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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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니 윤 (Johnny Yune)
본명
윤종승 (尹宗承)
최종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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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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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복수국적)
출생
1936년 10월 22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1] 금석리
사망
2020년 3월 8일 (향년 83세)
미국 캘리포니아어바인
배우자
줄리아 리[2]
종교
개신교
학력
무극초등학교
무극중학교
성동고등학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성악 학사
데뷔
1959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필모그래피



1. 개요[편집]


대한민국, 미국코미디언 겸 토크쇼 호스트. 종교개신교이다. 미국에서는 아시아계 최초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약했다.

본명은 윤종승. 미국식 이름은 'Johnny Yune'이다. 국적회복을 통해 미국과 대한민국 복수 국적을 취득하였다.


2. 생애[편집]


1936년 10월 22일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3] 원래 1959년에 대한민국에서 방송인으로 데뷔한 후 한동안 MC 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대한민국 해군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리고 제대한 후에도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알바를 무려 3개씩이나 하며 공부한 끝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아예 미국에 눌러앉은 그는 1964년부터 뉴욕에서 무명 MC 겸 코미디언 생활을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뉴욕의 '텔 아비브'라는 카페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탠드업 코미디 양식을 개발했으며, 이때부터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가 미국인에게 먹힌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4] 자극적인 소재나 욕설, 폭력 등의 천박한 방법을 하나도 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동양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하, 성적 풍자, 정치풍자 등을 간결하게 툭툭 던지고 넘어가는 식으로 미국인들을 엄청 웃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1977년 뉴욕 최고 연예인상을 받았으며 또 그가 공연하던 산타 모니카 코미디 클럽에서 미국 최고의 토크쇼였던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의 호스트 자니 카슨에게 픽업되었고, 그의 제의를 받아 아시아인 최초로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첫 출연에선 간단하게 스탠드업 코메디만 하려고 했는데, 다음 출연인 대배우 찰턴 헤스턴이 갑자기 사라져서 대타로 20분 가까이 자니 카슨과 함께 시간을 끌어야 했으며, 시간 끌려고,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불러주셨다는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나섰는데 가곡 오 솔레미오였다.[5] 한편 찰턴 헤스턴이 늦게 도착해 착석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자니 윤이 그에게 "내가 당신이 출연한 벤허를 5번 봤었죠."라고 말한다. 헤스턴이 자니 윤의 손을 맞잡으며 정말 고맙다고 말하자, 자니 윤은 "5번 본 건 그 영화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때 영어 대사를 못 알아들어서죠."라고 조크를 쳐서 모두를 웃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잘 대처한 자니 윤의 유머, 재능, 진행력을 자니 카슨이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무조건 한 달에 한번씩은 자니 윤을 초청하라고 피디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6]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니 카슨 쇼에 총 34번을 출연하는 등[7],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 업계의 네임드로서 활약했다. 과장이 아니다. 당시 미국에서 제일 잘 알려진 코미디언 중 하나였다.[8]


위 레퍼토리의 라스베가스 극장 밤무대 버전
같은 레퍼토리지만, 수위가 살짝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한때는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NBC 방송국과 전속 계약을 하며[9] '자니 윤 스페셜 쇼'를 진행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백인들은 함부로 못 건드리는 인종차별문제, 성차별문제 같은 것을 동양계 이민자로서 자기 그런 거 잘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서 툭 건드렸다가 얼른 빠지는 식으로 각종 드립을 치며 넘어가는 게 그의 전형적인 코미디 루틴이었다.[10] 그렇게 수준 높은 고난도 블랙 코미디를 구사하며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뉴욕에서 인기가 떨어지자, 1980년대 중반부터 도박의 도시이자 환락가인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그 당시 카지노 호텔 공연으로 주급을 2만 5천 달러나 받았는데, 당시 1년의 절반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라스베이거스에서만 대략 1년에 60만 달러 이상의 돈을 벌어들인 셈이다. 물론 이 당시 그는 라스베이거스뿐만 아니라 애틀랜틱 시티, 리노, 레이크 타호 등에서도 누구나 인정하는 미국 국민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 미국 국민 코미디언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의 창시에도 큰 역할을 한 미국 코미디계의 전설 밥 호프 등과 함께 각종 호텔 카지노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했고 큰 돈을 벌어들였다.[11]

그 후 서울 올림픽을 4개월여 앞둔 1988년 5월 고국으로 귀국해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성대한 귀국 기념 쇼를 치렀는데 이 쇼가 KBS를 통해 방송되자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부터는 조영남을 보조 MC로 두고 자신이 메인 MC가 된 '자니윤 쇼'를 매주 수, 목요일에 진행하면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12][13] 이 인기로 인해 자니 윤은 고국에서도 스타덤에 올랐고 광고를 여러 개 찍기도 했다.[14] 참고로 자니윤 쇼로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의 나이가 이미 50대 중반이었다.


'자니윤 쇼'는 미국의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 형식을 그대로 들여온 토크쇼로, 진행자의 이름을 내걸고 매회 게스트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본격적인 토크쇼라고 보면 된다. 그 이전에도 11시에 만납시다와[15] 스튜디오 830-가정저널 같은 토크쇼가 있기는 했지만 11시에 만납시다는 사회명사를 초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형식의 대담프로그램인지라 오락적인 요소가 없다시피한 프로그램이었고 스튜디오 830이나 가정저널은 후의 아침마당과 비슷한 형태의 프로그램이라서 교양적인 요소가 다분했던지라 본격적인 토크쇼와는 거리가 멀었다.

점잖게 덕담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확 의표를 찌르며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식의, 순전히 '재치'와 '해학'만 갖고 승부하는 그런 류의 '미국식 유머'는 국내에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1989년 당시 '자니윤 쇼'는 국민 대부분이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큰 인기를 누렸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라, 당시 '자니윤 쇼'가 인기를 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특유의 '야한 농담'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50대 중반의 점잖은 신사 아재가 젊은 여성 앞에서 그런 수위의 색드립을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으나 자니윤이 미국 생활을 꽤나 오래 해서 생긴 어눌한 말투로[16] 그런 종류의 색드립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잠시나마 그럭저럭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아무래도 당시 시대상이 '미국 것이라면 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에 대해 선망이 컸다 보니(나쁘게 말하면 사대주의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미국에서는 다들 그렇게 한다니 우리도 그렇다면 따라야지.'라는 마인드로 버프를 받았던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런 어색한 색드립을 치는 자니윤 앞에서 여성 출연자가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 같은 게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는 대단히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시청자 참여 경품이었는데 프로그램에 사연 엽서를 보내는 형태로 참여하는 시청자에게 아시아나항공이 협찬해 준 왕복 항공권을 선물로 줬다.[17] 지금이야 누구나 항공권 구입이 편리하게 가능하지만 자니윤쇼가 방송되던 시절은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가 이뤄진 직후였으며 항공여행은 웬만큼 소득 수준이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의 일이었기에 꽤 파격적인 경품이었다. 이 쇼 덕분에 당시 신생 항공사였던 아시아나항공은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고 자니윤을 아시아나항공 광고 모델로 섭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성적 코드나 자본주의적 욕망이 담긴 그의 조크에 대해 사회윤리를 해친다며 불편해하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늘어났고, 그가 사회의 높으신 분들을 건드리는 유머를 하면 편집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18] 이에 자니윤이 불만을 가지면서 '자니윤 쇼'는 방송 1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자니 윤이 미국에서 성(性), 정치 등의 민감한 주제를 자유롭게 건드리며 입을 털어도 무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어디까지나 마이너리티인 동양계 이민자라는 것 덕분이었는데, 한국에선 기득권자가 돼버린 그가 그런 얘기를 할 경우 한국 시청자들이 이를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도덕강박증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욕망에 관한 조크를 하면 당시까지 경직된 가치관을 갖고 있던 한국 시청자들이 당황하기도 했으니, 그로서는 답답했을 것이다.[19]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 TV쇼를 때려치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후 SBS의 개국과 함께 '자니윤 이야기 쇼'라는, 이름만 다르고 나머지는 거의 다 똑같은[20]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때 당대 MC 중 최고 연봉으로 계약하며 큰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예전과 똑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결국 얼마 못가 다시 쇼를 관두고 말았다.

2000년대 초반 다시 재기를 시도, 2002년 iTV에서 <자니윤의 What's Up>을 방송했다. 기존 자니윤 쇼와 거의 유사한 포멧으로 진행했지만 중간에 프로그램 이름이 한번 바뀌었고[21] 당시 iTV의 경인지역 외 역외재전송 금지 등의 시행착오 끝에 높은 시청률은 기록하지 못했다. 또 2004년까지 폭소클럽에 종종 출연한 뒤, 방송 커리어를 마감했다.

그럼에도 '자니윤 쇼'를 시작으로 해서 밤으로 가는 쇼, 밤과 음악사이, 주병진쇼, 이홍렬쇼, 서세원쇼, 야한밤에, 놀러와, 야심만만, 힐링캠프 등 오락성 토크쇼들이 심야 시간대에 방송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적지 않다.

그 후로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한국 등을 오가며 무료한 노후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한국 국적을 회복하여 이중국적을 갖기도 하였다. 1999년에는 예순넷의 나이로 18세 연하의 줄리아 리와 결혼했으나, 2010년에 이혼하였다.

2014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에 의한 낙하산 인사였다는 사실이 2016년 말 유진룡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의해 폭로되었다(자세한 것은 유진룡 문서로). 어쨌든 낙하산 인사 논란을 빚었을 당시 국정감사에 출석하여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힌 것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2016년 4월 13일 오전, 뇌출혈병원입원했다. 2017년 12월 말에 한국에서 보도된 바에 의하면, 현재 심각한 치매 상태이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 헌팅턴 요양원에서 홀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치매의 영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자니 카슨 쇼는 기억한다는 걸 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만은 기억하는 듯 보인다. # 최근에는 다소 증세가 호전되어 거동은 힘들지만 외출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이혼한 전 부인이 거동을 도와준다고. 그런데 이 언론 보도 때문에 전 부인 줄리아 리가 '남편이 치매에 걸리자 버렸다'는 대중의 비난을 받자, 이를 억울해하며 반박 인터뷰를 내놓았다. 주요 골자는 이혼은 7년 전인 2010년에 했으며, 그 이후의 방송에서 부부인 것처럼 출연한 이유는 자니 윤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본격연예 한밤' 2017년 12월 26일 방송분에서도 줄리아 리가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위의 반박 인터뷰를 다시 말함과 동시에 '이혼하면서 자니 윤의 대저택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는 소문에 대해 '원래 본인 재산이었다'라며 이혼 서류에도 명시된 두 사람의 개인 재산 목록을 증거로 제시했고, 현재 한국에 있는 이유는 '목 디스크 치료를 위해 일시적으로 귀국한 상태'이며,[22] '치료를 하고 나면 다시 미국으로 가서 자니 윤을 간호하겠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취재진이 직접 자니 윤을 찾아가 인터뷰 해본 결과, 말이 어눌한 것과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본인의 과거에 대해서 아주 기억 못한다는 것은 과장된 보도였음이 밝혀졌다.[23] 또한 '자니 카슨 쇼에 출연하지 않았나' 묻자 "(자니) 카슨이 와야 하는 거지 뭐"라고 대답하고, '자니 윤 쇼에 많은 게스트들이 출연했다'라고 묻자 이번에는 "안 나오면 나한테 맞는 거야"라고 대답하는 등 특유의 농담은 여전하다는 것도 방송되었다.

이후 소식이 없다가 미 현지시간 2020년 3월 8일 새벽 4시경 미국 UC어바인 병원에서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한다. #1 #2 #3 시신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 메디컬센터에 기증하기로 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3. 여담[편집]


  • 그가 '자니'라는 애칭을 사용한 것은, 미국에 건너갔는데 본명인 '종승'이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였기 때문에 이름의 첫 글자인 '종'과 발음이 비슷하고 미국인이 발음하기 쉬운 존(John)을 미국식 이름인 쟌으로 썼고 John의 애칭형인 쟈니를 사용하게 되면서 자니 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종승 → Johnson → Johnny라는 아이디어다.)

  • 로빈 윌리엄스와 대학 동창생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로빈 윌리엄스는 클레어몬트 대학원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이후 줄리아드 스쿨에서 수학하였다. 자니 윤은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성악과를 나와서 바로 파트 타임 가수로 뛰어들었기에 양자의 접점이 없다. 사는 지역부터가 달랐으며 자니윤이 유학한 곳은 오하이오이고 로빈 윌리엄스가 당시에 살던 곳은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였다. 사실 자니 윤은 1936년 생, 로빈 윌리엄스는 1951년 생이다. 로빈 윌리엄스가 대학에 들어간 시기는 1969년으로 이미 자니 윤은 데뷔한지도 몇년이나 지난 뒤였다. 둘 모두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점에서 와전된 말인 듯.

  • 자니 윤의 전성기 당시 인기는 대단했다. 아무래도 전체적인 인지도나 팬베이스로 볼 때 전성기 시절의 브루스 리는 뛰어넘지 못했지만, 브루스 리의 전성기는 지난 지 오래고 또 브루스 리는 자니 윤 전성기 몇 년 전에 죽었으며, 1970년대 말 당시 성룡은 미국에 알려지지도 않았음을 고려할 때, 당시 기준으로 제일 인기 있는 아시아인 엔터테이너는 자니 윤이었다. 그리고 브루스 리는 그냥 미국 국적만 가지고 있었을 뿐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는 않았던 데 반해, 자니 윤은 배우 출신도 아닌 성악도 출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카페의 코미디언에서 뉴욕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나아가 미국 최고 코미디언 중 하나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미국 연예계에서 코미디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큰 것까지 감안하면, 자니 윤의 성공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는 시대적으로도 인종차별이 법적으로만 폐지되었지 인종차별 자체는 계속되었고 흑인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런 시대에 투나잇 쇼 한 번 나오는 것도 영광 중의 영광인데 무려 34회 출연에다 보조 MC, 그리고 전속 출연, 미국 최고급 스타들과의 친분 등은 엄청난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자니 윤 이후 미국 주요 토크 쇼에 자니 윤만큼 많이 출연한 아시아계 미국인 코미디언이나 다른 셀럽은 아직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 KBS 8기 성우인 윤정은이 그의 여동생이며 배우 나시찬[24]은 그의 매제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나시찬의 부인은 수도여자고등학교 교사였던 강모 씨다.(참고)

  • 198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조지 H. W. 부시 지지 연설을 가진 적 있다.

  • 1990년 3월 19일 MBC FM 배철수의 음악캠프 첫 방송에서 스튜디오에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신청곡도 주문했다.

4. 필모그래피[편집]


미국에서 활약할 당시 영화에도 여럿 나왔으나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주연으로 나온 영화 'They Call Me Bruce?(1999년 9월 1일 SBS에서 내 이름은 브루스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는 100만 달러 이하 제작비로 만들어 북미 박스 오피스에서 1,689만 4,678달러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전형적인 3류 영화에 불과하다.[25] 어쨌든 이 흥행에 힘입어 1987년에 속편 'They Still Call Me Bruce'[26]에 나왔으나 철저하게 망했다. 이게 마지막으로 나온 미국 영화가 되었다.


1979년에 만든 '지구의 대참사'(Meteor)에서 극지방 사람으로 나와 지구로 추락하는 혜성을 보고 놀라 비명지르는 엑스트라로 나온 바 있다. 이 영화 숀 코너리, 나탈리 우드, 헨리 폰다, 마틴 랜도같이 배우진은 화려한데 자니 윤이 나온 것은 그야말로 묻혔다. 그밖에 1986년 영화로 바로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나온 코미디 영화 '광고 대전략(Nothing in Common)'에서도 엑스트라로 나온 바 있으나 이거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영화 감독은 프린세스 다이어리 시리즈, 한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된 영화 환상의 커플, 귀여운 여인 감독으로 유명했던 게리 마셜이다.

그밖에 미국에서 찍은 한국영화 '햄버거 자니'라는 영화는 흥행이나 평에서 망했다.[27] 성룡이 엑스트라를 겨우 벗어난 수준으로 나온 미국 영화 캐논볼에서는 성룡을 인터뷰하는 TV속 화면으로 나와 몇 마디하기도 했다.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강수연, 정보석 주연 한국영화 '웨스턴 애비뉴'(1993). 2004년에는 SBS 월화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에 미국내 거대 로펌회사의 대표로 출연하기도 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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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금왕읍.[2] 18세 연하로, 이혼한 후에도 요양원에 있는 자니 윤을 위해 옆에서 도와 주었다.[3] 이주일보다도 4살이나 더 많은 고참급 코미디언이다.[4] 뉴욕에 발을 들여놓은 첫 해에만 7만 5천 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 변두리 지역의 아파트가 1채당 오륙백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20-30여채는 사도 남을 돈이었다.[5] 한국어 노래를 예상하고 있던 시청자들에게 조크를 던진 것. 자니 윤은 첫부분은 이태리어로 중간 이후는 한국어로 불렀다.[6] 물론 당시 미국 최고의 프라임 타임 토크쇼 《투나잇 쇼》에 무려 20분 가까이나 게스트로 나온 것은 자니 윤으로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당시 투나잇 쇼는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레잇 나잇 쇼(심야 토크쇼)로서 토크쇼가 몇 개 없던 그 당시(미국도 이 시절에는 케이블TV가 갓 생기던 시절이다.) 토크쇼하면 투나잇 쇼였는데 이 쇼에 나오는 것은 모든 코미디언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 쇼에 들어가는 건 소셜 미디어도 케이블 TV 보급도 거의 없던 70년대 말 당시에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당시 투나잇 쇼 1번 출연은 지금 유튜브 조회수 1000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쟈니 카슨 다음의 호스트였던 제이 레노도 70년대에 이 쇼에 나온 것이 그의 커리어의 출발점이었다.[7]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시아계 최초로 이 쇼의 보조 MC까지 했었다. 보조 MC는 게스트만큼이나 중요하다. 호스트나 게스트의 조크를 맞받아치는 등의 고도의 코미디 스킬이 필요하다. 또한 34번이면 스탠드업 코미디언 중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근데 그 시기가 70년대 80년대라 한국에 적게 알려졌지만 자니 윤의 명성은 대단했었다. 89년 한국 오기 전까지도 유명 스타들과 같이 공연도 하고 골프도 쳤을 정도니 말이다. 34번은 그냥 숫자가 아니다. 그 당시 NBC의 인기, 특히 투나잇 쇼의 인기는 최고였다. 코미디의 새 평을 연 쎄러데이 나잇 라이브 역시 1975년에 첫방송을 한 시기였다. 그 당시는 지금이랑 많이 달라서 하나가 독점할 수 있는 시대였다. MTV조차도 1981년에 개국했으며 미국 전체로 퍼지기 시작한 건 케이블 TV의 구매가 늘어난 82년 말~83년 초다. 그때 마이클 잭슨이 맹활약해서 일약 케이블 TV에 불과하던 초기 MTV를 지상파급으로 올려놨다. 근데 자니 윤의 시대는 이보다 몇년 전으로 아주 달랐다.[8] 특히 전성기였던 1978년에서 1980년 사이에는 무려 14번이나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참고로 그 당시 '투나잇 쇼'의 1회당 출연료가 2만 5천 불이었다고 한다. #[9] 미국 4대의 지상파 중 하나가 없던 시대였다. FOX 말이다. FOX는 1986년에 개국했지만 자니 윤 스페셜 쇼는 그 전이다. 이 당시 NBC는 특히 엔터테인먼트 부분에선 미국 최고의 방송국이었다.[10] 얼핏 보면 동양계 이민자라는 배경을 활용하여 개그 참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류의 자학개그도 사실 동양인으로서 쉽게 갖출 수 없는 자니 윤 특유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상당한 시사적 식견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니 윤은 미국 이민자 1세대다.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 당시 영어공부하기는 지금보다 수십 배는 어려웠음에도 그 언어를 정복해 유머를 구사하고 미국 사람들을 웃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11] 큰 돈도 돈이지만 같이 한 프랭크 시나트라와 밥 호프는 미국 음악계와 코미디계에서 각각 최고 대접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각 업계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과 함께 공연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자니 윤의 명성을 말해준다.[12] 백밴드는 송골매였다.[13] 참고로 미국은 이런 방식의 토크쇼를 무려 주 5회나 한다. 그 대신 거의 빠짐없이 주 1~2회하는 우리나라랑은 다르게, 미국은 몇 주 동안 빠짐없이 주 5회 한 다음에 1~2주 정도 쉬는 방식이다. [14] 세제 "하모니"를 광고한 적이 있는데, "하모니 알아요?" 하는 광고의 대사가 "하문이 알아요?"로 들리는 바람에 당시 인기가 높던 그룹 출신 미남 가수 조하문이 자니 윤 아들이라는 헛소문이 돌기까지 하였다.[15] 자니윤쇼도 11시에 만납시다랑 월요일과 화요일 시간대를 차지한 프로그램이다.[16] 해외에서 현지인들과 부딪히며 오랫동안 영어를 구사하며 살아온 교포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어눌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만 16년을 운동선수로 살았던 박찬호도 발음이 약간 어눌한 편이다. '투 머치 토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말을 잘 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달변가이지만 발음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셈이다.[17] 이 당시 자니윤은 시청자에게 항공권 경품 전달 사실을 고지할 때 "일본 주요 도시는 물론 국내 어~디에나 가실 수 있는 항공권을 드린다"고 말했다. 국제선 항공권으로 갈 수 있는 지역이 일본으로만 한정됐던 것은 그 당시 아시아나항공에 부여된 운수권이 일본 노선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이 미주 노선에 취항한 것은 자니윤 쇼가 없어진 1991년 10월의 일이었고 현재처럼 세계 주요 대륙을 오갈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18] 당시 '유머일번지'나 '쇼비디오자키'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노태우가 표현의 자유 보장을 약속하면서 어느 정도 시사풍자가 허용되었고, 방송자유화가 노조 주도로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정부 비판적인 시사프로그램들이 등장했음에도, 아직도 방송사 내에서 정권 눈치 보기적인 심의가 없지 않아 있었다. MBC 베스트극장이 방송사 내의 일을 풍자하는 드라마를 내놓았다가 후폭풍이 불면서 한 동안 폐지되었다는 후문도 있다.[19] 예를 들어 자니 윤이 자니윤 쇼에서 한 조크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자기 아내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킬러를 고용했다. 킬러는 일을 해치운 뒤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원하시는 대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그런데 증거는 완전히 없앴겠지?" "네, 완전히 인멸했습니다" "사용한 총은 어떻게 했나?" "거기 있는 스위밍풀에 던졌습니다" "응? 우리집엔 스위밍풀이 없는데?" "뭐라구요?" "주소 XXX가 485번지 맞아?" "네? XXX가 458번지 아니었나요?"[20] 간주 등의 현장 연주를 채널 식스라는 이름의 전속 밴드가 맡았던 점 등.[21] 자니윤 이야기쇼로 바꿨다.[22] 즉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23] 자니 윤 쇼 출연 게스트 중 기억나는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자 강호동, 신성일 등을 언급했다.[24] KBS 8기 탤런트로 1981년에 사망. 대표작으로 전우(1975년)가 있다.[25] 만약 영화로 성공했다면 에디 머피처럼 영화로도 성공한 코미디언이 되었을 것이다.[26] 1999년에 SBS에서 '아직도 내 이름은 브루스'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했다. 참고로 자니 윤 목소리의 한국어 더빙은 양지운이 맡았다.[27] 용팔이 시리즈를 만든 설태호 감독의 1988년 작품이며 샌프란시스코를 올 로케한 작품이다. 여담으로 주인공인 여배우가 가수 설운도의 부인인 이수진이다.[28]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 김래원이 자니 윤과 김태희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