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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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명나라 말기의 민란 지도자이자 대서(大西)의 유일한 황제로 이자성의 세력과 쌍벽을 이뤘다. 한자로는 張獻忠, 표준중국어 발음으로는 장셴중 (Zhang Xianzhong[1] , Chang Hsien-chung[2] )
도교의 신이자 원나라 황실에게도 숭배받은 문창제군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그를 태조(太祖)로 추존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1606년 9월 18일 섬서성 연안부(延安府) 정변현(定邊縣) 유수간보(柳樹澗堡)[3] 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대추를 판매하는 작은 장사를 했다. 어려서 독학하다가 입대해 연안부의 포졸이 되었으나 모종의 일에 연루되어 파면당했다. 이후 연수진(延綏鎭)[4] 에 들어가 국경을 지키는 병졸이 되었다가 범죄를 저질러 참수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당시 주장(主將)이었던 진홍범(陳洪範)이 장헌충의 용모를 보고는 기이하게 생각하고는 당시 총병으로 있던 왕위(王威)에게 호소해 죽음만은 면하고 곤장 100대를 맞은 뒤 군대에서 쫓겨났다.
1630년에는 고향 유수간보에서 18개 마을의 농민들을 끌어 모아서 반란군을 일으키고, 왕가윤(王嘉胤) 등이 일으킨 반란에 호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팔대왕(八大王)이라고 칭했다. 1631년 왕가윤이 부하 장립위(張立位)·왕국충(王國忠) 등에게 살해당한 뒤에는 왕자용(王自用)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36영(營) 중 한 영을 이뤘다. 이후 섬서성·산서성·하남성·안휘성·호북성·사천성 등지를 전전하며 전공을 세웠다. 1633년 겨울에는 황하를 건너 남하하여 고영상(高迎祥)에 휘하에 들어갔고, 고영상이 이끄는 13가 중 하나가 되었다.
1634년에는 사천성으로 들어가 기주부(夔州府)[5] 를 공격해 함락하고, 태평현(太平縣)[6] 으로 진군해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진양옥 총병이 이끄는 백간병(白杆兵)을 만나 접전했으나 패배하고 호광(湖廣)으로 도주했다. 1635년에는 하남성에서 관군을 맞아 고전하다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었고, 여령부(汝寧府) 고시현(固始縣)[7] 과 봉양부(鳳陽府) 태주(泰州) 곽구현(霍丘縣)[8] 등을 연이어 격파했다.
이후 화북지방의 봉양부를 포위해 반나절만에 봉양부를 지키던 관군 2만명을 모조리 섬멸했고, 주국정(朱國正) 등의 장수들을 사살하는가 하면, 지부(知府) 안용훤(顔容暄)을 포로로 잡은 뒤 백성들의 앞에서 그의 죄상을 낱낱이 알린 뒤 처형했다. 그리고 전리품과 창고에 있던 식량들을 모두 봉양부에 살던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고, 봉양부와 근처 네 개 향(鄕)의 백성들을 소집해 황릉 주변에 심어 놓은 소나무·잣나무 수십만 그루를 모두 베어 버리게 했고, 또한 주변의 건축물들과 주원장이 출가해 승려로 생활하던 용흥사(龍興寺) 등을 철거하도록 했다. 이어 명나라 황제들의 선조 무덤들을 파헤치고 봉양부에 살던 부자들을 모조리 끌어내 살해했다.
이후 계속 남하하여 여주부(廬州府)[9] 와 안경부(安慶府)[10] , 화주(和州)[11] , 저주(滁州)[12] 를 격파해 함락하고 장강을 따라 인근 고을들을 모두 조리돌린 뒤 의진현(儀眞縣)[13] 에 도착했다. 이후 군대를 돌려 서쪽을 향해 영산현(英山縣)[14] 과 여주부 곽산현(霍山縣)[15] 을 거쳐 호광 마성현(麻城縣)[16] 를 점령하고 장순주(長順州)로 개칭했다. 이어 호북성에서 하남성을 거쳐 다시 관중 지방으로 복귀했다. 이때 병부상서 홍승주가 이끄는 관군을 만나 몇 차례 전투를 벌였고, 애만년(艾萬年)·조문조(曹文詔) 등 홍승주 휘하 장수들을 사로잡아 참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636년 초에 이르러 장헌충의 휘하 장병들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해 9월 고영상이 관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능지처사당했다. 이후 이자성이 동관현(潼關縣)[17] 서부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자 장헌충은 동관현 동쪽 지역의 관군들을 주요 공격 목표로 삼고, 섬서성, 하남성, 안휘성을 전전하며 수 차례 관군에 맞서 승리를 거뒀다. 하남을 공격할 때 개봉부(開封府) 허주(許州)[18] 를 점령하고 좌량옥(左良玉)의 형을 죽였다. 이듬해인 1637년 3월에는 안경부에서 관군과 격전 중에 반가대(潘可大) 등 명나라 장수를 쏘아 죽였다.
1640년에는 포위망을 피해서 사천으로 후퇴하고, 1644년 쓰촨(사천)을 근거지로 대서(大西)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지만 1647년 1월 2일 사천성 순경부(順慶府) 서충현(西充縣) 봉황산(鳳凰山)[19] 에서 청나라 화석숙친왕(和碩肅親王)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헌충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4명의 부하들인 손가망(孫可望 ?~1660년), 이정국(李定國 1621~1665년), 유문수(劉文秀 ?~1658년), 애능기(艾能奇 ?~1647년)을 양자로 들여 자신의 성씨도 주었다. 이 넷은 장헌충 사후 손가망을 필두로 운남과 귀주로 근거지를 옮겼고 애능기가 일찍 죽은 이후 남명 정권에 투항하여 청나라에 맞서 싸우다 죽었다.[20]
3. 사천 대학살[편집]
도촉(屠蜀)이라고도 한다. 청군이 이자성을 격파하고 근거지인 사천을 압박해오자 사천 지방에서 그야말로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살인극을 벌여 중국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살인마로 기록된다.[21]
이때의 학살이 워낙 심하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고 이 줄어든 인구를 벌충하기 위해 청나라 때 후베이성, 광둥성 등 다른 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 결과 기존에 파촉 지역에서 쓰이던 언어(일명 파촉어)가 절멸하였고 사천성은 분지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관화(만다린)를 쓰는 지역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장헌충을 섬겼으며 대서 정권의 붕괴까지 모두 목격했던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가브리엘 드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āes, 중국명 안문사安文思)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1647년 5월 18일자 『사천 성과 그리스도 교회의 파괴와 손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 땅에서 루이스 브리오와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가 연금의 신세가 된 것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22] 증거도 존재하므로 아직 장헌충이 누명을 썼다는 주장을 완전히 정설로 받아들이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이 사료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장헌충이 사천의 성도인 성도에서 대량학살을 저지른건 맞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이 정도의 대량학살을 저질렀는지는 조사가 더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번역된 사료다.
폭군(장헌충)은 곧바로 그 크고 인구도 많은 도시(성도)를 원주민이 없는 무인지경의 고립 상태로 바꿔버렸다. 주변을 감싸고 돌던 강은 붉게 물들어 마치 물이 아니라 피 같았다. 게다가 시체로 가득 차서 바다까지 흘러들어, 아주 수량이 많은 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항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강에 인접한 도시와 마을은 이런 잔학함에 겁을 먹었고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
주목할 것은 이 폭군이 관리 및 이들에 관한 다양한 사항과, 생원 칭호에 관한 모든 사항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이다. 이 계모와 같은 사악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는 공적인 포고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대대적으로 과거를 열어 그의 궁궐과 왕국을 맡을 사람들을 뽑고 싶으니, 과거를 준비하는 자이거나 이미 관직을 맡고 있는 자이거나 관계없이 모든 거인(擧人)과 모든 생원은 수도의 궁정으로 와야 한다." 이 사람들은 이에 매혹되었고, 관리의 명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이 폭군이 지식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처형과 잔학한 행위를 알고 있었음에도, 모두 그에게 복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붓이 아닌 칼을, 먹이 아닌 그들의 피를 주었다. 그들에 대한 불신으로 그들을 '그릇된 사상의 소유자'라 불렀으며,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고 총 1만 3천 명을 참수하였다.
(...)
폭군은 자신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떠났고 어른도 아이도, 소년도 노인도 죽였다. 그는 도시와 거리와 마을을 모두 태워버렸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단 한 채도 남지 않았다.
(...)
1년 후 우리가 타타르인(청 왕조의 관리)과 함께 돌아왔을 때 사천 성의 여러 땅을 다녀보니, 그곳은 한때 사람이 거주하던 땅이 아니라 이미 야생 숲으로 변하여, 사람이라기보다는 호랑이나 다른 맹수의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였다.
다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선교사는 연금되어 있었고 기행담이 으레 그렇듯이 과장이 섞여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하는 것을 염두에 두자.
이 외에도 장헌충이 사람을 죽이고 글을 지어 새겼다는 비석, 일명 '칠살비'에 대한 설화도 있는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生萬物以養人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人無一德以報天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殺殺殺殺殺殺殺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장헌충, 칠살비문(七殺碑文)
3.1. 학살에 대한 의문 제기[편집]
20세기에 청나라가 망하면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사천의 대학살은 장헌충의 짓이 아니고 청나라 군대가 한 일이며 이 학살이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청나라 조정이 모든 책임을 장헌충에게 돌렸을 뿐, 장헌충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야기 중국사를 쓴 역사 소설가 진순신 등의 인물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선 리그베다 위키를 위주로 이러한 반박이 퍼져나갔다.[23]
우선 역사서에 기록된 글들이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도 당시 실정과 맞지 않다, 오늘날 장헌충이 가진 '피에 미친 마왕, 악마' 이미지 형성엔 명사 장헌충전이 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기록은 농민 반란세력을 폄훼하기 위한 청 조정, 농민 반란군에 가족을 잃은 명나라의 학자, 관리들의 기록이 거의 전부를 자치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한 악행묘사의 근거가 촉벽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근거가 빈약한 책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장헌충의 학살자 이미지에 반박하는 측에 따르면, 장헌충의 모토는 바로 '탐관은 죽일 뿐, 순민(順民)은 건드리지 않는다' 였다고 한다. 확실히 장헌충은 농민봉기 세력이였고, 농민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황족, 귀족, 호족 세력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중경, 상양, 성도를 함락하면서 양왕 주익명, 촉왕 주지주를 비롯한 황족들은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성도를 점령한 후에는 사천의 호족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서양 선교사의 기록에도 교차 검증되는 부분이라 사실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백성들에게는 매우 관대했다. 대서국을 세운 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고, 특히 3년 동안 군대가 쓸 전량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사천에 진입하고 죽은 년도를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장헌충은 파촉지방을 약탈하거나 징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사천을 근거로 힘을 키우기 위해 주력했고, 그 일환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관청이나 지방호족들이 빼앗은 땅은 모두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장헌충이 죽자 사천의 주민들은 장헌충을 기리면서 장헌충의 소상을 세웠고, 청나라 조정이 이를 무너뜨리자 주민들은 계속해서 다시 세웠다고한다. 그 뿐만 아니라 파촉의 21개 주현이 스스로 장헌충에게 귀순했다고 하는데, 이는 장헌충의 기존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촉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학살한 장헌충을 기릴 이유가 전혀 없을 뿐더러, 파촉 지역이 완전히 황폐화되어서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말과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천의 사족들이 다 죽은 것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재동은 장헌충 지지가 컸던 지역이라 후대에도 장헌충의 제사를 지냈는데 장헌충에게 해를 입은 사천 사족들의 후손들이 화를 내면서 재동의 장헌충 제사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들이 정말로 다 죽었으면 이들이 장헌충에 대해 분노하면서 비난한 기록이 남아 있었을리가 없을 것이다.
장헌충이 사천인들을 모조리 죽여서 사천어가 바뀌었다는 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대에 사천성에 쓰이던 언어가 어떠한 언어였을지는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관화 계열에 속했는지, 여느 중국어의 방언들처럼 한장어족에 속하지만 관화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별개의 언어였을 지는 현재로서는 상상의 영역이다. 또한 현재의 사천 관화도 말만 만다린 계열에 속할 뿐이지 베이징 방언을 기반으로 한 표준중국어와는 꽤 이질적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표준중국어만을 쓸 것을 강요하자 쓰촨어를 없애고 있다는 비판이 올라오고 있을 정도다.
게다가 전근대의 군대는 군기를 엄정히 잡고 백성들에게 갈 피해를 막으려고 들지 않으면 약탈이나 살인 등이 비일비재했고, 따라서 백성들이 군대가 오는 걸 극도로 꺼렸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장헌충이 민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장헌충의 군대가 백성들의 호감을 살 정도로 민폐를 적게 끼쳤고, 이는 장헌충이 군기를 엄정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장헌충은 인재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2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를 계속해서 실시했고, 학당을 건립해 자주 시찰했다. 과거 합격자들은 주현의 책임자나 보좌진으로 썼다. 명나라 관리라 해도 탐관은 죽이되 순관이나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중용했다. 위의 민심을 사기 위한 행보들과 결합해서 보면, 장헌충은 진지하게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그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시사하는데, 이 또한 기존의 장헌충의 학살마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는다.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고자 하는 행동과 그 기반이 될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것은 모순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24]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장헌충이 죽자 그의 군대는 사천 주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청나라와 싸웠고, 청나라는 장헌충이 죽은지 13년이 지나서야 사천지역을 온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이는 역사책대로 장헌충이 거의 백만 가까운 군대를 죽였다거나, 사천 주민들을 도륙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자기 고향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대학살마의 무리를 따르면서 장헌충군보다 더 강하고 자신들에게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은 청나라군과 맞서 싸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헌충의 사인이 수도 중경이 아닌 곳에서 청군과 맞서다 전사한 것임에서 알 수 있듯이, 장헌충은 청나라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한 이전부터 농민봉기군으로써 명나라군에 맞서서 명군을 여러번 무찌르기도 했고, 사천으로 도망가서도 여러번 명군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가로이 옥좌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량으로 죽일 시간이 있었고, 당장 한 사람이 급한 판국에 사람들을, 그것도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어줄 일반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재미삼아 죽였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크다. 만약 장헌충이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학살을 일삼는 광인이였다면, 상식적으로 이런 난세에 제대로된 세력을 만들고, 근거지인 산서성에서 패배해서 쫓기면서도 사천지방이라는 큰 지방을 차지하고 나름 나라꼴을 갖추고,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과 쌍벽을 이루는 군벌로 성장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저항한 명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전적이 있는 청나라군에게 학살을 할 동기가 있었으면 있었지, 거사 초기 촉에서 관료층 등의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의 행적을 볼 때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청군에 격렬하게 대항하다 전사한 장헌충에게는 사람들을 학살할 동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장헌충이 입촉한 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장헌충은 대략 5-6년을 파촉에서 보냈는데, 청나라와 싸우면서 5-6년만에 파촉에서 그러한 대학살을 하는 것은 전근대의 기술력 등을 생각하면 무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쓰촨 고유의 문화나 언어는 아주 멀쩡하게 존재하고, 사천 지방은 지방색이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 장헌충이 사람을 마구 죽여서 사천 문화가 없어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칠살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실제로 사천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문제의 세번째 줄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한다.
天生萬物以養人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人無一德以報天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鬼神明明自思自量 신령은 다 알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보고 반성하라.
하지만 당시 청나라 정권에 의해 진실이 전부 가려지고 사실이 조작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의견도 엄연히 존재한다. 당시 청나라가 학살을 벌였던 양주(揚州)나 가정(嘉定)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은 생존자에 의해 당시의 일을 기록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나 가정도성기략(嘉定屠城紀略) 같은 책이 은밀히 나돌기도 했고, 이 책들은 청나라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상당히 지독했던 청나라의 문자의 옥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남아 있는데 비해서, 당시 사천의 대학살을 청군의 행위라고 적은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물 출토 결과 청나라군이 쓴, 청군이 학살을 했다는 내용의 고시가 출토되는 등 청나라에 의한 학살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또한 당시에는 반청 지식인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청에 대한 가짜 정보나 루머까지도 양산하던 시절인데, 사천의 생존자들로부터 실제 학살자가 청나라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마땅히 남아있을 청군이 사천인들을 학살했다는 기록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반청 지식인층들은 주로 명나라의 관료층이거나 호족과 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반란군이고 관료층이나 호족을 상당히 죽인 전적이 있는 장헌충을 좋게 봐줄 이유가 없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또 장헌충 학살 관련 사료에서 과장된 부분(6억 학살 등)이 있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일지라도, 장헌충이 저지른 학살이 전부 거짓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또한 설령 청나라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장헌충이 사천에서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염두에 두자. 위에서 언급했듯이, 장헌충의 학살을 반박하는 측에서도 청나라가 자신의 학살을 장헌충에게 뒤집어씌우고 과장한 부분은 있지만 장헌충 역시 촉에서 학살을 저지르긴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천의 도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今统以十分而论之,其死于献贼之屠戮者三,其死于摇黄之掳掠者二,因乱而相残杀者又二,饥而死者及二,其一则死于病也。
지금 10으로 나누어 그(도촉)를 논해보자면, 헌적(장헌충)의 도륙으로 인한 죽음이 3할이고, 요황(십삼가)의 겁략으로 인한 죽음이 2할이고, 난으로 인해 서로 잔륙하고 죽인 것(장헌충 사후 손가망 등 사천성의 명나라 계열 군벌들의 혼전)이 또 2할이고, 기아로 인해 죽은 것이 2할에 미치고, 그 (나머지) 1할은 즉 병으로 죽은 것이다.
장랑, 《신여록》
결국 장헌충이나 청나라 둘 모두가 사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명말청초 이후 사천의 인구가 학살, 기근, 타지역으로의 유출 등으로 크게 줄었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학살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고, (인구의 대부분이 호구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해도) 명말청초 이후 사천의 인구가 대폭 감소한 것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내리기가 어렵다.
3.2. 영향[편집]
만력 6년(1578)
사천 인구 318만 2073명(26만 2694호)
-《명회요(明會要)》
강희 24년(1685)
사천 인구 1만 8090명
-《사천도지(四川道志)》
장헌충이 사천성에서 시행한 학살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명청교체기의 혼란에서 사천성이 입은 인적 피해는 막심했다. 난세가 이어진데다가 16년이나 청나라에 맞서 싸우고, 다시 청나라의 학살이 겹쳐서 당시 기록에는 이전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비옥한 사천 지방에서 수백 리를 가도 인적을 찾을 수 없고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으며 사람살던 고을이 텅비어 개 짖는 소리나 닭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심한 경우 사천의 인구가 1~2% 밖에 남지 않았다는 추산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이렇게 인구가 줄었다기보다는 오랜 전쟁으로 호구에 잡히는 인구 수가 급감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물론 사천의 사람들이 장헌충에게 많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헌자료들만이라도 꼼꼼히 대조하고 분석해 보면 명말청초 사천사회가 입은 피해의 정도가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피해 정도가 과장된 것은 청조의 고의적인 왜곡 때문이 아니다. 청조는 정복 사업이 막바지에 이른 순치 18년(1661)에 전국의 토지와 인구를 파악했다. 당시 청조는 서남부에 치우친 사천 지방을 자신의 영역 안에 거의 편입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장악한 극히 일부 지방의 수치를 사천의 수치로 기록했다. 이를 사천 전체의 수치로 오해한 청대의 지배층이나 현재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주요한 근거의 하나로 삼아 도촉(屠蜀)의 심각한 피해상황을 강조했고 도살자 장헌충의 상을 만들어 내었다.[25]
청나라는 황무지가 된 사천에 사천과 가까운 호북성이나 광둥성, 북경의 백성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켰다.[26] 이를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고 한다. 이때 이주한 사람들은 역사상의 다른 강제 이주와 달리 상당히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장헌충 집단이나 청나라가 사람만 죽였을 뿐,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아서 집이나 가재도구, 조금 황폐해지긴 했지만 잘 정비된 농지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른 강제 이주 같은 초기 고생이 굉장히 적었다고 한다. 그냥 그해 먹을 식량과 종자만 가져가서 주인이 죽고 없는 빈집에 들어가 남아있는 농기구로 공짜로 분배된 농지에 농사만 지으면 된다고 할 수준이었다고 한다.[27]
일설에는 이 무렵의 학살로 고대 사천인(파촉인)은 멸족했다는 주장까지 있다...만 장헌충이 사천에 머문 기간이나 사천문화가 지방색이 상당히 강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쓰촨어 등의 존재를 고려하면 이는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천 지방에 화북의 문물이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서 사천 지방의 문물이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덤으로 사천 요리에도 나와있다시피 원래 사천 요리는 꿀과 엿을 많이 쓰는 단맛 요리 위주였는데 학살로 호북성, 호남성 남부를 비롯한 타지역 백성들의 반강제적 이주하면서 오늘날 알고 있는 향신료를 많이 쓰는 매운 요리 위주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다.[28]
4. 사천지방 장헌충 전설[편집]
어쨌든 이렇게 사천에서 흉명을 떨친 장헌충은 이후 이 시기를 겪고 살아남은 사천 주민들에게 역설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장헌충을 증오하는 사족들이나 그를 추앙했던 평민들이나, 사천인들이 장원충에 대해서, 학살자라던지 정의를 구현한 심판자라던지 인상 깊은 전설들을 남겼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장헌충이 활동하던 그 시기를 기억하는 사천인들이 그만큼 많았으며 장헌충이 수많은 곳에서 대량 학살을 하긴 했으되 사천문화와 사천인들을 진정으로 절멸시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장헌충은 사천지역에서 도촉(屠蜀)을 벌인, 피에 굶주린 도살자로 묘사된다. 살육자라는 장헌충의 이미지는 완전히 날조된 것은 아니고, 당시의 문헌 기록에서도 상당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1차 사료에서 2차, 3차 사료, 그리고 최종단계인 명사로 가면서, 점차 장헌충의 살육 묘사가 무자비해지는 경향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장헌충 연구에서는 도촉(屠蜀)을 소극적으로 부정하거나, 민간전설을 연구하면서 문헌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 방향의 자료를 탐색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4.1. 장헌충의 출생과 어린시절 전설[편집]
사천의 민간구전전설에서 장헌충은 여러가지 면모를 보이는데, 지역적으로 주로 사천성 북부 서충현(西充縣)이나, 서북부 재동현(梓潼縣)에서 생애 전설이 집중적으로 유포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헌충 생애 전설의 내용으로는 하늘의 연자성(燕子星)이 하범한 인물이라는 신이로운 내용의 출생 전설이 있다. 옥황대제(玉皇大帝)가 권선징악을 하고, 부자를 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세상에 연자성을 내려보낸 것이다.
그런데 사천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인물이 왜 섬서성에 태어났는가 하면, 남해관음성모가 토지신이 올린 보고를 보고, 섬서성 연안부 연자암의 가난한 백성인 장문흥의 아내가 곧 해산하려 하니, 그곳으로 보내서 천명을 완수케 하는게 좋겠다고 상주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옥황대제, 남해관음성모, 토지신 등의 신격을 동원하여 해명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장헌충이 태어나자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고 벼락이 치면서, 장헌충이라는 이름을 적은 쪽지가 집 앞을 지나던 화상에게 떨어졌다. 화상은 종이를 부친에게 건네주면서, 이 아이는 하늘의 별자리가 하범한 것이므로,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탐관오리를 죽일 것이라고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부모를 잃은 장헌충이 서충현의 부자집에서 목동으로 일할 때, 관상가가 얼굴을 보고서 천자가 될 상이라고 절했다는 전설, 어렸을 때 친구들과 황제에게 절하기 놀이를 할 때, 장헌충 혼자만이 보좌에 앉아서 절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4.2. 은혜를 갚은 장헌충 전설[편집]
이렇게 비범한 출생 전설이 있지만, 성장 전설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범하였다. 공부보다는 글을 배우면서 스승의 말은 귀담이 듣지 않았다거나, 무술을 익히고 싸움하는걸 좋아했다거나, 지주의 아이를 때려서 서당에서 쫓겨났다거나, 아버지와 사천에서 대추장사를 했거나, 장사치를 따라서 사천을 떠돌았다는 전설이 있다. 사천에서 장사를 할 때는 모욕을 받아서, 훗날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천성의 서부 성도, 동부의 충칭 지역에서는 장헌충과 관련이 있는 절기·지명 유례가 전설도 있다. 단오절에 관련된 내용으로는, 장헌충이 사천성에서 죽은 오빠와 올케가 남긴 조카를 업어주고, 자기가 낳은 아이는 걷게 하면서 피난을 가는 착한 여인을 만나자, 자신의 군대가 악인들을 죽일 때, 쑥(혹은 창포)를 집 밖에 걸어서 죽음을 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착한 여자는 이웃 사람들에게도 사실을 알려줘서, 이웃들도 모두 참화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날이 마침 단오절이라, 이것이 단오절에 대문이나 벽에다가 쑥을 내걸게 된 유래라고 전설은 언급한다. 단오절에 쑥을 문 밖에 내거는 풍습은 질병을 막는 쑥의 기운으로 액막이를 하는 주술적 행위로서, 이미 위진남북조시대에도 언급될 정도로 연원이 오래됐고 중국 전역에 퍼져 있기 때문에, 이미 있었던 풍속에다가 장헌충 설화를 결합시킨 것이다.
또 충칭 지역에는 쑥이나 창포를 내거는 것 이외에도 장헌충이 버드나무 가지를 꽂으면 죽이지 않는다고 알려줘서, 주민들이 살아날 수 있었고, 그래서 마을이 버드나무 거리(楊柳街)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역시도 쑥으로 하는 액막이와 비슷한 풍속이 장헌충 설화와 결합된 것이다.
이런 기록들에선 장헌충이 닥치는대로 도살했다는 문헌 기록과는 달리, 선악(善惡)을 골라서 죽인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악인들조차 주술적 행위로 피해갈 수 있었다는 이유로, 기존 문헌과는 상반된 묘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구비 전설에서조차도 거의 '죽음의 천사' 수준으로 장헌충이 도살을 하고 다녔다는 전설들도 있기에 장헌충 전설에 대해선 여러가지로 애매한 구석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장헌충이 어린 시절에 신세를 졌다가 나중에 은혜를 갚은 전설도 있다. 어린 장헌충에게 젖을 준 유모, 어린 장헌충이 말똥을 치우고 있을 때 흰 두건을 빌려준 자, 농민군 포로에게 떡을 준 노파 등등에게 은혜를 갚았다는 내용이다.
은혜갚기 전설의 사례는, 어린시절 장헌충이 섬서에서 사천 수녕현으로 장사를 하러 왔는데, 말이 부자집 문 앞에서 똥을 누자 그 집 주인이 장헌충에게 똥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장헌충은 혹한에 언 손으로 말똥을 치우는데, 어느 청년이 흰 두건을 벗어 사용하라고 주었다. 장헌충은 훗날에 봉기하여 군대를 이끌고 사천의 수녕현에 도달하자, 흰 두건을 쓰고 있는 사람은 죽이지 못하게 했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흰 두건을 써서 살아났다는 것이다.
흰 두건은 상복으로, 은인이 흰 두건을 아직도 쓰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데, 그럼에도 은인을 죽이고자 하지 않는 장헌충의 투박하지만 우직한 마음씨를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도 장헌충이 '흰 두건'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지지세력 외엔 학살을 하긴 했다는 식의 얘기라 '장헌충'이라는 이름에 실린 피비린내를 완전히 가려주지는 못하는 일화다.
4.3. 주민보호와 권선징악 전설[편집]
주민 보호 전설도 존재하는데, 문창제군묘, 관제묘를 보수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데, 나중에 장헌충에 우호적이었던 사천 서부, 북부 지방에서 장헌충이 이들과 함께 제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군이 시장을 불태우자, 장헌충이 새로 시장을 건설하고 군량을 풀어서 빈민을 구제했다는 전설, 임산부의 해산을 도와주고, 병든 여인을 치료하고, 금은, 의복, 양식을 풀어 빈민구제에 나섰다는 전설 등이 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 같은 주민들 보호에 관련된 호의적인 전설은 지역 편차가 있는데, 사홍현, 서충현, 남충현과 재동현 등의 사천 서북부에 이런 전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마갈량이스가 증언한 대량 학살이 있었던 성도 지역에서는 이러한 전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장헌충이 권선징악을 했다는 전설도, 상당히 비율이 많고, 이러한 전설의 범위는 사천성 전역에 도달한다. 주로 악덕 지방관, 지주, 부자, 무뢰한들을 제거하는 전설들이 있으며, 동란기에 나타나는 비적을 제거한 전설도 있다.
4.3.1. 마장각 처단[편집]
권선징악을 했다는 전설로는, 장헌충이 악지현(岳池縣)에서 마장각(馬長脚)을 제거하고, 왕사(王四)를 도와주었다는 전설이다. 왕사는 부자 왕원외(王員外)의 아들이었는데, 왕사가 열 살 되던 해 왕원외는 마장각이라는 외지인을 잡부로 거둬들인다.
마장가는 무예가 뛰어나서 마웡뇌에게 신임을 얻어 비서가 된다. 그렇지만 마장각은 왕원외와 빚을 받으러 나갔다가, 절벽에서 왕원외를 밀어서 죽이고, 미끄러져 죽었다고 속인다. 그리고, 왕원외의 아내에게 억지로 장가들고, 독넣은 배를 먹여서 죽이고는 관부에 뇌물을 주고 배장수에게 살인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왕사의 계부 노릇을 하면서, 호시탐탐 재산을 노리게 된다.
왕사는 일부러 소를 죽이지 말라는 금령을 어기고, 장헌충에게 잡혀가는데, 장헌충은 마장각을 잡아와서, 왕사와 모든걸 '절반'으로 나누기로 했는지 물어본다. 마장각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장헌충은 왕사가 논밭을 가는 소를 죽인 죄도 절반씩 나눈다면서, 각각 태형 50대와 노역 10년의 형벌을 내린다. 그리고 계부라는 이유로 마장각을 먼저 처벌하여, 마장각은 50대를 맞고 감옥에 갇혀 죽고 만다. 왕사는 장헌충에게 간청하여, 대서군에 들어가게 된다.
4.3.2. 부자 처단[편집]
또 대파산(大巴山)에는 학(郝)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명나라 병부상서 웅문찬(熊文燦)의 심복이었다. 학 부자는 넓은 토지를 가지고, 고액의 소작료를 받았으며, 가족들의 생일이 되면 선물을 바치라고 강요하였다.
또 생일이 되면, 산해진미를 먹는 모습을 자신의 저택에 달아놓은 거울에 비치게 하고, 선물을 바치러 온 가난한 농민에게 거울에 비치는 대로 음식을 먹는 시늉을 내라면서 괴롭혔다. 소금 장사로 변장하여 이 모습을 지켜본 장헌충은, 달(月)을 판다면서 학 부자와 만나서 물통을 보여주며 그 안에 든 달을 사라고 요구했다.
학 부자가 미친 놈이라고 욕하자, 장헌충은 정체를 드러내고 학부자를 감옥에 가두고, 토지와 재물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4.4. 가짜 장헌충을 죽이다[편집]
또, 특이한 사례로서 '가짜 장헌충'을 제거한 일화가 있다. '가짜 장헌충' 전설은, 명나라 관부에서 가짜 장헌충을 내세워서, 가짜 장헌충이 사천성 주민들을 도륙했다는 전설이다.
전설의 내용은 사천성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장헌충이, 자칭 장헌충이라는 자가 백성들을 하나씩 목베면서 "나는 장헌충이다. 오로지 사천 사람들을 죽인다.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하면서 몰살시키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가짜를 사로잡고 자초지종을 캐묻는다. 이에 가짜 장헌충은 자신은 관부의 사람인데 장헌충에게 민심이 쏠릴 것을 우려한 상관이, 장헌충을 가장하여 백성을 죽이라고 실토했다는 것이다. 장헌충은 가짜를 죽이고, 주민들에게 자신은 부자를 치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탐관오리만 죽인다고 해명했다는 전설이다.
전설에서 가짜 장헌충이 살육을 했다는 지역은 간주(簡州)인데, 문헌에서도 간주에서 장헌충군이 살육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전설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4.5. 가짜 내강왕 전설[편집]
장헌충 측도 가짜를 썼다는 전설이 있다. 내강왕 주지기(內江王 朱至沂)는 촉왕(蜀王)의 후예인데, 장헌충이 가짜 내강왕 주지기를 이용해서 10만에 달하는 명의 패잔병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이다.
촉왕(蜀王)은 성품이 인색하고 탐욕스러워, 명군의 토벌에 협조하지 않고 재물을 내놓기를 거부하였는데, 1645년 장헌충의 군대가 성도를 점령하자 촉왕 본인을 비롯한 촉왕부(蜀王府)의 비빈과 성도왕(成都王), 태평왕(太平王) 등의 종실은 우물에 투신하여 자살한다. 내강왕은 투신했다는 소문도 있고, 장헌충 전설에서는 성도가 함락될 때 붙잡혀서 죽었다고도 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장헌충이 성도를 함락시키자, 파현 출신의 진사 왕응웅(王應熊)은 남명 정권에서 총독 벼슬을 받고, 사천에서 패전한 명나라군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신사들의 토착 향군과 제휴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때, 홀연이 용모가 준수하고 영웅적인 기상이 넘쳐흐르는 내강왕이 나타나자, 군인들은 총독 왕응웅의 통솔을 거부하고 내강왕을 따르게 되었다. 내강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농민군과 싸워서 군공을 거두고, 포로들을 자신의 친위부대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장헌충 군대가 공격해오자, 내강왕의 친위부대도 안에서 호응하여 10만 명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내강왕은 장헌충이 보낸 가짜였던 것이다. 이는 장헌충의 악명을 기록한 유명한 사료인 촉벽(蜀碧)이라는 사료에 기록된 내용이다.
한편 구비전설에서는 10만 명군이 원래 사천순무 용문광(龍文光)의 수하 구문진(苟文進)이 이끄는 '철벽군(鐵壁軍)'으로, 중경부에서 장헌충에게 패배한 철벽군이 후퇴하여 토착 향병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장헌충은 철벽군을 정면으로 상대하기 여의치 않아, 계략을 써서 자신의 부하장수 마원리(馬元利)를 내강왕으로 변장시키고 명군 복장을 한 부하 300명을 딸려 보낸 것이었다. 가짜 내강왕은, 구문진이 왕응웅에게 보낸 사신 둘을 붙잡아 자신을 알현하게 하였다. 마침, 왕응웅은 구문진의 벼슬이 높아지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 의심하여서, 부총병이라는 낮은 직함을 내렸다. 구문진은 격분하였고, 그 때 두 사신이 자신이 만났던 내강왕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강왕을 모셔 소조정(小朝廷)을 열면, 강산을 얻지는 못해도 개국원훈은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구문진은 가짜 내강왕을 만나서, 왕관, 왕복, 그리고 숭정제가 내린 금책과 봉국장군의 은인을 보게 되었다. 의심이 풀리자 구문진은 가짜 내강왕을 모시고, 태사 병마대원수를 자칭하게 됐다. 장헌충의 양자 장능기(張能奇, 본래 성은 애艾)가 공격해오자, 철벽군은 패전하고 군심이 동요했다. 이 때 내강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에 나서서, 산채와 성을 빼앗았다. 내강왕은 성으로 행궁을 옮기고, 철벽군을 입성시켜서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이 때 장능기의 군대가 성밖에서 공격해오고, 가짜 내강왕 마원리와 부하들도 내응하여 철벽군을 전멸시켰다는 것이다.
4.6. 장헌충의 전쟁 전설[편집]
장헌충 전설 가운데 가장 많이 채록되는 것은 전투 전설로서, 정부군인 명군, 이민족인 청나라군, 이자성이 이끄는 대순군, 그리고 당시 신사와 지주들이 이끄는 향촌 자경단과의 전투가 주로 묘사되고 있으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같은 잦은 전쟁 전설은 장헌충의 대서 정권이 사천성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완전한 지배체계를 완성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향촌 자경단과의 전투 전설은, 주로 험준한 지형에 건설된 채(寨)를 무대로 펼쳐진다. 예를 들어, 쌍채자(雙寨子)라는 요새 전설에서, 쌍채자는 채문 두 곳이 모두 돌다리로만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화약으로 화공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장헌충은 밤중에 양의 목에 등불을 걸고, 쌍채자의 정문으로 몰아갔다.
채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양 목에 걸린 등불 불빛만 보고 장헌충 군대가 공격해오는 줄 알고, 후문의 병력도 불러모으자, 장헌충은 후문을 돌파하여 쌍채자를 점령하였다.
4.7. 부군채 함락과 삼이패왕(三李覇王)과의 대결[편집]
부군채(扶君寨)는 명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서충현 출신의 이씨 신사들, 이건덕(李乾德), 이완(李完), 이조(李兆)의 삼이(三李)가 주축이 되어 지키고 있었다.(이들은 '서충현지'에 문헌으로도 기록이 있다.) 병사 2천명을 확보하여, 훈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장한충도 쉽게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서 세작을 사용했다.
서충현의 관리 선우홍(鮮于紅)이 장헌충에게 항복해오자, 장헌충은 자신의 부하들을 선우홍의 부하로 변장시키고, 술과 닭, 오리, 물고기 등의 음식을 가지고 부군채에 위장귀순을 시켰다. 채주 이건덕이 선우홍과 부하들을 받아들이자, 선우홍은 거짓 정보를 알려주면서 잔치를 벌이게 했다. 그 틈을 타서 장헌충이 공격해오고, 잠입시킨 부하들이 내응하여 부군채는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이완, 이조는 살해되고, 이건덕은 도주하였다.
다만, 서충현지 같은 문헌 기록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정황이 드러나는데, 이조는 가족이 몰살되고 2년 뒤 병사하였고, 이완은 장헌충이 사천을 공격할 때, 사람을 모아 군사를 훈련시키다가 대서정권의 지현 고능운(高凌雲)에게 체포되었고, 의로움을 지키며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 이건덕은 장헌충이 쳐들어오자 2만 군사를 모아 장헌충과 싸웠는데, 장헌충이 성도를 점령하자, 이건덕의 친족 10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건덕은 나중에 남명의 영력제 정권에서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건덕은 이 지역에서 이조, 이완과는 별도로 활동했는데, 전설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한데로 엮은 것이다.
전설에서는 이건덕의 친족들은 장헌충에게 계속 대항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고루채(鼓樓寨) 전설에서는 대서정권의 예부상서 강정진(江鼎鎭)이 고루채에서 군량과 마초를 비축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왕교운(王巧云)이라는 주민이 강정진이 자신을 강간하고 아버지도 죽였다면서 고소하였고, 왕씨 주민들이 나서서 고루채의 문에 써있는 대서정권의 연호를 말똥으로 칠해버렸다.
장헌충이 당사자들을 심문해보니, 왕교진은 이건덕의 먼 친족 조카딸로, 왕씨로 성을 바꿔서 숨어 있었던 것이며, 이건덕의 아들 이룡(李龍)도 성과 이름을 바꿔서 왕교진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들과 왕교운의 부친은 강정진이 장헌충에게 투항한 것을 복수하려고 모략을 꾸몄지만 들켜서 죽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씨 가문은 집요하게 장헌충을 공격했는데, 이조의 아들 이영경(李映庚)은 대학사 여문숙(呂文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소치(李昭治)를 낳았고, 이소치는 강희연간에 서충현지를 편찬할 때, 장헌충이 선악을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닭이나 개조차 살려두지 않았다고 기록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반면, 이소치의 외가인 여씨 가문의 후손 한 사람은, 장헌충이 가난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며 맞서다가 조정에 반항한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집안의 도움으로 풀려난 여씨는, 극단을 조직하며 시골로 다니면서, 장헌충은 악당만 죽이고 다니는 좋은 사람이라는 내용의 연극을 공연했다고 한다.
4.8. 신사 계층을 포섭하려 한 장헌충[편집]
장헌충은 초기에는 신사와 지주 계층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는데, 1차적인 문헌 사료들에서 보면, 1644년 대서정권을 수립한 장헌충은 과거로 신사들을 선발하고 관료를 뽑으려 했다. 팔고문을 변경하여서 책론(策論)으로 시험을 치르거나, 과거를 시행하여 향시 합격자 80명과 회시 합격자 50명을 선발했으나, 인재를 구하지 못하여서 한 해에 두 번 과거를 치뤘다는 것 등의 구체적인 사례 언급이 있다.
"처음에 성도(成都)의 명나라 관원들은 장헌충이 오자 급히 도망갔다. 그후 장헌충이 왕을 칭하고 관직을 나눠주며 임무를 맡기자 마치 폭우가 쏟아진 후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지는 것처럼 태평스러워졌다. 또 장헌충이 용감하고 능력도 있어 능히 나라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일반 관료들 이 모두 나와서 임무를 감당했다"
비교적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서양인 선교사 Gourdon 역시 장헌충이 초창기에 신사 계층을 포섭하려 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1645년 겨울 장헌충은 돌변하는데, 성도에서 과거를 시행하겠다며 모인 과객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렸다는 것이다. 장헌충 군대의 살육에 신사층이 대서 정권에 적대적으로 바뀌자, 극단적인 살육으로 보복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도 일대에서 벌어진 살육은 신사층의 반감을 불러온 것으로 보이는데, 성도 지역에서는 장헌충에게 관련된 민간 전설이 극단적으로 적은 편이다.
4.9. 재동현의 장헌충 숭배[편집]
장헌충 사후 주민들이 소상을 만들어서 무덤에 경의를 표했다는 사후 전설이 있다.
명말 재동현 칠곡산에는 장아자(張亞子)를 모시는 문창묘(文昌廟)가 있었다. 문창묘는 동진 시기에 부견에 맞서 싸웠던 장육(張育)을 기원으로 하는데, 장육 신앙은 민속신인 장아자와 융합하였고, 이후 장아자는 문창성(文昌星)의 환생으로 여겨진다. 문창제군(文昌帝君)은 글(文)이 훌륭해지다(昌)는 의미 답게, 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문생들의 참배를 받으며 매우 유명한 신이 되었다.
1644년 겨울, 장헌충은 재동현에서 문창제군을 모시는 태묘(太廟)에 들렸으며, 정전인 문창전과 누각을 수리하고, 관성묘를 추가로 창건하라고 하며 거액의 수리비용을 기부하고 다수의 일꾼을 징발해 주었다. 이렇게 장헌충은 문창묘를 매우 중시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장헌충은, 이 때 문창묘에 모셔진 장아자의 상에 분향하면서, "당신의 성도 장씨이고, 나의 성도 장씨이니, 우리 한 가족처럼 지냅시다."라고 외치고, 태모를 장씨의 가묘(家廟)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또 태묘에 토지를 기부하였고, 기존에 태묘를 지키던 사향호(司 香戶)도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이는 재동현의 혈연의식을 자극하면서, 재동현 장씨들에게 지지를 받으려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동현의 장씨는 재동현지예 따르면, 청대에 공생(貢生)을 네명이나 배출한 유력한 성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동현은 사천성에서 장헌충 지지가 상당한 지역이 되었다.
장헌충이 전사하자, 재동현민들은 풍동루에 장헌충의 소상을 세우고 분향하는 행사를 가지게 됐다. 매년 2월과 8월에는, 대서의 군대가 재동현에 온 날을 기념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태묘에 가서 장헌충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2월과 8월 제사는 원래 장헌충에게만 모시는게 아니고, 명대의 세시 풍속에서 문창제군에게 분향하는 행사였는데, 태묘를 구경하거 연극, 곡예, 잡기 등의 오락을 즐기고 여러가지 잡화를 구매하는 민간 축제였다. 아무튼 이렇게 재동현에서 모셔지게 되면서, 장헌충은 관성제군(관우), 문창제군(장육)과 함께, 문창묘의 신(神)으로서 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4.10. 타파된 장헌충 신앙[편집]
그런데, 재동현의 장헌충 신앙은 100여년이 지난 뒤, 격분한 사천성의 지방관과 신사들에게 파괴되고 만다. 당시 정황은 『장헌충의 상을 헐어버린 기록(毁張獻忠遺像記)』이라는 글에서 묘사되고 있다.
명말에 재동현(梓潼縣) 사람들은 역적 장헌충(逆賊 張獻忠)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풍동루(風洞樓)에 상(像)을 세우고 제사를 그치지 않았다. 면죽현(綿竹縣)의 현명한 지현 공안(安公)[29] 이 재동현(梓潼縣)으로 가던 도중에 역적의 상을 보고 욕을 퍼부었다.
"이것은 개돼지조차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신(神)으로 모시고 있다. 역적이 어찌 이처럼 (대접) 받을 수 있는가?"
좌우에 명하여 (소상(塑像)을) 찢어서(磔) 길에 널어놓게 했다. 오호라! 역적이 법망을 벗어난 지가 거의 백년이나 되었다. (역적의) 神位를 몰래 세우고 멋대로 제사지냈는데 어리석은 남녀(愚夫愚婦)들이 빌고 제사 지내면서 놀라 식은땀을 흘리고 희생과 술을 깨끗하게 하여 제수를 바치는 것이 우리 공안(安公)의 호기(浩氣)에 거슬려 그가 (소상(塑像)의 피부(皮膚)를 부수고 뇌를 꺼내었으니 곧 지난날에 대해서는 흉악한 자를 끊어서 없앤 것이요 장래에 대해서는 경계함을 보인 것이다
공안덕은 『제훼적상비기(除毁賊像碑記)』를 지어서, 풍동루에 비석으로 세워서 장헌충의 소상을 파괴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였다.
재동(梓潼)의 문창제군은 충효(를 관장하는) 신령이므로 춘추(千秋)에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나 홍덕(洪德)은 산동(山東) 사람으로 면죽 지현(綿竹 知縣)을 지냈다. 이전에 나강현 지현 이덕한(羅江縣 知縣 李德瀚)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신사(神祠)에는 녹포금검(綠袍金臉)이 있는데 잔적 장헌충(殘賊 張憲忠)의 상(像)이다. 매번 일찍이 없애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긴다. (중략) 신당(神堂)의 대련(對聯)을 보면 적(賊)의 성명(姓名)과 일치하는 글자가 있다. (어떤 이들은) 속여서 말하기를 이것은 문창(文昌)의 화신(化身)이라하니 어찌 이처럼 신령을 극히 모멸할 수 있는가!
내가 상관(上官)[30]
의 위임과 협력을 얻어 재동현(梓潼縣)의 길을 살피면서 수색(搜索)하여 풍동루(風洞樓)에 이르러 면포금검(綠袍金臉)에 사납고 독살스러우며 잔인한 형상을 보니 신(神)과 매우 달라 도적상(賊像)임을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급히 본주(本州, 綿州) 지주(知州)인 두란공(杜蘭公)에게 아뢰고 관아의 일꾼들에게 그 상(像)을 만 토막으로 내도록 명령하여 도적(賊)의 대역부도(大逆不道)와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죄를 처벌하였다. 음사(淫祀)를 제거하고 신우(神宇)를 깨끗하게 했다.
재동현의 장헌충 숭배는, 문창제군의 '화신'으로 둘러대면서 숭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동은 물론 주변 현에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민심을 어지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르는 척 하면서 임기를 넘기고 있었던 것 같다. 면죽현지에 따르면, 안홍덕은 이전에 이미 '사교'를 단속하고, 서적을 불태우고 처소를 서원으로 바꾼 경험이 있는데, 재동현에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주의 허가를 받아 현 경계를 넘어가서 훼철시킨 것이다. 장헌충 소상을 혁파한 공로 덕분인지, 이듬해인 1742년에는 면주의 지주로 승진하였다.
기록에서는 장헌충 신상이 매우 흉악스러운 모습이었다고 묘사되는데, 아마도 주민들이 장헌충의 '무서운 이미지'를 숭배했던듯 하기도 하다. 또 장헌충의 소상을 파괴하는 모습이, 청대에 역적을 능지처참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부수었는데, 신사 계급의 장헌충에게의 적대감을 알 수 있다.
4.11. 정리[편집]
장헌충 전설은 명말청초의 사천사회와 장헌충에 대해 문헌자료가 제공해주지 못하는 새로운 내용을 풍부하게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문학 자료인 장헌충 전설을 역사학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사실성의 문제이다. 전설들은 문헌자료에 기록되고 분명하게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내용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민초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되 사실을 적당히 가공하여 이야기의 재미와 극적 요소를 강화 시킨 것도 있다.
둘째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장헌충 전설 속에서는 부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자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데 혈안이 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장헌충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정하게 모은 재물을 뺏기는데 민초들은 빼앗긴 재물을 장헌충을 통해 돌려받는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착한' 부자들의 존재는 외면한다. 지배층인 관료나 신사, 지주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일방적인 시각은 전설을 재미있고 선명하게 전개하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복잡다단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데는 장애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헌충 전설 자체는 명말 청초의 사천사회와 장헌충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장헌충 전설은 지역적으로 사천전체가 아니라 사천의 일부 지방 특히 서북부인 재동현(梓潼縣), 서충현(西充縣)에 집중적으로 유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태묘 건설과 보수과정에서 장헌충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재동현에서는 그의 행적을 지지하면서, 장헌충 사망지인 서충현에서는 항청 투쟁에서 희생된 그를 기리면서 많은 전설을 만들고 유포시켰다. 반면 대서정권의 도읍지였던 성도 주변의 사천 서부 일대에 유포된 전설은 극소수이다. 이 지역에서는 오히려 도살자 장헌충을 글로 벌하는 문헌기록을 주로 남겼다.
둘째, 장헌충 전설은 장헌충 세력 대 반 장헌충 세력의 대결 구도라는 관점으로 명말청초 동란기의 사천사회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전설은 반 장헌충 세력의 중추인 명의 관료와 군대는 부패했고, 지주와 신사는 민초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든 악한 무리라고 낙인을 찍고 있다. 이는 신사층이 기록한 문헌자료에서 전하는 바, 장헌충 세력은 악이고 반 장헌충 세력은 선이라는 가치판단을 민초들이 뒤집은 것이다.
셋째, 장헌충에 대한 전설의 개별적인 이미지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내린다는 이른바 체천행도(替天行道)의 구현자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자들은 평소 민초를 괴롭히던 악인들이므로 그들을 죽이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이다. 신사나 관료들이 장헌충을 비난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인 대규모 인명살해를 전설에서는 권선징악과 부자를 치고 빈자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행위로 정당화한 것이다. 이리하여 장헌충은 지배층이 기록한 문헌자료에서 낙인찍힌 도살자의 이미지를 벗고 오히려 체천행도의 구현자로 부활하였다. 이런 관점은 도둑 무리가 군웅으로 활약하면서 체천행도 한다는 수호전의 계보를 이은 것이다. 하지만 장헌충이 수행한 천명은 힘을 앞세우는 패도적 속성이 강했고 그로 인해 대서정권나 장헌충은 진시황이나 항우 정권처럼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장헌충에 대한 기록들은 사천인들 각각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싶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토대로 재구성한 반쪽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역사연구자의 입장에선 당연히 문헌기록의 사실성을 더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학적 허구인 전설도 세세한 내용면에서는 사실성이 떨어지지만 그 줄거리는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결국 사천인들에게 있어 장헌충에게는 '도살자'와 '체천행도의 구현자'라는 이중의 성격이 병존했던 것이다.
4.12. 기타[편집]
- 장헌충의 죽음과 원혼
장헌충은 서충현 봉황산에서 청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는데, 생존설이 있는 이자성과는 달리 구전설화에서도 장헌충의 죽음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죽은 뒤에도, 원혼이 배신자와 청군 장수를 죽여서 복수했다거나, 자신의 무덤을 도굴하는 도적에게 이무기를 보내서 삼키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상의 내용은 民間傳說을 통해 본 明末淸初의 四川社會와 張獻忠 논문의 내용에서 가져왔다.
그런가 하면 장헌충의 농민군이 촉왕부를 함락시켰을 때, 촉왕부의 제당(祭堂)에는 명나라 초기 장군이었다가 모반죄로 처형당한 남옥(藍玉)의 인피(사람 가죽)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5. 유물의 발굴[편집]
2016년 갑자기 강가에 금속제 유물이 발견되어 사천성에서 물길을 돌려서 발굴을 해본 결과 四川彭山“江口沉银遗址”에서 발굴되었다.
금제 동물의 왕의 옥새, 금으로 된 책, 귀걸이, 아주 짧은 기간 유통되었던 서국의 엽전 등이 출토되었다.
6. 대중매체[편집]
- Fate/Grand Order에서는 이문대 인지통합진국 신의 진양옥이 언급 하는데, 대서왕이 진양옥의 고향에서 더욱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며 선동하면서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자, 황제가 흉성을 떨어뜨려 진양옥의 고향을 지워버렸다. 그런데 대서왕은 선동했던 사람들을 지켜주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마을로 넘어가 사람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진양옥은 대서왕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반면 황제는 수도 함양에서 황제를 찬양하는 것을 제외한 글과 시만 보여도 흉성을 떨어뜨려 삭제해버리는 학살을 벌였지만, 그 끝에는 전쟁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태평성대를 이룩했기 때문에 황제에게 충성했다.
- 근육조선에서는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 함락에 성공해 순을 세우자 장헌충도 낙양을 점령하고 서를 세운다. 2부에서는 척가군에 있었던 장신위의 손자 이름으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원역사와 달리 서나라가 살아남아 학살은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중원일통을 위해 거듭 친정을 나갔다가 50대에 전장에서 급병으로 사망 후 4황자 장형운이 쿠데타로 황위를 계승한다. 원역사에서는 태조묘호를 장아자에게 올려 추존했지만 여기서는 거듭된 군사원정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었는지 자신이 태조 묘호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