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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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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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와 20세기의 주요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천치메이[편집]


천치메이는 장제스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인물로 장제스의 형이자 사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장제스는 그를 위해서 그의 정적을 병원에서 쏘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맹렬히 추종했다. 천치메이도 장제스를 아꼈고 그에게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들과 인맥을 쌓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천치메이가 암살된 이후 장제스는 그야말로 한동안 폐인이 되어 상하이의 홍등가를 뒹굴고 다니면서 술과 여자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천치메이의 조카들인 천리푸와 천궈푸를 최측근으로 삼아 총애했다.


3. 쑨원[편집]


파일:external/img.secretchina.com/20120125093126620.jpg
[1]

일각에선 쑨원과 장제스의 인연이 장제스의 일본 유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장제스와 쑨원이 일본에서 만났다고 하기엔 정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어쩌다 스친 정도이지 의미 있는 만남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장제스와 쑨원의 본격적인 인연은 장제스가 천중밍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구하면서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천중밍과 대립하던 처지라서 그와 연합하던 쑨원에게 크게 실망했고 쑨원도 장제스에게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로 장제스는 쑨원의 측근이 되었다.

쑨원은 천치메이가 죽은 이후 장제스가 복종한 마지막 인물로 장제스는 거의 병적으로 쑨원의 신임을 갈구했다. 소련행을 자처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고자 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왜 믿지 않냐고 거의 애원하기까지 했다. 장제스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들에 쑨원은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대처해야 했다. 이후 장제스는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을 맡는 등 국민당의 간부가 되었고 쑨원이 가장 믿는 심복 중 한명의 위치에까지 오르지만 우리 나라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쑨원의 정치적 후계자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쑨원이 죽은 이후 장제스는 쑨원의 처제인 쑹메이링과 결혼하는 등 자신과 쑨원의 연계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로 자처했다.

4. 왕징웨이[편집]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면 놀라겠지만 원래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친밀하여 국민당의 온건 좌익 성향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쑨원 사후 한동안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왕징웨이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후 쑨원의 비서이자 국민당의 대표적 좌익인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국민당 우파인 후한민과 쉬충즈를 모두 숙청하였다. 이렇듯 매우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 이것이 1차로 폭발한 것이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다는 구실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고문들과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다가 다시 풀어주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은 장제스가 좌익도 아니고 왕징웨이 똘마니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인식하게 되었지만, 북벌 때문에 두 사람은 일단 협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우한과 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천도논쟁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반대파들에 의한 자신의 실각을 병적으로 겁내던 장제스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 독재자와 폭군의 등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부여된 초법적 사령관 특권을 회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때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고 결국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일단은 장제스에 협조하던 왕징웨이는 당연히 경악했고,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장제스가 세운 난징 국민정부와 대립했다.

북양군벌 장쭤린의 공격으로 둘은 다시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제스에 대응하려 했으나, 펑위샹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이후 난징 정부가 쑨촨팡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고 우한 정부도 국공결렬을 이뤄내자 결국 왕징웨이와 장제스는 각각의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치는 영한합작을 이루었지만, 둘의 대립은 끝나지 않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계속되었다.[2]

나중에도 장제스는 자신에게 부족한 정치적 명망을, 왕징웨이는 자신이 없는 군사력을 보완하려 몇 번이나 장왕합작을 이룩하였으나, 무력을 보유한 장제스의 지분과 영향력이 왕징웨이를 압도했고, 장제스는 이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왕징웨이를 견제했다.[3] 때문에 왕징웨이는 명목상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권한을 가질 수 없었고,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관계는 좋을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때의 좌절과 실패경험이 추후 친일 행보를 불러왔다고 평가할 정도.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왕징웨이는 중국이 사는 길은 일본에 협력하는 것뿐이라 굳게 믿고 일본에 붙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렀다. 이로써 그는 혁명가에서 한간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온 대륙의 적으로 떨어져 죽어도 보복을 염려해 무덤을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철옹성같이 만들었지만 장제스는 옛 동지의 무덤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그에게 배신자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5. 선통제[편집]


1928년 장제스는 2차 북벌로 베이징을 점령하고, 1931년 천진사변 이후 선통제가 만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자 11월 초, 청조 사학관 출신의 옛 유신인 고우당을 푸이에게 파견하였다. 고우당은 장제스로부터 1924년 펑위샹이 없애버린 청실우대조건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매년, 혹은 한꺼번에 우대비를 지급할 테니 원하는 액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주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어느 곳이던지 푸이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선통제는 동릉 도굴 사건 때문에 국민당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이미 일본인들이 부추긴 만주 황제가 될 꿈에 사로잡혀 있어 냉소하면서 이제서야 겨우 우대를 생각하느냐며 빈정댔다. 이 때 선통제의 장제스에 대한 평은 이러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완이 악랄하고 지독하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발처(髮妻)를 버리고 천하디천한 미국의 앞잡이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결혼한,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 일본이 두렵다 보니 나와 일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안달이다. 내가 장의 말을 수용하면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황제 칭호 주고, 나를 농락한 후 제거할 심산이다. 답변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


선통제는 끝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주로 탈출,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했다.


6. 이오시프 스탈린[편집]


둘은 장제스가 1920년대에 소련에 가던 때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장제스는 스탈린 대신에 트로츠키를 만나긴 했지만 국민당과 소련의 협력 관계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 커넥션은 유지되었다. 친소파로 인식되던 장제스에게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스탈린은 한동안 공산당에 국민당과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며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상하이 쿠데타 이후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바꾸어 국민당 내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의 자체 무력을 갖추어 국민당을 장악할 것을 지시하여 왕징웨이 - 공산당 합작까지 깨고 만다. 한동안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을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악취가 가시지 않은 화장실 같은 곳이라고 디스해댔으며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모두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4]

하지만 몇년 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마오쩌둥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처럼 스탈린과 장제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는 1차 국공 내전과 대장정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이 소련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 들을 모조리 숙청했기 때문이다.[5]이 우호 관계는 유지되었으며 국공 내전으로 장제스가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굳이 따지자면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의 편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장제스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6] 소련은 즉각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 연을 끊었다.


7. 조지프 스틸웰[편집]


파일:Chiang_Kai_Shek_and_wife_with_Lieutenant_General_Stilwell.jpg
왼쪽부터 장제스, 쑹메이링, 스틸웰. 사진 속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지만 장제스와 스틸웰의 실제 사이는 매우 나빴다.

장제스와 미국에서 파견한 군사 고문이자 버마 - 중국 전역 연합국 총참모장[7]인 스틸웰 대장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스틸웰은 인종 차별주의자였으며[8] 서로가 독선적이라 의견 충돌이 잦았다. 이렇게 양측이 계속 반발하다가 1944년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군수 물자와 전략 예비대인 Y군의 파병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책임을 장제스에게 떠넘기면서 양측의 관계는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후 스틸웰은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이에 분노가 폭발한 장제스는 미국 정부에 스틸웰을 선택할 것이냐, 중국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최후 통첩을 날렸다. 결국 스틸웰은 해임되었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가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스틸웰은 유능한 장군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어 잘 한다는 이유로 미중 우호 관계를 상징하기 위해 보낸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고 처음으로 대규모 전선을 지휘해보자 자신의 능력 밖의 황당한 지시만 내렸다. 스틸웰의 본래 임무는 미중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에 국민당은 멍청하며 공산당 잡을 생각만 하고 비겁하다고 이간질했으며 전략적으로도 일본군 공세를 앞두고 중국군 예비대와 정예 부대를 빼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소모시키는 행동만 반복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야전에서의 승부를 노래 불렀고 장제스의 지연전,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을 미개하다고 비웃었는데 정작 그는 버마에서 자신이 그리 좋아하던 야전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남 탓만 했다.


8. 마오쩌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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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vs 항우, 조조 vs 유비, 주원장 vs 진우량에 못지 않을 역사적 라이벌 중의 하나다.

1차 국공 합작이 파기된 이후로 장제스는 평생 마오쩌둥을 잡아 죽이거나 국민당의 밑에 복종시키려 했고 한번도 그를 믿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차 국공 합작 시기에 마오쩌둥이 몇번 황포 군관 학교에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후일 장제스는 '씻지도 않는 놈이 경전은 줄줄 외운다'라고 하면서 불쾌해했다.[9]

결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싸움이 계속되던 와중에 호남군벌 허젠이 1930년 리리싼의 지시로 창사 폭동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오쩌둥과 떨어져 지내던 첫 아내 양카이후이를 체포해 처형했다. 정강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마오쩌둥은 당시 허쯔전과 결혼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양카이후이의 처형 소식을 들었을 때 통곡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짓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가적으로 그녀를 추모하는 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 후에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이는 미국의 중재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평화 협상을 위해 만난 것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장 위원장(장제스를 지칭) 만세"를 삼창하고, 기자들에게는 자신은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제스를 존경하며 그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천명해 국공 양당의 휴전 합의를 이뤄내기도 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돌아가자마자 이 협정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 협정을 무효화했다. 결국 분노한 국민당 측은 공산당을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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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직후인 1945년 9월 충칭으로 온 마오쩌둥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마오와 건배하는 장제스.

이후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감에 따라 둘의 관계는 끝장났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라이벌로 여기면서도 고평가했고, 이는 장제스가 권토중래를 꿈꾸면서도 마오쩌둥을 평할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원수처럼 지냈지만 동시에 서로를 인정한 것이다. 미중관계가 회복될 때 미국 기자에게 장제스를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용기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장제스가 죽었을 때는 충격을 받았는지 하루 종일 장송곡을 틀고 그 음악을 듣고 있기도 했다.

사실 마오쩌둥이 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은 장제스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공산당에는 마오쩌둥보다 더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고, 마오쩌둥은 거기에 명함도 못내미는 미미한 존재였는데,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400명의 공산당 엘리트를 사살했고,[10] 대장정 당시 공산당을 추격하던 장제스가 유난히 마오쩌둥 스타일의 게릴라전에 취약한 지휘관이어서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을 키워줬다고 볼 수 있다는 것.[11]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장제스는 하필 중국공산당 내에서 머리 좋은 넘들만 골라 몰살시켰다.[12] 다만 마오쩌둥도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엘리트였기도 했고, 지도력과 문장력, 정무감각은 매우 좋아, 이걸 바탕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건 마오쩌둥에 대한 과도한 폄하라고 할수있다. 두차례씩이나 나라를 말아먹어서 악평을 들을뿐이지.

국공결렬 이후 둘은 원수로 지내기는 했지만, 중화주의자라는 면에서는 일치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각자 대만과 중국에서 표준중국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현재 중국인들과 대만인들은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어서 언어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13] 1974년에 남베트남서사군도를 점령하자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북경이 만약 개입하지 않으면 우리가 서사군도를 탈환하겠다"고 전문을 보내었고, 이를 받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해군육전대를 보내서 남베트남군을 축출하고 서사군도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중국 해군이 대만해협을 통과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14] # 사실 남중국해의 논쟁의 발단은 장제스가 1947년 그어놓은 8단선 때문이며, 장제스를 대륙에서 축출한 중공정부는 이것을 보완해서 9단선을 만들었으니, 이 문제만큼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입장이 일치하는 셈이다.


9. 저우언라이[편집]


파일:external/res.news.ifeng.com/4e5dc56186c6f0bc8e4ae35e5bade2b1.jpg[15]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인연은 저우언라이 -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가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이었을 때 저우언라이는 학교 정치 주임이었다. 정치 주임은 학교에 배치된 정치장교. 둘은 매일 같이 아침을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고 저우언라이가 후에 밝힌 바 있다.[16]

이때는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 소속 정치 장교로서 국민당의 이념인 삼민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황포 군관 학교에서 국민당 일을 하면서도 장제스 모르게 비밀리에 학생들을 포섭하여 학교 내에 공산당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17]

어쨌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각별히 여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두려고 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성향을 눈치챈 저우언라이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둘이 틀어지게 된 계기는 중산함 사건[18]인데 저우언라이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장제스를 배신한다. 이후 둘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공산주의자의 거물로 장제스에게 상하이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저우언라이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국민당군에 한번 사로잡히는데 장제스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수였다. 다만 이 시기의 기록이 부정확해서 체포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해방구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시안 사건 때로 장제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타난 저우언라이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우린 적이지만 자네를 잊은 적이 없네,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일할 날이 오길 바라겠네."라고 말하였다. 이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장제스와 자주 회동했지만 국공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고 결국 둘은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으로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이전하게 된다.


10. 장쉐량[편집]


장제스의 적이면서도 동지였던 인물이다. 국민당이 만주를 차지하는데 정통성을 부여했으며, 반장 전쟁 당시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HP 1 남은 마오쩌둥에 마지막 한 방만 날리면 되는 상황에서 취소시킨 주역이다.

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은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게 되지만 바로 다음 해 중일전쟁이 발발, 국민당의 천도가 계속되면서 장쉐량도 계속 거처지를 옮기게 된다. 어찌됐건 장쉐량은 만주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전쟁 때 장제스는 비록 전에는 적이었어도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나름 너그럽게 봐줬지만 장쉐량은 예외였으므로 장쉐량봉천군벌서안 사건을 기점으로 완벽히 몰락하게 된다.[19]

2차 대전 종전 후 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국부천대까지 이뤄졌지만 장쉐량은 감옥에서 수감 생활 하는 것 에서 가택 연금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묶여있었고 오죽하면 1953년 장제스 생일에 장쉐량이 시계를 선물로 보내[20]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 풀어줄때가 되지 않았느냐"라는 메시지를 보낸 데 대해 장제스가 낚시대를 보내 암묵적으로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때워라."라는 답을 줬을 정도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가 죽기 직전에 아들 장징궈에게 남긴 말 중 하나가 "장쉐량을 절대 풀어주지 말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원한이 심하게 생긴 모양이다.[21]

장제스가 죽은 후 후계자였던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가 계엄 해제에 민진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줄 정도로 민주화에 힘썼지만 장쉐량은 예외였고 그대로 연금 생활이 지속되다가 장징궈도 죽은 후 후임 총통인 리덩후이 시기에서야 연금이 풀린다. 이때가 1993년으로, 1937년 부터 수감 및 연금 생활을 했으니 56년 동안 감옥에서 있었다고 보면 된다.

장쉐량은 반 세기동안 대륙, 그리고 대만에서도 갇힌 상태로 지내다 석방 후 10여년 정도를 더 살고 2001년에 103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사망한다.


11. 프랭클린 루즈벨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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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 만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처음엔 괜찮았다. 루즈벨트는 중국에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장제스를 지원하지 말자는 미 육군의 조언을 물리치고 대중 지원을 승인했으며 장제스에게 수차례 친전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를 만난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그동안 자신이 상상하던 카리스마나 패기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소통 부재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루즈벨트는 장제스가 항일 의사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스틸웰의 곡해가 중간에 개입되면서 더욱 틀어졌고 말년에는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일을 의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마지막까지 장제스를 지원했고 루즈벨트가 죽었단 소식에 장제스는 후임 지도자인 트루먼이 지원을 줄이거나 아예 그만두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특히 장제스가 우려한 것은 트루먼이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실수로 망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국부천대 직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에 맞서 만주 핵폭격 및 50만 국민당군 화남상륙을 계획했다. 장제스 에겐 대륙수복의 적기였지만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해 버렸고 이제는 누구도 대만이 대륙의 한자락 땅이라도 얻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고위층에도 대륙 출신이 줄어들고 대만 본성인이 늘어나는 현재에는 오히려 대만의 탈 중화 가능성이 높아지는 중이다.

장제스 본인은 루즈벨트에 꽤 호감을 품은 모양으로 루즈벨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12. 윈스턴 처칠[편집]


꽤 험악했지만 상대방이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했다. 윈스턴 처칠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자였고 장제스는 영국을 침략자들로 보아 매우 혐오했다. 이후 홍콩 문제나 조계지 문제로 영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협력 관계가 된 후에도 영국은 장제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할까봐 중국과 험악한 사이였다. 또한 전후 처리에(특히 일본의 식민지 처리)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장제스는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처칠은 이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이었고 장제스가 만주, 타이완의 회복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재점령' 야욕이라고 상당히 좋지 않게 보았다. 게다가 처칠은 끝까지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불러오는 것을 반대했으며[22] 불러온 다음에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자는 입장으로 중국을 우습게 봤고 결국 중영의 험악한 관계는 카이로 회담 내내 지속되었다. 그래도 처칠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하다고 평가했다. 또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난 것은 애석한 일이며 자신은 카이로에서 장제스, 쑹메이링과 촬영한 기념 사진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등 나름의 애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장제스도 처칠을 제국주의자 우두머리라고 욕하곤 했으며 카이로 회담 도중에는 이런 악감정이 더 심해져서 루스벨트와 동렬에 놓을 수 없으며 속이 좁고 교활하며 이기적이며 완고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 이후에는 처칠이 그래도 걸물이라고 인정했다.


13. 이승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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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쑹메이링 부부와 이승만. 1953년 이승만대만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장제스는 자신의 후원을 받던 김구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지지했고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47년 이승만이 난징을 방문하면서 이승만·장제스 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장제스는 이승만의 기백과 반공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49년 국부천대라는 상황 변화가 생기면서 이승만과 장제스의 관계도 바뀌어 나갔다. 장제스는 1949년 8월 대한민국을 최초로 방문한 외국의 정상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요청에 따라서 경상남도 진해에서 이승만과 장제스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승만과 장제스는 반공노선을 지향하였고 각각 공산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데다 미국을 압박하여 지원을 이끌어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도로 좋아졌다.

진해회담 당시 장제스는 수도인 남경을 공산군에 내주고(1949년 4월) 광저우에 가 있을 때였는데, 대륙 수복을 위해 제주도에 중국의 해공군 기지를 세울 수 있을지를 문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국공내전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이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제스는 1949년 10월 1일 베이징(당시는 베이핑)에서 열리는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식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중화민국 국군의 전투기들의 행동반경이 짧았기 때문에 부산을 경유하여 베이징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부는 마찬가지의 이유로 거절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 [23]

6.25 전쟁 당시에도 장제스는 한국에 중화민국 국군을 파견하여 중공군과 싸우려고 했으나 했으나, 미국이 이를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11월에 이승만은 대만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반공연맹, 집단안보체제 수립 구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으며 정치적 연대는 지속되었다.

14. 김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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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와 김구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게 선택받은 독립운동가였다면 장제스가 손잡은 독립운동가는 김구였다고 할 수 있다. 훙커우 의거 이후 장제스는 김구의 최대 후원자였고 장제스는 김구가 죽은 이후에도 김구를 항일 동지라고 높였으며 김신을 집안 사람처럼 대우하는 등 김구와 자신의 인연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조직하자 1941년 행동 준승을 만들어 국민당군의 통제하에 두려 하였는데 그 이유가 광복군이 일종의 군벌화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풀린 것은 1944년이다. 그러나 이건 장제스 입장까지 고려하면 일방적으로 비판하기도 애매한 게, 원래 국가지도자 입장에서 난민이란 존재 자체가 상당한 리스크고, 특히 일제 같이 팽창주의적 야욕이 강한 이웃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안그래도 자국 내에선 실질적으론 본인 통제가 안되는 무장집단이 많아서 골칫거리인 장제스 입장에선 항일이란 정치적 입장은 고려해도 또다른, 그것도 외국인 무장집단의 국내활동을 용인하는 거 자체가 상당한 위험요소였다.

개인적인 감정도 상당히 호감이 깊어서, 김구의 아들인 김신이 1963년 한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타이완에 쌀 5만 톤을 구하러 갔을 때 처음에는 대만 정부관리들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김구를 각별하게 생각한 장제스의 특별 지시에 의해 한방에 성사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5. 박정희[편집]


국부천대 이후 대만(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이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에 맞서는 최일선이 되어버리자 양국의 실권자이던 장제스와 박정희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특히 이 시기 대한민국은 한참 경제발전 도상에 있어서 대만의 정치, 사회, 문화를 많이 참고했다. 장제스의 일생 중에서는 거의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타이베이의 중정기념당에 가 보면 박정희와 찍은 사진도 있다.


16. 도조 히데키 등의 일본 제국 지도자들[편집]


당연하지만 중일전쟁으로 인해 이쪽들과는 그냥 적이었다. 도조 히데키의 경우 1942년 홍콩싱가포르가 연달아 함락하자 제국의회에서 대놓고 고립무원상태에 놓여있는 중경정권[24]은 이제 무너질 일만 남았다고 자축하는 연설을 했을 정도.


17. 호찌민[편집]


1942년 호찌민이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국민혁명군에 체포되어 18개월간 구금당한 적이 있다. 장제스는 호찌민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 대신 장제스는 베트남 국민당 등 비공산계열의 베트남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했다. 장제스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독립하자 태도를 바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25]에게 호찌민과 협상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5년 중화민국이 베트남 공화국과 수교하며 다시 틀어져 버렸다.


18. 그 외의 군벌들[편집]


  • 리쭝런(이종인): 장제스의 가장 오래된 군벌 동지임과 동시에 최대 정적 중 하나. 반란을 거듭하다가 중일 전쟁 직전에 다시 한편이 되었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국공 내전 중에 장제스는 이 양반에게 총통 자리까지 잠시 내줘야 했다. 하지만 대만으로 망명한 후, 다시 오너가 자리를 잡자 리쭝런은 축출되어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서 생활고를 겪던 중 중공 측이 접근해 좋은 대우를 약속하자 대륙으로 귀환하여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 바이충시(백숭희): 리쭝런과 함께 광시계 군벌로서, 장제스에 반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신용하지 않았다. 작은 제갈량이라 불리는 뛰어난 능력으로 여러 차례 중일 전쟁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런 반역 경력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라는 스틸웰의 제안을 거부하고, 심복 허잉친(하응흠)을 이 자리에 앉혔는데, 허잉친은 바이충시보다도 훨씬 역량이 뒤졌다. 그래도 바이충시는 반역 경험에 비하면 꽤 중용되어 5전구 참모장, 군훈 부장, 구이린 행영 주임을 전쟁 기간 동안 역임했고 전후엔 초대 군정 부장이 되었으며 동북 초비 사령관이 되어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했다. 장제스의 삽질로 국공 내전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화중에서 최후의 항전을 지휘하며 창사에서 린뱌오 군대를 개발살내는 등 공산당과의 전투에서도 여러차례 승전을 거두었지만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최후의 전역인 하이난 섬 방어에 실패하고 리쭝런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대만으로 갔으나 별 볼일 없이 지냈다.
  • 옌시산(염석산): 역시나 장제스와는 반목과 동맹을 반복한 군벌 중 하나. 산시의 개인 왕국에서 떵떵거렸으나 처음에는 일본군,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결국 영지를 잃어버리고 장제스에게 달려갔다. 실권없는 자리에서 별 볼일 없이 죽어갔다.
  • 펑위샹(풍옥상): 장제스와 동맹과 반목을 반복했던 수많은 적들 중 하나. 국공 내전 후반기인 1948년에 소련 선박을 타고 귀국하다가 흑해에서 화재로 죽었다고 한다. 크리스천 제너럴, 즉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했으며[26] 군벌 중에선 도덕적이고 소탈한 사람이라서 누가 보면 대군벌이 아닌 노동자나 졸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한다. 장제스와 왕징웨이 사이를 저울질하다 장제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반장 전쟁에서 장제스와 반목했고 이후 다시 합쳤다. 국민당의 거물 중에서도 강경한 인물로 봉천파나 일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다.
  • 천중밍(진형명): 장제스가 가장 싫어했던 군벌. 장제스의 절강성 사투리[27] 때문에 그는 늘 천중밍의 광둥 출신 참모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고 천중밍이 공공연하게 쑨원을 허풍선이라고 비방하는 통에 쑨원을 존경하던 장제스는 그때마다 반발했다. 쑨원은 장제스와 천중밍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지만 둘 다 거부했다. 장제스는 천중밍과의 관계를 끊으라 했고 천중밍은 반대로 저 무뢰배를 내쫓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천중밍이 선빵을 때리면서 쑨원과 천중밍의 관계는 틀어졌고[28] 이후 천중밍은 국민당의 첫번째 공격 목표가 되어 두들겨맞고 패망한다.
  • 위안스카이(원세개): 장제스가 두번째로 타도하고자 했던 대상이나[29] 꼬꼬마 혁명가였던 장제스와 중국의 지배자인 위안스카이 사이에 딱히 인간적 접점이 있을 리는 없어 크게 서술할 것은 없다.
  • 천지탕(진제당): 광둥의 군벌. 군벌 중에선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한 편이었으나 장제스 밑에 들어가고 나서도 장제스의 인형을 참수하며 장제스에게 노골적인 반항심을 드러낸 인물. 결국 미신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쫄딱 망했다.


19. 장제스의 추종자 젭 부시 & 대미관계[편집]


의외로 장제스의 추종자 중에서 미국의 정치인 젭 부시가 있다. 젭 부시는 장제스를 전설의 신비로운 전사라고 표현하곤 한다. 2005년 당시 자신을 삼촌처럼 따르던 신참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에게 검을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이 장제스를 찬양했다.

“I told you that we were going to ‘unleash Chang’ on the election. And Marco, being a relatively young guy, didn’t know who Chang was. Chang was a mystical warrior. Chang is someone who believes in Conservative principles, believes in entrepreneurial capitalism, believes in moral values that underpin a free society. I rely on Chang with great regularity in my public life ... Chang, this mystical warrior, has never let me down. I’m going to bestow to you the sword of a great conservative warrior. I know that Chang won’t let you down, and you won’t let him down either.”

"나는 일찍이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장제스를 출정시킬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리고 마르코는 아직 상대적으로 젊어서 장제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장제스는 신비로운 전사였다. 장제스는 보수의 원칙을 믿고 자유 시장의 기업가적 정신을 믿고, 자유로운 사회의 버팀목이 될 도덕적 가치를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공직생활 동안 자주 장제스에게 의지했었다. 신비로운 전사 장제스는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나는 이제 자네에게 위대한 보수주의 전사의 칼을 수여하겠다. 나는 장제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며 자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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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수여하던 당시의 사진.

훗날 젭 부시가 2016년 대권주자로 출마하면서 미국 정가에서 이 이벤트를 발굴해서 다시 주목은 했으나 별로 평은 좋지 않았다. 당장 젭 부시 항목 자체가 보여주듯 미국에선 본인부터 상대방인 민주당 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에서도 힘 빠지는(Low Energy) 놈이라고 평가받는데, 애초에 'Unleash Chang'이란 표현 자체가 아버지 부시가 국공내전 직후 중미간 외교관으로 일하던 시절 미국내 반공 매파들이 양안 사이에 분쟁 억제기로 있던 미국 7함대 걷어치우고 장제스가 맘대로 대륙수복 할 수 있게 미국측에서 걸어주던 브레이크를 빼라는 의미에서 종종 하던 말이었다. 이걸 인상 깊게 본 아버지 부시가 나중에 그냥 일상에서도 특정 상황에서 자제하고 있던 매파, 공격적인 또라이를 내보낸단 이유로 "장개석 출정 시킨다" 농담하며 다녔던 걸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어도 아니고 그냥 부시 가문 내부에서 그 시절 기억하던 사람들끼리 자기들끼리만 조크 비슷하게 쓰던 표현이다. #

안그래도 젭 부시가 힘 딸리고 재미없는 꼰대 기성 정치인이란 기믹이 있는데, 애초에 외부인들은 알아먹지도 못하는 조크에 기반해 연출한 거 때문에 오히려 젭 부시의 찐따 샌님 기믹이 더 강해져버렸다. 그리고 그 조크도 애초에 아버지 부시 대(代)에는 장제스를 문자 그대로 칭송하는게 아니고, 그냥 특정 첨예한 상황에서 매파들이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걸 풍자하는 조크로 써먹은건데 이걸 말그대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어설프게 인싸 흉내 내듯이 장제스에 대한 칭찬으로 잘못 이해한거란 의혹도 강하다. 아니면 아예 장제스하곤 전혀 상관도 없는 표현을 젭 부시 혼자 잘못 이해하고 만들어낸 표현일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장제스를 출정시켜라'란 표현도 실제로 당시 미국 정치인들이 종종 했던 말이라면 그 자체도 문제 있는 게, 당장 악명높은 조지프 스틸웰을 기용한 것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국민정부를 전공하는 중국, 미국 양측 역사학자들은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중국 인식이 형편 없었으며 이런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미국의 중국 정책이 최악의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켜 중일전쟁 당시 협조의 난항, 임팔 작전 당시 중국 주력군의 버마행 재배치, 대륙타통작전, 종전 후 국공내전 재개, 공산당 격멸 실패 같은 일련의 장대한 몰락에 큰 일조를 했다."고 본다. 장제스 집권 시절부터 미국 정치인들은 장제스를 여전히 스틸웰같은 미국 군인 하나만 꽂아놓으면 맘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등 우습게 봤고, 미국 민간 사회에선 오히려 현대 와서야 논파된 혁명사관의 씨앗이 에드가 스노우 등 친공 외국발 좌익 저널리스트들의 활약으로 인해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이 표현 관련된 설명들이 사실이라면, 1950년대의 장제스는 국부천대 이후 진먼 포격전 같은 중공의 침략 시도를 겨우 막으며 정권 유지하기 바빴고, 본토귀환, 대륙 수복은 말그대로 정권 유지용 메세지였지 전혀 현실적으로 가능한 입장이 아니었다. 장제스가 진짜 외부의 본격적인 지원만 있었으면 국가 통제력을 굳힐 수 있던 국공내전 상황에선 도와주지도 않고 스틸웰 따위나 보내던 양반들이, 오히려 국공내전에서 패하고 좁은 대만으로 도망가 있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브레이크 풀어주고 도움만 주면 장제스는 일사천리로 본토상륙 이후 중공을 축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국의 중국 상황에 대한 숱한 무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마인드로 대아시아 정책 짠 양반들이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니 엉뚱한 자국 내 대중 전문가 싱크탱크들을 숙청하고 최소한의 현지 역사적, 정치적 문맥은 고려하지도 않고 설치다가 터뜨린 정점이 결국 훗날의 베트남 전쟁이다.

역사적 사실도 틀려먹은 게 애초에 장제스는 반공주의자긴 했지만 장제스 본인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면서도 여전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국민혁명을 추구하는 일종의 '혁명가'로 보았고, 특히 '기업가적 자본주의'를 믿는 젭 부시와 미국 공화당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는 전혀 아니었다. 기업과 자본가들 상대로 장제스는 오히려 줘패면 줘패고 내가 없으면 니들 전부 빨갱이 밥이다 겁을 줬지 영미 보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친시장, 친기업적 의미에서 '우파'하곤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반공과는 별개로 장제스의 내치에는 나름 좌파적인 성향도 종종 있었다.[30] 그리고 미국에서도 이런 일발성 정계에서 역사적 언급에 관심 가지고 일일이 설명할 만큼 역사와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 장제스는 무슨 영미권에서 말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부시 집안 자식들 중에선 그나마 똑똑하다고 하는 젭도 조크를 잘못 이해한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장제스를 출정시키다"가 진짜 뭔 뜻인지 이해할만큼 실제 장제스나 세계사에 대한 조예가 부족했다. 그래서 젭은 이 20세기 중국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성향의 장군이자 독재자를 "기업가 정신과 자유로운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보수주의적 원칙을 믿는 '신비로운 전사'" 운운했던 것이다.

해당 사건을 취재한 정치 저널리스트 Brad DeLong

[1] 파일:external/pic.pimg.tw/4a7cd15418a93.jpg
이 사진은 본래 장제스 외에도 2명의 동료 장교들이 쑨원과 함께 찍은 것이었지만, 쑨원의 후계자로서 장제스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2명의 모습을 삭제한 것이다.
[2] 하지만 왕징웨이가 명백히 수세였다. 특히 왕징웨이는 좋지 않은 자신의 건강을 핑계로 결정적인 정치적 공격을 받으면 매번 유럽 유람을 떠나곤 했는데, 결국 장제스의 공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암살 기도로 큰 부상을 입으면서 더욱 몰락하고 말았다.[3] 왕징웨이에게 군사력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때문에 장제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거나 하야해 없을 때에는 다른 군사 실력자들과 합작할 수밖에 없었다. 중산함 사건 이전 광저우 국민정부 시절에는 높아지는 장제스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탄옌카이 등과 연대하려 했고, 우한 국민정부 시절에는 탕성즈와 협력하여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했다.[4] 이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 측에서 장제스를 숙청해야한다고 주장했을 때 스탈린이 장제스는 제국주의자와 싸우는 유용한 도구이므로 아직 즙이 많이 남은 레몬과 같다고 표현한 데서 유례했다. 이 발언이 있은 후 불과 몇달 만에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자 스탈린은 장제스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바꾸었다.[5] 소련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공산주의자 들이 중공 초창기를 이끌었고 마오쩌둥은 엄밀히 말하면 듣보잡이었다. 하지만 책 속에 파묻혀 현실을 직시못한 소련파 들은 결국 장시성에 힘들게 조성한 중화소비에트가 국민당의 5번에 걸친 초공 작전으로 완전 패망 이후 대장정을 거쳐 마오쩌둥이 이끄는 마오이즘에 밀려 소멸되었다. 소련 입장에선 마오쩌둥이 중국식 공산주의를 만들어 개인플레이를 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고 이는 후에 중소분쟁 으로 이어진다.[6] 물론 UN상임이사국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구 5억의 인구대국과 인구 900만의 소국가운데 어떤나라를 인정해야되냐면 아무리 전자를 선택하는것이 이득이었다.[7] 아시아 대륙 지역 연합국 총사령관은 장제스다.[8] 그는 기자들 앞에서 “중국 문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무식하고 문맹이고 미신적인 농민 개자식들과 연맹을 맺은 것입니다.”라고 한 적도 있다.[9] 엘리트 군인 출신으로 정갈하고 질서있는 생활 패턴인 장제스에 비해, 마오쩌둥은 게릴라 스타일에 가까워 이론중심적인 장제스에 비해 실전파였고 세신 따위는 안중에도 안둘 정도였다. 여담으로 마오쩌둥은 매독을 앓았지만 성기를 씻는 걸 거부, 많은 여자들에게 성병을 옮겼다. 다만 마오쩌둥은 매일 아침마다 몸을 씻는것과 수영을 매우 즐겨했기 때문에 안씻는 놈이라고 하는것은 근거없는 폄하이기는 했다.[10] 5천명 이상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때 사살된 사람 중에는 당시 공산당을 이끌던 리다자오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천두슈 등이 감금되어 세력을 잃게 되어 공산당은 완전 지리멸렬하게 되었다.[11] 만약 장제스가 공산당을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그리고 게릴라전에도 충분히 대비를 했다면, 중국공산당의 지도권은 계속해서 장궈타오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쥐었을 것이다.[12] 물론 덩샤오핑 같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인재들은 살아남았으나, 이들은 마오쩌둥에 비해 나이가 어렸다.[13] 중국어의 방언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이러한 정책이 없었다면 중국과 대만은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14] 2023년 현재보다도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대립이 심하고 양안간 교류도 전혀 없던 시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는 장제스나 마오쩌둥이나 중국과 대만이 반드시 언젠가 다시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중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대만이 아니라 중국이 서사군도를 탈환하는 것이지만 어차피 나중에 통일되면 다 같은 중화의 땅이므로 똑같다고 생각한 것이다.[15] 황푸 군관 학교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저우언라이(오른쪽).[16] 보통 달걀을 풀어 넣은 콩국과 압맥빵을 같이 먹었는데, 저우언라이는 이후로도 거의 평생 이 식단으로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17] 이들중 가장 유명한 이가 린뱌오로, 장제스의 제자였던 린뱌오는 제2차 국공 내전에 국민당군에게 만주 방면에서 참패(요심 전역)를 안겨주었고, 이 한판으로 전세는 완전히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18]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상대방의 음모라고 주장.[19] 사실 20세기 중국 군벌 중 최강의 세력을 구축했던건 봉천 군벌 이었고 아무리 젊고 경험이 많지 않더라도 충분히 유용히 써 먹을 수 있던 장쉐량 이지만 장쉐량은 시안 사건 이후 군대는 커녕 세상에 나오는 기회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에 봉천군벌의 원로들과 협력하려고 했는데 장징후이 등은 한간으로 변절한 상태였고 우쥔성 등은 죽었으며 장쭤샹 등은 은둔 생활을 고집해서 실패했다.[20] 중화권 문화에서 시계를 선물로 주는 건 큰 모욕이라 받아들여진다. 마치 죽을때를 재촉하는것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까지 한 걸 보면 장쉐량도 자신의 처지에 달관 한 듯 해 보인다.[21] 원한이 심할만도 한게 당시 1차 국공내전은 마오쩌둥 및 다른 중공 수뇌부만 잡는 것만 남았는데다 그것도 거의 완수 되어가는 상황이었다. 그 끝무렵에 멈춰버렸고 그 후 중일전쟁을 거쳐 거대해진 중공이 후에 대륙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 자기는 경상도 만한 섬 으로 쫓겨나는 상황까지 왔는데다 인생 거의 끝자락엔 겨우 얻은 국제사회의 지위도 잃었으니 기독교인이었던 장제스에게 최고(苦)의 십자가는 장쉐량이었을 것이다.[22] 이 부분은 스탈린 역시 마찬가지.[23] 이에 대한 내용이 중국 영화인 건국대업에서 묘사된다.[24] 당시 장제스 정권은 중경(충칭)으로 천도하고 일본에 항전하고 있었다. 일본측에서는 장제스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중경정권이라 불렀다. 반면에 왕징웨이 정권을 국민정부라고 불렀다.[25] 당시 국민혁명군이 북위 16도선 이북 베트남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1946년 6월까지 북베트남에 주둔했다.[26] 부하들에게 소방 호스로 세례를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27] 라고는 하지만 중국의 방언들은 8개의 외국어로 분류 가능 할 정도로 이질적이라 장제스의 오어와 천중밍의 광동어는 전혀 접점없는 언어였고 고로 사실상 외국인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28] 진형명이 손문의 총통부를 공격하여 손문이 위급할 때에 군함 영풍을 가지고 손문을 상해로 무사히 탈출시킨 것이 바로 장개석이다. 이후 영풍은 이름을 중산으로 개명한다.[29] 첫번째는 당연히 청나라다.[30] 국민당에서 진짜 강경 우파 성향은 후한민, 그리고 서산회의파의 중추인 셰츠, 쉬충즈같이 국민혁명 초기부터 국공결렬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들이었고,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히려 보로딘, 왕징웨이 같은 좌파와 가까운 인물로 평가받던 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무슨 권력 한줌 없는 샌님들이 아니라 당장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 같이 국민당 우파 정치인들이 군사력을 필요했던만큼 그들의 정치적 명분과 대의도 필요했던 다른 대군벌들과 종종 손잡으며 실제로 장제스의 권력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도 있는 쟁쟁한 정치세력이었다. 당장 서안 사건때만 하더라도 좀 많이 현실적인 계산도 끼어있지만 허잉친, 리쭝런 같이 총통의 일신이 위험하더라도 초공의 기치가 더 중요하다며 시안도 폭격으로 밀어버리고 초공작전 지속하자던 강경 인사들도 충분히 있었다. 즉, 피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국민정부 시기 장제스의 정치적 대립은 자기가 정점인 국민당 vs 한주먹도 안되는 공산당이 1대1 구도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당 내에서도 수많은 다른 계파, 경쟁 군벌들과도 동시에 싸우면서 공산당하고도 싸우고, 나중엔 추가로 이들보다 훨씬 강한 일본하고도 싸워야하는게 30년대 장제스의 처지였다. 그리그 장제스가 와중엔 본인보다도 더 강경 반공 우익인 다른 국민당 우파 정치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정적들과 싸우며 정신없던 사이 공산당은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일삼으면서도 어쨋든 굉장한 생존력을 발휘하고 타격을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세력을 키운 끝에 2차대전 끝나고 2차 국공내전이 터졌을때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위세로 성장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총합해서 보면 장제스는 국민혁명의 중진들 중에선 오히려 중산함 사건, 상하이 쿠데타 같이 확실하게 반공으로 기울어진 20년대 후반 이전까지 포함하면 이념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유연했던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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