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야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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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00px-Chang_Ya-juo_1942.jpg
전문서 비서실 서기
정체
章亞若
간체
章亚若
한국식 독음
장아약
영문
Chang Ya-juo
출생
1913년 중화민국 장시성 난창
사망
1942년 8월 16일 (향년 29세) 중화민국 광시성 구이린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난창여중학교 재학
직업
비서

1. 개요
2. 생애
2.1. 젊은 미망인
2.2. 장징궈의 애인이 되다
2.3. 갑작스런 사망
3. 장야뤄는 어떻게 죽었는가?
3.1. 병사설
3.2. 독살설
3.2.1. 장징궈의 또다른 비서가 독살했다
3.2.2. 천리푸 또는 다이리가 독살했다
3.2.3. 장징궈가 독살했다
4. 사후의 이야기
5.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장징궈의 비서이자 애인. 1942년 1월15일 광시성 구이린병원에서 쌍둥이 아들 둘을 출산했으나 7개월 후 의문사했다.


2. 생애[편집]



2.1. 젊은 미망인[편집]


장야뤄는 1913년[1] 장시성 영수현 난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공도(章贡涛)는 16살 때 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었고 베이징 정법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장시성 수천현 현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4,5살 때 집에서 시구와 서예를 익혔고 여섯살 때부터 난창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소학교를 다닐 때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학교에서 벽보와 간행물을 작성하는 걸 도맡았으며 춤을 추고 놀이를 하는 데서도 모두 훌륭했다. 또한 12,13살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주금화(周锦华)의 집안일을 도왔는데, 요리를 매우 잘하고 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셔서 세간에서는 그녀를 재녀(才女)라고 불렀다고 한다.

1926년, 장야뤄는 난창 여중학교를 중퇴하고 5년 연상의 탕잉캉(唐英剛)과 결혼하여 첫째아들 탕위안보(唐遠波)와 둘째아들 탕위안후이(唐遠輝)를 낳았다. 그러던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중국 각지에서 반일 시위가 요동쳤다. 봉건적인 가정에서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장야뤄는 이러한 정세를 읽고 자신도 밖에 나가서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여러번 일자리를 구했고 마침내 장시성 고등법원 문서실 서기가 되면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그녀의 남편 탕잉캉이 사망했다.[2] 이리하여 장야뤄는 젊고 예쁜 과부가 되어 많은 남정네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2.2. 장징궈의 애인이 되다[편집]


1938년, 장야뤄는 난창 국민혁명군 6사단 선전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이후 난창 서양의원(南昌西洋醫院)의 간호원으로 재직중이던 어느 날, 그녀가 팀원들과 경극 연습을 하고 있던 중 곽예백(郭礼伯) 사단장 일행이 불시에 찾아와 한 사람을 팀원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성 보안처장 부처장 장징궈 동지다."


장징궈가 물었다.

"방금 이 작은 동지가 아주 잘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장야뤄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장야뤄입니다. 전 이미 어른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난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장야뤄는 피난민들과 함께 간저우로 피신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간저우 전문도서자료실 관리원으로 채용되었다. 그후 항적 동원위원회 서기로 배속되었다가 간지우 청년간부 훈련반에 들어가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해 장징궈의 '청건반' 조수로 추천되었다. 이때 장징궈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장야뤄는 장징궈에게 이미 아내 장팡량(蔣方良)과 자녀가 있고 자신은 두 아들을 둔 미망인인데다 장제스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의 사회적 입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장징궈의 고백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야뤄는 청간반을 졸업한 후 장징궈에 의해 전문서 비서실의 서기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녀는 '민중순문처'의 책임자를 겸임해 순시를 나가서 도박과 마약을 검문했으며, <청년보> 기자로서 '장빈(章频)'이나 '무이(懋李)'라는 필명으로 청년보에 기사를 게재했는데 때로는 수묵화를 곁들어 동시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장징궈의 거듭된 사랑 고백을 받은 그녀는 마침내 그의 진심에 감동해 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정명(情名)을 정해 장징궈는 혜봉(慧凤), 장야뤄는 무운(懋云)을 썼다.

장징궈는 장야뤄와 극비리에 사랑을 나누면서 아내 장팡량과 친분을 다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장징궈는 아버지 장제스에게 이 일을 보고하려 했지만, 당시 중일전쟁이 갈수록 위태롭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보고할 기회를 찾지 못해 차일파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1941년 여름, 장야뤄가 임신했다.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고, 장징궈는 충칭으로 가서 아버지께 이 소식을 보고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아들이 아내가 이미 있는데도 애인을 따로 두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말에 격노해 결혼을 결사 반대했다. 당시 전황이 위태로운데다 장제스의 정적들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아들의 불륜을 용납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았다. 장징궈와 장야뤄는 장제스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 고심했다. 장야뤄는 "차라리 낙태하는 게 어떻겠나"라고 제안했지만 장징궈는 거부했고, 결국 그녀는 여러 친지와 친구들과 함께 구이린으로 가서 아이를 낳기로 했다. 또한 장징궈는 장야뤄가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마칠 때까지 그녀가 맡던 관련 업무를 간저우시 민정부장이자 자신의 친구인 구창위(邱昌渭)에게 맡겼다.


2.3. 갑작스런 사망[편집]


장야뤄는 1942년 1월 구이린에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후 장징궈는 늘 간저우에서 구이린으로 와서 장야뤄와 그녀의 조모와 함께 즐겁게 지냈다. 그러던 1942년 8월 14일 오후, 장야뤄는 구창위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가 귀가한 후 밤이 깊었을 때 심한 설사를 하고 8월15일 광시성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당시 광시성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왕씨 의원이 장야뤄의 왼손 혈관에 주사를 놨는데, 몇분뒤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아악! 눈앞이 깜깜해....."


그 직후 그녀는 정신을 잃었고, 오래지 않아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사망을 막지 못했다. 1942년 8월 16일, 그녀의 숨이 끊어졌다. 향년 29세. 장징궈는 소식을 들은 후 구이린에 사람을 보내 장례식을 치르게 했다. 장야뤄는 구인린 칠성구 백면산 봉황령에 안장되었다.


3. 장야뤄는 어떻게 죽었는가?[편집]



3.1. 병사설[편집]


장징궈의 친한 친구이자 총정치 작전부 주임 총통 고문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던 왕성(王升)은 1992년 1월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장야뤄가 이질에 걸렸으나 항생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만 연합보 기자 저우위커(周玉蔻)가 쓴 "누가 장야뤄를 죽였는가"라는 책에서, 왕성이 장야뤄의 쌍둥이 아들들에게 그들의 어머니가 급성 이질에 걸렸고 의사가 치료를 시도했으나 끝내 숨졌다고 말했다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병사설을 받아들이기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1. 당시 계림성 병원은 중국 후방 의료병원들 중 의료장비 및 의사들의 수준이 훌륭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중소병원도 고칠 수 있는 그성 이질 같은 흔한 병을 상용약인 항생제를 찾지 못해 못 고쳤다는 게 말이 되는가?

2. 당시 왕성은 구이린에 있지 않았고 장야뤄 옆에 있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장야뤄가 급성 이질에 걸린 게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장야뤄의 곁에 있던 장야메(章亚梅, 장야뤄의 동생), 계창덕(桂昌德, 장야뤄의 친구), 계창종(桂昌宗, 장야메의 친구), 주숙청(周淑清, 구창위의 부인)과 왕 의사 등은 그녀가 급성 이질에 걸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단지 병원에서 항생제를 찾지 못해 사망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1940년 전후 장징궈 담당 주임비서를 지냈고 구이린시 사회과장 겸 군사과장을 지냈던 서군호(徐君虎)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야뤄는 병으로 죽은 것이 확실하며 타살된 것이 아니다. 당시 위생 조건은 매우 열악했고, 항전 시기의 생활 조건도 좋지 않았다. 장야뤄는 아이를 낳은 후라서 몸이 허약했고 세균에 감염되게 되면 곧 병사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 주장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중일전쟁 시기 중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나쁘긴 했지만, 장야뤄는 항전 이래 상위 기관에서 근무하며 고정된 경제수입을 가지고 있었고 장징궈와 연애하고 아들을 낳은 후 좋은 대접을 받았다. 또한 장징궈는 구이린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매달 200위안을 지원했고 장야뤄 또한 영양제를 사서 복용해 몸보신했다. 그리고 장야뤄가 사망 전에 진료를 받은 광시성 병원은 대후방 의료시설로 수준이 가장 높은 병원이었다.

3.2. 독살설[편집]



3.2.1. 장징궈의 또다른 비서가 독살했다[편집]


장야뤄의 죽음에 관해, 수십년 동안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징궈가 사망하고 아들 장샤오옌(蔣孝嚴)이 장징궈의 아들로 정식 인정되면서 대만 정계학게 명사가 되자, 장야궈의 사망에 얽힌 미스터리에 대한 각종 추측이 나왔다. 그중 대부분은 장징궈의 또다른 비서 황중미(黄中美)가 장야뤄를 독살했다고 주장한다. 황중미가 독살했다는 주장을 최초로 제기한 이는 당시 장징궈의 비서를 지냈고 후에 대만 '군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칠고유(漆高儒)다. 그는 황중미가 사건 전에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장야뤄는 아직 구이린에 숨어서 대외적으로 공개되어서는 안되는데 구이린에서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녀가 장부인을 자처한다면, 장징궈의 정치 진로를 방해할 수 있고, 위원장도 이 일을 알고 있다. 장징궈의 미래는 한 여성의 목숨보다 중요하다."


칠고유는 황중미가 어떻게 장야뤄를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그녀가 장야뤄가 죽은 뒤 장징궈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장징궈는 이를 불만족스러워했으며 얼마 후 황중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밝혔다. 이후 대만 작가 저우위커(周玉蔻)는 1942년 5월 간저우에서 근무하던 비서급 요원 2명이 구이린에 가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알렸고 얼마 후 장야뤄가 죽었다면서 장야뤄가 독살된 게 분명하다면 황중미가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만의 중앙연구원 오내덕(吴乃德)은 장야뤄가 '장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사교활동에 적극 나서자 장징궈의 부하들은 상관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반드시 그녀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장징궈의 러시아시절 동창이자 비서였던 황중미였다고 주장했다. 중국 신문사도 장야뤄가 황중미에게 독침을 맞아 죽었다고 보도했다.

황중미의 동기는 뜻밖에도 장징궈에 대한 '충성'에서 나온 것으로, 장징궈가 소식을 듣고 두 손을 떨구고, 비탄에 잠겨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장징궈는 황중미를 직접 심문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황중미는 마침내 자신이 독침으로 장야뤄를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장징궈는 이로서 모든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대외에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황중미가 장야뤄를 독살했고 장징궈가 이 사실을 알았다고 확증짓기엔 증거가 부족하며 황중미의 이후 행보에도 어긋나는 점이 많다. 장야뤄가 사망한 후에도 장징궈는 황중미를 중용했고 1943년 간저우와 저장성 등 4개 성 염무 전문사무소의 주임비서로 임명했다. 또한 장징궈는 대만으로 갈때 황중미에게 대만에 함께 가자고 강력히 요청했지만, 황중미는 대륙에 남아있는 쪽을 택했다. 만약 장징궈가 황중미가 자기 애인을 비참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를 이토록 신임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장야뤄가 사망할 무렵, 황중미는 저장성에 있었고 서계원은 복건성에 있었으며 칠고유는 간난(赣南) 지역에 있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사람이 함께 밀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설령 세사람이 같은 시에 있다고 해도, 칠고유는 당시 서계원, 황중미보다 처지는 직책을 맡았으며 황중미의 부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황중미가 칠고유에게 장야뤄를 죽여야겠다는 투의 말을 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장야뤄의 아들 정샤오옌 역시 2006년에 어머니는 황중미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3.2.2. 천리푸 또는 다이리가 독살했다[편집]


일설에 따르면, 장제스가 어느날 천리푸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징궈와 장시의 그 여자에 대한 일은 이미 간난과 구이린 양쪽에 많은 소문이 나 우리 집안의 명성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내가 아이를 가르치는 데 재주가 없어서 이런 일이 생겼다. 나는 징궈를 충칭으로 전근보내려 한다. 문제는 그녀다. 구이린에 사는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의 아버지가 징궈라고 자주 말하며 징궈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징궈와 혼례를 치른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는가? 우리는 보통 가정이 아니며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여자로 하여금 여기저기 다니며 명예를 구걸하게 해서는 안된다. 내 생각에는 이 일은 네가 우리 집의 우환을 없애줘야겠다. 비밀을 극도로 지켜서 남들이 알게 하지 마라."


이에 천리푸는 즉시 특무 요원 2명을 보내 병원 의사나 간호사를 매수해 장야뤄에게 주사를 놓는 기회를 이용해 독약을 주사제에 주입하여 독살시켰다는 것이다. 또다른 설은 다이리가 장제스의 밀명을 받고 장야뤄를 독살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증거는 없다.


3.2.3. 장징궈가 독살했다[편집]


일각에서는 장징궈가 아버지로부터 "그 여자를 정리하라."는 압력을 받고 고민한 끝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 장야뤄를 없애는 것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2006년 장징궈과 장야뤄의 장자 장샤오옌은 자신의 어머니가 부친인 장 전 총통에 의해 살해당했다며 이 설을 뒷받침했다. 장기간에 걸쳐 세밀하게 조사해본 결과 어머니가 살해됐음을 확신하게 됐다"며 "범인은 당시 아버지가 재임중이었던 장시(江西)성 한 관공서의 부하였다"고 말했다. 그 후 자신은 성장하면서 얼마나 위태로운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실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장징궈가 부담을 느꼈다면 헤어지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는 없다는 반박도 제기되고 있다.


4. 사후의 이야기[편집]


장야뤄가 죽은 후, 그녀의 두 아들 장샤오옌(章孝嚴)과 장샤오츠(章孝慈) 두 쌍둥이 형제는 장제스의 전 측실인 야오예청(姚冶誠)의 손에서 자랐다. 1949년 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하자, 두 사람은 야오예청과 함께 타이완 타이베이로 이주했다. 1996년 2월 24일 장샤오츠가 병사했고 2005년에 장샤오옌이 이미 사망한 장샤오츠와 함께 장제스 집안의 장씨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장팡량 소생의 장징궈의 세 아들은 모두 죽었기에 2019년 현재 장샤오옌은 장징궈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다.


5. 참고 문헌[편집]


[1] 정확한 날짜는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다.[2] 일부 자료에서는 자살했다고 하고 다른 자료에서는 배를 탔다가 부주의로 물에 빠지는 바람에 급성 페렴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