NPB 투수들의 직구 평균구속은 135km 정도였다.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30km/h대 초반 수준이던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에 최고구속 140 중반대를 찍던 구속과 완급 조절능력을 발휘했으니, 대한민국 타자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진출 이후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강속구가 아닌 제구력과 기교위주로 평가하는데, 이는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완급 조절을 할 수밖에 없어 주로 설렁 설렁 던지다가 위기상황때 전력투구를 하여 타자들을 상대했기 때문. 실제로 한국프로야구 시절에는 대부분 130대의 느린 패스트볼을 던졌다고 한다.


4. 은퇴 후[편집]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8b608a79.jpg}}}
삼성 라이온즈 투수 인스트럭터 시절 성준의 투구 폼을 지도하는 장명부.[6]

은퇴 후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쇠락했다. 1987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려다가 김포국제공항에서 종합소득세 730만 원이 체납된 사실이 밝혀져 혼자만 대한민국에 발이 묶였고, 이후 이혼까지 당했다.[7]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투수를 지도했고 삼성롯데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8] 고교 순회코치 시절에 그가 발굴한 투수 중 한 명이 LG 트윈스의 야생마 "이상훈"이다.

하지만 롯데 투수코치 시절에 팬을 폭행했고, 1991년 5월에는 성낙수, 박찬 등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가 드러나 마약사범으로 구속되어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9] 그 해 7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결국 KBO로부터 영구제명된 후 대한민국 입국금지 조치를 당하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빌린 돈을 안 갚는다며 지인으로부터 사기 혐의로 피소당했다.

1991년 12월, 그는 추방 형태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이후 일본에서 건설업과 건물 야간경비, 택시 운전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행적은 찾기 어려웠으며, 김무종이나 주동식 등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1995년 4월 27일 MBC에서 한선교, 신애라가 진행했던 <그 사람 그후>라는 프로그램 제작진이 그를 찾아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는데, 당시 오사카에서 '후쿠시 상사'를 운영하며 묘지매매와 무역, 중개업을 해왔다. 딱 봐도 얼굴이 푸석푸석한 검은 빛이 도는 등 건강이 안 좋아 보였고, 자택 안에선 야구인 시절을 잊으려고 글러브 모양의 소파를 뺀 야구 관련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부인 치에코는 이미 세 아들을 데리고 히로시마로 별거한 상태였다.[10]

그럼에도 야구의 끈은 놓지 못했다고 한다. 청각장애인 야구팀의 코치를 맡아 무료 봉사를 하고, 세계장애인야구연맹 부회장으로도 있었다고... 기사.

사후인 2023년 7월 3일에 일구회 회원에 가입되었고[11] 장명부 선수의 유족들에게 위로를 전함과 동시에 그동안 쌓인 게임사 성명권 금액을 김광수 일구회 회장이 오사카에 방문하여 전달했다.


4.1. 사망[편집]


파일:i10502652340.jpg}}}
2005년 KBS 스페셜에서 재현한 장명부의 친필 문구

그렇게 힘든 말년을 보내던 중, 2005년 일본 와카야마현의 미나베 마을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장 사무실 소파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건현장 당시 벽에는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12][13])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향년 55세. 비록 전성기는 짧았지만 다시는 나오기 힘들 대기록을 남긴 주인공의 마지막 순간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했다. 사망 원인은 마약중독으로 대한민국에서 추방 당했을 당시 추방원인이 되었던 게 마약이었는데 결국 그 마약으로 인해 쓸쓸한 인생의 최후를 맞이했다.

참고로 '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영화에 등장한 표현이다. 가츠 신타로가 주연했던 영화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표현인 것. 가츠 신타로 명언 봇이라거나, 관련 서적 등에서도 언급된다. 한국에서는 이걸 한자식 표현으로 바꿔서 "落葉不怨秋風"이라고 쓰기도하는데, 이 표현은 한국 웹에서만 검색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落葉不怨秋風 但靜落爲更始"라는 대구까지 완성된 사례가 보이는데 이것은 네이버 지식인 답변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5. 기타[편집]


  • 엄청나게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글짓기 시간에 "병이 나으면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주제로 글을 지어 아버지에게 보여줬더니 다음 날 아버지가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사 갖고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야구를 시작했다.

  • 일본에서 쓰던 본명은 마쓰바라 아키오(松原 明夫)였지만, 결혼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며 후쿠시 아키오(福士 明夫)로[14], 차남을 낳은 후에는 후쿠시 히로아키(福士 敬章)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본명인 장명부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고.

  • 난카이 호크스 시절 팬이던 후쿠시 치에코와 사랑에 빠지며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걸림돌은 장명부를 탐탁치 못해하던 치에코의 아버지였다. 그는 일본 정부 고위직을 지낸 거물급 인물이었는데 장명부가 결혼 승낙을 받으려 치에코의 집에 쳐들어와 3일 동안 대치했고, 참다 못한 치에코의 아버지가 장명부를 안방으로 불러서는 "자네는 야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잔뜩 얼어있던 장명부는 "막노동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굶기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무남독녀인 딸을 데려가 호강시켜 주겠다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이러한 대답에 보통의 아버지라면 "이 녀석이!! 뭐가 어쩌고 어째?!"라면서 멱살을 잡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치에코의 아버지는 "그래? 무릇 사내라면 그래야지...자존심을 버리면 뭐든 할 수 있다"라며 어깨를 토닥이며 결혼을 허락했다 한다. 장명부의 장인이란 양반도 어찌 보면 대인배였던 듯... 그렇게 결혼에 성공한 장명부는 이듬해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했고, 장명부의 아버지는 "섭섭하다"라고 토로했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서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입장인지라 더 이상 아들을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 박민규 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기술한 바에 따르면 별명은 철완 너구리. '라면은 너구리, 오락은 폼포코 너구리, 야구는 철완 너구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고 한다.

  • 삼미에서 뛰던 시절, 팀 동료들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특히 1983년 12승을 거두며 원투펀치를 형성한 임호균과의 사이가 굉장히 불편하여 이듬해 임호균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고[15], 배터리를 이루던 포수 김진우와는 견원지간[16]이었다(...). 가장 친한 팀메이트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의 동료였던 내야수 이영구뿐이었으니 말 다한 셈.[17]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등판한 경기 때 결승타를 치거나 파인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에게 고급 시계 또는 양복 등을 선물하는 등, 인심을 쓰는 면도 있었다.

  • 1985년 시즌, 삼미가 18연패의 수렁에 빠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단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목사님과 스님을 불러 예배와 예불을 한다던가, 심지어 무당까지 불러 굿을 하거나 덕아웃 앞에 소금을 뿌리는 등 미신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 호텔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려 선수들을 밀어넣고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시켜주는 것은 물론 밴드까지 불러주며 아무 말 안할테니 밤 새도록 실컷 놀고 스트레스를 풀라고 한 적도 있다. 그 와중에 성적이 부진한 팀에서 흔히들 하는 삭발만큼은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장명부가 "삭발해서 이겼으면 진작에 이겼다. 일본에서도 아무리 팀 성적이 안좋아도 머리는 깎지 않는다" 라고 부득부득 우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충청남도 아산에 이복 형인 장재현 씨가 살고 있는데, 장재현 씨의 집에 장명부의 선수 시절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고 한다. 장명부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던 1975년 대한민국 실업 팀과의 친선경기차 방한한 일본 프로 연합팀 멤버로 대한민국에 와서 서로 만난 적이 있지만, 그 당시 장명부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서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장명부는 대한민국에 있을 때 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고 싶다고 염원했으나, 결국 가지 못한 채 쫓겨난 후 세상을 떠났다.

  • 그의 가정사를 추가로 덧붙이자면, 본인의 바람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거 같다고 인터뷰 한 바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는 상당한 호색한이었고, 자신의 엄마가 몇번째 아내인지도 모른다나. 장명부의 아버지인 장득룡 씨는 1992년에 74세를 일기로 작고했는데, 이복 형 장재현 씨가 수습하여 아산시 영인면 영인산 자락에 모셨다고 한다. 이복 형 장재현 씨는 지금도 생존 중이고 손주가 현재 20대라고 한다.

  • MBC 청룡내야수 김인식[18]은 장명부의 사구에 가장 많이 맞은 선수였다. 김인식은 계속 참다참다가 어느 날 또 사구를 얻어맞자 헬멧을 집어던지고 장명부에게 달려들어 원터치를 뜰...려고 했는데, 정작 마주치니깐 20cm 이상 신장 차이가 나는 장명부를 보고서는 그냥 쿨하게 1루로 갔다. 장명부를 다룬 다큐에서 이 장면이 나왔다.

  •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인천광역시를 연고지로 삼은 SK 와이번스가 2004년 문학 홈 개막전에[19] 장명부를 시구자로 세우려고 장명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연고지역민인 인천 시민들에게 아직까지 낯설었던 SK 구단을 홍보하고[20] 이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과의 콜라보레이션 홍보를 위해서라도 장명부를 찾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일단 장명부는 1991년 12월에 대한민국 입국 금지를 당하며 추방당했던 데다가, 장명부는 은둔 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히 야구계 관계자를 피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장명부의 행방을 아는 재일동포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21] 결국 SK에서는 장명부 대신 슈퍼스타 감사용의 실제 주인공인 감사용으로 시구자를 대신했으며[22], 이듬해 4월 일본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서야 세상에 그의 행적이 드러났다.

  • 이런 멸시와 차별, 선입견 때문에 일본에선 조센징, 조국에선 반쪽바리로 불리며 단지 '야구만 잘할 뿐이던' 그의 비참한 인생이 계속되었다. 오죽했으면 '내 조국은 대한민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내 조국은 현해탄[23]이다.'라고 말했을까. 그의 설움이 잘 드러나는 명언이다.

  •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사실인데, 선수협의 기초를 마련한 바 있다. 1983년 시즌 후 그는 일본처럼[24] 한국도 선수들의 협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MBC 청룡의 김재박, 이해창 등 노장 선수들이 만들려고 했으나, 구단들이 그 전에 미리 손을 쓴 탓에 실패했다.

  • 씨름선수 장지영과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장명부가 한국에서 전성기를 누렸을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기에 인천직할시에 살았고 장지영은 인천 출신으로서 인하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때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친분이 매우 깊었다.

  •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는 성명권 문제로 인해 '장명'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었는데 특이구종 스크류볼은 본명인 '명부'의 이니셜을 딴 'MB스크류'다. 선수카드는 83년 엘리트 카드도 2023년 들어서는 잘 쓰이지는 않는 편이다. 특히 삼미 소속의 레전드 카드가 있는데 이 레전드 카드는 출시 당시에도 이미 인천-현대 올스타에도 잘 안 쓰이고, 83년 레어 카드보다 능력치가 좋지 못한 탓에 조합용으로 돌려지곤 했다. 영입선수 전환 시에는 대표팀 계열의 덱에 사용할 수 있다. KBO와 MLB에 관계없이 한국인 선수만 대표팀에 영입선수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일본국적의 재일동포임에도 KBO시절엔 당시 외국인 제도도 없었고, 한국인 선수 취급을 받았기에 무리는 아닌 듯하다. 이는 용병영입, FA영입, 대표팀 차출로 통합 전 세부화하던 시기부터 유효했다.

  • 그러다가 2023년 7월에 장명부의 일구회 가입이 승인되면서 장명부의 성명권 문제가 해결되어 마구마구 등의 게임에서 실명으로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5일 업데이트로 다시 이름이 장명부로 돌아왔다.

  •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 컴프매에서는 엄청난 체력을 보유했다. 무려 131이라는 수치로 이 카드를 제외하면 100이 넘는 카드도 없으니 압도적이다. 그 덕에 오버롤은 88을 책정받았지만 현실은 뻥버롤 취급이라 코치로 고정된다.

  • 2020년 1월에 한 한국인 유학생[25]이 그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했다.# 위에 언급된 장명부의 이복형 장재현 씨와 박영길, 이영구 등 당시 같이 활동했던 야구인들을 직접 인터뷰했다고 한다. 후속작도 기획중이라고.


  • 프로야구 초창기에 내한했던 재일교포 선수들 중에선 한국어가 상당히 유창했던 편이었다. 86시즌 종료 후 빙그레 이글스에서 방출되고 나서 진행했던 인터뷰와 전술한 MBC <그사람 그후> 인터뷰에서도 한국을 떠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국어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항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68
요미우리
1군 기록 없음
1969
1970
11
40⅔
6
0
0
3.07
0
3
-
-
38
4
18
32
1971
2
7⅓
1
0
0
5.14
0
0
-
-
6
1
3
6
1972
5
9
2
0
0
8.00
0
0
-
-
17
4
4
2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73
난카이
27
140⅔
18
6
1
2.87
7
0
-
-
130
10
73
56
1974
26
139⅓
18
5
2
3.04
9
7
0
-
130
10
43
59
1975
32
188⅔
21
11
4
(1위)
3.00
11
12
0
-
185
10
60
66
1976
24
115⅓
17
3
0
3.68
6
7
1
-
120
13
44
23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77
히로시마
46
100
6
0
0
5.13
6
6
5
-
129
11
45
39
1978
41
230
32
12
(1위)
2
3.60
15
8
0
-
236
(1위)
23
75
94
1979
37
163⅔
25
4
1
3.57
7
9
1
-
156
24
47
109
1980
31
187
28
8
1
3.95
15
6
0
-
195
28
55
106
1981
35
201⅓
28
7
1
4.03
12
9
0
-
211
22
81
116
1982
22
111⅓
15
5
1
4.46
3
11
2
-
113
21
43
7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3
삼미
60
(1위)
427⅓
(1위)
44
36
(1위)
6
(1위)
2.36
(2위)
30
(1위)
16
6
(3위)
0
388
19
122
220
(1위)
1984
45
(3위)
261⅔
(2위)
25
15
(1위)
2
(3위)
3.30
13
20
7
(4위)
0
261
20
72
145
(4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5
청보
45
(3위)
246
(2위)
35
10
(4위)
0
5.30
11
25
(1위)
5
0
304
22
112
128
(3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6
빙그레
22
108⅓
17
3
0
4.98
1
18
0
0
130
12
50
48
NPB 통산
(15시즌)
339
1634⅓
217
61
13
3.68
91
84
9
-
1666
181
591
785
KBO 통산
(4시즌)
172
1043⅓
121
64
7
3.55
55
79
18
0
1083
73
356
541

1983년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 기록을 세운다. 시즌 최다이닝 등판, 시즌 최다경기 완투, 시즌 최다승, 시즌 최다패의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도 희박하며, 최다 이닝 등판과 같은 기록은 절대로 깨져서도 안 된다.

사실 이런 그의 초인적인 기록은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2년 밖에 안 된 초창기 시절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많이 올라간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26][27] 특히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는 투수진의 분업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는 해도, 장명부가 세운 기록은 1983년의 장명부 단 한차례 있었다 .

장명부의 30승은 2019년 한국 야구인들이 투표한 'KBO리그 역사상 가장 깨기 힘든 불멸의 기록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28] 총 150표 중 가장 많은 36표를 받았으며, 24%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모두들 "투수 보직이 분업화된 현대 야구에서는 30승은 불가능한 기록"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장명부의 1983년 시즌의 WAR13.63으로 역대 KBO 투수 단일 시즌 WAR 2위의 기록이다.[29]#


7. 관련 문서[편집]


[1] NPB 입단부터 1978년까지는 마쓰바라 아키오(松原明夫), 1979년에는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라는 이름을 썼다. 작명가의 조언을 받아 바꾼 이름이 바로 이 이름.[2] 한국에서는 한국명으로 활동하였으므로 등록명으로 본다. 즉 여기선 한국계라서 한국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의 등록명과 똑같이 다룬다.[3] NPB 입단부터 1978년까지는 마쓰바라 아키오(松原明夫), 1979년에는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라는 이름을 썼다. 작명가의 조언을 받아 바꾼 이름이 바로 이 이름.[4] 현재의 아산시 배미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참조.[5] 부인과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참조.[6] 뒤의 인물은 삼성의 2군 감독이던 박창용 씨.[7] 명목상 이혼 사유는 생활고였는데, 실제로는 장명부의 바람기가 원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장명부는 아버지의 바람기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8] 이 때 장명부를 롯데로 데려온 사람이 삼미 시절 장명부를 보살펴 주었던 김진영 감독이었다. 그리고 김진영 감독이 1990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해임당하자, 장명부도 같이 잘렸다.[9] 후술하겠지만 마약중독 때문에 결국 사망하고 만다.[10] 다만 장명부 사후 일구회와 접촉을 한 것을 보면 장명부와의 연을 아예 끊은 건 아닌 듯 하다.[11] 기사에 따르면 유족 측에서 먼저 가입 요청을 했다고 한다.[12] 낙엽이 꼭 가을바람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말년의 쓸쓸함 속에 자신의 과거와 열정을 그리워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운명이며 섭리임을 말한 글이다.[13] 하지만 항목의 사진은 연출된 사진이고, 실제 현장사진은 아니다.(사실 자살현장 사진 치고는 벽이 너무 깨끗하고 글씨도 너무 반듯해서 진짜가 아님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나중에 사망소식이 전해져서 취재한거라 현장이 보존되어 있을리 없으므로, 보존된 현장을 언론이 취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진짜 사진은 없다. [14] 흔히 일본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데릴사위의 경우는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기도 한다. 일본 야구계에선 나카니시 후토시가 그 경우에 해당되며,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사위로 미하라 가문에 입적된 바 있다. 그래서 미하라 후토시가 그의 호적상 이름이다.[15] 그러나 임호균은 인천 출신인 자신이 장명부 가족이 살 집을 알아봐 줄 정도로 챙겼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워낙 실력 차이가 커서 국내 선수들이 콤플렉스를 느낀 부분도 있고, 장명부가 한국어를 거의 못해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어서 원만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했다.[16] 1984년 시즌 막판 홍문종(롯데), 김일권(해태), 이해창(MBC) 세 명이 치열한 도루왕 경쟁을 벌일 때 장명부는 같은 재일동포인 홍문종이 누상에 나오면 견제를 게을리하여 베이스를 훔치는 데 은근슬쩍 지원해 줬고, 이에 열받은 김진우는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지원할 사람이 있다 이거야' 라면서 김일권을 밀어 주었다. 참고로 당시 장명부는 주자견제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지금으로 치면 거의 봉중근급) 김진우 또한 1983년 시즌 도루저지율 5할(120회 시도 중 60회 저지)을 기록한 데다 1984년에도 롯데 한문연의 뒤를 잇는 도루저지율 2위의 강견을 자랑하는 포수였다. 덧붙이자면 이해창은 지원해 줄 타팀 배터리가 아무도 없어 나름 열심히 뛰긴 했지만 결국 그해 도루왕 타이틀은 김일권에게 내줘야 했다(...).[17] 삼미의 국내 선수 중엔 포수 금광옥과 친했다. 장명부 등판 시에 사이가 안 좋은 김진우 대신 금광옥이 자주 마스크를 썼는데, 포수 리드가 공격적이라며 금광옥을 선호했다고 한다.[18] 흔히 알려진 프로 및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유명한 투수 출신의 김인식과는 동명이인이다. 현재 독립야구단인 연천 미라클 감독직을 역임 중.[19] 'LG의 야생마'였던 이상훈이 SK 유니폼을 입고 LG를 상대로 세이브를 올렸던 기막힌 사연의 경기였다.[20] 인천지역의 야구팬들, 특히 인천야구의 역사를 또렷이 기억하던 올드 팬들에게 장명부가 의미하는 게 상당했기 때문에...[21] 반면 어떻게 보면 라이벌인 투수 김일융은 야구 해설 등으로 너무 세간에 잘 알려졌고...[22] 10년뒤 고향에서 다시 시구했고 그로부터 6년뒤 고향팀은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23] 대마도규슈 사이를 가르는 해협.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명칭은 대한해협이나, 현해탄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이나 재일교포들에게는 현 세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24] 일본은 1979년 처음 선수협이 결성되었고, 1985년 노동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지위를 인정받았다.[25] 히어로즈 팬이라고 한다.[26] 그도 그럴 것이, 투수진의 분업화가 완료된 지금은 144경기 기준 5선발 로테이션을 돌린다는 조건 하에 ND, 패배, 부상 없이 오로지 승리만 기록해도 30승을 기록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7] 비슷한 전개로 최동원, 백인천, 장효조 등의 기록도 폄하되는 경우가 인터넷 상에서는 종종 있다. 다만 그말대로면 과거 메이저리그에 활약했던 베이브 루스, 사이 영, 월터 존슨, 타이 콥과 같은 선수들 역시 인정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그저 인프라가 더 갖춰진 후세에 태어날 수록 대단하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옛날 기록이라고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그 당시 얼마나 잘했느냐가 중요하다.[28] 2위는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3위는 백인천의 4할 타율.[29] 1위는 1986년 시즌의 선동열(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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