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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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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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강원 삼척시)
제14대
김정남

제15대
장을병


선거구 통합
최연희[1]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장을병
張乙炳 | Chang Eul-byung


파일:장을병.jpg

출생
1933년 2월 5일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現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사망
2009년 7월 5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본관
인동 장씨

옥원 (沃原)
학력
삼척호산초등학교 (졸업)
삼척중학교 (졸업)
삼척공업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 박사)
병역
학도의용군 전역
신체
168cm, 79kg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5
경력
성균관대학교 총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정치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
개혁신당 공동대표
민주당 공동대표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
국민신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1. 개요
2. 생애
3. 총장 시절
4. 기타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장을병(張乙炳, 1933년 12월 14일 ~ 2009년 7월 5일) 은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정치인이다. 호는 옥원(沃原)이다. 직선제로 뽑힌 첫 성균관대 총장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33년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현 삼척시 원덕읍)에서 태어났다. 삼척호산초등학교, 삼척중학교, 삼척공업고등학교(현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 동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모교인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의 계엄에 저항해 지식인 134인 선언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서 심하게 고문 받고, 1980년 강제 해직됐다. 당시 그는 청암 송건호, 한완상 서울대 교수, 소설가 이호철 등과 함께 "국군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국군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시정되어야 한다"라는 선언으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1984년 성균관대에 복직해 복직교수협의회 공동대표, 대학교권수호 특별위원장 등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모교 성균관대학교에서 총장을 지냈다.

파일:00170594_20090706.jpg
1991년 백골단의 폭력진압에 희생된 재학생 김귀정의 노제 허용을 위해 경찰 책임자와 협의를 하고 있는 장을병[1]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개혁신당을 창당하였다가 곧바로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 창당시 김원기 의원과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삼척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성균관대학교 교수 시절 제자였던 현역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김정남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통합민주당은 15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고, 총선참패 이후 열린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이 총재로 복귀하면서 당내갈등은 심화되었다. 이에 장을병은 자기가 공동대표를 맡았던 당이었음에도 탈당하고 만다. 그뒤 무소속으로 머물다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신당에 입당하였고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1998년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되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동해시-삼척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최연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총재 지명직)이 되었지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에 임명되면서 정계를 떠났다.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와 한국정의구현연구원장도 역임하였다.

이후 만년에 자신의 모교이자 총장으로 재직했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의 명예교수로서 강의를 이어갔는데, 건강이 나빠지면서 중단하였다. 2009년 7월,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총장 시절[편집]


90년대 초중반 성균관대 총장 재임 당시 삼성을 성균관대학교의 재단으로 영입해 이후 21세기 들어 성균관대학교가 명문대로 성장, 발전하는데 바탕을 마련한 공로자다.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뛰어난 리더쉽을 들 수 있는데, 1991년 성균관대학교 총장이 되었을 당시 그는 직선제로 선출된 첫 총장으로 교수진들의 투표와 지지를 받은 총장이었다.

덕분에 권위가 서니 당시 재계, 정치계 인맥도 굉장히 폭넓었는데,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재직중일 당시 운영재단이었던 봉명재단이 나간 후, 재정난에 시달리자 고심 끝에 결국 삼성 이건희 회장의 비서실장에게 연락을 취하여 성균관대학교에 재단으로 들어올 것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삼성은 의대가 없는 대학은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며 성균관대학교가 정부로부터 의대 설립 인가를 받으면 들어오겠다고 하였다. 이에 장을병 총장은 청와대로 가 김영삼 대통령과 이야기 끝에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말에 허가를 해주겠다고 하였고[2] 이후 1996년에 교육부가 이를 승인해주어 의대가 설립되고,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4. 기타[편집]


장을병의 제자 중에는 역시 모교인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활동한 김일영 교수도 있었는데, 장을병이 그의 박사논문 지도 교수였다. 김 교수는 장을병이 타계한 지 불과 수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에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칼럼도 썼는데, 1997년 9월 26일 동아일보 <원칙이 사라진 정치판>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강원 삼척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4,957 (31.80%)
당선(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강원 동해·삼척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33,691 (39.00%)
낙선(2위)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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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른쪽 뒷편에 있는 사람은 장기표이다.[2] 자서전 왈 당시 교육부의 눈치를 보았다고 하였는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