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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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손오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자포(子布). 장승과 장휴의 아버지.
생몰년도에서 알 수 있듯이 굉장히 장수하여 80년을 산 인물이다.[1] 황건적의 난 때 이미 성인이었으나[2]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서주 팽성국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백후(白侯) 자안(子安)에게서 춘추좌씨전을 수업 받고, 많은 책을 널리 보았으며, 약관 때에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가지 않고, 조욱, 왕랑과 함께 명성을 날리고 친교를 맺었다. 서주자사 도겸은 그의 명성을 듣고는 무재로 천거했으나 장소는 이에 불응했다. 도겸은 자신을 가벼이 여겼다고 여기고는 격분하여 장소를 잡아들였다. 그러나 조욱이 힘을 다해 구출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3]
이후 황건적의 난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강남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2.2. 손책 휘하에서[편집]
황건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건너간 장소는 주유의 추천으로 회계태수 손책의 휘하에 들어가 벼슬을 하게 되었다.
손책은 장소를 매우 신임하였고 그에게 정사의 일체를 맡기는 등 모주로 대우했고 나중에는 그를 중부라 불렀다. 그러던 와중에 원술이 칭제하자 손책은 원술과 절교했는데 이 때 장소는 손책의 명으로 원술에게 보내는 절교 격문을 작성했다. 사실 장소는 이 당시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간파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원술이 칭제를 하자 장소는 손책에게 원술이 대의명분과는 정반대로 가려는 행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격문을 작성하게 했다. 다음은 그 격문의 내용이다. 손책은 사실상 받아쓰기만 했고 내용의 큰 틀은 장소가 만들어줬다.[4]
"은(殷)나라 탕(湯)왕이 하(夏)나라 걸(桀)왕을 토벌할 때 '하나라는 죄가 많다' 하였소. 주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정벌할 때는 '은나라는 징벌이 너무 무겁다' 하였소이다. 이 두사람이 아무리 성스러운 덕이 있다 할지라도 가령 그때 걸과 주에게 도리를 잃은 과오가 없었더라면 그들을 핍박해 천하를 취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오.
황제께서는 천하에 악한 일을 한 바가 없소이다. 단지 어리고 세력이 약해 강한 신하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탕왕과 무왕의 시절과는 사정이 다르오. 비록 동탁이 탐욕스럽고 도리에 어긋나고 교만하고 황실을 업신여기고 욕심이 끝이 없었으나 그조차도 황제를 폐립한 후 스스로 자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다 한마음으로 그를 미워했는데 항차 그의 잘못을 본받고 나아가 더 심한 짓을 하려는 것이오?
또 듣기로는 어린 군주가 지혜롭고 총명해 이미 덕을 이룬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오. 천하 사람들이 비록 천자께 은혜를 입은 바 없음에도 마음을 천자께 돌리고 있소이다. 사군께서는 5대에 걸쳐 재상의 직을 역임하고 재상으로서 한나라를 보필하여 그 영예와 은총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오.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켜 왕실에 보답함으로써 주공 단(旦)과 소공 석(奭)의 아름다운 전례를 밟기를 바라는 것이 사군을 따르는 자들이 소망하는 바이오.
요즘 사군께서는 사람들이 도참과 점술에 의거해 떠드는 말에 혹해 망령된 글을 끌어다 붙이면서 참으로 아첨하는 말만 아름답게 여기고 계책의 성공과 실패를 고려하지 않고 있소이다. 성패는 예나 지금이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바이거늘 어찌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고 논박하는 것은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법이나 진실로 사군의 밝음에 도움이 된다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손책이 임종 시에는 장소에게 손권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손권의 능력이 못하다면 그가 직접 나라를 취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5] 이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것과 같은데 그만큼 손책이 장소의 능력을 믿고 신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6]
2.3. 손권 휘하에서[편집]
장소는 손권을 모시면서도 특유의 신중함으로 국사가 경솔히 이루어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손권의 지배 기반을 든든히 하였다. 손권 역시 장소를 중히 여겨 그가 출정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으면 장소를 항상 후방에 남겨 그에게 정사 일체를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소의 일생이 제대로 꼬이는 사건이 터지는데 208년에 조조가 유표가 죽어 무주공산이 된 형주를 함락하고 강동 땅을 노리자 주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들어 항복을 주장했다. 손권은 이러한 주장에 굴복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노숙이 아무 말 없다가 손권을 따라가 넌지시 그들 모두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신임을 얻었고 노숙이 파양에서 불러들인 주유가 적극적으로 항전을 주장한 뒤 손유 연합이 기어이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조군을 격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복을 주장하던 장소의 입지가 상당히 축소된건 물론이고, 더 극단적으로 평가하면 숙청만 피했을 뿐 장소의 정치 커리어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이에 대해 장소의 의견은 가신의 입장에서 주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 주장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두 세력간의 전력 차이는 물론 항복이 한심하다고 욕하기에는 당시 조조의 입장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항복한 장수와 유종은 어찌저찌 살아남았지만, 조조에게 항전한 장막의 경우 삼족이 멸족당했고 마찬가지로 원소의 자식들인 원담,원희,원상역시 비참하게 죽었다. 전력차가 명백한 상황에서 손권의 후견인 역할을 맡은 장소는 젊은 주군이 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여지가 있다.원소가 유우를 추대하려던 시도는 (본인이 거절했기 때문이지만) 실패했고, 원씨 일족은 멸족되었으며, 다른 황실 종친인 유표나 유언이 각자 1개 주를 영유하며 사실상 황제놀이를 할지언정 중앙에서의 독립은 포기할 정도며, 요동의 공손강도 중앙 정부와 대적하는 대신 자치를 인정받는 선에서 만족할 정도인데 하물며 강동은 신흥군벌가문인 손가의 휘하에 지역 호족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체제인데다가, 방계중의 방계라도 하여간 황족에 의대조라는 명분까지 쥐고 있는 유비와 달리 당대의 상식으로는 황제까지 끼고 있는 허창 중앙 정부에 대해 오랫동안 뻗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서주 출신의 장소가 고향 서주를 쑥대밭으로 만든 조조에게 귀부를 주장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고뇌를 거친 결정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남은 장수와 유종의 말년이 편안했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장수는 조조와 조비에게 밉보여서 아예 토사구팽 당했다는게 정설로 받아질 정도고[7] 유종은 살아남긴 했는데 유기와 함께 싸잡아서 개돼지 취급을 당하였고 거기서 생겨난 고사가 돈견이라는걸 고려했을때 항복한 손권이라고 딱히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원소군 포로를 생매장 시킨것이나 헌제귀인 동씨,효헌황후 복씨 자신에게 도움을 준 허유까지 죽여버린 조조가 과연 강동의 구심점이 될수도 있는 손권을 언제까지 잘 대해주고 살려둘지도 미지수 였으며 손권이 단순히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기보단 더 큰 뜻을 품고 있었는 데다가 애초에 일신의 안전을 빌미로 그러는 건 유장 휘하 법정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만 후대사람들이 세력 대 세력으로 보면 곧장 항복하자는 게 이해가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손권은 조조보다 훨씬 작은 강동의 세력조차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던게 아니었다. 적벽대전 당시 26세가 채 되지 않았던 손권은 세력을 물려받은지 고작 8년이었고, 그 위치도 호족 연합의 수장에 가까웠다. 당시 최소한 양주 전체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가 세력의 존망이 달렸는데도 패주하고 달아나던 유비+강하 태수 유기가 모은 것보다 조금 많은 정도의 병사 밖에 모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손권의 벼슬은 토로장군에 불과했다. 삼국시대의 전쟁에서는 명분이 중요했는데, 오의 지배체계가 특히나 느슨했기에 명확한 명분이 없다면 각 지역을 지배하는 호족들로부터 병력을 징발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반대로 손권측과 대적하는 조조군의 병사는 수십만명 이였다.[8] 이 정도이니 포지셔닝을 잘못해 자칫 손권이 '한나라의 승상에 대적하는 역적' 프레이밍을 당해 호족의 지지를 받지도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한 헌제와 직접적인 인연도 없고 이전까진 딱히 조조를 적대하지 않았던 손권이 이제와 이런 명분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애매하다. '니들은 역적이니 황제로 인정할 수 없어' 포지셔닝은 손권이 나중에 양주와 형주, 교주까지 다스리게 된 이후에 잡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손권은 명분이 훨씬 강했던 조위나 촉한에 비해 칭제가 훨씬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니 양주 자체도 느슨하게 지배하던 적벽 직전의 젊은 손권 입장에선 유비가 필요했던 것이다.그리고 적벽대전은 단순히 거대한 적을 맞아 열심히 싸운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 자체에 치밀한 외줄타기가 필요했다. 명분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전쟁 시작 전부터 이미 무너질지도 모르며, 전쟁을 치르게 된다고 해도 당시 최강자 조조의 대군과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 게다가 조조는 장료, 장합, 서황 등 항장들이나 가후 등 자신과 적대하다 항복한 이들을 잘 활용했다. 물론 손권은 한 세력의 지배자이긴 했지만 이 시점까지 조조 본인과 딱히 적대한 적도 없으며 정치적 입지가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높지도 않았던 손권을 딱히 숙청할 이유도 없다.
이런 상황이니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장소 입장에선 명분을 세우기도 힘들고 이기긴 더더욱 힘든 전쟁을 해서 젊은 군주를 위험하게 하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그가 대세에 순응해 안전한 길을 가게 한다는 선택을 한다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장소의 실수라면 손권의 야망과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인데, 사실 후대 사람 입장에서야 훗날 황제가 되는 손권이 조조, 유비와 대등한 입장의 거물로 보이지 당시 손권은 세력을 규합한지도 얼마 안되는데다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만한 강대한 적과도 아직 싸워본 적이 없던 젊은이였다.[9] 장소는 손책이 죽을 때 동생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인물이니 좀 더 안전한 길을 선호하는게 자연스럽다. 게다가 장소는 군인이 아닌 정치가인 만큼 항복을 하자는 주장은 그럭저럭 합리적인 선택이였다고 볼수도 있다. 문제는 손권이 장소의 생각보다[10] 훨씬 역량이 더 있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주유의 도움을 받아 조조와의 싸움을 이기자 적극적으로 화친론을 주장한 장소의 포지션이 난처해졌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적벽대전 승전 이후 장소의 입지가 엄청나게 좁아지긴 했지만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활동했던 기록이 꾸준히 있으며, 적벽의 대승 직후 손권이 합비로 진군한 것에 맞추어 장소가 서주로 진군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일족들도 이궁지쟁 이전까지는 꾸준히 정계에서 활약을 했지만, 2인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손권도 장소가 이랬던 것을 내심 언짢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게 장소의 나이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과 동갑내기라는 점이다.
221년에 위나라에서 사자 형정을 보내어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서고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장소는 형정의 무례함을 꾸짖고 협박하자 형정은 수레에서 곧 내렸다고 한다.
손권이 황제를 칭하게 되자 장소가 손권에게 축하하러 왔는데 손권은 장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만약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라고 쏘아붙였고, 장소는 땀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고 한다.
처음 승상을 둘 때 여론은 장소였지만 손권은 이를 듣지 않고 손소를 첫 승상에 삼았다. 손소가 죽고 승상을 새로 임명할 상황이 되자 또 모두가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손권은 "내가 어찌 자포에게 애정을 가지겠소? 승상의 일이 번잡하지만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아 원한과 허물이 장차 생겨나는데, 이를 더할 수는 없소"라고 말하면서 고옹을 등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강표전에서 말하기를 손권이 장소가 항복을 주장하는 일로 그를 꺼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1]
또한 육손과 함께 주유, 노숙, 여몽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12] 장소와 진송이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같이 말했으나 노숙이 반대하여 이기니 통쾌했다하면서 장소의 이름을 찍어서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권의 측근으로 남아 그를 보좌했는데, 사람됨이 강직하고 엄격했기 때문에 손권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또한 손권은 그를 꺼리기도 하였는데, 장소의 사람이 꼬장꼬장해서 군주인 손권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말싸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13] 영감님이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14]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손권이 칭제하자 장소는 늙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지만, 정작 촉의 사신이 오에 와서 촉을 찬양할 때 반박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자 손권은 반드시 사신에게 반박했을 장소를 그리워해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공손연이 오의 번국이 되기를 청했을 때 손권은 장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신 장미와 허안을 요동에 보내 공손연을 연왕에 임명하게 했다. 화가 난 장소는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았고, 손권도 화가 나서 장소 집 문을 흙으로 막았다.[15] 그런데 장소의 예측대로 공손연은 장미와 허안을 죽였다. 이후 손권이 장소에게 사과도 하고 구슬려보기도 했지만 영감이 단단히 삐쳤는지 묵묵부답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손권이 집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 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래도 끝까지 장소는 집을 나서지 않아서 결국은 아들이[16] 장소를 업고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나 손권과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숙청되거나 하야하지 않았는데, 이는 손권이 장소를 마냥 아껴서 라기 보다는 손오 체제의 불안정성 덕분에 숙청할 여건이 되지 못했는데다가 본인 역시 체제 안정에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손권 입장에서는 토호를 견제해야 할 카드도 필요했고 말이다.
하여간 이 때문에 장소의 말년 30여년간 두 사람은 정말 많이 티격태격 했다. 손권은 장소에게 "오나라의 사대부들은 입궁하면 곧 나에게 절하지만, 출궁하면 곧 그대에게 절한다. 내가 그대를 공경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건만 몇 번이나 백관 한가운데서 나를 꺾으려 든다."(吳國士人入宮則拜孤 出宮則拜君 孤之敬君 亦為至矣 而數於眾中折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한 번 이미 군주의 뜻을 배신하고 적에게 항복하자고 권했고, 두 번이나 승상 임명에 퇴짜를 놨으니 권위가 죽을 법한데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닦아놓은 명사의 간판이 워낙 삐까번쩍해서 손권이 없는 궁 밖에서는 사족들의 영수, 리더 대접을 받고 옳은 말이긴 해도 어쨌든 사사건건 자신한테 맞서려고 든다는 점에서는 손권 입장에서 절대로 승상 같은 더 큰 실권을 줄 수 없고, 줘서도 안 되는 존재였을 법하다. 단지 명성과 여론을 함부로 어쩌긴 어려우니 선 넘을 만하면 적당히 달래면서 의전용, 내정용 트로피로 곁에 둔 것에 가깝다. 국가에는 여러모로 필요한 존재지만 손권 본인에게는 갈수록 정치적 부담이란 점은 말년의 육손과도 묘하게 포지션이 겹치는데, 그나마 육손과는 달리 군사적 영향력이 없고 + 정치적 실권도 약해서 부담의 레벨은 덜했을 것으로 보인다.
3. 평가[편집]
당나라 인물인 주경칙이 쓴《수고조론》에서 소하, 구순,[17] 제갈량, 무굉,[18][19] 경략[20] 같은 명재상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4. 기타[편집]
- 매우 장수한 부분에다 오나라의 원로 대신이란 이미지도 강해서 대부분의 창작물에선 적벽대전 파트 때 이미 노인이 된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장소는 오히려 조조보다도 1살 어렸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소(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