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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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채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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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



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한국시리즈
1991 한국시리즈 MVP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5번
결번

장채근(1986)

김기철(198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2번
박진섭(1982~1986)

장채근(1987~1994.6.6)

최해식(1994.6.7~2000)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22번
김영운(1990~1994.6.6)

장채근(1994.6.7~1995)

정원배(1996~1999)
KIA 타이거즈 등번호 81번
김종윤

장채근(2003~2005)

김태원(2006~2007)
우리 히어로즈 등번호 87번
팀 창단

장채근(2008)

최창호(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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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선수 시절. 올스타전에서 장종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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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의 모습
홍익대학교 야구부 No.81
장채근(張彩根 / Chae geon Jang)
출생
1963년 3월 28일 (60세)[1]
파일:전라남도 휘장.svg 전라남도 파일:화순군 CI.svg 화순군 남면 사평리[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송정동초등학교 (졸업)
광주동성중학교 (졸업)
광주상업고등학교 (졸업 / 31회)
성균관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
신체
183cm, 98kg[3]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6년 1차 지명 (해태 타이거즈)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6~1994)
쌍방울 레이더스 (1994~1995)
지도자
해태-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 (1996~2004)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4~2005)
KIA 타이거즈 육성군 코치 (2007)
우리 히어로즈 1군 배터리코치 (2008)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1~)

1. 소개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3.3. 대표팀 감독 선임 논란
4. 선수 시절 평가
5. 기타
6. 연도별 성적



1. 소개[편집]


해태 타이거즈,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의 포수. 現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

전설을 찾아 장채근 상편, 전설을 찾아 장채근 하편,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장채근편
몸집보다 더 컸던 마음집, 장채근


2. 선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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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후 선동열과 포옹하는 모습.

송정동초등학교광주동성중학교, 광주상업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체육교육과를 다녔으며 특히 대학 시절 배터리를 이룬 동기 한희민과는 둘도 없는 절친. 대학 졸업후에 1986년 신인지명 1차 9순위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당시 주전 안방마님이던 김무종의 존재감이 워낙 막강했던지라 백업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백업 포수로 출전했다 해도 타석에선 대타를 써버리자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엔 경기 후 술에 잔뜩 취해서는 숙소의 김응용 감독 방에 들어가서 "나에게도 한번 기회를 달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나, 김응용에게 찍소리 못하고 제압당한 적도 있었다(…). 카더라에 의하면 당시 흉기를 들고 김응용 감독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장채근 본인이 "주전 기용 요청을 위해 김응용 감독을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흉기를 소지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6분부터 참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김응용은 장채근의 배짱을 높이 사게 되었고 후에 그에게 주전 도약의 기회를 주기에 이르렀다.[4]

이후 1987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 김무종이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자 장채근에게 안방을 맡기는 기간이 늘어났고, 장채근이 이에 부응하며 잔여시즌 동안 나름대로 활약을 보이며 주전으로 써도 되겠다는 눈도장을 받았다. 가끔 터지는 홈런포 외에 타격은 딱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장채근의 최대 장점은 어떤 투수든지(선동열이든 전날 갓 올라온 2군의 무명 투수였든 간에) 넓게 포용해주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장채근은 경기 전날 항상 선발투수와 다음날 경기 운영에 대해 미리 의논했고 주로 투수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설령 투수가 자신의 후배라 하더라도 "다 받아줄테니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라"며 편안하게 배려했기 때문에[5] 해태 투수들 대부분은 장채근을 상대로 등판하는 것을 선호했고, 조금씩 인정을 받게 된다.

1988년 시즌에 들어 장채근은 본격적으로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장채근은 그 해 당대 최고의 슬러거이던 팀 선배 김성한과 홈런왕 쟁탈전을 벌일 정도로 타격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물론 전매특허인 투수리드는 기본이었다. 장채근이 거둔 1988년 시즌 성적은 타율 0.249, 26홈런(2위), 58타점으로 포수로선 상당히 준수한 기록이었다.[6] 그리고 그는 주전 포수가 바뀐 셈임에도 해태 마운드를 잘 다독이며 1988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팀의 전성기를 이어가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장채근은 해태의 안방마님으로서 에이스 선동열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도합 6번의 한국시리즈 제패(1986~1989년, 1991년, 1993년)의 금자탑을 세우는데 기여한다.[7]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8] 그러나 1993년 이후 기량이 쇠퇴하며 정회열에게 주전 자리를 넘기고[9] 1994년 시즌 중 최해식 + 95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지명권 트레이드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이적, 박경완의 백업포수로 간간히 나오다가 1995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10] 10시즌 동안 타율 0.228, 97홈런, 285타점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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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을 보냈던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11]


3. 지도자 경력[편집]



3.1. 한국프로야구[편집]


은퇴 후 장채근은 1996년 친정팀 해태 타이거즈의 배터리코치[12]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팀이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도 쭉 배터리코치직을 이어오다가 2004~2005년에는 수석코치[13], 2006년 한 해는 일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1년간 코치연수를 받다가 2007년 KIA로 돌아와 육성군 코치를 맡았으나 시즌 후 정재공 단장 및 서정환 감독이 모두 사퇴하면서 그 역시 코치직에서 잘렸고, 친정팀 KIA를 떠났다.

2008년 이광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신생팀인 우리 히어로즈 1군 배터리코치로 영입됐으나[14][15] 1년만에 이광환 감독이 물러나고, 김시진 감독을 비롯한 과거 현대 시절 코칭스태프들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팀을 떠났다.


3.2. 대학야구[편집]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장채근은 2011년 가을부터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다시 야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도 비화가 있는데, 홍익대에서 감독 제안이 들어오자 역시 야인으로 쉬고 있던[16] 선동열에게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고 물었고,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제안을 수락했다. 만일 선동열이 프로팀 감독으로 가면 자신도 당연히 데리고 갈 줄 알고 미리 확인한 것이다. 실제 야구계에서 장채근은 선동열 사단의 일원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런데 홍익대 감독 취임 보름 후, 선동열KIA 타이거즈 감독 부임 발표가 났다. 장채근이 감독으로 간 직후에 KIA 쪽에서 연락이 왔다면서 선동열이 직접 장채근에게 해명을 했다.[17]

홍익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서울대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2주간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게 되는데, 여기서 과거 선수/지도자들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알려줄 말을 남긴다.“내가 그동안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 솔직히 OPS(출루율+장타율)도 몰랐다^^” [18]

십 수 년간 프로에서 코치생활을 한 현직 대학 감독이 고도로 정교한 세이버매트릭스 지표도 아니고, 그 당시 이미 야구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OPS도 몰랐다는 건 국내 야구 지도자들의 통계 야구에 대한 관심이 아직 절박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증.[19] 막상 본인은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높고 장타력이 있었기 때문에 OPS로 보면 '낮은 타율에 홈런만 잘 치는 타자'로 불리던 과거보다 좀 더 고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수였다. 실제로 한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수료했고, '이론 공부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면서, 최근에는 그래도 '안 배우려 하는 지도자들 보다 낫다는 평가'도 받는다.

대학야구 약체팀이었던 홍익대학교를, 2013년 춘계리그 준우승(vs동국대)과 대통령기 준우승(vs 건국대)으로 이끌었으며, 드디어 2014년 하계리그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우승하며 콩라인 탈출에 성공하였다. 하계리그에서는 홍익대의 첫 우승이며, 전국대회 우승으로는 2004년 대통령기 우승(vs 경성대)이후 10년만인 경사였다. 2015년에는 KBO 총재기 대회 결승에서 동국대에게 승리를 거두며, 또 한 번의 우승을 선사했다. 어찌 보면 선배인 선동열을 안 따라간 것[20]이 신의 한수가 된 듯? 장채근 감독의 활약상

201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로팀 감독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관련기사 2016년 하계리그 결승에서 연세대에게 1-3 상황으로 리드 당하는 상황에서 빅 이닝을 만들어냈고, 8-3으로 역전승을 거두며 2년만에 하계리그 패권을 탈환하였다. 2014년부터 3년 연속 우승이며, 부임 이후 3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인터뷰 그리고, 8월에 무등 야구장에서 개최된 대통령기에서 단국대를 제압하고 12년만의 대통령기 우승 및 '16시즌 2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2017년 KBO 드래프트에서 제자 나원탁, 원혁재, 김민섭이 지명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런 성적을 인정받아 2016 WBSC U-23 야구 월드컵에 참가할 대한민국 U-23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대표팀을 대회 3위로 이끌었다. 하지만 임지섭에게 남아공전에서 13개성적표, 다음날 멕시코전에서 75개성적표, 사흘 후 일본전에서 127구를 던지게 하는 등성적표 혹사를 시켜서 비판을 받고 있다.

선수 경력도 화려하고 성품도 모나지 않으며 약체인 홍익대를 대학야구의 명문으로 만들며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고 또 약체인 연령대 대표팀을 이끌며 아시아선수권 3위,하계 유니버시아드 3위, 세계야구선수권 3위를 이뤄내는 등 호성적을 기록하며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하마평이 오르고 있다. 홍익대를 대학야구 강호로 변모시킨 장채근 감독

전임인 이정훈 감독이 선수들을 혹사시키면서 구단들이 선수들을 차출해주지 않으려 해 각 구단들을 설득하느라 진을 뺐다고 한다. 그나마 kt 위즈가 통크게 주전급 자원들인 박세진, 류희운, 정운, 심우준, 정성곤을 차출해줘 한숨을 돌렸다.

창단 이후 2020년도 전국대회 첫 8강, 4강, 결승전 진출에 창단 후 첫 전국대회 우승(황금사자기)을 이끈 김해고등학교 야구부의 박무승 감독이 홍익대 코치 시절 장채근 감독으로부터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았으며 본인의 지도자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3.3. 대표팀 감독 선임 논란[편집]


2018년 8월 엠스플뉴스를 통해 인터뷰를 하였는데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가 사상 처음으로 국가대표 감독을 공개모집하고도 여론의 화살을 맞고 있다. 국가대표 감독 선임 과정에서 불분명한 규정과 오락가락한 말 바꾸기로 스스로 논란을 자초한 탓이다.

즉,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이 대표팀을 맡고 있는데 과정에서 KBSA 임원 세 명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해 특정 감독 후보에겐 최고점을, 다른 감독 후보들에겐 최하점을 주면서 면접 심사 결과가 뒤바뀌어진 사실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밝혀낸 것이다. 즉 편파판정.

여론의 화살은 이제 KBSA 집행부를 향하고 있다. 취재 중 만난 한 아마야구 감독은 “관리단체에서 벗어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KBSA가 다시 ‘과거의 문제투성이 협회’로 회귀했다”며 “현 KBSA 집행부가 모두 옷을 벗든, 뼈를 깎는 반성을 하든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KBSA는 또 한 번 관리단체 신세가 될 게 분명하다”고 일갈했다.

이에 대해 장채근 감독은 “KBSA가 실시한 U-23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 선임에 여러 의혹이 있다"는 동료 감독들의 의견을 종합해 감독들을 대표해 KBSA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KBSA가 말만 ‘공개모집’이지, 실제론 특정인을 염두에 둔 불공정한 선임에 치중했다는 게 많은 아마야구 감독의 공통된 생각"이라며 "지금껏 수십 년간 누적돼온 KBSA의 ‘불공정한 관행’을 뿌리 뽑지 않는 한 아마야구의 미래는 없을 것으로 판단해 내가 총대를 메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논란에서 보듯 왜 아마대회에 매번 프로선수들이 대거 출전하지는 모르겠다”며 “‘병역혜택’를 위해 아마야구를 이용하는 지금 같은 행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또한 스승이었던 김응용 회장에게도 강한 불만을 표했다.

즉 양해영 실무부회장이 KBSA에 있다는 것에 대해 강하게 유감을 표하며 수준행정에 대해 "역시 사람이죠. 전 양해영 전 KBO 사무총장이 왜 지금 KBSA에서 실무 부회장으로 활동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분이 KBO 사무총장일 때 KBO가 어땠습니까. 직원이 입찰 비리를 저지르고, 심판이 구단에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외 얼마나 불공정한 일이 많았어요. 그런 분이 KBSA에서 실무 부회장을 맡아 협회 행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에요. 지금도 어떻게 그분이 아마야구에 오게 됐는지 정말 의아할 따름입니다."

"김용균 사무국장과 양해영 실무 부회장 같은 사람들이죠. 이번 U-23, U-20 감독 선임도 두 사람이 결제라인에 있었어요. 특히나 김 사무국장은 정말 수시로 말을 바꿨어요. 야구인을 하찮게 알아도 이렇게 하찮게 여길 순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에게 현안을 있는 그대로 설명드려야 하는데, 전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봐요."

엠스플인터뷰

두 달 후 2018년 10월 10일 엠스플추적에서 이 사실이 들통났고 즉 밀어붙이기 점수 형식이 탄로났다. 현직 KBSA 임원 세 명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해 특정 감독 후보에겐 최고점을, 다른 감독 후보들에겐 최하점을 주면서 면접 심사 결과가 뒤바뀌어진 사실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밝혀낸 것이다.

보도자료에서 KBSA로부터 제출받은 U-23 감독 선발 과정의 면접 평가표를 검토한 결과 손혜원의원은 “면접 과정에서 특정인 밀어주기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며 “KBSA가 점찍어둔 감독이 있다는 야구계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야구계에선 오래전부터 국가대표 감독 선임 과정에 특정인 개입 의혹과 이권 의혹 등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정성 강화를 위해 시행한 사상 첫 감독 공개채용에서까지 같은 논란이 반복됐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이에 대해 손혜원 의원은 “KBSA는 공개채용 과정에서조차 특정인을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농간을 부린 것으로 보인다”며 “대한체육회와 KBSA는 면접과정에 개입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백히 밝히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엠스플추적

요컨대 장채근 감독이 제기한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졌다.


4. 선수 시절 평가[편집]


포수 리드와 볼배합 측면에서는 당대 1위라 할 수 있고 먼저 주전을 맡고 있던 선배 김무종에게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으며, 수비도 블로킹 능력 (+ 트래쉬 토크) [21]을 제외하면 동 시대의 경쟁자들보다 월등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팀 포수들이 갖기 어려운 강점 2가지가 있었으니,

첫째, 체격.
워낙 체구가 큰 덕분에 장채근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으면 백스톱이 꽉 찬 듯한 인상이 들어 투수들이 마음놓고(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디로 던져도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둘째, 소통.
투수가 최대한 편하게 던질 수 있도록 다독이는데 능하였고, 마운드에서 흔들리는 투수를 특유의 걸직한 입담으로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이렇게 하면 투수 개개인의 특성을 살리는데 매우 유용할 뿐만 아니라, 벤치 및 일상에서의 팀 단합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는 홍익대 야구부 감독시절에도 잘 드러나는데, 4학년 포수가 1학년 투수한테 성질 내고 욕하면, 오히려 포수를 혼냈다고 한다.

타격의 경우, 정확도는 평균 내지 그 이하였다. 통산 .228의 타율과 순출루율은 비교적 높았지만 3할 초반인 출루율은 당시 포수들의 타격능력을 보아도 확실한 우위의 성적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413의 통산 장타율로 이를 만회하였다. 포수로는 그 유명한 이만수 이후에 시즌 20홈런을 2번이상 기록한 두 번째 사례다. 통산 성적으로 봤을 때 그의 공격력은 그리 높게 평가할 순 없지만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의 5시즌 동안은 wRC+ 115로 리그 중상위권의 타자였고 포수로 범위를 좁히면 장채근 보다 더 나은 타격을 보여준 선수는 이만수김동기 뿐이다.[22] 단일 시즌 성적을 보면 가장 좋은 타격을 보였던 1992년엔 wRC+ 143을 기록하며 상위권의 생산력을 보였고 리그 열손가락에 드는 성적을 기록했다. 더불어 규정타석을 채운 포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거구, 한 번씩 날려주는 일발 장타력, 어떤 투수와도 호흡을 맞출 수 있게 하는 푸근함. 이런 독특한 개성으로 타이거즈 전성기의 한축을 담당했기에 해태 타이거즈의 꼬꼬마 팬들이었던 지금의 30대 ~ 40대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일부 타이거즈 팬들이 그를 과대평가하는 주장을 펼쳐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만수와 김동수 사이에 장채근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장채근 전성기 88~92년에 이만수는 계속 포수 보고 있었고[23] 91년까진 매해 규정타석을 채우면서 여전히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타격을 했기에 동기간 장채근이 확실하게 우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으므로 계보에 끼기엔 어려움이 있다. 소속팀의 성적에서는 차이가 크지만 당대 이만수보다는 한수 아래라고 평가되던 김동기와 더불어 2위권으로 평가 받는게 적절하다.[24] 그럼에도 해태 왕조의 대표 포수라는 타이틀이 있기에 섭섭한 평가는 아닐 듯하다.[25]


5. 기타[편집]


  • 해태 입단 초기 동계훈련 때 김응용 감독이 체중을 물었는데, 자신의 진짜 체중은 95kg 였지만 5kg를 줄여 "90kg입니다" 라고 답했다. 이에 김응용은 "한달 줄테니 10kg 빼라"는 지시를 내려 장채근은 한 달 동안 죽어라 고생한 끝에 간신히 5kg를 줄였다. 비록 10kg엔 미치지 못했지만 한 달 만에 5kg를 줄인 게 자신으로서도 뿌듯했던 장채근은 김응용이 다시 체중을 묻자 "옛! 90kg입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김응용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야 임마, 하나도 안 줄였잖아!" 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장채근은 순간 자신이 체중을 속였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 우람한 체구에 비해 의외로 다리가 꽤 가는 편이다.


  •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챙달린 포수헬멧(현재 포수/주루코치 겸용 헬멧)을 착용한 선수였다.

  • 이병훈의 현역 시절 통산 도루 갯수(8개) 중 3개를 허용했다. 한번은 이병훈이 "형, 왜 저 안 잡으셨어요?"라고 물으니 장채근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2루송구할 생각조차 못했다)"라고 했다 한다.[26] 광주에서 열린 올스타전 중계 당시 카메라가 장채근을 비춰주자 현역시절 도루 이야기를 꺼냈으며 이병훈이 왜 도루저지를 하지 않았는지 장채근에게 묻자 장채근은 '느린 것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자'고 했다고 한다.

  • 이병훈이 술회하기를 현역 시절 잠실 원정을 오면 시합 전날 과음으로 LG 트윈스 쪽에 자리를 깔고 앉아 '병훈아~선배 죽겠다. 음료수하고 짬뽕 한 그릇만 갖다 주니라' 말을 했다고 한다. LG 선수들은 우리가 술주정뱅이들이랑 야구를 하네 하면서 웃었다고.[27]

  • 현역 시절 이강철이 자기 피부를 칭찬하며 만져대기 좋아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초 해태 시절 선수단이 무등산에서 야유회를 했을 때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뭔가 수상쩍어보이게 나왔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였다.[28] 그러나 출연 당시 모습을 보면 과거보다 체중이 많이 줄어든 모습으로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거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 해태 타이거즈에서 배터리코치로 활동하던 시절 입단한 투수 김상진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MBC LIFE에서 방영하던 다큐멘터리 '히스토리 후' 김상진 편에 출연해 20살짜리 어린 투수가 항상 잘 웃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서 더 눈이 갔다고. 암에 걸려 목 통증을 호소했을 때도 옆에서 지켜봐주면서 투구폼을 교정해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29]


6.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해태
28
42
.190
8
1
0
2
3
3
0
5
.357
.277
1987
40
77
.208
16
4
0
3
9
5
1
6
.377
.262
1988
107
338
.249
84
16
0
26
(2위)
58
(4위)
51
2
36
.527
(4위)
.321
1989
102
316
.244
77
15
0
10
37
27
0
38
.386
.324
1990
61
192
.224
43
4
0
7
21
21
0
17
.354
.287
1991
114
345
.235
81
11
0
17
48
46
0
46
.414
.322
1992
112
326
.264
86
14
0
23
(5위)
62
59
1
66
.518
.384
1993
67
163
.178
29
4
0
4
20
17
2
31
.276
.30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쌍방울
30
54
.111
6
0
0
1
4
1
0
2
.167
.143
1995
73
126
.175
22
5
0
4
23
7
0
11
.310
.237
KBO 통산
(10시즌)
734
1979
.228
452
74
0
97
285
237
6
258
.413
.316

[1] 단, 호적상으로는 1964년생이다.[2] 2019년 사평면으로 개명 이전, 전직 야구선수 김종모도 남면 출신이다.#[3] 현재는 살이 많이 빠져서 98kg보다는 훨씬 적게 나갈 것으로 보인다.[4] 사실상 김무종의 부상으로 세대교체가 임박했었고 백업을 맞고 있었고 포수 자원 중 가장 기대가 컸던 장채근이 머지 않아 주전을 차지하게 될 것은 기정 사실이었기에 이 사건이 없었어도 주전 자리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긴 했다.[5] 이는 이후 등장한 롯데 자이언츠의 강민호의 스타일과도 유사하다. 장원준에게 "다 받아줄테니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라고 했다고. 그 당시 둘 다 신인이였다.[6] 사실 홈런 개수 대비 타점이 매우 적은 편이다. 하위타순에 주로 들어섰단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장채근이 홈런 쳤을 시 앞 타자들이 출루를 많이 해주지 못한 불운 또한 기인한다.[7] 사실 해태의 길었던 전성기 중 단 한명의 포수, 소위 왕조를 이끌었다는 포수를 뽑긴 애매한 점이 많다. 83, 86, 87 우승 당시의 주전 포수였던 초기 해태의 김무종, 88, 89, 91 우승 당시 주전 포수였던 장채근, 해태가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한 93 우승의 정회열, 96, 97 우승의 최해식까지 특색 있는 각 시기의 포수가 존재했기 때문. 다만 가장 큰 임팩트와 가장 좋은 커리어를 기록한 건 장채근이기에 해태 포수하면 장채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8] 한국시리즈 사상 첫 포수 MVP였다. 이후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25년만에 양의지가 MVP를 수상한다.[9] 다만 정회열도 94 시즌 말에 부상을 입으면서 결국 다시 백업으로 밀려난다.[10] 허구연이 강연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장채근이 최해식에게 밀리자 식칼을 들고 코끼리 감독에게 찾아가는 기행을 보였다고 하는데, 장채근을 밀어낸 것은 정회열이 맞으므로 허구연의 기억에 착오가 있는 모양.[11] 옆에 펑고 배트를 들고 있는 인물은 정영기 코치다.[12] 1996년에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 당시 신참 코칭스태프였다. 선수단의 리더는 장채근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이순철.[13] 이후 시즌 중반 유남호 감독 경질 후 서정환 대행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2군 감독으로 이동했다.[14] 해태 타이거즈 출신인 이순철 수석코치의 추천으로 영입된 듯 하다.[15] 이 당시 강정호의 재능을 대단히 높이 사서, 전문 포수로 나가 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16] 2010 시즌이 끝나고 그룹 인사의 여파로 감독 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학수 전 부회장의 인맥을 쳐내는 과정에서 김응용 사장이 용퇴했고, 김응용의 최측근이던 선동열도 같이 물러나게 된 것.[17] 그리고 선동열은 삼성 1군에 있던 정회열을 배터리 코치로 영입한다. 정회열은 김성한 해임 이후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재계약에 실패하여 야인이 되었으며, 선동열이 삼성 감독으로 있던 시절에 함께했다.[18] 이 발언 자체는 '세이버 매트릭스'에 '구시대 야구인들이 어둡다라는 반증'이 되지만, 장채근의 경우에는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빠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당장 그 시절 야구인들 치고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인물 자체가 드물다. 이순철도 해설자로서 롱런중이지만, 자신의 흠결을 쉬이 드러내는 편이 아닌지라..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까지 했었던 박흥식의 경우에도 그 연배 야구인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인 야구인이지만, 정작 현대 야구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이 난 것을 고려해보면, 장채근의 케이스는 오히려 오픈마인드를 높게 평가하여 프로야구로 넘어와야만 하는 인재가 아닌가 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의견도 실제로 프로야구로 넘어오게 되면 완전히 뒤엎어질 수도 있다.[19] 뭐 애초에 베이스볼 아카데미가 그런 거 바로 잡으려고 만들어진 것이긴 하다. 앞으로는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수료해서 통과하지 못하면 지도자 라이센스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여담으로 이 서울대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총책임자는 이광환이다. 장채근을 히어로즈 시절 코치로 쓴 인물이니 이제 공부시킨 것.[20] 특히 선동열은 KIA 감독 시절에 588이라는 성적을 냈다.[21] 한국시리즈에서 홈으로 쇄도한 주자를 잡으며 구수한 사투리 억양으로 "아따 아그야, 니가 살았을 것 같냐?"고 약 올리기도 했다.[22] 1990년엔 장염 증세로, 당시 신인이었던 정회열이 주전 역할을 하긴 했다.[23] 이만수는 1992년까지 주전포수였다. 노쇠화로 인해 이만수 - 김성현 - 박선일이 플래툰으로 출전하게 되는 1993년부터 주전포수에서 물러났고 백업포수, 지명타자, 1루수, 대타요원 등으로 골고루 나오게 된다.[24] 어디까지나 전성기 5년 기준이다. 통산으로 따지면 데뷔시즌부터 꾸준했던 김동기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wRC+는 20, WAR은 2배 이상 김동기가 앞선다.[25] 장채근은 짧은 전성기, 통산 성적 등으로 인해 유명세에 비해 선수로서의 순수 평가는 높지 못하다. 다만 80~90년대를 주름잡았던 해태의 포수들(김무종-장채근-정회열-최해식)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성적, 유명세를 보여주었고, 해태의 최전성기와 후기 전성기를 이어주는 위치를 고려한다면, 해태 왕조를 대표하는 포수로 첫손에 뽑힌다. 김무종과 함께 투톱이지만, 한명을 뽑는다면 장채근을 뽑는다.[26] 2004년 MBC 일밤 브레인 서바이벌에 출연한 이병훈이 직접 언급한 내용.[27] 송유석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히길 해태 선수들은 서울 원정을 유독 좋아했는데 서울에 해태 선수들의 지인,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서울 원정경기에서 패배하면 그 날은 숙소 바깥으로 외출 금지령이 떨어져서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술 마신 다음날 쓰린 속을 달래려 선수들은 덕아웃으로 짬뽕을 시켜먹었고 김응용 감독은 말없이 지켜봤다.경기 제대로 못하면 보자[28] 이상군도 중간에 합류했으며 대학 동기 한희민은 전화통화로 출연했다.[29] 막판 김상진의 죽음이 언급되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끼던 제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굉장히 슬퍼했고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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