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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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훈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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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gles_Champion_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파일: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22

파일:2023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로고.svg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준우승(코치)
2023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1 KBO 리그 최다 안타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0, 1991, 1992 KBO 리그 홈런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0, 1991, 1992 KBO 리그 타점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0, 1991, 1992, 1995 KBO 리그 장타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5 KBO 리그 출루율왕






장종훈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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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52번}}}
팀 창단

장종훈
(1986)


길주한
(1989)
{{{#ffffff [[빙그레 이글스|빙그레]]
/
[[한화 이글스|
한화 이글스]] 등번호 35번}}}
이군노
(1986)

장종훈
(1987~2005)


KBO 영구 결번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82번}}}
결번

장종훈
(2006)


강성우
(2010~2012)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85번}}}
정구선
(1991~2000)

장종훈
(2007~2011)


결번
결번

장종훈
(2013~2014)


김재현
(2015~2016)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3번}}}
강경선
(2014)

장종훈
(2015~2017)


김태룡
(2019)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35번}}}
KBO 영구 결번

장종훈
(2018~2020)


KBO 영구 결번




파일:02코치_장종훈.png

한화 이글스 No.35
장종훈
張鍾熏 | Chang Jong-Hoon

출생
1968년 4월 10일 (56세)
충청북도 영동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용담초 - 세광중 - 세광고
신체
185cm, 83kg
포지션
유격수[1]1루수, 지명타자[2]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6년 연습생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6~2005)
지도자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6~2007)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08)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9)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0~2011)[3]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1)[4]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3군 타격코치 (2012)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3)[5]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3~2014)[6]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5~2016)[7]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6~2017)[8]
한화 이글스 1군 수석·타격코치 (2018)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9~2020)[9]
한화 이글스 육성군 총괄코치 (2020)[10]
세광고등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 (2021~)[1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23)
경력
KBO 총재 특별보좌 (2023~)[12]
KBO 전력강화위원 (2023~)
본관
흥덕 장씨
종교
개신교[13]

1. 개요
2.1. 수상 내역
2.2. KBO 최초로 달성한 기록들
3. 은퇴 이후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kr.rd.yahoo.com/jangjh-2.jpg


"긴 시간, 과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 야구선수가 되겠습니다."

2005년 9월 15일 은퇴식에서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前 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

시대별 홈런왕을 따져볼 때 1980년대를 상징하던 홈런왕이 김봉연, 김성한, 이만수였다면 1990년대를 대표한 강타자는 장종훈이다. 장종훈의 뒤를 이어 이승엽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홈런왕이 됐고 이후 이대호, 박병호, 최정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지금도 '홈런왕' 하면 장종훈을 떠올릴 정도로 현역시절 홈런 타자의 상징이었으며 KBO 리그 최초의 단일시즌 40홈런 달성자[14][15]이자 최초의 3시즌 연속 단독 홈런왕[16]으로 은퇴 시점에서 KBO 역대 우타자 최다 홈런 1위[17][18]의 기록을 달성했다.

라인 드라이브를 넘어 엄청난 속도로 정말 총알같이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전매 특허.[19] 정말 총알같은 타구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다 할 정도로 타구를 강하게 치는 선수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유격수가 점프캐치를 아쉽게 실패했는데 그게 펜스 상단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수상 내역[편집]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1999)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2회 (1988, 1990)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1991)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2회 (1992, 1995)
MVP 2회 (1991, 1992)
안타 1위 (1991)
홈런 1위 3회 (1990~1992)
타점 1위 3회 (1990~1992)
장타율 1위 4회 (1990~1992, 1995)
출루율 1위 (1995)


2.2. KBO 최초로 달성한 기록들[편집]


  • 유격수 홈런왕(1990년)[20][21]
  • 단일시즌 3할-30홈런(1991년)
  • 만 23세 이하 단일 시즌 30홈런(1991년)[22]
  • 단일시즌 100타점(1991년)
  • 단일시즌 100득점(1991년)
  • 단일시즌 40홈런(1992년)[23]
  • 3년 연속 홈런왕(1990년~1992년)[24]
  • 3년 연속 타점왕(1990년~1992년)[25]
  • 3년 연속 최고 장타율(1990년~1992년)[26]
  • 3개 포지션 골든 글러브 수상(1992년)[27][28]
  • 단일 시즌 최고 장타율 4회 수상(1990~1992년, 1995년)[29]
  • 통산 300홈런(2000년)[30]
  • 통산 900타점(1999년)
  • 통산 900득점(2000년)
  • 통산 1,000타점(2001년)
  • 통산 1,000득점(2002년)
  • 통산 1,500안타(2000년)
  • 통산 1,700안타(2002년)
  • 통산 3,000루타(2002년)
  • 통산 300 2루타(2002년)
  • 통산 1,900경기 출장(2004년)
  • 15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1988년~2002년)[31]
  • 16년 연속 세자릿수 루타(1987년~2002년)[32]


3. 은퇴 이후[편집]



3.1.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종훈/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여담[편집]


  • 삼종훈 삼총사 중 두번째이며,[33] 데뷔년도과 은퇴년도도 중간정도.[34] 이들 가운데 성적, 인지도에서 장종훈이 단연 압도적이다 단 한국시리즈는 의외로 인지도가 가장 없는 김종훈이 우위다.

  • 삼종훈 중 우승을 딱 한 번밖에 못했다(1999년). 이는 빙그레 이글스의 4번의 준우승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 이만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35]

  • 유격수로는 단 네 시즌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4시즌동안 16 sWAR을 기록해 이글스 유격수들 중 통산 sWAR 1위이다. 그동안 한화의 유격수 자리가 얼마나 암울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 심지어 1차지명으로 기대 이하의 활약과 음주운전으로 욕을 얻어먹은 하주석이 이글스 유격수들 중 통산 sWAR이 3위이다(...) 그래도 그나마 장종훈이라도 있었기에 롯데보단 유격수 구멍 인식이 덜한 편이다.

  • 2004년 시즌 개막 직전 MBC 예능 프로그램인 브레인 서바이버 프로야구 특집에 출연했다. 준수한 입담을 보여주었고, 함께 출연한 김C[36] 장종훈이 타격왕, 홈런왕 등 타이틀 홀더를 다시 한 번 차지해서 신문기자들이 장종훈 같은 선수들에게 노장이라는 말을 못 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그를 예우했다.[37]

  • 커리어에 비하면 별명은 딱히 붙지 않았었으며 굳이 별명이라고 한다면 장레전, 연습생 신화 정도로만 불린다.

4.1. 오버 트레이닝[편집]


파일:/pds/200902/18/58/e0036358_499b9a5e54cb5.jpg
손바닥 굳은살 깎아내기가 취미였다고 보여주는 사진

나이가 들며 서서히 하향세를 탔고 연도별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를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한 '엄청난 연습량'이 양날의 검이 되어 부상으로 그를 괴롭힌 면이 크다. 하루에 6천 번 이상 타격 연습이라 했으니[38]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야구계의 선배들이나 현재 감독들은 모두 장종훈의 일상을 이해하고 있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이나 스포츠물리학 따위는 없던 시절 엄청난 혹은 과도한 연습량이 되려 몸을 망친 것이다. 장종훈과 함께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악바리 이정훈도 부상 중에 오히려 훈련량을 늘리는 오버 트레이닝으로 몸이 망가지면서 쓸쓸히 은퇴했다. 사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런 식으로 사라져간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80년대 투수는 투구 후 아이싱을 해야 하는데 핫팩으로 어깨를 웜업 하는 등 제대로 된 스포츠 물리학이 전달되지 못했다. 2000년 초반부터 조금씩 선수 혹사나 과도한 훈련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2018년 기준으로 투수의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는 식의 발언은 거의 먹히지 않는다.

4.2. 성품[편집]


촌놈이라 불릴 정도로 털털하고 꾸밈없는 성품이었으며, 사람 좋고 인간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타석에서 성질을 내거나 욕설을 내뱉지 않았고, 선수였을 때는 선후배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코치가 되어서는 지도한 선수들이 하나같이 공을 돌릴 정도로 인망이 높다. 코치로서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성격에서는 딱히 흠잡을 점이 없는 유형.

밑의 두 이야기는 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 1994년 데뷔 시즌에 첫해부터 13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던 태평양 돌핀스최상덕. 데뷔 다음해인 1995년 6월 25일,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벌어진 대 한화 이글스전에서 선발 등판한 그는 한화의 4번 타자, 장종훈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그대로 직격당해 앞니가 4개나 부러지고 잇몸이 찢어져 12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인플레이 상황이였기 때문에 1루에 가면 내야안타로 세이프였음에도 쓰러진 최상덕을 보고 너무 놀라 1루가 아닌 마운드로 곧바로 올라가 최상덕의 부상을 염려하며 살폈고, 3피트라인 이탈로 인한 주자 자동 아웃으로 아웃되고 말았다. 이후 최근, 장종훈 코치는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어휴,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미안해 죽겠어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최상덕은 그 해 2년차 징크스를 타면서 아예 시즌 아웃이 되었고 1996 시즌 개막 직전 해태로 트레이드로 되어[39] 1998 시즌에 재기에 성공,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해태 마운드를 나홀로 이끌다시피했다.

  • 1999년 7월 10일,대전구장, 쌍방울 레이더스 대 한화 이글스전. 투수는 선발등판한 쌍방울의 에이스 김원형. 타석엔 2회 선두타자로 나온 한화의 4번 타자 장종훈. 김원형이 던진 2구째 공을 장종훈이 정확히 강타했다. 타구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히 홈-투수-2루의 방향으로 라인드라이브로 나아가게 되었고, 투수 김원형이 이 무지막지한 파워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그대로 직격당해, 왼쪽 광대뼈에 금이 가고 코뼈가 함몰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투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투수의 얼굴에 맞은 공은 옆으로 흘렀다. 규정상 경기는 계속 진행 상태. 스톱이 아니다. 이런 경우 타자는 그냥 1루로 뛰면 내야안타로 세이프다. 그러나 그가 달려간 곳은 1루가 아니라 김원형이 쓰러져 있는 마운드. 그리고 3피트라인 이탈로 인한 주자 자동 아웃으로 아웃되었다.[40][41] 일단 먼저 1루에 도착한 후에 타임을 걸고 투수에게 달려가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장종훈은 곧장 투수에게 질주해서 상태를 살폈다. 김원형은 그 후로 마운드에 있을 때 장종훈이 타석에 들어서면 항상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김원형은 이 때 맞은 타구로 인해 거의 1년간 그라운드에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전성기때 장종훈의 타구는 라이너성으로 그야말로 총알같이 날아갔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런 공에 얼굴을 직격당했으니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42] 그런 부상을 입힌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다니 김원형도 대인배지만, 그 사고 이후 장종훈이 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장종훈은 상기 제목에서도 언급된 바, 연습생 신화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당시 지명도 못 받고 입단해 홈런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입지로까지 올라선 경우는 장종훈이 최초였다. 지금이야 김현수, 서건창 같은 신고선수 출신 스타플레이어도 많이 나왔으나, 80년대 당시 연습생(신고선수) 출신으로 1군 주전을 꿰차고 타이틀까지 딴 선수는 장종훈 하나밖에 없었고[43] 이것이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면서 지금까지 쓰일 정도로 고착화된 것이다. 이 때문에 장종훈은 지금까지도 육성선수들의 롤모델로 꼽힐 만큼 존경받고 있는데, 최익성, 박경완, 김현수, 서건창 같은 신고선수 출신 스타 선수들도 장종훈의 일례를 들으면 늘 연습생 하면 넘버 원이라고 칭송하는 점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연습생 신화와 함께 꼭 붙어다니던 신화가 고졸 신화였는데, 사실 이 별명을 장종훈은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44]. 이후 어느 정도 유명해진 장종훈에게 대전광역시목원대학교에서 입학 제의가 들어왔는데,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던 아래의 사연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난 대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대학교 나온 아빠로 기억되길 원했거든. 그런데, 나마저 대학교를 가버리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 주는 일이 되잖아요. 결국엔 대학교가는 걸 포기하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고졸 연습생 신화에 가깝게 날린 선수... (후략)
(일요신문과의 인터뷰, 2005.7.3)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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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단 직후부터 1990년까지.[2] 1991년 등[3] ~5월 5일[4] 5월 6일~[5] ~7월 17일[6] 7월 18일~[7] ~8월 17일[8] 8월 18일~[9] ~6월 5일[10] 6월 6일~[11] 세광중.고등학교와 빙그레/한화 이글스 시절 선후배 사이인 김용선 감독의 제의를 수락해 2021년 1월부터 재능기부 형식으로 야구부원들을 지도하고 있다.[12] 이승엽이 감독직을 수락하며 공석이 된 특보자리에 역임하게 되었다. 같은 전국구 선수이자 홈런타자 계보를 잇는 선수의 역순 관계가 된 점이 재미있다.(이승엽과 장종훈 사이에 조계현이 잠시 역임하긴했다.)[13] 1999년에 방송된 장종훈 관련 다큐에서 임종한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가족 전체가 추도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송지만도 인터뷰에서 자신과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14] 당시 김성한, 김성래 등 걸출한 선수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30홈런을 넘기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의 홈런 타자로의 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15] 지금이야 40홈런은 물론이거니와 이승엽, 박병호처럼 홈런을 50개 이상 치는 타자들도 등장했지만 90년대에는 지금보다도 경기수가 훨씬 적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16] 1983~1985 시즌에 KBO 최초로 3시즌 연속 홈런왕에 등극한 이만수는 1985 시즌에 김성한과 공동 홈런왕에 올랐다.[17] 통산 340홈런으로, 1999년 이만수의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고 양준혁이 2009년에 경신할 때까지는 10년간 KBO 전체 1위 기록이었다. 우타자로만 한정해보면 이호준(337홈런), 심정수(328홈런), 송지만(311홈런)도 은퇴할 때까지 장종훈을 넘지 못했다. 대신 해외 진출한 KBO 우타자들의 기록까지 합치면 일본에서 4년, 메이저리그에서 1년을 뛰어 총 408홈런(KBO 312+NPB 98+MLB 14)을 넘긴 이대호가 있다.[18] 2020년 6월 18일 SK 와이번스최정이 341호 홈런을 기록하면서 오랫동안 지켜오던 우타자 홈런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19] 반대되는 선수가 바로 해태의 김봉연. 김봉연이 홈런을 치면 그 누구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오랜 시간동안 날아갔다고 한다.[20]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21] 가장 근접한 기록으로는 1997년 이종범의 30개로 당시 홈런왕 이승엽과 단 2개 차이였다. 만약에 성공했다면 KBO역사 최초로 홈런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할수도 있었다.[22] 장종훈, 김기태(1992년 만 23세), 박재홍(1996년 만 22세), 이승엽 3회(1997~1999년, 만 21~23세), 김태균(2003년 만 21세), 노시환(2023년 만 22세)만이 달성한 기록[23] 장종훈 이후 타이론 우즈, 이승엽, 댄 로마이어, 찰스 스미스, 트레이시 샌더스, 박경완, 심정수, 호세 페르난데스, 이대호, 박병호, 강정호, 에릭 테임즈, 야마이코 나바로, 최정, 김재환*, 멜 로하스 주니어 등이 40홈런 고지를 밟았다. 그 중 이승엽박병호는 무려 세 번이나 단일시즌 40홈런을 기록했다.[24] 장종훈, 이만수, 이승엽, 박병호만이 달성한 기록.[25] 장종훈, 이만수, 박병호만이 달성한 기록.[26]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27] 유격수, 지명타자, 1루수.[28] 장종훈, 양준혁(1루수, 외야수, 지명타자), 이대호(1루수, 3루수, 지명타자)만이 달성한 기록[29]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30] 장종훈 이후 이승엽, 양준혁, 심정수, 박경완, 송지만, 박재홍, 이호준, 이대호, 김태균, 최형우, 이범호, 최정, 박병호, 강민호 등이 300홈런 고지를 밟았다.[31] 장종훈, 양준혁, 최정만이 달성한 기록으로 최정이 16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면서 기록을 경신했다.[32] 장종훈, 양준혁, 박한이, 최정만이 달성한 기록.[33] 박종훈은 1959년생, 장종훈은 1968년, 김종훈은 1972년.[34] 박종훈 - 1983년~1989년, 장종훈 - 1986년(연습생)~2005년, 김종훈 - 1994년~2007년.[35] 그래도 장종훈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지만 이만수는 공식적인 우승을 하고도(1985 전후기 통합우승)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지 못했고, 코치가 되어서야 메이저리그 시절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과 SK 코치로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볼 수 있었다.[36] 고등학생 때까지 야구선수였다.[37] 이 해 타이틀 홀더를 차지한 건 아니지만 OPS .750으로 나쁘지 않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나이 37세.[38] 산술적으로, 1분당 최소 10회씩 쉬지 않고 꼬박 10시간을 스윙한 셈이다.[39] 이 때 최상덕의 트레이드 맞상대가 다름아닌 박재홍이다.[40] 이 타석으로 타격 1위의 성적이 3위로 떨어졌다고 하는 루머가 있는데, 성적과는 관계가 없는 평범한 타석이었다. 참고로 장종훈의 1999년 최종 타율은 0.284였으며, 그해의 타격왕은 그보다 타율이 1할 가까이 높았던(0.372) 롯데 자이언츠마해영이였다.[41] 일반적으로 알려진 '타격 1위를 포기한' 일화는 95년도 최상덕 때일 가능성이 높다. 1995시즌 장종훈은 타격 2위였고(.326, 1위는 김광림 .337), 사고가 난 6월 중순에는 김광림, 김기태와 함께 타격 1위 경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사건이 99년도다.[42] 그의 전성기때 한번은 장종훈이 친 타구를 유격수가 점프해서 캐치하려 하였는데, 그 타구는 유격수 글러브 위를 살짝 지나가 그대로 뻗어나가서 스탠드에 꽂혔다.[43] 같은 팀이었던 한용덕 역시 연습생 출신으로 스타플레이어로 등극했지만, 이쪽은 타이틀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44] 소위 '야잘잘'이라고 할 만한 대형신인들은 전부 고졸로 입단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스타 플레이어들도 대다수가 고졸 출신인 2010년대의 기준으로는 '고졸 신화'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90년대까지는 지금과 반대로 오히려 고등학교에서 잘하던 선수들이 대학을 거쳐서 프로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20세기의 선동열, 양준혁, 이종범 등 올드스타들은 대부분 대졸 출신이라는 사실이라든가, 이승엽이 대학을 가지 않고 삼성 라이온즈에 바로 입단한 것이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은 뉴스겠지만 당시에는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던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