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쭝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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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종창.jpg
중화민국 안국군 부사령관
중화민국 직로연군 총사령관

정체
張宗昌
간체
张宗昌
한국식 독음
장종창
영문
Zhang Zongchang

효곤(效坤)
출생
1881년 2월 13일 청나라 산동성 액현
사망
1932년 9월 3일 중화민국 산동성 제남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직업
정치가, 군인
종교
유교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주요 경력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중화민국의 군벌. 봉천군벌의 맹장으로 2차 직봉전쟁 이후 산동독판이 되어 산동을 지배하였으나 방탕하고 폭력적인 생활 때문에 혼세마왕, '개고기 장군(狗肉將軍)'이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재산이 얼마인지, 부하가 얼마인지, 부인이 얼마인지 모른다 하여 '삼불장군(三不將軍)'이란 별명도 있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1881년 산동성 액현 축가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잠시 글방에 다니기도 했고 글방 훈장으로부터 장씨 가문을 번창시키라는 뜻으로 종창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다가 1897년 이래로 축가촌에 몇년간 가뭄이 들어 아사할 위기가 놓이자 18세의 나이로 고향을 떠나 만주 일대에서 머슴, 날품팔이, 도박관 문지기 등 갖은 막노동을 하다가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이때 필사적으로 러시아어를 배워 러시아어가 아주 유창하였는데 그 덕분에 시베리아 금광의 작업총책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중동철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마적단에 가담하여 비적질을 하였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부하 200명을 거느리고 이를 민군이라 칭하며 산동민군 도독 호영에게 투항하였다. 이후 부대를 이끌고 상하이로 남하하여 혁명가 천치메이를 만나 그의 밑에서 광복군 독립기병단장에 임명되었다.

1912년, 강소성 3사단 기병3연대 연대장에 임명, 이후 5여단장을 거쳐 1913년 강소육군 제3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13년 계축전쟁황싱 밑에서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한 봉기에 참가했으나 쉬저우에서 남하하는 북양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1913년 7월, 혁명군을 공격한 후 펑궈장에게 투항했다. 1917년 장훈복벽이 터져 대총통 리위안훙이 부총통 펑궈장에게 대총통 자리를 넘겨주자 대총통 시종 무관장이 되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터지자 강소성 6혼성여단장으로 참전하여 장회지와 함께 호남성에서 호법군과 교전했지만 박살났고 임편 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장쭝창은 강서에서 진광원과 교전했으나 진광원에게 패하여 길안지구에서 부대가 완전히 해체되는 수모를 맛보았다. 이에 펑궈장에게 자리를 부탁하려 했으나 이미 권력에서 물러난 후라서 차오쿤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으나 토비 출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우페이푸의 반대로 이도 실패했고 1921년 장쭤린에게 몸을 의탁하여 봉천군벌에 소속되어 헌병대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전 길림독군 멍언위안의 조카 고사빈이 노영귀 등과 함께 하얼빈에서 장쭤린을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일으키자 장쭤린으로부터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장쭝창은 이것이 자신이 승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 반란군 병사들 대다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산동성 출신임을 이용하여 이들을 술과 도박으로 포섭하여 하룻밤 사이에 와해시켰다. 달아나던 고사빈과 노영귀는 장쭝창에게 체포되었고 장쭝창은 이들을 모조리 총살시켰다. 장쭝창은 노영귀의 부하들을 흡수하여 3개 연대를 거느리게 되었고 장쭤린으로부터 반란 진압의 상을 받고 길림 방위군 3혼성여단장 겸 수녕진 수사, 중동철로 호로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의 패잔병들이 만주로 입국하자 이들을 대거 흡수하여 휘하에 공병대, 장갑병대를 만드는 등 화력을 크게 확충하였다.

하지만 비적 출신인 장쭝창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본 궈쑹링, 양위팅 등이 장쭝창의 부하들을 해산하기 위해 1923년 동계 훈련에서 굉장히 어려운 과제를 주었다. 이때 휴식 도중 궈쑹링을 만난 장쭝창은 궈쑹링으로부터 내가 네 애미를 강간했다는 패드립을 듣고 말도 안되게 어려운 훈련이 자신을 조지기 위한 궈쑹링의 음모라는 걸 알게 되었으나 궈쑹링에게 "제 어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시라면 궈 장군님은 제 아버지 되시는 분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떤 후 부하들을 통솔하여 훈련을 무사히 끝마쳤고 장쭝창의 대항군 역할을 맡았던 리징린이 봉군의 원수는 우페이푸인데 우페이푸를 앞에 두고 봉천군벌이 분열해선 안된다고 궈쑹링과 장쭝창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이때 장쭝창은 궈쑹링의 제자인 장쉐량을 만나 그의 호감을 얻는데 성공했으며 봉천육군 혼성3여단장으로 승진했다.


2.2. 2차 직봉전쟁에서 직봉풍전쟁[편집]


1922년 요녕진수사, 길림성방군 제3 혼성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용맹함으로 인해 장쭤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토비, 적 군벌 패잔병, 러시아 내전 와중에 중국에 들어온 백군을 대거 흡수하여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 동북군 제2군 부군장으로 참전, 10월 22일 란저우를 공격해 28일에 점령했고 직군의 패잔병을 대거 흡수하여 휘하 병력을 증강시켰다. 2차 직봉전쟁 이후 직예군벌의 발해함대가 항복하지 않자 동북해군 부사령관 심홍렬과 함께 경호대를 거느리고 발해함대의 조화호에 탑승하여 경호대를 동원해 조화호를 장악한 후 발해함대를 손쉽게 동북군에 귀순시키기도 했다.

1924년 11월 24일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1924년 12월에 발발한 제노전쟁에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소환선무사 루융샹과 함께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격파하고 상하이를 점령했다. 장쭝창은 필서성을 해군사령관에, 왕기를 재무담당에 임명하여 상하이를 장악한 이후 자신의 친구인 청방 두목 황진룽, 두웨성 등과 어울리며 영국 조계지의 삼마로 회중여관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장쭝창이 워낙 주색잡기를 좋아하고 사치스러운데다가 성격이 포악한 것을 걱정한 장쭤린은 장쭝창을 상하이에 두었다간 열강과 충돌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산동을 산동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산동군무독판에 추천하였다. 장쭝창은 부유한 상하이를 떠나야 한다는 점이 불만스러웠으나 일단 군말않고 산동독판에 취임, 직로연군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산동성을 장악하고 산동왕으로 떵떵거렸으며 소환로 3성 토비 총사령관, 동북 해군 사령관에 임명되는 등 봉천군벌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이때 많은 첩을 거느리고 횡령, 약탈, 전횡을 일삼아 민중에게 큰 고통을 주어 원성을 샀다. 또한 미신을 신봉하여 전투 전에는 꼭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고 비가 오면 하늘에 대포를 쏘았다.

이후 손봉전쟁이 발발하자 쑨촨팡과 교전했고 반봉사건궈쑹링과 결탁했던 펑위샹 휘하의 국민군 2군과 3군이 펑위샹의 말을 듣지 않고 리징린을 공격하자 리징린은 장쭝창에게 직예성을 넘겨줄테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장쭝창은 직로연군을 조직하여 리징린을 부사령관에 임명, 베이징과 톈진을 공격하였다. 돤치루이는 장쭝창을 2방면군 군단장에 임명하여 펑위샹 토벌을 명령했고 1926년 옌후이칭 내각이 출범하자 6월 26일, 장쉐량, 왕회경 등과 함께 베이징에 입성, 28일에 순승왕부에서 우페이푸, 장쭤린의 회담에 참여했다. 1926년 옌시산과 함께 직봉풍전쟁에 참전했다.

파일:봉천군벌순승왕부회의.jpg
순승왕부 회의 기념사진. 2번이라고 적힌 키큰 남자가 장쭝창이다.

이 기간 내내 특유의 불량한 행실을 고치지 못해 잔인한 행동을 많이 했으며 사람을 함부로 죽였고 그의 휘하의 군사들은 군기가 불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성향 또한 반동적이라 신사상을 싫어하여 쑨원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지나치게 유럽을 숭상하여 권리만 찾고 의무를 모른다며 반서양문화의 태도를 보였으며 심삽경을 간행, 산동성에 보급하여 산동의 대학생과 중학생들에게 유교경전을 읽을 것을 강요하였다.


2.3. 국민당의 1차 북벌[편집]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쑨촨팡과 의형제를 맺어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약조하였고 적극적으로 쑨촨팡을 원조할 것을 주장했다. 11월 29일 장쭤린을 안국군 사령관으로 추대했으며 안국군 정부가 조직되자 안국군 부사령관 겸 직로연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쑨촨팡은 처음에 진윈펑, 우광신 등을 초청해 안휘군벌과 합작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자 봉천군벌과의 합작에 매달렸다. 1927년 1월 쑨촨팡이 심복 양문개를 보내 합작을 청하자 장쭝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린 녹림대학 마적과 출신이고 당신들은 사관학교나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았소? 아무 말 말고 우리 같이 남군을 치러 갑시다! 쑨 장군에게 말 전하십시오. 우리 꼭 함께 하자고 말입니다."


이후 쑨촨팡을 원조하여 상하이에 병력을 진주시켜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1927년 저우언라이가 주도한 3차 총파업 때 상하이에서 축출되었다. 1927년 6월 쑨촨팡과 함께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했고 급기야 황제에 즉위하는 것을 건의하기도 했지만 장쭤린은 대원수 직위에 만족했다. 이후 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발해함대 사령관 필서징이 난징 국민정부에 투항하려 하자 총살하였고 후임 사령관 오지형도 총살시켜버렸다. 공산당원 리다자오가 체포되자 그의 처형을 강경히 주장하여 총살하게 만들었다.

1927년 말에는 아예 벽운사에 안치된 쑨원의 시체를 없애버리자고 주장했으며 벽운사를 찾아 쑨원의 시체에 삿대질해대며 욕을 퍼부어댔다. 이 소식을 들은 장쉐량이 장쭝창을 불러 크게 호통쳐서 쑨원의 시체가 훼손되는 일을 막았다.


2.4. 국민당의 2차 북벌과 몰락[편집]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시기에 노남 방어를 맡았으나 국민혁명군이 북상하자 군기가 형편없던 장쭝창의 군대는 잇달아 패하거나 국민혁명군에게 투항했고 장쭝창은 노모와 첩을 북방으로 피신시킨 다음에 주색잡기를 즐기다가 베이징으로 달아났다. 그가 자랑하던 장갑열차들도 이때 국민혁명군에게 노획되어 파괴되었다. 이때 일본 제국이 2차 산동파병을 거행, 제남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장쭝창에게 장제스를 공격할 것을 청했지만 이미 장쭝창의 피해가 너무 누적되어 차려놓은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이후 북벌군이 베이징을 위협하게 되어 장쭤린이 봉천으로 철수하려 하자 항의하며 끝까지 베이징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다.[1] 베이징이 함락되자 옌시산에게 투항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했고 톈진에서 각국 외교관들을 위협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서원천을 비롯한 부하들이 북벌군에 투항하여 톈진까지 잃자 관외로 철수했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쑨뎬잉이 국민당에 투항하는 과정에서 청황실의 능묘를 대대적으로 도굴하기도 하였다.

1928년 관동군의 고급장교 고모토 다이사쿠의 음모로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여 장쭤린이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수령이 되었는데 장쉐량이 중국 국민당 합류를 꾀하면서 장쭝창에게 국민정부 합류를 권했다. 1928년 6월 중순, 장쭝창은 저옥박과 함께 장쉐량에게 직로연군을 봉천성에 기반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장쉐량은 이를 거절했다. 동북역치를 위해 봉천을 방문하고 있던 장제스의 대표 방본인과 바이충시의 대표 하천리가 직로연군을 처리할 것을 요구하면서 장쭝창의 직로연군이 봉천과 국민정부 사이의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양위팅은 직로연군을 4개 사단으로 축편하고 관외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장쭝창이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장쉐량은 장쭝창과 저옥박에게 직로연군은 4개 사단으로 줄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관외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렸는데 장쭝창은 이에 크게 반발해서 자유 행동을 선언했다. 장쉐량은 군대를 축편한 다음에 관외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장쭝창은 거부하고 장쉐량의 부대를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1928년 8월 25일 총사령부 긴급회의에서 장쭝창 부대는 국민정부의 자유처분에 맡기기로 하면서도 난징에 장쭝창 부대를 협상을 통해 중앙에 귀속시킬 것을 권했으나 바이충시와 하성준은 이를 거절하고 무력 토벌을 주장했다. 이에 1928년 8월 30일 장제스는 장쭝창 토벌령을 하달했고 장쉐량은 양위팅을 파견하여 바이충시와 함께 장쭝창을 공동으로 토벌하게 하였다. 결국 장쭝창은 패하여 변장을 하고 어선을 타고 9월 23일 다롄으로 망명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직로연군은 해체되어 바이충시에게 흡수되었다. 장쉐량은 직로연군 해산은 이들이 중앙에 복종하지 않아 대국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으며 전국 인민이 삼민주의에 복종하는 것이 대세이며 이에 따르지 않는 것은 망국의 죄인이 되는 길이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장쭝창에게도 전보를 보내 민의와 보경안민을 위해 부득이 대남타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산동성은 장쭝창의 부하 유진년과 일본 제국이 분할한 상태였으나 일본과 국민정부의 협상이 완료되면서 장제스와 펑위샹이 산동성을 분할하게 되었다. 1930년 중원대전 이후, 산동성은 장제스에게 투항한 펑위샹의 부하 한푸쥐가 통치하였다.


2.5. 말년과 죽음[편집]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쉐량은 장쭝창이 일본에 붙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귀국하여 베이징의 철사자호동에 기거할 것을 청했다. 이를 승낙한 장쭝창은 베이징으로 들어왔는데 아예 산동으로 가서 자신의 옛 부대원들을 소집하여 산동성의 대권을 틀어쥐려고 했다. 당시 산동성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기예노 초비 총지휘 겸 3로군 총지휘 겸 산동성 정부주석 한푸쥐 였는데 한푸쥐는 1932년 8월, 장쉐량이 소집한 군사회의 중에 스여우싼의 소개로 장쭝창을 만나 장쭝창, 우학충, 장쉐량과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장쭝창이 산동성을 장악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산동으로 내려오려고 하자 장쭝창을 제거하기로 했다.

장쭝창의 산동행에 대해 옛 부하 김수항, 서효루와 장쭝창의 모친 축무파가 모두 반대했으며 옛 맹우인 우페이푸, 쑨촨팡, 장쉐량도 모두 한푸쥐가 장쭝창에게 호의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만류하였다. 하지만 장쭝창은 듣지 않고 8월 말, 참모장인 김수창과 함께 제남에 도착했다. 장쉐량은 장쭝창이 산동으로 가버렸다는 말을 듣고 9월 2일, 장쭝창의 첩의 명의로 축무파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 장쭝창을 불러들였다. 9월 3일, 장쭝창은 한푸쥐에게 급히 떠나겠다고 말한 후 제남역에서 5시 37분발 기차표를 예매하였다. 오후 5시, 한푸쥐는 산동성 군정요인들에게 제남역에서 장쭝창을 배웅한다는 것을 통지하고 오후 5시에 장쭝창을 배웅했다. 장쭝창이 한푸쥐와 악수하고 기차에 오르려는 순간 산동정부의 부총참의 정계성이 달려들어 장쭝창을 쏘아죽였다. 정계성은 자신이 장쭝창에게 살해된 정금성의 아들이며 부친을 위해 복수하였으니 자수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첩들은 그의 재산을 모조리 나누어 가졌고 그가 남긴 금고를 열기 위해 부른 열쇠공이 금고 안의 모든 보석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였다.

장쭝창이 워낙 악명 높은 인물이었던지라 정계성은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펑위샹은 정계성에 대한 사면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정계성에게 특별사면을 내려 무죄석방하였다. 애초에 정계성이 장쭝창을 죽인 것부터 한푸쥐와 스여우싼의 사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여담[편집]


무식하고 반동적인 군벌이었지만 무기에 있어서만큼은 서양제를 좋아하여 장갑차, 전차, 장갑열차를 비롯한 신무기 도입과 군대의 기계화, 차량화에 열성이었고 휘하에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65사단을 꾸려 화기 사용법을 배우고자 했고 전차 제조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관련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쑨촨팡을 암살한 스젠차오의 아버지인 시공빈은 장쭝창의 부하였다. 장쭝창은 안휘성 장악을 위해 시공빈을 남하시켰으나 시공빈은 쑨촨팡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고 이에 스젠차오는 1935년 쑨촨팡을 암살했다. 스젠차오는 즉각 체포되었으나 쑨촨팡은 어차피 한물간 군벌이었는데다가 사람을 함부로 죽여 평판도 나빴기 때문에 각계에서 구명운동이 벌어져 7년형의 가벼운 벌을 받았으며 그나마도 1년 만에 사면되었다.


4. 주요 경력[편집]


산동성 역대 지방장관
1대 산동독판

2대 산동독판

3대 산동독판
정사기

장쭝창
(1925년 4월 ~ 1928년 2월 12일)

쑨촨팡


5. 참고문헌[편집]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張學良政權硏究(1928-1931), 송한용 전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1928년 장학량정권의 동북역치, 송한용, 역사학연구 12권, 호남사학회.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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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군벌 장작림에 따르면 장쭤린에게 항의하며 베이징에 남았다고 하지만 장제스 평전에 따르면 봉천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