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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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문화급 ,우문지급, ,사마덕감, ,배건통, 왕충 · 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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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須陀(565 ~ 616)
수나라의 장수.
수나라 최후의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1] 여로모로 진나라의 최후의 명장인 장한과 비슷한 점이 많다.
장수타는 제군 민향 사람이다. 대업 6년(610년), 당시 제군승이던 장수타는 제군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당시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 물자를 비축해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관리들이 조령을 기다려야지 마음대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며 반대했지만 장수타는 이로 인해 자신이 죽더라도 후회될 것이 없다며 끝내 백성들을 먼저 구휼한 뒤에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했다.
양제는 보고를 받았지만 장수타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다.
대운하 등의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
제2차 고수전쟁에서의 실패
[2]로 수나라는 극도로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양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다.
이런 흐름을 타고 611 ~ 61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군의 왕박과 맹양, 북해의 곽방예, 청하의 장금칭, 평원의 학효덕, 하간의 격겸, 발해의 손선아 등 하북과 하남을 아우르는 산동 각지에서 대규모 도적과 반란군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수 전쟁이라는 외부 원정이 있기는 했으나 당시까지는 통일이 된지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나라 내부가 평화로운 상태였으므로 각 지방의 관리들은 전투에 익숙지 못해 반란군들이 접근한다는 소식만 듣고도 스스로 무너졌다. 오직 장수타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반란군들을 격파해 나갔다.
613년, 장수타는 태산에서 왕박을 공격해 격파했다. 왕박이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임읍으로 도망치자 추격해서 다시 한 번 격파했다. 간신히 도주에 성공한 왕박은 하북의 학효덕, 손선아와 연합해 10만 대군으로 장구를 공격했으나 장수타는 보기 2만을 끌고 그들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의 수괴중 하나인 배장재, 석자하가 2만여 병력을 끌고 장수타가 있는 성을 급습하자 장수타는 병력을 모을 새도 없어 5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싸웠다. 적이 장수타를 100여겹으로 포위해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혔으나 장수타는 더욱 용기백배하여 적과 맞섰고, 이윽고 성 안에서 병력을 추스려 출진시키자 적들은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그러자 장수타는 이를 추격해 크게 격파했다.
얼마 뒤, 진군홍과 곽방예가 이끄는 반란군이 북해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성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에 장수타는 이틀 거리를 하루만에 달려가 적들을 대파해 수만 급의 목을 베었다.
당시 장수타의 밑에는 역성 사람 나사신이 있었는데 그 나이가 14세였다. 장수타와 반란군이 대치했을 때 나사신이 적진에 뛰어들어 적 여러 명을 죽인 뒤 그중 하나의 머리를 창끝에 꽂아서 맴돌자 적들은 싸울 마음을 잃어버렸다. 장수타의 군대가 적들을 격파했을 때 나사신은 적 하나를 죽일 때마다 그 코를 베어 적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증명했다. 장수타는 이를 보고 감탄하여 나사신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614년, 좌효우가 10만여 무리를 이끌고 준구산을 점거해 제군을 압박했는데, 해상, 왕랑, 정대표, 이완 등이 각기 무리를 이끌고 그를 보조해 기세가 성대했다. 하지만 장수타가 8영의 군사를 이끌고 그를 압박해 항복시키니 장수타의 위명이 동하를 뒤흔들었다. 이에 양제는 장수타를 제군통수, 영하남도십이군출척토포대사로 삼았다.
얼마 뒤, 노명월이 10만 병력을 끌고 축아에 주둔하자 장수타는 1만여 병력으로 그와 맞섰다. 대치가 열흘간 지속되어 군량이 떨어지자 장수타는 별동대로
진숙보, 나사신을 남겨둬 매복시킨 채 퇴각했는데, 노명월이 이를 보고는 진영을 거의 비우고 장수타를 추격하자 별동대는 적의 진영을 급습해 불태웠다. 노명월이 자기 진영이 점령된 것을 보고 당황하자 장수타는 군대를 돌려 반격했다. 노명월은 겨우 수백의 기명만을 거느리고 도망가 숨었다.
이후 여명성, 사인태, 곽소한 등이 제북을 어지럽히자 장수타는 이들도 공격해서 모두 격파했다.
하남 와강의
적양은 1만여 병력과 맹장인
선웅신,
서세적을 거느리고 있어 기세가 매우 대단했다. 양제가 와강의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자 장수타는 적양과 30여 차례를 싸워서 모두 격파했다.
616년, 적양이 다시 형양을 압박해오자 양제는 적양을 막아내지 못하던 형양태수, 옹왕 양경을 대신해 장수타를 형양통수로 삼고 적양을 토벌하게 했다. 장수타는 이전에 적양을 여러차례 격파한 경험때문에 그를 매우 얕보았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적양의 밑에
이밀이 새로 들어와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양현감의 난이 실패로 끝난 뒤 조정에 쫓기는 신세가 된 이밀은 각지의 반란군들을 전전하다가 결국 적양의 밑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자신의 명성과 수완을 활용하여 외황의 왕당인, 제양의 왕백당, 위성의 주문거, 옹구의 이공일 등 하남의 다른 반란세력들을 모두 적양의 밑으로 편입시켰다. 이밀은 오직 장수타를 노리고 함정을 파서 그를 기다렸는데, 손쉽게 적양을 격파한 장수타가 유인에 걸려 그를 추격하자 복병을 일으켜서 서세적, 왕백당, 적양 등과 함께 그를 포위했다.
장수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으나 병력의 상당수가 여전히 포위망 안에 갇혀있었다. 이에 장수타는 포위망 안팎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병력을 빼내기 위해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끝내 진형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본 장수타는 천자를 볼 면목이 없다고 탄식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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