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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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재
張希載

이름
장희재 (張希載)
본관
인동 장씨 (仁同)
출생
1651년[1]
한성부 북부 연은방 불광산계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사망
1701년 음력 10월 29일 (향년 50세)
한성부 군기시 앞 길
(현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서울시청 근처)
직업
정치가, 관료, 무신
종교
유교 (성리학)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붕당
{{{-1 [[남인|

남인
]]
주요 경력
포도대장
금군 별장
한성좌윤
내금위장
부모
부친 - 장형(張炯, 1623 ~ 1669)
모친 - 파평 윤씨(坡平 尹氏, 1626 ~ 1698) 윤성립(尹成立)의 딸
형제자매
누이 - 김지중(金志重)의 처
여동생 -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 ~ 1701)[2]
이복 형 - 장희식(張希栻, 1640 ~ ?)
부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 ? ~ 1701) - 김덕립의 딸
자녀
장남 - 장씨(1697 ~ ?) 요절 김씨 소생
차남 - 장차경(張次慶, 1699 ~ ?) 김씨 소생
3남 - 장휘(張輝, 1701 ~ 1728) 생모 미상
4남(서자) - 장종경(張終卿, 1693 ~ 1724) 측실 안숙정 소생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시대의 무관이자 외척. 조선 19대 군주 숙종의 비빈(妃嬪)이었던 희빈 장씨(장옥정)의 작은 오빠로 20대 군주 경종의 외숙부이다. 1701년(숙종 27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가 회복치 않고 빨리 죽기를 기원하는 저주굿을 했다는 대역죄 혐의 아래 자진한 뒤(무고의 옥) 그녀의 법적 대리인[3]으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2. 생애[편집]


보통 드라마에서는 평민이며 건달로 지내다가 여동생이 후궁이 된 덕에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어 벼락출세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희빈 장씨궁녀가 되기 전에 무과에 급제해서 1680년(숙종 6, 경신년) 당시 내금위에 재직 중이었다. 1683년에는 그 관직이 종6품 포도부장에 달했다. 1683년 3월 13일 정명공주의 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숙정(훗날 장희재의 첩이 되는 인물)에게 취객이 꼬여들자, 숙정을 취객의 행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것 때문에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에게 공무 이탈 혐의로 엄청난 매를 맞기도 했다. 장희재는 이미 정6품 사과 김덕립의 딸[4]결혼한 상태였으나, 위에 언급한 인연으로 숙정과 맺어져 결국 조강지처였던 작은애기를 소박하고 기생 신분의 숙정을 정실로 맞이했다.

여동생 장옥정이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쫓겨났으나, 명성왕후가 승하하여 장례가 끝난 후 자의대비 조씨의 중개로 1686년 초에 다시 궁녀가 되었으며 이 때 숙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 1688년 장옥정이 숙종의 첫 아들인 원자를 낳아서 중전이 되자, 중전의 오빠이자 원자의 외숙부이라는 배경 덕분에 종3품 훈련원부정, 정3품 내금위장, 종2품 금군별장 등 요직에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692년에는 정2품 총융사로 승진하고 종2품 한성좌윤도 맡았다가 1694년 갑술환국 당시에는 종2품 포도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희빈 장씨가 중전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후궁(희빈)으로 강등됨에 따라 입지가 좁아졌다. 갑술환국의 여파로 인해 사형당할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세자의 외숙부였던 관계로 영의정 남구만 등 소론 대신들이 참수를 강력하게 반대해서[5] 제주에 유배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에도 숙원 최씨독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자작극을 벌였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기도 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1701년 8월에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희빈 장씨와 같이 이에 연루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1701년 11월에는 그의 시체까지 부관참시되었다. 장희재가 참수당하던 날 여동생 희빈 장씨도 사약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부인들 중에서는 작은애기와 숙정이 체포되었다. 자식들 중 어린 아들은 체포를 모면했으나 큰아들 장휘는 체포당해 심한 매질을 당했다. 남편에 의해 평생 동안 괄시를 받아온 작은애기는 장희재와 동평군이 그간 저지른 일을 남김없이 고해바쳐 장희재가 죽을 수 밖에 없게 궁지로 몰아넣고[6][8] 자신도 죽었다. 작은애기의 고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에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과 종들이 몰려와 그녀의 시체를 참혹하게 난도질하였다고 한다. 숙정은 의금부로 끌려가 압슬형을 당한 끝에 죄상을 자백해 희빈 장씨의 궁녀 숙영과 설향, 무녀 오례 등과 함께 군기시 앞으로 끌려가 거열형을 당했다.[9]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은 범서인 세력 내부의 다수당이었던 소론의 몰락을 불러일으켰다. 소론의 조정 영수였던 남구만이 일관되게 장희재에 대한 온건론을 펼치자 송시열, 김수항, 김익훈 등의 죽음으로 어그로가 팍팍 올라 분노 게이지가 만땅이었던 젊은 소론들은 격노했고 소론의 재야 영수인 박세채까지도 강경론을 주장하는 노론과 뜻을 같이 하자 박세채 문하를 비롯한 젊은 소론들이 대거 노론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애초에 젊은 새 세력이 많다는 의미로 '少론'이라 불렸던 소론은 나이가 많은 대신들이 주축이 되었고 송시열을 추종하는 늙은 구 시대 인물이 많다고 '老론'이라 불렸던 노론은 거꾸로 혈기왕성한 젊은 선비들이 대거 합류하게 되어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큰아들 장휘는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지만 대는 끊어지지 않았는데 막내 아들이 너무 어려서 체포를 모면해 살아났다.[10]

3. 여담[편집]



  • 그의 시신은 오랜 기간동안 저잣거리에 방치되다가 어느 군관이 목을 잘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일단 묘지가 있는 것을 보면 수습되긴 한 듯.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1년 MBC 드라마 《여인열전》 중 제1화 <장희빈>에서는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인현왕후>에서는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 악역이라기보다는 개그캐릭터에 가깝고 시종일관 오두방정을 떨었다.[11] 한성판윤이 됐다고 여기저기 자랑질을 하고 다니는가 하면, 유배 중에도 관복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며 이를 나무라는 제주목사를 두들겨패거나 한다. 백성들에게 악명이 자자한데 어느 백성에게 오물을 얼굴에 투척당하기도 하여 분노해 손수 칼을 뽑고 쫓아갔으나 놓치기도 했고 죽을 때도 백성들에게 야유와 오물 세례를 받는 묘사가 나온다. 참수당할 때에는 그 전에 장희빈에게 사약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옥정아! 중전 마마!"라고 울부짖는다. 형장에서 과거 떵떵거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장희빈에게 "오라버니가 원하신다면 영상 대감이라도 관직을 내릴 수 있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한 것에 기뻐하던 과거를 회상하다가 "세자 저하를 뵙고 싶으니 모셔오라"고 떼를 쓰던 중 망나니의 칼에 쓰러진다. 작은애기는 그래도 남편이라 정이 있었는지 장희재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울고 휘는 그런 어머니를 좋은 말로 달래 형장에서 데리고 나가는 것으로 일가족의 등장은 끝이 났다.


  • 2002년 K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연기했다. 능력[12]은 쥐뿔도 없으면서 여동생의 후광을 무기로 온갖 나쁜 짓을 도맡아하는 무식한 캐릭터로 등장했다가 작가가 바뀌고 나서는 개그캐릭터화되었다. 조강지처인 작은애기를 내치고 기생 출신의 숙정을 정실로 들인 다음 작당 모의를 하는걸 보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을 정도. 하지만 이후 숙종의 마음이 장희빈을 떠나면서 자충수에 가까운 음모를 꾸미다 역관광당한 뒤 제주로 유배를 가는데 제주부사를 꼬드겨 유배지를 탈출해서 모반을 일으키려다 제주부사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희빈 장씨의 사사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다. 백성들에게 야유와 몰매를 맞고 전처인 작은애기와 아들 휘를 제외한 일가족이 모조리 참형을 당하고 만다.

  •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는 배우 김유석이 연기했다.[13] 개그캐릭터의 비중을 줄이고 악역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는데, 주로 권모술수를 이용해서 동이를 괴롭혔으며 동이뿐만 아니라 장희빈의 출세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근데 막판에는 어머니와 더불어 일 처리가 엉성해서 오히려 장희빈의 몰락에 일익을 담당하고 뒷감당이 안될 때마다 여동생에게 달려가 "이 일을 어찌 하면 좋냐"고 전전긍긍하는 등 다소 개그캐릭터 쪽으로 회귀한 느낌도 적잖이 있다.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배우 고영빈[14]이 연기했다. 문무를 겸비한 재원 중의 재원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숙부 장현이 살아있을 때는 장현에게 이만큼 충직한 심복이 없을 정도로 성격도 충직하다. 마음 속 깊이 야욕을 숨기고 있으나 이는 그저 장옥정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오빠의 마음일 뿐이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성격은 넉살이 매우 좋아 붙임성이 있고 역관 집안의 일원답게 중국어에 매우 능통하다.

  • 2016년 SBS 드라마 <대박>에서는 배우 백승현이 연기했다. 숙원이 된 후 하루가 다르게 위세가 드높아지는 복순을 두려워하는 장옥정을 바라보며 이를 갈던 그는 결국 해서는 안되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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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정원일기 숙종 27년(1701년) 11월 2일 기록에 장희재의 세는 나이가 51세로 기록.[2]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3] 정궁이나 후궁이 를 지으면 지존을 모셨던 여성으로서 특별히 형벌을 감해주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정붙이에게 그 죄를 대신 물었다.[4] 속칭 작은애기며 자근아기라고도 한다.[5] 세자의 외숙부인것도 있지만 장희재가 참수형에 처해질만큼 흉악범죄를 저지르지 않은것이 중요했다.[6] 작은애기는 동평군 이항이 '세자의 모후를 중전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주장을 쓴 을 장희재 - 숙정을 거쳐 희빈 장씨에게 전달한 일, 근래에 남인들이 숙정의 집에 모여 모의를 한 것, 묘비 훼손 자작극 사건의 전말, 인현왕후 승하 후 남인 오시복이 궁궐 동태를 살펴봐달라고 했던 것 등을 고했다.[7] 작은애기의 고변 전에는 그 진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이흥발 등 7명이 처형당하고 업동은 유배당하는 것으로 끝났다.[8] 묘비 자작극 사건은 장희재 아버지의 묘비가 훼손되고 무덤에 저주물이 묻힌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알린 장희재의 종 업동은 무덤이 있는 장소에 이것이 떨어져 있었다며 호패 하나를 내밀었고 그 호패의 주인은 응선이라는 종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응선이 당시 서인계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이었다는건데 만약 응칠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다면, 서인들은 까딱하면 "권력 때문에 남의 아버지 무덤을 훼손하는 X같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판국이었다. 그러나 응칠은 자백하지 않은채 죽었고 외려 업동이 장희재의 아버지 묘소에 가기 전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 드러나는 등 서인의 짓이 아니라는 증거가 발견되고 결국 작은애기의 고발을 통해 그 전말이 드러났다.[7] 알고 봤더니 오히려 남인 이흥발이 주모자가 되어 여럿이서 무덤을 훼손하는 짓을 벌이고 서인들에게 덮어 씌우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흥발 및 가담자들까지 합쳐 7명이 죽었고 업동은 유배를 갔으나 작은애기의 증언 때문에 다시 끌려와 고문을 받다 죽었다. 사실 가담자가 1명 더 있었는데 바로 장희재의 숙정이 이흥발 등 남인 잔당들을 규합해 일을 꾀한 것. 즉, 숙정에게도 이 무고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9] 이 때 죽은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작은애기도 죽었는데 그 죽은 시체를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었다고 한다.[10] 원래 역모 사건이라 해도 어린 아들과 아내는 노비로 삼았다. 물론 연산군같이 잔혹한 케이스도 있지만 말이다.[11] 장희빈의 후원자격인 동평군의 권유로, 장차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늦은 나이에 논어를 처음 배우고 그게 너무 자랑스러워서 지나가는 선비를 붙잡고 논어 구절을 외우며 잘난 척 했다가 "기특하기는 한데 나는 9살 때 이미 배웠소."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12] 극 중 양반들처럼 학문적 식견이 없었을지는 몰라도 포도청 포교로 근무하면서 다수의 무뢰배 정도는 혼자 때려잡을 만큼의 무력은 가지고 있었다.[13] 작품 중 평소 목소리 톤을 바꾸어 연기했다. 약간 과장된 톤의 느낌이 있다.[14] 원래는 2012년 tvN 드라마 <푸른거탑>에서 싸이코 역할을 소화해 낸 배우 김호창에게 캐스팅 섭외를 했으나 김호창이 고사해서 고영빈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