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홍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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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장석산(張石山), 장병수(張柄洙)[1]
자 / 호
충직(忠直) / 석포(石圃)
본관
상장군계 인동 장씨[2]
출생
1910년 12월 24일[3]
전라남도 지도군 장산면 대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대리[4] 88번지[5][6])
사망
1990년 11월 5일 (향년 79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부모
아버지 장진섭, 어머니 하동 정씨
형제
장병준, 장병상[7], 장홍재[8]
가족
아내 정은자[9], 슬하 1남 5녀
장녀 장현숙[10], 차녀 장명숙[11], 3녀 장신자[12]
4녀 장희자[13], 아들 장웅식[14], 5녀 장미숙[15]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9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4. 가계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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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7일, 고향 장산도에서 치러진 흉상 제막식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이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장병준은 그의 맏형이다.


2. 생애[편집]


1910년 전라남도 지도군 장산면(現 신안군 장산면) 대리에서 1883년(고종 20) 오위장(五衛將, 정3품)을 지낸 아버지 장진섭(張鎭燮, 1873. 5. 11 ~ 1900. 7. 20)과 어머니 하동 정씨(1879 ~ 1959. 1. 11)[16]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남도 목포부(現 목포시) 양동 125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다.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57번지와 원동(現 종로구 원서동)에 거주했고, 1977년 당시에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114-13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인동 장씨 함평파 22대손이며 장산도 대리마을 입향조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를 지낸 장인걸(張仁傑, 1751 ~ 1791. 3. 20)[17]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 장도규(張道奎, 1842 ~ 1902. 5. 6) 대에 이미 장산도 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숙부 장진방(張鎭邦, ? ~ ?)이 주변 섬들의 간척사업을 주도하면서 일가는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아버지 장진섭은 조부의 셋째 아들이었던 탓에 그리 많은 토지를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평소 신학문에 관심이 많아 네 아들들을 전라남도 목포부경기도 경성부, 일본까지 유학을 보내어 새로운 근대학문을 익히게 했다. 이에 그 또한 14세 되던 1923년 목포사립영흥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16세 되던 1925년부터 경성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28년 11월 9일, 그는 사숙(社塾) 고학당(苦學堂) 교사 이종률(李鍾律)이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격문의 초고를 쓰자 이를 얻어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약 40장을 배포했다. 또한 이듬해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각 학교 대표들과 함께 회합하여 1930년 1월 15일 9시를 기해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동맹휴학을 전개하다가 결국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을 당했다.

같은 해 3월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대학(中國大學)[18]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해 수학하는 한편,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은신하였다. 그러나 1932년 9월 결국 베이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구금되었던 그는 1932년 12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고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대학 정치경제학과에 복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한국광복군 전남지구대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잠시 염전을 경영하다가 우익 정치인으로 한국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를 막으려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영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전라남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민주당 유옥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가 1967년 탈당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1990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해 있던 중 증상이 낫지 않아 결국 그 해 11월 5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사망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1999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1948년 7월 12일 전남 풍수 피해에 대해 보고하였다.

1948년 8월 3일 내무치안회의 위원장을 대리해서 단민당 사건을 중간 보고하였다.

1948년 8월 5일 반민처벌법 기초위원으로 뽑혔다.


4. 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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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호남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다. 특히 방계 쪽이 유명한데, 방계 자손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인 장하준[19]과 장하석 등과 장하성 전 정책실장 등 짱짱하기 그지 없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무안군 을[20]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24,325표 (56.35%)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무안군 을[21]


9,635표 (18.93%)
재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대문구 을[22]

[[무소속|
무소속
]]

2,502표 (6.7%)
낙선 (4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무안군 을[23]


9,156표 (30.02%)
낙선 (2위)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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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8년 12월 7일 작성된 장홍염 소행조서[2] 상장군 금용(金用)계 함평파 23세 홍(洪) 항렬. 인동 장씨 28세.#[3] 인동장씨대동보 권5 (함평파) 638쪽에는 11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5] #. 이 지번에 현재 장홍염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6] 1928년 12월 15일 작성된 장홍염 소행조서에는 대리 35번지가 본적으로 기재돼 있다.[7] 張炳祥. 족보명 장홍협(張洪莢). 1899 ~ 1957. 4. 15.[8] 張洪㘽.[9] 鄭銀子. 1916. 8. 19 ~ . 경주 정씨이다.[10] 張賢淑. 1936. 7. 27 ~ .[11] 張明淑. 1939. 9. 8 ~ .[12] 張信子. 1943. 3. 28 ~ .[13] 張姬子. 1946. 10. 3 ~ .[14] 張雄植. 1949. 10. 3 ~ .[15] 張美淑. 1953. 11. 8 ~ .[16] 정치순(鄭致順)의 딸이다.[17] 1770년 전라도 함평현, 해남현을 거쳐 진도군 가사도에서 장산도 대리마을로 이주했다.[18] 1913년 4월 관립 국민대학(國民大學)으로 정식 설립되었다가 계축전쟁이 일어나자 설립에 소요된 경비가 모두 북양정부에 회수되었고 학교도 민립대학으로 바뀌었다. 이듬해인 1914년 1월에는 학교가 당시 상하이에 있던 중국공학(中國公學)과 합병되어 중국공학 대학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1917년 3월 5일 중국공학 대학부는 '중국대학'으로 개칭되었고, 그 위치는 지금의 베이징시 시청구 다무창골목(大木倉胡同)35호에 있는 정왕푸(鄭王府)에 있었다. 1949년 3월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들은 화베이대학(華北大學)과 베이징사범대학에 흡수, 합병되었고 이과대학은 산시대학(山西大學)에 합병되었다.[19]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등의 저자로도 유명하다.[20] 제22선거구[21] 제15선거구[22] 제6선거구[23] 제24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