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희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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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배우. 2세대 트로이카이자 70~80년대 최고의 영화 흥행 여배우로 유명하다.
정윤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2] 미혼.
2. 활동[편집]
2.1. 데뷔 전[편집]
1958년 1월 27일 아버지 장경근, 어머니 최숙자 사이에서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3] 유년시절, 아버지가 집을 나가 홀어머니 슬하에서 컸다고 한다.[4] 어릴 때에는 장미정(張美貞)이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애는 선머슴애였다고 한다. 그래서 축구 등의 운동을 좋아해 축구공으로 남자애의 발목을 맞혀 넘어뜨렸다고 한다.
1972년에는 예술대회에 출전하여 춘향전으로 금상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장미희는 초등학교 교사가 장래희망이었으나, 그녀의 언니가 장미희를 강제로 출전시켜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2.2. 1970년대[편집]
1975년 TBC(동양방송) 특채탤런트로 뽑혔다. 이듬해인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춘향' 역에 발탁되면서 영화 《성춘향전》에 데뷔하였다.[5]

이듬해 1977년, 겨울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6] 이 기록은 당시 해방 이후 역대 최다 관객 동원수였으며, 이 기록은 1990년에 상영한 장군의 아들로 깨지게 된다. 뒤이어 속 별들의 고향, 순악질 여사 등이 흥행하게 되면서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뒤를 잇는 여배우 신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드라마에서도 정윤희와 함께 출연한 청실홍실[7] , 비바람 찬이슬, 찔레꽃 등이 성공하며 77년 미녀배우 순위에 정윤희의 뒤를 이어 2위의 자리에 올랐다.[8]
2.3. 1980년대[편집]

1980년 종합소득세 신고 납부액에서 8,850만 원을 신고하고 세금 1,700만 원을 납부했는데, 이는 1979년 여배우 중 최고 수입이었다. 당시에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정윤희가 1,430만원을 신고하고 세금 400만 원을 납부한 것보다 액수가 훨씬 컸다.[9]
드라마 <아롱이 다롱이> 주연이 장미희로 낙점되었지만, 김수현 PD와의 갈등으로 촬영 하루 전에 장미희가 촬영을 취소해 김형자로 주연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1년에는 '취팔권 쌍팔권'에 출연하여 쿵후액션연기를 보여줬다. 4월 27일부터 9시에 만납시다의 MC로 출연하였으나 시청자의 반응이 영 별로라[10] 9월 19일부터 김보연이 진행자를 맡았다. 장미희는 방송에 하차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11월 21일에 어머니 최숙희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장미희의 은퇴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1982년 신군부 집권 시기에 출연금지 연예인 목록에 오르면서, 1984년까지 제대로 된 드라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의 여파였는지 몰라도, 1982년에 여배우 수입 순위에서 정윤희와 유지인에 밀린 3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11] 단순히 방송금지 조치만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연기공부를 위해 1982년, 1983년 2번이나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도 장미희의 공백기를 심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공백기 때문에 정부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며, 소문의 정점은 후술할 X양 사건(...).
그 대신 영화활동에 전념했는데, 주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애인 등의 멜로물에 출연을 하였다. 이러한 영화는 대박까지는 아니고 중박의 성적을 내었다.

그러던 중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으로 그녀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배창호가 감독을 맡은 안성기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의 흥행 성공으로 대종상 수상을 거두게 된다.
특히 깊고 푸른 밤은 이전의 처녀 혹은 아가씨의 모습에서 벗어나 원숙미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당시에는 애마부인으로 대표되는 에로물이 범람해 영화가 전체적으로 야해지다 보니 깊고 푸른 밤이나 적도의 꽃에서 정사장면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 깊고 푸른 밤의 성공은 장미희의 이미지 변신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렸고,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과 정윤희와는 달리 이후의 방송 활동에도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황진이에 출연하였지만, 장미희의 누드를 기대했던 관람객의 기대에 못 미쳐서 흥행에 실패[12] 하였으나, 89년에 이덕화와 짝을 맞춘 '불의 나라'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2.4. 1990년대[편집]
1990년대에도 사의 찬미 등의 영화로 인기를 유지해 갔다. 애니깽 사태로 유명한 애니깽에도 출연했지만 영화는 망했다(...).[13] 이 때에는 드라마 육남매로 더 알려졌다.
배우 활동과 더불어 교육계로 진출하려는 뜻으로 명지전문대학에서 교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2.5. 2000년대 이후[편집]
이전과는 달리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보다는 드라마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우아한 사모님, 귀부인풍의 배역을 맡는다.
현재 2세대 트로이카 중에선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80년대 이후 은퇴한 정윤희는 말할 것도 없고 유지인 역시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연기보단 종편 예능 위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14] 장미희는 2010년대 후반 들어서도 연기 이외의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1년에 드라마 한 편은 꼭 찍고 있다.
2019년 시크릿 부티크 이후로 한동안 차기작을 정하지 않은 채 CF 촬영만 하며 휴식기를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2년 KBS 주말 드라마 삼남매가 용감하게를 통해 오랜만에 복귀하게 되었다.
3. 사건사고[편집]
3.1. 스캔들[편집]
3.1.1. 전두환 전 대통령[편집]
X양 사건
장미희의 스캔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스캔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이 장미희를 아껴 내연녀로 삼자 이에 질투한 이순자가 드라마 길을 촬영하고 있던 장미희를 납치해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하고는[15] ,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가 있는 감방에 넣었다는 내용이다.
이 스캔들이 떠오른 시기가 1980년인데, 전두환의 여성편력과 관련된 루머가 한참 나오던 때였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장미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는 등 갑자기 활동이 뜸해져 루머에 불을 지폈다.
장미희가 82년 귀국 후 깊고 푸른 밤으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하고 사의 찬미등의 히트작을 쏟아내며 활발히 활동하자 루머는 점차 잦아들었다[17][18] . 본인도 루머에 대해 인정한 적이 없고, 종편의 연예계 뒷담화 프로에서조차 다루지 않으나 아직까지 미혼이라 유독 중노년층에서 주로 나도는 루머. 정작 귀국 직후인 83년에는 후술되는 신기수 회장과의 약혼발표가 나왔다.
3.1.2. 신기수 전 경남기업 사장[편집]

1983년 당시 경남기업 사장과 약혼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밀회를 가진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3.1.3. 배창호 영화감독[편집]
배창호가 장미희에게 공개구혼을 한 적이 있다. 배창호가 무명 시절 우연히 장미희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았고, 이후 감독을 맡은 배창호가 오랜 기간 장미희와 짝을 맞추는 동안 배창호가 장미희에게 연정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3.2. 학력 위조[편집]
장충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미국 호손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국대학교 청강생에 불과했던 것. 신정아 학력 위조가 드러남에 따라 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인은 "할말이 없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구설수에 올랐다. 학력위조 문서를 참조할 것.
그러나 의외로 장미희의 학력위조 경력은 더 있다. 그녀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협성여상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고 졸업에 건국대 의상학과로 자신을 포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장미희 보고 여상 출신이라고 비아냥거린 적도 일부 있었다고.[19]
4. 여담[편집]
배우 본인의 고고하고 우아한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20] 어떤 작품에 출연해도 배역 자체를 잡아먹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홀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어야 할 드라마 '육남매'[21] 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약간이나마 나올 지경. 장미희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선 "연기 생활이 40년 가까이 되는데도 연기의 변화가 별로 없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전성기 때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남성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체로 장미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인시절부터 센스가 탁월했으며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좋은 건 물론이고 베드신처럼 어려운 연기에서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상대배우를 배려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장미희 험담을 한 게 신성일인데,[22] 이 배우의 인간 됨됨이나 주위평을 생각한다면...
젊은 시절부터 프로정신이 대단해서, 창문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23] 하거나, 눈 위에서 경주용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등 스턴트나 대역이 필요한 위험한 연기도 직접 다 해냈다고 한다. 장미희가 성공한 데에는 이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정윤희가 외모로는 압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질 정도였다고. (정윤희와 장미희는 '청실홍실'이라는 드라마에서 라이벌 관계로 출연한 적도 있다.)

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또 잘 입는 걸로 유명하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협찬 러브콜을 받는다고 하며, 최고의 명품 패션 하우스중 하나인 에르메스 마니아라고 하는데, 지금도 협찬받기 가장 어려운 에르메스에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협찬한 첫 배우이다.
한창 남북화해 분위기가 있었던 1990년 즈음, 남북 간 연예인들끼리 만나던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때 북한의 유명 여배우 오미란과 만났다.
1992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남긴 "아름다운 밤이에요" 라는 수상 소감이 지금까지도 유명하다[24] .
장미희의 성대모사를 자주 하던 이경실이 방송에서 한 말로 추정해보면 2000년대 중반부터 동부이촌동의 용산시티파크 아파트[25] 에 15년 넘게 거주하는 듯 하다. 이경실이 2009년 세바퀴에 출연할때도 같은 아파트의 자기 아랫집에 산지 몇년 됐다고 말했는데, 2021년에도 방송에서 여전히 장미희 선배님이 아랫집에 사신다고 말했다. 이경실은 자신이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아파트에 산다고 과거부터 방송에서 여러번 말했었다. 이경실의 아들이 초등학생때 장미희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고, 아들은 인사를 하며 자신이 이경실의 아들임을 밝혔다고 하는데 장미희가 조용히 "그래... 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2011년에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였을 때, 조문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5. 출연작[편집]
5.1. 드라마[편집]
5.2. 영화[편집]
동시대 여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 흥행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2세대 트로이카는 물론이고, 80년대 트로이카들보다도 흥행력이 뛰어나다. 장미희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중후반부터인데, 70년대 전반까지 소급해도 그녀보다 흥행력이 좋은 여배우는 없다. 이런 점을 넘어 장미희 이전 배우도, 이후 배우도 가지지 않은 장미희만의 유일한 기록이 있는데, 그건 역대 국산 최고 영화 흥행 기록을 2차례나 갱신한 유일한 배우라는 점이다.[28] 남자 배우도 이런 기록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장미희의 영화 흥행 실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 예.[29]
5.3. 광고[편집]
- 1975년 해태제과 맛동산
- 2008년 LG OZ - '오주상사'라는 가상의 회사를 배경으로 만든 연작광고에서 팀장 역할로 나왔다. 이 때 부하직원이 이문식이다.
- 2010년 CJ제일제당 백설유 쌀눈유
- 2014년 KT GiGA 인터넷
- 2018년 네이처셀 닥터 쥬크르
5.4. 방송[편집]
- 1981년 4월 27일 ~ 9월 19일 9시에 만납시다 : MC 출연
6. 수상 내역[편집]
[1] 학력위조 사건 관련 기사에서 인터뷰할 때 본인이 "언론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다"면서 그 예로 혈액형을 들었다. 처음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혈액형은 AB형.[2] 동시대에 배우 이영옥도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세 여배우들에 비하자면 후세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트로이카에 포함되지는 않는 듯하다. 사실 이영옥의 히트작 중에는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유명작품 하나 빼고는 후세까지 인지도가 남은 게 잘 없기도 하다. 그에 비해 장미희를 포함한 3명은 아직도 인지도 있는 70년대~80년대 히트작이 많았다.[3] 부산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4] 가족관계에 하나 설이 있다. 장미희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첩이었다는 것.[5] 당시 남자주인공은 진짜진짜 시리즈로 유명세를 탄 이덕화였다.[6] 당시에는 유신정권 치하에 놓여 있어서 문화예술적인 제약이 심했는 데다가, TV드라마의 유행으로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침체 상태에 있었다.[7] 정윤희와 라이벌 관계로 출연했다. 시청률은 70% 정도였다고.[8] 3위는 또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9] 수입이 높다고 해서 꼭 인기가 많다는 것은 아니었다. 정윤희의 영화 전성기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그 이전부터 인기를 끈 장미희보다 수입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후로는 정윤희가 수입에서 장미희를 능가한다.[10]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데다가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다고.[11] 1위가 유지인으로 1억 3,440만 원, 2위가 정윤희로 9,600만 원, 3위가 장미희로 7,200만 원이었다. 80년대 트로이카인 이미숙, 원미경은 각각 5위와 8위로, 각각 5,800만 원과 5,000만 원을 벌었다. 또 다른 80년대 트로이카인 정애리는 3,200만 원을 벌었고, 이보희는 당시 무명이었다.[12]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내시와 동시상영하였다. 결과는 152,558명의 관객을 모은 내시의 대승.[13] 그 이유는 당시 출연할 예정이었던 임성민이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는데, 배우를 교체하지 않은 상태 등 여러 문제가 많았다.[14] 사실 유지인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중견급 이상의 여배우들이 이 루트를 타고 있다.[15] 모 여성 잡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질구봉합수술(즉 여성할례)을 했다고 한다.[16]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서울 무지개의 '톱모델 출신 여배우 실종'이라는 플롯은 윤영실 실종사건을 비롯한 당시 연예계 루머들과 흡사하다. 오히려 같은 해 개봉한 '빨간 여배우'가 당시 나돌던 X양 루머에 가까운 내용.[17] 오히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장미희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미 사망한 박정희를 언급하는 식으로 황당무계한 루머로 확대재생산 되었다.[18] 무엇보다 장미희는 신라호텔 휘트니스센터를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루머처럼 몸에 큰 흉터가 생길 테러를 당했다면 호텔 헬스클럽을 대놓고 이용할리가...[19] 현재 시점에서 보면 출신 고등학교로 포장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장미희는 나이상 74년에 서울/부산에서 최초로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정책 직전에 입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엔 명문/비명문 차이가 엄청나게 컸다. 최고의 명문고였던 경기고-서울대학교 라인이 성골 중 성골로 인정받고, 이중에선 서울대보다도 오히려 고등학교 인맥이 더 세게 적용할 정도. 당시 대부분 고등학교는 단성학교였고, 서울의 3대 명문이던 경기/서울/경복고등학교는 당연히 남자학교였으므로 경기여고에 버금가는 명문 이화여고의 위상은 굉장했다. 게다가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낮던 시기라 서울의 이름있는 대학 출신이란 것만 해도 엘리트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가 사칭한 것은 굉장한 엘리트 코스인 셈이다.[20] 딱 봐도 귀부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 음색, 어조다.[21] 이때 장미희는 떡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홀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장미희 특유의 억양의 '똑(떡) 사세요~! 똑(떡)이요~!' 대사는 당시에 성대모사의 소재로 유행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톤으로, 인터뷰에서 언급하길, 귀하게 자란 마나님이 시장통에서 떡 장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감안해 일부러 저렇게 연기를 했다고.[22] 포동포동한 얼굴의 앳된 장미희가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는지 볼 때마다 ‘너 같은 아이가 어떻게 배우가 되었냐. 얼굴이 꼭 빈대떡 같다’ 라고 대놓고 말했다.[23] 1977년 영화 겨울여자에서 보여줬다.[24] 그리고 이 성대모사를 이경실이 자주 구사했었다. 이경실의 모 잡지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우연히 장미희와 마주쳐서 인사를 했는데 못들은 척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기의 성대모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25] 2004년에 분양받은 신축 아파트였다. 거주는 그 이후이다.[26] 1980년대에 활동한 가수 백영규의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서 제목을 따왔고, 백영규가 주인공(남)으로 출연하였다.[27] 당해 최고 관객 수 기록이다.[28] 1977년 겨울여자가 58만 관객을 동원해서 1974년 46만 관객을 동원했던 별들의 고향 기록을 뛰어넘었고, 이 기록을 1985년 또 다시 본인이 주연으로 등장한 깊고 푸른 밤의 60만 관객 기록으로 갱신했다. 자기가 갱신한 기록을 스스로 깼다[29] 굳이 남자 배우 중에서 언급하자면 신성일이 1974년의 별들의 고향, 1977년 겨울여자에 동시 출연했고, 이 두 영화가 최고 기록을 갱신한 영화이긴 하지만 두 영화에서 신성일이 핵심 남자 주인공이라 보기는 곤란한지라 사실상 장미희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30] 現 백상예술대상[31] 김영란과 공동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