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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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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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0대 태왕
장수왕 | 長壽王


파일:요양 고씨 장수왕 영정.gif

요양 고씨가 그린 장수왕의 영정.[1]
출생
(음력)

394년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491년 12월 (향년 97세)
고구려 평양성
능묘
장군총(將軍塚) (추정)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의 태자
409년 4월 ~ 412년 10월 (3년 6개월)
제20대 태왕
412년 10월[2] ~ 491년 12월 (79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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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횡성 고씨 / 요양 고씨[1]

거련(巨連, 巨璉) / 연(璉)
부태왕
광개토태왕
형제자매
동생 한 명[2]
태왕후
고조다의 모후
자녀
태자 고조다
왕자 고공?, 고승우
왕녀 1명
태손
고나운
종교
불교
신장
약 165cm 이상[3]
시호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북위: 강(康)
연호
연수(延壽)(?), 연가(延嘉)(?)[4], 건흥(建興)(?)[5]



1. 개요
2. 시호와 휘
4. 평가
5. 《삼국사기》 기록
6. 장수
7. 여담
8. 대중매체에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구려의 제20대 태왕.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태왕 중 하나로, 394년광개토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412년 10월 고구려의 20번째 태왕으로 즉위하고 491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승하하며 79년 2개월의 기나긴 재위를 마쳤다. 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2. 시호와 휘[편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긴 장'(長), '목숨 수'(壽). 말 그대로 '긴 수명'이라는 뜻이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했고,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는 거련(巨連). 단순 한자 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는 뜻. 아마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인 듯 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허나 그때는 순우리말 이름을 여러 한자로 음차했기에 풀어 읽어서 '크게 잇는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위에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주기도 했다.#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수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 한다. 고구려의 경우를 고국원왕 때 한 번 망했다 친 뒤 3대로 빗댄다면 소수림왕-고국양왕 시대가 1세대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고, 2세대가 광개토대왕으로서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녔다면 3세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 하고 선대의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넓어진 영토, 점점 다시 강해지는 남북조, 고구려의 빈틈을 시시각각 찾고 있는 백제와 신라를 사방에 두고 장수왕은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국내성 주변에서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남벌을 천명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 [3]

신라가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세력권 밖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백제와 신라는 최소한 장수왕 당대에는 고구려의 힘에 짓눌려 있었다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또한 요동을 놓고 누대의 원수이던 모용선비의 후예 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 요동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중원 남북조에게는 양면외교를 시행하며 형식상 조공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외교로 남북조, 유연과 함께 4강 체제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은, 소수림왕 시기에서부터 천천히 시작해 광개토대왕시기까지 오면서 만들어진 전성기의 국가인 고구려를 편하게 운영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했다. 하지만 탁월한 본인의 능력을 활용하여 강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왕권 강화, 밖으로는 주변국 장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고구려 왕실의 두 원수인 북연 황제와 백제 왕을 주살하여 조상들의 원수도 갚았다. 본인도 장수하면서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을 향유한 왕이었다. 실제로 장수왕이 받은 중국 국가들의 시호들과 지위들,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접들은 역대 한국사 군주들 중에서 당연히 최상위라고 할 만하다.

5.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三國史紀)

[ 본기(本紀) ]
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박혁거세 · 박남해 · 박유리 · 석탈해 · 박파사 · 박지마 · 박일성
박아달라 · 석벌휴 · 석내해 · 석조분 · 석첨해 · 김미추 · 석유례 · 석기림 · 석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김내물 · 김실성 · 김눌지 · 김자비 · 김소지
김지대로 · 김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8권 「신라 8권 (新羅 八)」
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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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1-43권 「열전 1-3권」
44권 「열전 4권」
김유신 ,김원술 · 김윤중 · 김윤문 · 김암,
을지문덕 · 거칠부 · 거도 · 이사부 · 김인문 ,김양도, · 김양 ,김흔, · 흑치상지 · 장보고 · 정년 · 사다함
45권 「열전 5권」
46권 「열전 6권」
을파소 · 김후직 · 녹진 · 밀우 · 유유 · 명림답부 · 석우로 · 박제상 · 귀산 · 온달
강수 · 최치원 · 설총 · 최승우 · 최원위 · 김대문
47권 「열전 7권」
해론 · 소나 · 취도 · 눌최 · 설계두 · 김영윤 · 관창 · 김흠운 · 열기 · 비녕자 · 죽죽 · 필부 · 계백
48권 「열전 8권」
향덕 · 성각 · 실혜 · 물계자 · 백결선생 · 검군 · 김생 · 솔거 · 지은 · 설씨 · 도미 · 필부
49권 「열전 9권」
50권 「열전 10권」
창조리 · 연개소문
궁예 · 견훤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 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 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九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의 거의 전부다.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북위에 조공 기록만 25회.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기록이다. 덕분에 일부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공왕'이라는 괴랄한 별명도 있다.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 정책이 드러나는 거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그보다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글자수라도 채우기 위해 중국 사서 내용을 옮겨 적어야 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건 《삼국사기》가 거의 500년쯤 뒤에 쓴 책이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는 후기 고구려와 관련된 사료 대다수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 기록이 부족하면 《삼국사기》에서는 당연하게 중국 사서의 기록을 모아서 내용을 채웠다. 당연히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장수왕 관련 기사야 조공으로 기록된 외교 기사만 있을 수 밖에 없다.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대까지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다. 《신집》은 소수림왕 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 대까지가 상세하다.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덕분에 기록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 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관련된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흔적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


6. 장수[편집]


파일: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jpg

시호인 '장수'(長壽)라는 뜻처럼 매우 오래 산 임금이다.

고대인 기준으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한 아버지 광개토태왕과 무척 대비되는 부분.[4] 동시대 인물인 모두루도 '하늘이 이 나라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태왕께서 승하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 의학이 매우 발달한 21세기 현재에도 97세까지 생존하기는 무척 어려우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 수명, 전제군주제의 임금으로서 겪었을 업무 강도까지 고려하면 정말 오래 장수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157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금관가야수로왕, 11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태조대왕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적 모순점이 많고 신화적 기록이 가미되었거나, 혹은 다른 숨겨진 인물의 재위기록이 섞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로왕이나 태조대왕과는 다르게 장수왕은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실증적 재위 기록이 중국 사서에도 존재한다. 게다가 저 두 왕은 수명이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장수왕은 현실에서도 간혹 그 나이까지 장수하는 경우가 있기에 일말의 의혹 없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장수했고,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셈.

현대 기준으로 봐도 경이로운 건강인데, 오랜 재위와 건강으로 왕세자 놀리기가 거의 밈 취급을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도 장수왕과 비교하면 1년 단명했고 9년 짧게 재위했다. 게다가 장수왕은 남성이라는 수명적 핸디캡을 안은데다 현대 의학의 도움조차 없이 저런 수명을 누렸으니 더더욱 복 받은 건강을 누린 셈.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 길다. 연령이 검증된 인물들 기준으로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 왕은 물론이고 고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한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수왕보다 오래 산 지도자는 아직까지 없다.[6] 원래 후계자였던 태자 고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손자인 문자명왕이 장수왕에게 보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같은 고구려의 왕들인 태조대왕, 신대왕, 차대왕[7] 등이 믿기 힘든 긴 수명으로 이름이 높고 미천왕, 고국원왕, 문자명왕 등도 3~40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을 자랑하며 안장왕, 안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등도 환갑쯤은 가뿐히 넘기는 것을 보면 고구려 왕가 자체가 장수하는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장수는 유전자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기 때문이다. 군주의 수명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요소이고 군주는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의 군주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의의를 갖는다.[8] 거기다가 장수왕은 이렇게 70년 넘게 재위하였음에도 명군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오래 산 것도 모자라 그 기간 동안 명군의 행적만 보였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복 받은 일이다. 더불어 그의 이름값으로 인해 다른 장수하는 군주들에게도 그런 별명이 붙고 있다.


7. 여담[편집]


  • 외모 평가가 드문 《삼국사기》에서 장수왕의 외모에 대해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다며 기록하고 있다.


8. 대중매체에서[편집]


고구려 왕조에서 아버지 광개토대왕 다음가는 업적과 유명세를 자랑하고 상당히 오래 재위하여 고구려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의외로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데 기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 듯 하다. 장수왕 본인이 부왕 때 미친듯이 팽창하던 국가의 왕자로 태어나 즉위한 뒤 대내외로 패권을 휘둘렀던 사기캐라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차라리 이 무서운 인물을 대해야 했던 백제신라의 입장에서 극강의 최종 보스 역할이면 모를까. 그래서 앞으로도 장수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38세에 사망했지만 대중매체에서 죄다 늙은 모습으로 나오는 아버지 광개토대왕과는 달리 장수왕 본인은 97세까지 장수했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죄다 젊은 모습으로 나온다.

  • 형민우의 만화 〈태왕북벌기〉에서는 마지막 권에서 어린 시절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무술을 수련하면서 이후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하고 끝.

  • 2007년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는 기하의 소생으로 나오며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다보니 아역으로만 출연했다. 배역은 정윤석. 당시 이름은 아직이인데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해서 수지니가 아직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응당 등장할 것으로 여겨졌으나 끝까지 안 나왔다. 배역은 커녕 언급조차 없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구려 영웅으로 등장한다.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쓰는데 모델링이 영 괴악해서 대머리처럼 보이며 투구뿔도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으로 착각해 헤이하치 컷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작 초상화는 중세 프랑스 왕족을 연상시키는 머리스타일에 곱상한 얼굴이다. 전차를 몰고 활을 쏘는 영웅 유닛으로 현혹술을 통해 적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덧붙여 다른 나라는 왕이 현혹술을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만 유일하게 태자가 현혹술을 쓰고 있다. 목소리가 나카오 류세이와 비슷하다.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영화 관상에서 마지막 장면의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다. 노년의 장수왕 모습이 대중매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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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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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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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왕사


























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고여진


























고호동

5대
모본왕

고재사


























고익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고막근

고막덕

8대
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고국천왕

고발기

10대
산상왕

고계수




























고박위거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

고예물

고사구
























13대
서천왕

고달가

고일우

고소발

공주
























14대
봉상왕

고돌고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

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고강

19대
광개토태왕
































20대
장수태왕





고익


























고조다

고승우

공주

고승천


























21대
문자명태왕
































22대
안장태왕

23대
안원태왕

고안학






























24대
양원태왕

왕자






























25대
평원태왕






























26대
영양태왕

27대
영류태왕

평강공주

대양왕




























고환권



28대
보장태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1] 중국 하얼빈시 요양 고씨 집성촌에 보관되고 있다.# 이 영정을 그릴 때 요양 고씨 연장자 두 사람의 골상을 토대로 하얼빈 화가가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2] 당대 고구려인들에 의해 작성된 광개토대왕비에서는 412년 10월에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를 토대로 즉위년을 계산하면 413년 10월이 된다.[3]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평양 천도는 훗날 북방계 귀족과(기존 국내성계로 대표되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 남방계 귀족 사이의(평양계로 대표되는 한반도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 앙금이 생겨 이내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결국은 연개소문의 쿠데타 및 집권과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씨앗이 되고 만다. 물론,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거점화 및 수도방어면에서 국내성보다 더 수월하다는 군사적 이점으로 인해 추진한 것이므로 그러한 파생된 문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4] 전근대 시대에 평균 수명이 낮았다지만 그건 유아기 사망률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고, 성인까지 성장했다면 4~50대까지는 사는게 보통이었다.[5] 괄호 안은 실제 기록은 아니며 문맥으로 판단한 사항이다.[6] 수명이 정확히 알려진 한국사의 정치 지도자 중 장수왕 다음으로 장수한 사람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 대통령이다(92세).[7] 그러나 이들은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도 20년쯤 뻥튀기되었어도 90세에 죽었다고 봐야 하는 태조대왕 등을 볼 때 장수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8] 민족문제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랫동안 재위하고 있어서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자 큰 혼란이 벌어졌던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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