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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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군인. 본명은 김병원(金秉元). 그래서 김병원으로 쳐도 리다이렉트되어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흔히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로 불린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921년 3월 10일 평안북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 430번지(現 평안북도 룡천군 학흥리)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주오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던 도중 1944년 1월,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강소성 서주시(徐州市)에서 탈영해 그해 5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했다. 사실 이전에 한 번 탈출하다 걸려 체포되어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학병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로 면죄하여 그가 충실한 황군이 되기를 바랬으나, 장철부는 재차 탈영해 버렸다. 이후 한국광복군에서 항일유격대장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장철부로 개명했고, 1945년 강홍모, 이건국, 김중진 등과 함께 김구의 추천을 받아 중화민국 군관학교 기병과에 20기로 입학해 1947년 졸업했다. 귀국 후 1947년 10월 23일 육군사관학교에 5기로 입교해 1948년 4월 6일 장교로 임관했다. 중대장과 전술학 교관 등을 거쳐 1948년 12월 10일 기존의 제1보병연대 예하 수색단이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 독립기갑연대로 개편되자, 과거 중화민국 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한 이력으로 독립기갑연대 휘하 제2기마수색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당시 북한의 막강한 기갑 전력에 일선 보병들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기갑연대의 주력인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들이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하나씩 손·망실되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철부 휘하의 기병부대가 기갑연대의 핵심이 되었고, 후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기병의 기동력과 돌파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지연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전후 생존한 기병부대 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휘해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켰으며, 말로 운반한 기관총과 박격포로 적을 타격하면서 적의 화력, 위치도 알아냈다고 한다.[1]
이외에도 휘하 기병을 드라군처럼 운용하는 것 외에도 과감한 기병 돌격[2] 도 시켰는데, 6월 29일 조선인민군 소대가 거룻배로 몰래 도하해오자 돌격해서 섬멸하기도 했고, 7월 2일부터 7월 4일까지 경기도 과천군에서 조선인민군 선견대(先遣隊)를 공격해 인민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도 했다. 또한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정찰 경계 임무를 맡을 때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 예하 1개 대대와 마주치자, 기습 돌격으로 섬멸시키고 적 대대장의 차량을 노획했다고 한다.
특히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에서 7월 14일 미군 제63포병대대 소속의 B포대가 약 400여명의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그가 지휘하는(직접 현장 지휘는 아님) 기병중대가 적의 배후를 타격, 미군의 탈출을 도왔으며 이 전공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1)에서 기병중대의 소대장이었던 조철돈 소위의 증언 형식으로 그리고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가 1961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 128)와 T. R. 페렌바크가 저술한 미국의 유명한 한국전쟁 역사책인 This kind of War에도 기술되어 있다.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471) - 조철돈 소위 증언 원문 발췌
"우리 중대가 유구전투(평택―조치원 부근의 전투 참조)를 치르고 공주로 복귀하다 보니 12일 밤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공주의 금강교가 끊어진 다음이었다. 그래서 금강 서안을 따라 밤중으로 말을 달려 그 이튿날 13일 아침에 부여대안에 도착, 그곳에서 배를 구하여 부여로 도하하였다. 부여에서 공주로 가다가 지석리(부여 동북쪽 7.5km) 부근에서 하안정찰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미군 6명을 만나 함께 삼교리로 갔다. 그곳에 포진지가 있었고, 서쪽 강변에는 미군수색중대와 공주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중대는 우금치(삼교리 동북쪽 1.8km) 남쪽에 중대본부를 두고, 우금치 서쪽 고지에 경계병력을 배치하였다."
"14일, 중대본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고개 서쪽 고지에서 사격이 가해져서, 급히 달려가보니 적이었다. 그 고지의 적을 무찔렀는데 그 동안에 삼교리의 포병진지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포대를 구출하려고 달려갔으나, 이미 포대가 수라장이 된 뒤여서 적의 등을 찔러 포대와 합세를 하였을 뿐 적을 격퇴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포대와 함께 그곳에서 철수하게 되고말았는데, 105mm곡사포 5문인가 모두 공이를 뽑아 파괴하였다. 중대의 말(馬)에 미군 부상병을 싣고, 우리 병사들은 걸어서 동쪽의 논산도로로 빠졌는데, 도로에 나오니 미군차량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을 후송해 갔다. 중대는 논산으로 집결하여 그날 밤을 보낸 뒤, 그곳에서부터 미 제34연대의 지휘를 벗어나, 15일 여산―전주로 내려가,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의 장악하에 들게 되었다."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ul' (p. 128) 원문 발췌
"A group of South Korean carvalry rode past the battery and attacked west toward the enemy, but the confusion was so great that no one in the artillery position seemed to know what happened as a result of this intervention"
* T. R. 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 원문 발췌
"Next, it was B Battery's turn. Four hundred enemy infantry surrounded the battery area, and for several minutes something akin to Custer's last stand was repeated. Then, while a group of ROK horse cavalry, who had ridden out of nowhere to attack the enemy, slashed into the North Koreans on the west, the artillerymen went march order."
7월 15일에는 미 제24사단 제34연대 제3대대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자 심야의 폭우를 무릅쓰고 후방을 기습, 이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병부대는 고급 병과였기 때문에 신병 충원[3] 이나 보급[4] 이 어려웠기에 전투를 계속하면서 전력이 계속 감소했고, 낙동강 전선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보기는 커녕 전투 경험도 제대로 없는 전투 경찰들로 충원되었다. 여기에 기존 기병대 장병들도 대부분 말을 잃어 보병이나 마찬가지였다.
8월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오진우가 이끄는 조선인민군 12사단 766여단[5] 과 조우했는데 이때 장철부 가 직접 야간 정찰을 나갔다 오곤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을 이끌고 신출귀몰 적진을 쑤시고 다니는 한편, 적의 사단 사령부를 야습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청송 전투 중 독이 바싹 오른 인민군 3000여 명의 대규모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다[6] 야간에 기습한 적을 뿌리치고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지만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장철부는 적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1950년 8월 4일 권총으로 자결해, 굵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자결 직전에 남긴 유언은 포로가 되는 수치와 불명예 대신에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 였다고 한다.
당시 장철부의 부대와 교전했던 조선인민군 12사단 766여단은 끊임없이 투항 권유를 했고, 최후에 포위를 한 상태에서도 중국어 무전을 보냈는데, 왜 중국어였냐면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766여단은 해방 전 중국에서 조선의용군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었다. 중국어 무전을 통해 중국에서 독립운동했던 동지였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장철부는 이들의 유혹을 끝내 뿌리쳤으나, 한때의 동지들과 싸워야 했던 비극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전 서울국제교류센터 이사장 방자명(1924 ~ 1999. 12. 26)[7] 이 증언하기로 당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던 8월 1일 전야에 체념하고 있다가 장철부 대대장에게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는 저승에서 다시 전우들과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장철부 대대장은 눈을 감은 채 한참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이 말에 방자명은 "우리는 죽어서 다시 만나게 되겠군요. 저승에서 대대장님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는 안심하고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8월 5일 그는 장철부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몹시 애석해 했다."나는 특별한 종교도 없고 철학적 해석도 잘 모르나 저 질서 정연한 천체의 운행과 인간 정신의 오묘함과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특성으로 봐서 절대자의 존재와 무한한 생명력과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
장철부의 전사 이후 일부 잔여 기병들이 북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1.4 후퇴 이후 미군의 지원으로 기계화가 되면서 남은 말들은 경찰로 인계되었고 기병부대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장철부와 기 부대원들의 영웅적인 분전과 용맹은 전쟁 초기 연패하던 국군과 미군 장병들에게 감동과 투지를 심어주었다.
전사 후에는 화랑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해 육군 중령으로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2002년까지 국립서울현충원 장교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었다.[8] 이후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에는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동년 6월 호국 인물로 선정, 이후 8월 12일에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으로 이장되었다.
2017년 3월 17일에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인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도서출판 다물 아사달, 김선덕 저)가 출간되었다.[9]
2020년 6월 호국인물로 다시한번 선정되었다. 그 덕분인지 끝없이 가는 길 -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 중령의 생애 라는 책도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