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r20220720판)

문서 조회수 확인중...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민중왕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모본왕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고국천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부흥운동
추존
불명
안승
대양왕
· 고여율 · 대흥왕
기타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군주들





장수왕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고구려 제20대 태왕
長壽太王 | 장수태왕


파일:0kzJw8b.jpg

장수왕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감신총 벽화[1]
출생
(음력)

394년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491년 12월 (향년 97세)
고구려 평양성
능묘
장군총 (추정)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의 태자
409년 4월 ~ 412년 10월 (3년 6개월)
제20대 태왕
412년 10월[2] ~ 491년 12월 (79년 2개월)

[ 펼치기 · 접기 ]
본관
횡성 고씨

거련(巨連, 巨璉) / 연(璉)
부태왕
광개토태왕
태왕후
고조다의 모후
자녀
태자 고조다
왕자 고공?, 고승우
왕녀 1명
태손
고나운
종교
불교
신장
약 165cm 초과[1]
시호
장수태왕(長壽太王)
연호
연수(延壽)?, 연가(延嘉)?[2]


1. 개요
2. 시호와 휘
3. 생애
3.1. 내치
3.1.1. 평양 천도
3.1.2. 국호 변경
3.1.3. 숙청 가능성
3.2. 외정
3.2.1. 남진 정책
3.2.2. 왜국과의 외교
3.2.3. 중국 남북조 국가들과의 외교
3.3. 지두우 분할 시도
4. 평가
5. 《삼국사기》 기록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용성왕 풍군이 여기까지 와서 노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북연의 황제 풍홍이 고구려로 도망쳐 왔을 때 사신을 통해 건넨 위로의 말.[3]

[4] #


고구려의 제20대 군주.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조상들의 원수를 갚은 태왕이다. 39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413년 10월 고구려의 20번째 태왕으로 즉위하고 491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승하하며 재위를 마쳤다.


2. 시호와 휘[편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긴 장(長), 목숨 수(壽). 말 그대로 긴 수명이라는 뜻이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했고,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는 거련(巨連). 단순 한자 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는 뜻. 아마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인 듯 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북위에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주기도 했다.


3. 생애[편집]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이 거련(巨連)이다. 연(璉)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의 원자(元子)이다. 몸과 얼굴이 크고 잘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

長壽王, 諱巨連. 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에 나오는 첫 문구. #


보통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접고 뒷수습과 남진정책으로 선회한 수성군주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도 아버지 광개토대왕만큼 정복에 적극적인 타입은 아니었고 내치에 주력한 시기도 분명 있었지만 실상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아버지 말고는 비견할 대상을 찾기 힘든 패왕 타입 정복군주다.

광개토대왕이 412년에 승하하고 나서 즉위하여 맨 처음 한 일은 만 24개월 동안 3년상[5]을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광개토대왕의 능비에서 알수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부왕이 412년에 승하 하였고 414년 9월 29일에 능비를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413년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1년 격절을 토대로 보정하면 정확히 24개월 동안 장사를 지냈음을 역산할 수 있다.[6]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7]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3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 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8]


북쪽으로는 몽골 초원으로 말을 달려 지두우 분할을 시도하는 동시에 거란과 물길을 압박하고, 서쪽으로는 요서 일대에서 북연의 절대 투항을 이끌어내 황제 풍홍을 포함한 풍씨 황족과 인구를 접수하고, 외교전략을 병행하여 북위를 상대로 기싸움에서 유리함을 선점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일대와 왜까지 매우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

선조들의 두 원수였던 북연백제의 수도인 화룡성과 위례성을 불태우고, 북연 황제 풍홍과 백제 개로왕을 죽여 조상들의 한을 풀었다. 게다가 신라의 실성 마립간의 죽음과 눌지 마립간의 즉위에도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고 백제의 비유왕이 고구려에게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최소 2명, 최대 4명이나 다른 나라 군주를 바꿔버린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저 시기 백제는 신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고구려에게 짓밟혀 멸망할 뻔했다.[9]

이 때 고구려는 잘 나갔겠지만 아버지가 넓힌 땅, 흡수한 북연 인구, 평양성 천도로 인해 생겼을지도 모르는 신·구세력간의 대립, 물길의 발흥, 북위의 압박, 고구려 세력에서 이탈하려고 나제동맹을 맺어 안간힘을 쓰는 백제와 신라의 도전 등 나름 골머리 앓으면서 신경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수왕은 해결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해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과거와 급을 달리하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잡는다.

3.1. 내치[편집]


삼국사기》에는 내정 관련 기록이 빈약하여 아래 서술할 개로왕이 북위로 보낸 국서에 나오는 선전 문구를 바탕으로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압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414년, 만주 일대에서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했다.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서 고구려 고씨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규정하며, 광개토대왕 때 입안된 수묘인 제도를 성문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건 손자인 문자명왕 때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 시점을 장수왕 시기로 보느냐, 문자명왕 시기로 보느냐는 건립 목적과 관련되어서 중요한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파일:신라 호우명 그릇.jpg
파일:호우명 그릇 탁본.jpg

경주시 호우총에서 나온 그 유명한 호우명 그릇도 장수왕 3년(415년)에 제작하였다. 바닥에 새긴 글귀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으로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용 호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광개토대왕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기인데, 광개토대왕 장례식 일주년 당시 신라 사신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가 하사품으로 받아 온 것으로 추측됨.

419년 여름,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

424년, 나라에 풍년이 들어 왕이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3.1.1. 평양 천도[편집]


파일:고구려 군기.png
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 펼치기 · 접기 ]
졸본도읍기
동명성왕 ~ 유리명왕
국내도읍기
유리명왕 ~ 장수왕
졸본성[1]
국내성
환도성
하고성자토성 / 나합성[2]
오녀산성
평양도읍기
장수왕 ~ 평원왕
평원왕 ~ 보장왕
안학궁 / 청암리토성[3]
대성산성
장안성

별궁
전설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하였던 평양의 평지성





평양성 천도와 관련해서는 이미 아버지 광개토대왕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고[10] 장수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평양성 천도를 단행했다.[11]

기존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동천왕 때의 경험으로 그다지 방어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는 게 입증된 데다 척박하기까지 하여 생산력도 떨어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겨울 평균 기온은 -11℃. 쉽게 말하자면 철원보다 겨울에 6도 정도 낮은데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한반도보다) 내륙 지방+(평양성보다) 고위도'라는 악조건 때문에 여름엔 철원보다 더운 데다 춘천 평야의 반에 불과한 좁은 평야 말고는 모두 산이다.

반면 평양성 지방은 황해도의 평야와 인구 밀도를 바탕으로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고조선의 후기 수도였다는 점과 낙랑군에서도 행정 중심지였던 덕에 당대 동방(중국 동방)의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였다. 더구나 백제, 신라, 가야, 왜의 세력을 미리 꺾어두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당할 위험도 적은데다[12] 떠오르는 강자 북위를 방어할 만한 위치였다. 이 때 건설한 궁궐이 바로 안학궁(安鶴宮)이다.[13]


3.1.2. 국호 변경[편집]


평앙 천도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국호는 '고려(高麗)'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 시기 중원 고구려비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명문이 등장하므로 고려라는 국호는 이미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공식적으로 굳어진 시기는 장수왕 시기로 본다. 중국 측 기록에서도 장수왕 재위시기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일관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소 고려시대부터는 고구려라는 국호가 다시 보편화되어 있었다. 《삼국사기》가 좋은 예이다. 현대의 학계에서도 왕건이 건국한 고려 왕조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 부르고 있다. 조경철 등을 비롯한 다소 급진적인 소수의 연구자들은 아예 고대고구려중세고려를 각기 전고려, 후고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한민족고구려고려로 구분해 온 마당인지라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3.1.3. 숙청 가능성[편집]


5세기 전반기 이래로 고구려의 자체 기록은 다소 빈약해진다. 개로왕472년북위로 보낸 국서에서

"지금 연(璉)[14]

의 죄로 고구려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라는 문구로 고구려 공격 당위성을 주장한 기록이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임용한은 이 문구에서 착안하여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고구려의 내분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굉장히 오랫동안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중략) 의외로 장수왕의 기록이 없어요.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 때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는 거에요. 아마 평양 천도 하고 굉장히 심각한 내적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국내성파와 평양 세력 간의 갈등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거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中


게다가 맨 위 초상화가 정말 장수왕을 그린 것이 맞다면, 다른 부분은 비교적 말끔한 데 비해 머리 부분만 유난히 뜯겨 있어서 장수왕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고의로 훼손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고구려 내부의 소행일 수 있는데, 만약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은 타 민족 누군가가 그랬더라면 저렇게 머리만 지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무덤 전체를 불사르는 등 더 극단적인 방법을 썼을 테니 말이다.


3.2. 외정[편집]


내정이나 외정이나 고구려 자체의 사료가 거의 없다. 외정 관련 기록은 주변국에서 남긴 것들이 퍽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특히 중국에서는 조공, 책봉 기록의 양이 후덜덜하고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들도 주목할 만 하다. 일본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을 꽤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장수왕 대로 추정되는 시기의 고구려와 일본간 교섭도 기록으로 남아있긴 한데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때문에 정확하게 장수왕 시기의 기록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3.2.1. 남진 정책[편집]


파일:/100/sub/133000_0.jpg

당시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신라에서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장군이 자신의 신라인 부하에게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라고 불어서 경각심이 생긴 신라 측에서 신라 내 고구려 장수들을 몰살해버렸다. 이렇게 신라는 국내에서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갓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터라 아직 단독으로 고구려에게 비빌 국력은 안 되었기에 백제와 힘을 합쳐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장수왕의 남진에 대항했다. 이 때는 둘을 합쳐도 고구려보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륙의 북위, 유연 등과 국경을 접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소백산맥을 끼고 방어하는 선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의 전력을 투사하기 힘들었다. 장수왕 시기에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지대에서 잦은 마찰이 발생했는데 450년에는 신라의 하슬라(현 강원도 강릉시) 성주 삼직(三直)이 고구려의 변경 성주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468년 장수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하슬라와 실직성(현 강원도 삼척시)을 점령했다.

한편 백제의 개로왕북위에게 밀서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472년 고구려로 전해졌다. 화가 난 장수왕은 첩자인 승려 도림을 백제로 파견하여 개로왕에게 접촉하게 한 뒤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궁궐 등을 짓게 하여 국고를 낭비하게 만들었다.[15][16] 백제의 국고가 바닥날 낌새를 보이자 475년 장수왕은 백제를 전격적으로 침공해 수도 위례성을 함락하여 개로왕을 비롯한 여러 부여씨 왕족들과 귀족들을 죽여 조상들의 원수를 갚았다. 이 때 비로소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보는 고구려의 남방 강역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직접 출병한 장수왕의 나이는 82세.

위례성 함락 때 살아남은 백제 왕자 부여문주는 고구려가 위례성을 침공하자 나제동맹을 맺고 있던 신라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신라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오던 부여문주는 이미 위례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은 채 위례성으로 진격하기를 선택했고 위례성으로 진격하자 한강 이북으로 일단 물러간 고구려군을 마주하게 된다. 이에 문주왕은 백제-신라-가야 연합군의 비호 아래 위례성에서 즉위했던 것으로 보이며 1개월 동안이나 천도를 심사숙고했다.[17]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은 남하하여 웅진성에서 진을 치고 항전 태세로 들어가자 장수왕은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웅진성 인근 대전까지 내려와 월평산성을 쌓았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웅진성과 대전 사이에서 장수왕의 고구려군과 나제 연합군간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결국 장수왕의 고구려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백제는 멸망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18] 개로왕을 처단한 뒤 숨을 고른 장수왕은 481년에는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 북변 7개 성을 점령하고, 계속 진격하던 중 신라-백제-가야-왜 연합군에게 격퇴당했다.


파일:attachment/goguryusung123.png


남한 지역에서 남진 정책과 관련한 고구려 유적들은 발굴 조사 누적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양주 분지에 위치하는 여러 보루들까지도 현재 조사하고 있다. 보루를 통한 고구려의 진출 방식은 한탄강,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임진강, 한탄강에서 백제와 국경을 형성하고, 이를 넘어 양주 분지 일대를 장악한 뒤 나아가 아차산 일대 보루군을 설치하면서 한강 유역 공세를 펼쳐 475년 한성을 공략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보루들은 서술한 3개 권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한강 이남 대전 월평동 유적(목책), 안성 도기동 목책, 청주 남성골 산성(목책)에서는 공통적으로 고구려 토기들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백제가 형성했던 방어 시설을 고구려가 지속 남하하여 점령한 뒤 재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19]

이후 경기 이남 지역이 다소 혼란해진 상황에서 신라가 한강 진출을 시도하며 고구려와 마찰을 빚는다. 이 때 고구려는 위 보루들을 보강하여 신라와의 전쟁에서 활용하기도 하였다. 기록은 간단하게 나오지만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지리지>를 보면 경상북도 거의 절반 정도에서 고구려 행정구역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군이 무려 모산성(아막성, 현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등장하고, 왜국도 고구려에게 공격을 받아 출항이 힘들 정도였으니 각각 백제, 신라, 반파국(대가야) 왕성 반나절 거리까지 고구려 국경이 밀고 들어와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까 장수왕의 그것은 단순한 '남진정책'이 아니라, 1세기도 안 되어 국가의 중심을 한반도 중심도시인 평양으로 이주시키고, 구 백제세력의 근거지인 한성 백제를 아예 멸망시켰으며, 삼한권의 세력구도를 고(구)려와 남방 군소국가들로 만들어 버렸다.

아래는 모산성(아막성) 위치이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아막산성(阿莫山城) 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삼국사기》 <귀산열전>에서는 아모성(阿暮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막'(莫)자가 '영'(英)자와 비슷해 아영성(阿英城)으로도 기록했는데 아영면(阿英面)이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딴 것이다. #

파일:baekje_map_ge.jpg


3.2.2. 왜국과의 외교[편집]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켰을 때 고구려 장수들이 더 치고 내려가 백제를 완벽하게 멸하자고 건의하자 장수왕이 백제 뒤에 왜가 버티고 있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장수왕이 뜬끔없이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국수주의적 사관임을 생각해 보면 단순 허세이니 하고 넘어갈 대목이다. 그냥 수사 다 치우고 백제-신라-가야-왜까지 본격적으로 합세한 반고구려 동맹을 고려한 것으로 보면 된다. 참고용으로 해당 내용을 아래에 적어 놓는다.

20년 겨울에 고구려 장수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안 된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는 왜국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 【《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유랴쿠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온 사신이 왜왕 앞에서 외교 문서를 읽는데, 내용이 '고구려왕이 교한다(=가르친다)'는 뜻이어서 왕자가 해당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왜국 측이 남조에게 보낸 외교 문서에서는 고구려가 왜국의 변경을 약탈하고 사신을 차단해서 제대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처럼 왜를 적대시하는 것이다.


3.2.3. 중국 남북조 국가들과의 외교[편집]



파일:external/cfs2.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VSdVp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TEuanBnLnRodW1i&filename=11.jpg

중국 화가 청빙이(成秉藝, 성병예)가 그린 장수왕[20]

중국 입장에서 쓴 중국 사서에서는 조공을 했다고 말하나 《일본서기》 같이 외국 사신에 대한 기사는 무조건 조공으로 기록한 중국 사서를 그대로 사실이라 믿는 것은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야마토 서복 동래설처럼 많은 이민족들의 조상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사서도 많다.

일단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배우면 교과서에서 잘 나오는 장수왕의 업적이 바로 이것이다.

우선 북위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후연(後燕)이 멸망한 직후 건국된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의 제3대 황제인 소성제 풍홍은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려 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436년). 이때 장수왕은 갈로맹광의 지휘하에 군사 수만명을 파견해 화룡성의 주민들을 구출한 뒤 화룡성을 약탈, 방화하고 돌아왔다. 북연 황제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분수를 모르며 대접을 바라다가 화가 난 장수왕한테 천대를 받게 되었다.[21] 이후 풍홍은 남조인 유송(劉宋, 420 ~ 479년)에 망명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이 때문에 장수왕은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풍홍과 그의 자손 10여인을 죽이게 했다. 고조 할아버지 미천왕의 한을 푼 셈이다. 이후 남북조 사이에서의 등거리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유송 문제 유의륭이 북위를 공격하고자 하자 말 800필을 유송에 지원해 유송과 화해하고, 북위를 압박하기도 했다. 물론 고구려의 위세가 남북조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닌지라, 유송의 사신 왕백구(王白駒)가 이때 북연군의 잔당 7,000여명을 데리고 풍홍 일가를 죽인 고구려 장수인 고구를 죽이고 손수는 생포했는데, 유송의 형식적인 처벌만 받은 사건[22]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중국 국가들이 이렇게 형식적으로나마 처벌한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면 그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상당히 강력했다는 반증은 된다.[23]

이후 북위는 고구려 고씨 왕실과의 혼인을 바랬지만 장수왕의 한 신하가 "저것들 북연도 저렇게 뺑끼치고 침공했다."이라고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0여 년 뒤에는 역으로 고구려 측에서 북위에게 요구하여 혼인이 성사된다. 이때 고구려에서 북위로 건너간 자가 문소황후 고씨로, 그녀의 오빠 고조는 북위의 권력자가 되어 북위의 정계를 주물렀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에 장수왕이 승하했을 때 북위 황제가 애도 의식까지 치렀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장수왕이 북위에 역대 황제의 계보를 바치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응한 북위가 황실 계보를 바쳤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해석의 오류로 기실 북위가 신하국으로서 계보를 고구려에 바친 것이 아닌 고구려가 봉물을 바치면서 일종의 조공국으로서 북위 황실에 대한 피휘(避諱)를 하기 위한 이유로 원한 것이다.

여하간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 유송보다 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의 비교적 강한 국력을 자랑했다. 이때 고구려는 중원의 북위, 강남의 유송, 유목세계의 유연과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고구려 왕에게 최대한의 높은 작위를 내리면서 고구려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중국 국가들이 내린 작위 기준으로 장수왕보다 높은 위치에 오른 국왕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 기껏해야 원 간섭기 몇몇 고려 왕들 정도가 고작인데[24] 독립국이었던 고구려와는 그 위상을 논할 순 없다. 고구려가 북위를 공격하고, 북위 사신의 고구려 통과를 불허하며, 대놓고 양다리 외교를 펼치는 등 피책봉국답지 않은 태도를 보여도 북위는 고구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토욕혼, 유연, 유송은 틈만 나면 괴롭히면서도 고구려는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효문제가 사신을 대우할 때 남제의 사신과 고구려의 사신을 동등하게 대우해 남제의 사신들이 항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북위가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남제를 첫 번째로, 고구려를 두 번째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3.3. 지두우 분할 시도[편집]



파일:attachment/장수왕~1.jpg

빨간 선은 원정로가 아니라 답사로다.

이후 479년에 몽골 고원의 유연과 모의하여 현재의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에 위치한 유목 부족 국가인 지두우의 분할을 시도했다. 유연과 지두우 분할 모의를 했다는 기사만 남아있고, 그 경과에 대해서는 기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두우와 고구려 사이에 있었던 거란이 고려(물론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대릉하 인근으로 도망했다는 기록이 2건이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분할 시도는 했던 것 같다. 헌데 그때 유연은 북위에게 털리고 있었던 터라 지두우에 원정을 보낼 사정이 못되었고, 이후에도 지두우나 물길이 여전히 사신들을 보내 외교활동을 하는걸로 보아서는 실패했거나 완전히 삼키지는 못했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확실한 건 지두우 원정 성공 여부를 떠나서 시도는 이루어졌고 그 와중에 거란이 고구려에게 침략당하여 당시 내몽골의 유목민 세계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종종 내몽골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의 성터를 이 사건과 연관짓기도 한다.1994년 발굴 당시 기사

국사 교과서 역사 부도 표기에는 거의 나타내지 않되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였다는 서술을 남김으로써 두리뭉실하게 다루고 있다.


4. 평가[편집]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 한다. 고구려의 경우를 저 3대로 빗댄다면 소수림왕-고국양왕 시대가 1세대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고, 2세대가 광개토대왕으로서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녔다면 3세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 하고 선대의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넓어진 영토, 점점 다시 강해지는 남북조, 고구려의 빈틈을 시시각각 찾고 있는 백제와 신라를 사방에 두고 장수왕은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국내성 주변에서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남벌을 천명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 신라가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세력권 밖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백제와 신라는 최소한 장수왕 당대에는 고구려의 힘에 짓눌려 있었다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남북조에게는 양면외교를 시행하며 형식상 조공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외교로 남북조, 유연과 함께 4강 체제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은, 소수림왕 시기에서부터 천천히 시작해 광개토대왕시기까지 오면서 만들어 진 전성기의 국가인 고구려를 편하게 운영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했다. 하지만 탁월한 본인의 능력을 활용하여 강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왕권 강화, 밖으로는 주변국 장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본인도 장수하면서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을 향유한 왕이었다. 실제로 장수왕이 받은 중국 국가들의 시호들과 지위들,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접들은 역대 한반도 군주들 중에서 당연히 최상위라고 할 만하다.


5.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三國史紀)

[ 본기(本紀) ]
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박혁거세 · 박남해 · 박유리 · 석탈해 · 박파사 · 박지마 · 박일성
박아달라 · 석벌휴 · 석내해 · 석조분 · 석첨해 · 김미추 · 석유례 · 석기림 · 석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김내물 · 김실성 · 김눌지 · 김자비 · 김소지
김지증 · 김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8권 「신라 8권 (新羅 八)」
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추모 · 고유류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어수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보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열전(列傳) ]
41-43권 「열전 1-3권」
44권 「열전 4권」
김유신
을지문덕 · 거칠부 · 거도 · 이사부 · 김인문 · 김양 · 흑치상지 · 장보고 · 정년 · 사다함
45권 「열전 5권」
46권 「열전 6권」
을파소 · 김후직 · 녹진 · 밀우 · 유유 · 명림답부 · 석우로 · 박제상 · 귀산 · 온달
강수 · 최치원 · 설총 · 최승우 · 최원위 · 김대문
47권 「열전 7권」
해론 · 소나 · 취도 · 눌최 · 설계두 · 김영윤 · 관창 · 김흠운 · 열기 · 비녕자 · 죽죽 · 필부 · 계백
48권 「열전 8권」
향덕 · 성각 · 실혜 · 물계자 · 백결선생 · 검군 · 김생 · 솔거 · 지은 · 설씨 · 도미 · 필부
49권 「열전 9권」
50권 「열전 10권」
창조리 · 연개소문
궁예 · 견훤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 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 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九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 거의 전부로[25], 나머지는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북위에 조공기록만 25회.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기록이다. 덕분에 일부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공왕'이라는 괴랄한 별명도 있다.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 정책이 드러나는 거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그보다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글자수라도 채우기 위해 중국 사서 내용을 옮겨 적어야 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건 《삼국사기》가 거의 500년쯤 뒤에 쓴 책이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는 후기 고구려와 관련된 사료 대다수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 기록이 부족하면 《삼국사기》에서는 당연하게 중국 사서의 기록을 모아서 내용을 채웠다. 당연히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장수왕 관련 기사야 조공으로 기록된 외교 기사만 있을 수 밖에 없다.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대까지[26]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고,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덕분에 기록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관련된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흔적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


6. 여담[편집]


파일: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jpg

  • 시호인 '장수(長壽)'라는 뜻처럼 매우 오래 산 임금이다. 고대인 기준으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한 아버지 광개토태왕과 무척 대비되는 부분.[27] 의학이 매우 발달한 21세기 현재에도 97세까지 생존하기는 무척 어려우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정말 오래 장수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15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금관가야수로왕, 119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태조대왕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로 전해져 오는데 역사적 모순점이 많고, 신화적 기록이 가미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로왕이나 태조대왕과는 다르게 장수왕은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실증적 재위 기록이 존재하는데다 현실에서도 간혹 그 나이까지 장수하는 경우가 있기에 일말의 의혹없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장수한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셈. 게다가 재위 기간은 무려 79년인데 그야말로 한반도 최장수, 최장기 집권 지도자.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 길다. 연령이 검증된 인물들 기준,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 왕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수왕보다 오래 산 지도자는 아직까지 없다. 원래 후계자였던 태자 고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손자인 문자명왕이 장수왕에게 보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같은 고구려의 왕들인 태조대왕, 신대왕, 차대왕[28] 등이 믿을 수 없는 장수로 이름이 높고 미천왕, 고국원왕, 문자명왕 등도 3~40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을 자랑하며 안장왕, 안원왕, 영양왕, 영류왕 등도 환갑쯤은 가뿐히 넘기는 것을 보면 고구려 왕가 자체가 장수하는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장수는 유전자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기 때문이다. 군주의 수명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요소이고 군주는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의 군주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의의를 갖는다. 거기다가 장수왕은 이렇게 70년 넘게 재위하였음에도 명군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오래 산 것도 모자라 그 기간 동안 명군의 행적만 보였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복받은 일이다. 더불어 그의 이름값으로 인해 다른 장수하는 군주들에게도 그런'별명이 붙고 있다.

  • 외모 평가가 드문 《삼국사기》에서 장수왕의 외모에 대해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다며 기록하고 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고구려 왕조에서 아버지 광개토대왕 다음가는 업적과 유명세를 자랑하고 상당히 오래 재위하여 고구려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의외로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데 기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 듯. 그래서 앞으로도 장수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장수왕 본인도 부왕 때 미친듯이 팽창하던 국가의 왕자로 태어나 즉위한 뒤 대내외로 패권을 휘둘렀던 사기캐 수준인 인물이라 입체적인 주인공으로서의 캐릭터를 만들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차라리 이 무서운 인물을 대해야 했던 백제신라의 입장에서 극강의 최종 보스 역할이면 모를까.

  • 형민우의 만화 <태왕북벌기>에서는 마지막 권에서 어린 시절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무술을 수련하면서 이후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하고 끝.


  •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당연히 등장해야 하는 배역이지만 끝까지 나오지를 않는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구려 영웅으로 등장한다.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쓰는데 모델링이 영 괴악해서 대머리처럼 보이며 투구뿔도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으로 착각해 헤이하치 컷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작 초상화는 중세 프랑스 왕족을 연상시키는 머리스타일에 곱상한 얼굴이다. 전차를 몰고 활을 쏘는 영웅 유닛으로 현혹술을 통해 적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덧붙여 다른 나라는 왕이 현혹술을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만 유일하게 태자가 현혹술을 쓰고 있다. 여담으로 목소리가 나카오 류세이와 비슷하다.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영화 관상에서 마지막 장면의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다. 노년의 장수왕 모습이 대중매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08 22:32:20에 나무위키 장수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얼굴은 훼손되었지만 벽에 왕(王)자가 써있고 감신총을 5세기 전반경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연화대에 앉아 있기 때문에 불교를 도입한 소수림왕 이후일 터인데 5세기 전반경에 고구려 왕이었던 사람은 장수왕 단 한명 뿐이니 장수왕을 그린 초상화가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2] 당대 고구려인들에 의해 작성된 광개토대왕비에서는 412년 10월에 즉위 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를 토대로 즉위년을 계산하면 413년 10월이 된다.[3] 용성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뜻하고, 풍씨는 북연의 국성이다. 엄연한 황제국의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왕도 아닌 용성왕이라 대놓고 낮춰 부른 것은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급으로 취급한 것이라 굉장히 모멸적인 호칭이다. 그 이후 행적을 봐도 조롱에 가까운 발언이였을듯 하다.[4] 특이하게도 한민족에게 처형된 유일한 중국 황제이다.[5] 만 24개월~27개월[6]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사망한 연도와 장사를 지낸 연도가 딱 27개월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 당대에도 널리 통용되는 관습임을 알 수 있다.[7] 광개토대왕이 스무 살일 때 장수왕이 출생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아들을 딱히 늦게 본 것도 아니다. 광개토대왕이 마흔을 못 넘기고 죽었기 때문에 아들 장수왕 역시 나이가 어릴 수밖에 없었다.[8]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9] 더 안습한 것은 백제의 지방군보다 더 멀리 위치한 신라의 지원군이 기록에서 등장한다.[10] 이는 《삼국사기》나 광개토대왕릉비 등 관련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재위 2년째에 평양에 절을 무려 9개나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영락 9년과 14년에 평양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 사회에서 은 사회망을 구축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단기간에 평양에 사찰을 9개나 세우고 왕이 직접 남쪽에 위치한 곳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에서 나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광개토대왕도 평양성 천도를 염두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11] 고구려는 건국 시기부터 수도 체제를 평시에 사용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을 따로 짓는 이중 수도 체제로 유지해왔는데 평양으로 천도를 하였을 때에도 전시용으로 대성산성도 건축하였다. [12]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대에 돌궐, 북주, 물길(말갈), 신라, 백제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았다. 6세기 말부터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로는 평양성이 국경과 인접해 버리는 위험한 꼴이 된다. 이건 100년 가까이 훗날의 이야기이니 장수왕이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이 때 고구려는 신라가 우리 대신 백제를 공격하라는 밀약을 맺었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관산성 전투이다.[13] 다만 안학궁은 이미 수·당 시대에는 사라진 한나라 미앙궁 양식의 궁궐 조성과 북위 궁전에서 보이는 태극전, 동•서당제 등이 확인된다. 이는 안학궁이 수·당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이며, 북위의 낙양궁이 지어진 때가 5세기 후반이므로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안학궁이 (북위 낙양궁이 지어지기도 전인) 장수왕 15년(427)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에 안학궁을 장수왕 대의 궁전으로 보지 않는 견해 역시 존재하고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14] 장수왕을 말한다.[15] 그러나 백제가 무너진 진짜 이유는 국고 낭비 때문이 아니라 도림의 꼬드김에 넘어가 개성 일대 방위선을 소홀히 하고, 한성 방어에만 불필요한 인력을 낭비했다는 것이 최근 대두되는 중이다.[16] 신라 소지 마립간 때 거문고 갑을 활로 쏴서 그 안에 숨어있던 간통 관계인 승려와 왕비를 죽였다는 <사금갑(射琴匣)조>는 대체로 신라 내부 불교 세력과 토착 종교 세력간 갈등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수왕이 백제에게 1번 써먹은 방법으로 신라에게도 승려를 간첩으로 보냈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주장도 있다.[17]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1권 《한성에서 웅진》으로 참고.[18] 이 때 신라는 언제 고구려군이 수도를 기습할 수 있으니 자비 마립간명활산성에 임시로 들어가 항전을 대비했다.[19] 가장 남쪽인 대전 월평동 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나오는 상황은 웅진성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웅진성 바로 옆인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유적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나온 사례가 있다.[20] 한국 측 초상화나 표준 영정은 없다. 청빙이는 역대 고구려 왕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동북공정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유인원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장수왕은 그나마 나은 편. 후술하듯 삼국사기에도 장수왕의 외모를 좋게 평가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도 외모가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21] 장수왕은 북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풍홍을 보내지 않았다. 충분히 할 일을 했다는 것.[22] 왕백구는 고구려측에서 생포했지만 외교관계를 고려해서인지 유송으로 압송시킨다. 이때 손수도 풀려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유송 입장에서도 당대의 강국이자 북조 견제에 필수적이었던 고구려에 차마 대놓고 적대할 순 없어서, 고구려가 왕백구를 죽이라고 압박을 하자 그를 송환하여 가둔 뒤 몰래 풀어주었다.[23]남제서》에서는 고구려가 워낙 강국이라 마음대로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하는데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북위는 고구려 사신의 관저를 남제에 버금가게 지었으며, 사신들의 의전 서열도 동등하게 했는데 이에 대해 중원 국가도 아닌 고구려를 그렇게까지 대접하느냐고 남제 사신들이 항의해도 북위는 그나마 이것도 당신들을 대접해준 것이라고 대꾸한 일화가 있다.[24] 원간섭기 고려 왕은 부계로만 고려인 피가 간신히 이어졌지, 모계로 치면 걍 원나라 황금씨족 일원이었다. 당연히 국력보다 작위가 높을 수밖에 없다.[25]광개토대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26] 《신집》은 소수림왕 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 대까지가 상세하다.[27] 전근대 시대에 평균 수명이 낮았다지만 그건 유아기 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고 일단 성인까지 성장했다면 4~50대까지는 사는게 보통이었다. 동시대 인물인 모두루도 '하늘이 이 나라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태왕께서 승하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괄호 안은 실제 기록은 아니며 문맥으로 판단한 사항이다.[28] 그러나 이들은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20년쯤 조작되었어도 90살에 죽었다고 봐야 하는 태조대왕 등을 볼 때 장수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