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북 사건 (r20210301판)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차 장북 사건
3.2. 2차 장북 사건
3.3. 일본의 요구
3.4. 관동군의 음모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6월 5일, 중화민국 차하얼성에서 관동군 특무기관 직원들이 차하얼성에 잠입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일본 제국은 이를 구실삼아 진토 협정 체결을 강요하였다.


2. 배경


1935년 5월, 하북성에서 벌어진 하북 사건을 구실로 화북분리공작에 여념이 없던 일본 군부는 중화민국 측에 하북성에서 중국 국민당 당부, 반일성향이 강한 동북군 소속 51군, 중앙군 소속 2사단과 25사단, 헌병 3단, 남의사 등을 모두 철수하여 하북성을 비무장화하는 것을 강요하는 하매 협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맞춰 일본군은 만리장성 일대에서 병력을 증강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초공작전과 서남 지역의 반장군벌인 리쭝런, 천지탕 등 서남정무위원회 견제에 여념이 없던 국민정부는 일본에게 군사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응하면서 난관을 겪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데므치그돈로브 등을 사주하여 내몽골 독립운동을 선동, 내몽골의 괴뢰국화를 꾀하고 있었는데 중화민국이 지배하는 차하얼성은 일본군 지배구역과 맞닿아 일본의 특무기관원들이 자주 들락이며 각종 분규를 꾀하는 곳이었다.


3. 전개



3.1. 1차 장북 사건


사건의 발단은 1934년 10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월 27일 일본군 화북주둔군 참모 카와구치 키요다케(川口淸健)와 외교 문서 기록관 이케다 카츠미(池田克己) 등 8명의 일본인이 장자커우에서 내몽골로의 여행을 명목으로 중국 측에 어떤 보고도 하지 않고 다륜으로 향했다. 이들이 장북현성 남문에 이르렀을 때 쑹저위안 산하의 국민혁명군 29군 132사단 호위대의 저지를 받았다. 40분 간의 실랑이 끝에 132사단은 이들을 통과시켰으나 일본 측은 중국이 황군의 군관과 외교관을 명백히 모욕하였다고 반발, 10월 29일 장자커우의 대리영사 하시모토(橋本正康)는 132사단 참모장 장유번에게 항의서를 제출했다. 10월 30일, 베이핑의 무관 다카하시도 베이핑에 있던 쑹저위안에게 강력항의하였고 11월 25일, 쑹저위안은 132사단장 조등우(趙登禹)에게 정식으로 일본에게 사과하라고 명령했으며 11월 29일에는 책임자인 장서림(張書林)을 직접 면직시켰다.

이를 1차 장북 사건이라고 하는데 일본 측은 1934년 12월 7일 부로 국민정부가 일본인이 차하얼 성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어떠한 휴대품을 소지하건 일본인은 검사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하였다.


3.2. 2차 장북 사건


한편 일본은 1935년 1월 찰동 사건을 일으키는 등 차하얼성에 대한 침탈 야욕을 계속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5년 5월 31일, 아파알(阿巴嘎)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특무기관 직원 야마모토 신조(山本信條), 오오이 히사시(大井久), 오츠키 가쓰라(大槻桂) 등 4명이 특무기관장 특무기관장 모리시마(盛島南芳)의 지시에 따라 트럭을 타고 다륜을 출발해 장자커우로 가서 트럭을 타고 차하얼 경계로 잠입하여 불법 측량을 실시하고 있었다. 6월 5일 오후 4시, 차하얼성 장북현 성문 앞에서 29군 132사단의 보초병이 이들에게 정차할 것을 요구, 통행증을 검사했으나 네사람 모두 중국 통행증이 없어 특무기관에서 발급해준 신분증을 내밀어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보초병들은 이들을 억류하여 사단 군법처로 보냈다.

군법처는 일본인들에게 술과 밥을 제공하며 이들의 내력을 심문하였고 장자커우에 전화하여 차하얼성 정부에 지시를 청했다. 이때 베이핑 군분회 정기 모임에 출석한 상태였던 쑹저위안은 일본인들이 트집잡을 것을 두려워하여 즉각 이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였고 성정부는 장북 수비군에게 일본인들을 석방하라고 하달했다. 이에 132사단 보초병들은 6월 6일 오전 11시, 일본인 4명을 정중히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장자커우에 도착하자 곧바로 관동군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들이 장북에서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군은 흥분하여 1934년의 1차 장북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일본인의 자유 여행을 보장하였는데 중국군이 일본인 네 사람을 불법 감금하였으며 감시하는 보초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도 금지하고 청룡도와 총검으로 위협했으며 음식과 침구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일본 군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날뛰었다. 6월 11일, 장자커우 영사 하시모토와 장자커우 특무기관장 마쓰이(松井源之助) 중좌가 나서 국민정부 차하얼 정부 민정청장 겸 29군 부군장 친더춘에게 항의를 제출하며 사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다. 마쓰이는 "5일 이내에 회답을 받지 못할 때에 우리 군은 자유 행동을 취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또한 관동군은 도이하라 겐지에게 지시하여 중국 주둔군과 베이핑 무관 보좌관과 협의, 쑹저위안 병력을 황하 이남으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라고 하였다.


3.3. 일본의 요구


일본측의 항의와 더불어 열하의 일본군이 찰동에서 군사작전을 실시, 영안보(永安堡)를 점령하였고 6월 11일에는 만주국군이 동책자(東柵子)를 침입하였다. 6월 12일에는 만주국 경찰대가 소창(小廠)에서 29군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차하얼 정부는 일본측의 항의에 위기를 느끼고 6월 12일, 친더춘을 장자커우에서 베이핑으로 보내 베이핑 군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에게 사건 경과과 일본의 요구를 보고하게 하고 대응방법을 논하게 했다. 허잉친은 사태 확대를 우려하여 차하얼 당국에 정세를 참작하여 처리해줄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6월 13일, 일본은 장북 사건의 책임 교섭자인 장자커우 특무기관장 마쓰이를 베이핑에 보내 일본 대사관 무관 타카하시와 모의하게 하였다. 13일 오후, 마쓰이는 친더춘을 방문하였는데 친더춘은 마쓰이에게 일본측의 요구를 상의하여 처리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관동군은 도이하라 겐지를 전권대표로 삼아 톈진으로 파견, 교섭에 참여하게 하였다. 마쓰이는 친더춘의 대답을 받고 13일 저녁에 톈진으로 가 화북주둔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에게 보고한 후 친더춘을 초청하여 톈진에서 교섭하게 하였다.

6월 16일, 친더춘과 마쓰이, 도이하라가 톈진에서 회담을 가졌다. 일본 측은 총 4가지를 요구하였다.

  • 1. 사과.

  • 2. 제132사 참모장의 해직.

  • 3. 제132사 군법 처장의 처벌.

  • 4. 금후 내몽골에 여행을 할 때 편리를 제공한다.

친더춘은 이를 모두 수락했다. 이때 도이하라는 친더춘에게 "관동군이 앞으로 제기할 가장 큰 요구는 쑹저위안 주석의 면직과 132사의 철수 및 사고를 일으킨 자에 대한 처벌이다. 만약 중국 정부가 자동적으로 처리한다면 이 요구는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원래 일본군은 하북 사건을 구실로 국민정부를 압박하여 우학충의 51군을 축출하였던 것과 같이 국민정부를 압박하여 29군을 철수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화북 주둔군 참모장 사카이가 쑹저위안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29군을 평진 지역에 주둔할 수 있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는 도쿄에 의견을 구하였는데 도쿄는 무리하게 29군을 몰아내면 국제적 간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카이의 의견을 지지하여 미나미 지로에게 다시 모여 회의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3.4. 관동군의 음모


도쿄의 훈령을 받은 미나미 지로는 6월 17일, 장춘에서 사카이, 산해관 특무기관장 기가, 장자커우 특무기관장 마쓰이 등을 소집하여 다섯 시간동안 회의를 했다. 6월 18일 새벽 2시에 미나미는 회의를 해산하고 <쑹저위안에 대한 교섭 요강>이라는 것을 제정하게 되었다. 미나미는 도이하라에게 교섭에 책임을 지게 하고 열하의 군사행동과 협력하여 2주 안에 교섭을 완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쑹저위안에 대한 교섭 요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침:
쑹저위안으로 하여금 절대로 차하얼성 내에서의 행동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결심케 하라.
요구사항:
(1) 정전 협정에서 정정선 이동 지구 및 북장성선 이북 지구의 쑹저위안을 서남 지구로 이동케 하라. 중국 군대가 다시는 철수 지역에 침입하지 못하게 하라.
(2) 모든 배일기관(동북헌병, 남의사, 국민당 당부)를 전부 해산할 것.
(3) 쑹저위안의 사과 및 책임자의 처벌을 곧 시행할 것.
(4) 상기한 제1,2항을 요구한 날로부터 두주 이내 완성토록 할것.
교섭:
(1) 도이하라 겐지 소장과 중국 주둔군 등이 긴밀하게 연락을 취한 후 직접 쑹저위안과 교섭할 것.
(2) 신속한 교섭과 더불어 중국 측의 실행을 확인할 목적으로 군의 일부를 열하 방면으로 행동토록 할 것.
(3) 또한 직접 배일 행위를 하지 않는 산동 이민 등도 마땅히 실제적으로 중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회의가 끝난 후 마쓰이와 사카이는 18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톈진으로 돌아가 일본 조계지 내부의 상반여관(常磐旅館)에 투숙하고 있던 도이하라를 찾아가 회의 내용을 종합보고하였다. 한편 마쓰이와 만나려 했던 친더춘도 마쓰이가 톈진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상반여관으로 가 마쓰이를 만났다. 중일 양국 대표들은 논의 끝에 베이핑으로 담판 장소를 옮기기로 하였다. 6월 19일, 쑹저위안의 전보를 받은 친더춘이 베이핑으로 이동, 거인당을 방문하여 포문월 등에게 톈진에서의 교섭 경과를 보고했다.

한편 국민정부는 친더춘으로부터 만약 국민정부가 자주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도이하라의 말을 보고받았다. 이에 행정원장 왕징웨이는 "우리가 남의 협박을 받아서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먼저 처리하는 것만 못하며 또한 그들은 요구할 대상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6월 18일, 쑹저위안을 차하얼성 정부주석에서 해임하고 친더춘을 대리 주석으로 임명할 것을 지시했다. 6월 19일, 쑹저위안의 해임과 친더춘의 대리주석 임명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친더춘은 19일 심야, 전용차를 타고 베이핑에서 장자커우로 돌아와 주석 집무를 보기 시작했고 쑹저위안도 장자커우에서 베이핑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평수선 강장역(康壯驛)에서 잠시 만나 얘기를 나눈 후 각자 목적지로 이동했다.

6월 20일, 베이핑에 도착한 쑹저위안은 차에서 내리자 곧 사저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며 모든 면담을 일체 사절하였다. 이후 쑹저위안은 다시 차를 타고 톈진으로 이동하여 사택에 머물렀다. 그는 톈진에 도착하여 기자들에게 "중앙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29군은 이미 사장 장자충에게 통수하도록 건네 주었으며 외교는 친더춘이 중앙의 의견을 받들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후의 책임자는 분쟁을 그치고 서로 편안히 지내도록 방침을 행해야 한다."라고 발언하였다.


4. 결과


국민정부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이에 더욱 기고만장해진 관동군은 친더춘을 협박, 진토 협정의 체결을 강요하게 된다. 자세한 체결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5. 참고문헌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일본근현대사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