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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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편집]
在韓 外國人. Foreigners in Korea.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국적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계 외국인은 포함되는 반면 한국 국적으로 귀화를 한 이민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계 외국인 중에선 조선족과 고려인,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 중국인, 베트남인, 태국인 등이 많다.
2. 역사[편집]
한국사에서 외국인이 오랜 시간 큰 집단으로 존재한 건 구한말 이후다. 물론 통일신라의 중동인 공동체나 고려의 중국 오대십국 귀화인, 조선시대 왜관의 일본인 거주 지역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한정된 지역에서 공무, 상업만 담당했고 거주도 제한했기에 한국 사회 속의 공동체라고 말하긴 어렵다. 특히 한중일 동아시아 세 나라는 문화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서로 떨어져있었던 이유로 (남만주, 황해, 대한해협 등) 일찍부터 각자의 역사적 영역이 유지되어 왔다. 그래서 고대 이후에는 집단적으로 이웃 국가로 이주하거나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조선 초기에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들이 상당수 귀화한 바 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중 일부가 귀화한 사례도 있었으며, 명나라 말기와 명나라 멸망 이후에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이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동화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사에서 본격적인 국내 외국인 공동체는 19세기 말에 청나라에서 건너온 화교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서양에서 온 선교사,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 등도 등장했다. 수교를 맺은 외국의 외교관들도 왔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에 약 70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살기도 했고 8만 명에 가까운 화교도 살았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쫓겨났다. 이들은 히키아게샤라 불리는데 일부는 중국이나 한국에 잔류하기도 했다. 게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국 정부는 외세에 휘둘렸던 과거 때문에 강한 제노포비아를 드러냈고, 1948년부터는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했다. 이러다보니 1950년에는 주한미군이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남고 모두 철군하면서 극소수의 외교관과 선교사, 기자 등을 제외하면 재한 외국인은 3만여 명의 화교 정도만 남게 되었다.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수만 명 규모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재외 한국인은 역시 화교가 대다수였다. 당시 한국은 부동산 등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을 통제하여 외국인들의 활동을 제한했고 화교들도 이때 차별을 심하게 당했다. 이때문에 차별을 못 견디고 한국의 많은 화교들이 홍콩, 대만이나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다 경제성장과 함께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농촌의 미혼 남성들의 결혼 상대로 결혼 이민자에 대한 수요도 크게 증가한다. 이에 따라 산업연수생, 고용허가제등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고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결혼이민자를 불러오게 된다. 결혼이민자에 관한 통계는 외국계 한국인을 참고할 것. 2000년대 이후 귀화자의 대다수는 이들이다.[1] 체류외국인 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2018년 12월 기준으로 단기체류자(90일 이하)와 장기체류자(90일 이상)를 합쳐 2,367,607명이었으며, 2019년에는 250만 명을 돌파했다. 다만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체류 외국인 수가 급감해 210만 명을 기록했다.
2021년에는 197만 명까지 내려갔다가 코로나가 일단락된 2022년부터 회복세를 보이며 2023년에 다시 250만 명을 돌파했다.
3. 통계[편집]
국내에 체류 중인 재한 외국인 통계이다. 물론 귀화한 외국계 한국인이나 체류 목적이 아닌 단순입국자는 통계에 잡지 않는다.
2023년 10월 31일 기준 총 2,496,092명이다.출처
이렇게 재한 외국인의 인구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에, 지진속보 및 지진조기경보에 영어를 병기하고 있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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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이전에는 거의 화교들이었다. 최초의 귀화자가 1957년의 화교 손일승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