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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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胡合作
Chiang-Hu Cooperation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말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중국국민당의 군사 지도자 장제스와 정치 지도자 후한민의 정치적 합작을 의미한다. 1928년, 8월 국민당 2기 5중전회가 후한민이 제출한 훈정대강을 접수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31년 2월 탕산 사건으로 붕괴되었다.


2. 배경[편집]


쑨원 사후 장제스가 쑨원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정도로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쑨원이 죽고 나서 명확한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좌파 당권파 왕징웨이, 우파 당권파 후한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 쑨원의 아들 쑨커, 우익 원로 다이지타오 등이 각기 후계를 노리고 있었고 장제스는 그저 생전의 믿을만한 심복 정도로 대권을 노릴 인물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손잡고 1925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구실로 외교부장 직위에 있던 후한민을 숙청하는데 참가하였다.

소련에 시찰을 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상 강제 외유를 떠난 후한민은 중국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코민테른중국국민당 가입을 신청하는 등 반공활동을 이어나갔고 장제스는 1926년 중산함 사건을 기점으로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하여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하였다. 후한민의 귀국을 막던 보로딘과 왕징웨이가 축출되면서 후한민도 1926년 4월 19일 광저우를 통해 귀국하였으나 미하일 보로딘의 핍박 속에서 상하이에 칩거하였고 소련이 중국을 코민테른의 도구로 삼아 중국혁명을 방해하고 있다고 격렬히 비판하면서 장제스에게 보로딘을 감시하고 소련 고문들의 영향력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는 등 반공활동을 이어나갔으나 북벌을 위해서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던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27년을 넘어가면서 장제스와 중국공산당 및 국민당 좌파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고 이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폭발하였다. 제1차 국공합작을 부정하게 된 장제스는 리지선, 리쭝런을 비롯한 반공 군벌들과 국민당 감찰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소련으로 외유를 떠났던 후한민과 합작을 도모하게 된다.


3. 전개[편집]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고 1927년 4월 들어서 국민당 내부 좌우갈등이 격렬해졌는데 4월 3일, 왕징웨이가 후한민을 방문하여 대결정국 해결을 모색하였지만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장제스는 후한민을 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제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예비회의에서 주석으로 추대했고 후한민이 이를 수락하며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1927년 4월 18일, 후한민은 난징 국민정부의 중앙정치회의 주석 겸 국민정부 위원회 주석에 취임하고 청당운동에 들어갔다.

허나 쑨촨팡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장제스가 리쭝런바이충시에게 난징 국민정부의 실권을 넘겨주고 사퇴하게 되면서 장제스와 후한민의 합작에는 난황이 찾아오게 된다. 후한민은 초기 장제스가 하야하자 장제스와 같이 진퇴를 같이 한다는 이유로 차이위안페이, 우징헝, 리스쩡 등과 함께 공직에서 사퇴하여 상하이로 가는 등 장제스를 지지하였으나 이후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철폐를 위해 서로 합작하자[1]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프랑스로 외유를 떠나게 된다.

당시 후한민은 난징정부가 정치적으로 불리할 경우 반장운동에 뛰어들 가능성, 반대로 장제스의 영도 밑에서 난징정부가 잘 굴러간다면 장제스와 협력할 가능성 모두를 고려했다. 1928년이 흘러가며 국민혁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장황사변광저우 폭동으로 장제스와 손잡았던 왕징웨이개조파가 입지가 크게 좁아져 대거 외유를 떠나게 되자 후한민은 기회기 욌다고 판단한다.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손잡은 것에 대해 불만이었던 후한민의 입장에선 더 이상 장제스와의 합작을 재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셈이었다.

1928년 6월 3일, 후한민은 국민정부 주석 탄옌카이에게 전보를 보내 국민당 2기 5중전회에 <훈정대강안>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북벌이 완성되었으니 마땅히 총리의 건국대강에 의거하여 주의의 실현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외의 정세를 살피건대 이후 당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래 몇가지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첫째, 당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이루고 훈정을 실시하여 헌정을 위한 기초를 확실히 해야 한다. 둘째, 당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이루고 견고한 영도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5권제도의 실행을 통해 5권분립의 헌정체제 완성을 기약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6월 18일, 베를린에서 '훈정대강시안설명서'를 난징에 보내 '정치회의강령'과 '국민정부조직강령'에 대한 원칙과 제도에 대해 설명했다.

1928년 8월 8일, 국민당 2기 5중전회가 개최되었는데 8월 11일, 2기 5중전회는 후한민의 훈정대강안을 접수하기로 결의하고 약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약법을 제정하기로 의결했다.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게 된 후한민은 8월 8일 프랑스를 출발해 8월 28일 영국령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때 광동성 정부주석 천밍수와 광동성 수정주임 천지탕이 후한민을 맞이하였는데 이들은 후한민에게 난징으로 가지 말고 광저우 정치분회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후한민은 이를 거절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9월 3일 상하이에 도착한 후한민은 장제스, 리스쩡, 우징헝, 다이지타오, 장인걸 등 국민당의 여러 원로들과 리쭝런, 리지선 등 군사 실력자들과 연일 회동을 가져 국민정부 오원장과 각부 부장에 대한 인선을 논의했다. 9월 7일, 후한민은 장제스의 고향 봉화현을 방문하기 위해 상하이를 떠났고 9월 10일, 전보를 보내 펑위샹과 옌시산에게 난징으로 올 것을 촉구하였다. 9월 18일 후한민은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다이지타오, 리쭝런, 리지선, 쑹쯔원 등과 함께 장제스를 난징으로 데려갔고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국민정부 조직법 심의에 들어갔다. 10월 3일, 중화민국 국민정부 조직법과 중국 국민당 훈정요강이 의결되었고 10월 8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 겸 국민혁명군 육해공총사령관, 후한민은 입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서 1931년까지 지속되는 장호합작 체제가 완성되었다.


4. 결말[편집]


1931년 2월 28일, 장제스는 약법 제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찾아온 후한민을 기습적으로 감금하고 3월 1일 후한민이 건강상의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는 탕산 사건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후한민을 비롯한 당권파들을 '서생'으로 우습게 여겨 이들에게 물리적 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별 수 없으리라 여겼지만 우파의 거두이며 광동파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을 일방적으로 감금한 사건은 국민정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결국 린썬, 구잉펀, 등택여 등 감찰위원들이 대거 장제스를 탄핵하였으며 쑨커 등도 국민정부를 이탈, 광동성 수정주임 천지탕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1차 양광사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전면적인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결국 장제스는 전국적인 합작을 위해 후한민을 석방하고 1931년 12월 15일 국민정부 주석 겸 행정원장에서 사퇴하게 된다. 이후 국민당 4차 전국대표대회의 결정에 따라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 서남정치분회 등이 조직되면서 후한민은 더 이상 중앙에서 일하지 않고 광저우와 영국령 홍콩을 중심으로 한 소극적 반장파로 남게 된다.

반면 후한민의 원수인 왕징웨이는 1932년 항저우 회담을 계기로 장제스와 합작, 1932년 2월에 행정원장에 취임함으로 3차 장왕합작을 결성한다. 후한민은 1936년 사망할 때까지 장제스와 화해하지 않았다.


5. 참고문헌[편집]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The Kuomintang left in opposition, 1928-1931 : the leftist alternative in Chinese politics, So Wai-Chor,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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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제스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서는 서산회의파가 실권을 잡고 있는 중앙특별위원회를 붕괴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