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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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적도 기니 국기.svg
파일:적도 기니 국장.svg
국기
국장
통일, 평화, 정의
Unidad, Paz, Justicia

면적
28,051km2
인구
1,702,908명(2022년) | 세계 152위
수도
말라보
신수도(예정)
시우다드데라파스
최대도시
바타
국가
우리의 거대한 행복의 길을 걷자
(Caminemos pisando las sendas de nuestra inmensa felicidad)
공용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기타 토착어[1]
정부 형태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전체주의
민주주의 지수
1.92점, 권위주의 (2023년)
(167개국 중 156위)
대통령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부통령
오비앙 응게마 망구에[2]
총리
프란시스코 파스쿠알 오바마 아수
민족구성
부비족, 이보족, 팡족, 벵가족
종교
가톨릭 94%, 이슬람교, 토착종교
UN가입년도
1968년 11월 12일
통화
CFA 프랑/중앙아프리카
남북수교현황
대한민국 : 1979년 9월 14일
북한 : 1969년 1월 30일
교민 수
214명
여행경보
여행유의 : 전 지역


1. 개요
2. 자연
3. 역사
3.1. 스페인령 기니
3.2. 스페인 내전
3.3. 독립 이후
4. 정치
5. 인권 탄압
5.1. 블랙 비치 교도소
5.2. 추가 자료
7. 문화
7.1. 언어
7.2. 스포츠
7.2.1. 축구
10. 여행
11. 기타
12. 지도



1. 개요[편집]


아프리카 중서부에 있는 나라. 수도는 말라보. 인구는 1,702,908명이고 영토는 28,051km²로 유럽벨기에와 비슷한 크기다. 기니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니 주의하자.


2. 자연[편집]


대륙에 카메룬가봉 사이에 끼어 있는 본토가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수도 말라보는 본토에서 뚝 떨어진 비오코 섬에 있다. 덴마크[3]아부다비와 비슷한 경우. 다만 다른 둘은 섬이라도 육지랑 매우 가까워 그냥 육지나 다름없는데, 말라보가 있는 비오코 섬은 꽤 멀찍이 떨어져있다. 오히려 적도 기니 본토보다는 카메룬과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며, 카메룬의 최대 도시인 두알라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원래 본토의 제1도시인 바타가 수도였는데 본토에서 이격된 저 멀리 외딴 섬에 있는 말라보로 수도를 옮겼다. 현재 말라보는 수도이자 제2도시의 위치에 있다. 이 때문에 본토 지역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비오코 섬 사람들이 다 해먹는다며 그냥 비오코 섬 중심의 적도 기니 중앙 정부로부터 분리독립을 하자는 여론도 간간히 나오고 있다. 결국 여러모로 문제가 되자 본토에 신수도를 건설하고 있다. 기존의 신수도 이름은 오얄라(Oyala)였으나 2017년에 시우다드데라파스(Ciudad de la Paz)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름과는 달리 적도본토를 통과하지 않는다.[4] 그저 적도와 가까울 뿐이다. 다만, 안노본 섬과 나머지 영토 사이 바다로 적도가 통과한다. 안노본 섬상투메 프린시페와 가까운 섬으로 이 섬의 문화는 스페인보다 포르투갈의 문화에 더 근접해 있다.


3. 역사[편집]






3.1. 스페인령 기니[편집]


파일:spanish guinea colony.png

스페인어가 공용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스페인령 기니(Guinea Española / Spanish Guinea)'로 불렸던 스페인식민지였다. 원래 수도가 있는 비오코섬을 1472년포르투갈인 탐험가였던 페르낭 두포(Fernão do Pó)가 발견하였고, 1447년포르투갈 왕국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788년 엘파르도 조약(Treaty of El Pardo)으로 나중에 스페인 왕국의 식민지로 넘어갔다. 근대까지 이곳은 아메리카로 보내지는 흑인 노예무역이 번성했으며 이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쿠바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다시 아메리카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한때 영국 노예상들도 이 삼각무역의 일원이 되어 노예무역 단속을 위해 영국군이 파견된 적도 있었지만, 1844년 스페인과의 협의로 남은 영국인들은 영국령 시에라리온으로 떠났다.

본래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했던 스페인령 기니는 나이저강에서 남쪽으로는 가봉의 오고웨강(Ogoou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 패배 후 맺어진 파리 조약(1898)으로 스페인령이었던 북쪽과 남쪽은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넘어갔다. 스페인은 남아있던 안노본 섬, 비요코 섬과 리오무니(Rio Muni)를 10개 지역으로 합쳐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아무튼 스페인은 이 지역을 점유한 이래 코코아와 같은 상품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개척하고자 했고, 한 때 스페인령 기니의 코코아 수출량은 세계 5위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비요코섬과 리오 무니 원주민들의 인구가 감소하고, 국제 매판자본이 투입된 강제노동으로 지탄을 받아 한때 유럽에서 적도 기니산 농산물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국제여론에 밀린 스페인은 1913년 노동법을 개정하고, 1926년, 식민지인의 법적 권리를 규정한 새 법률을 통과시켰다.

한편, 스페인 본토와 쿠바에서 유입된 인구는 페닌술라르(Peninsular)로 불리는 지배계층이 되었고,[5] 에만시파도스(Emancipados)라 부르는 스페인인과의 해방노예의 혼혈인구가 그 다음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대규모 플랜테이션 산업으로 적도기니는 인구 유출입이 매우 활발했는데,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봉 등에서 대규모 계약직 노동인구가 유입되었고,[6] 상당수는 적도 기니에서도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팡족(Fang)이 이웃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로 넘어가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현재도 카메룬가봉에는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인구가 존재한다.[7]


3.2. 스페인 내전[편집]


1936년 7월, 왕당파 소텔로의 암살과 함께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을 당시, 내전 발발 후 단 며칠 만에 반란군 손에 넘어간 스페인령 모로코스페인령 사하라와 달리 스페인령 기니는 인민전선의 충실한 영토로 남아있었다. 의외로 식민지 지배층과 흑인 중산층은 공화파 인민전선에 확고한 지지를 보냈으며 비오코 섬에 입항한 스페인 해군 경순양함 멘데스 누녜스(ESPS Méndez Núñez)에서 일어난 반란도 수병들이 침착하게 진압시켰다.

그러나 공화파에서 별다른 신경을 못 쓴 사이, 마침내 9월 19일 루이스 세라노(Luis Serrano Maranges)가 지휘하던 기니 식민지 경비대(Guardia Colonial)가 봉기하여 수도 말라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세라노는 프랑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독의 역할을 맡았으며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파로 합류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본토구역인 리오 무니(Rio Muni)는 부총독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ández)의 지휘 하에 여전히 공화파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양 측의 내전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에쿠쿠 강 근처 교전에서 세라노측이 이끄는 반란군이 승리하여 스페인령 기니 전역은 국민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희생도 있었다. 승리한 프랑코 정부는 기니 원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38년 보다 세분화된 신분법과 자결권을 부여하였으며, 학교, 병원시설을 확충하였다. 사실 프랑코 정부는 모로코에서도 무어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형식적으로나마 모로코 독립을 언질하기도 했고, 무어인의 지위상승과 뜬금없는 이슬람교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는 등, 오직 공화파를 꺾기 위해 식민지인들을 상대로 갖은 유화책을 보여주었으니 딱히 특이한 점은 아니다.


3.3. 독립 이후[편집]


2차대전 후 스페인령 기니는 약간의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여전히 스페인 본토에서 파견된 총독과, 원주민, 비 원주민을 구별하는 법률제도와 정책은 원주민들로 하여금 독립의 열망을 싹트게 했다. 때마침 전후 불어온 탈식민주의 흐름에 따라 독립 여론이 일어났고, 1959년 최초로 원주민 출신 의원이 당선되었으며 공식적인 명칭도 적도 기니(Guinea Ecuatorial)로 바뀌었다.

마침내 1968년 8월 11일 첫 선거와 함께 적도기니는 독립했다. 1968년 9월 22일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0월 12일에 공식적으로 독립이 인정되었다.

파일:macias nguema.jpg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독립 이래로 철권 독재 정치를 펼쳤다. 독립은 했지만 대부분의 자본이 식민지시절 엘리트계층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부는 매우 고르지 않게 분배되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1970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일당제를 선포한 후 1972년 7월 14일부터 종신 대통령직에 등극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대파들 186명을 축구 경기장에서 처형시키고, 비아프리카적이라는 이유로 서양 의학 금지, 외국으로 국민들이 달아날까봐 배(船)와 낚시 금지 등의 기행을 자행해대는 통에 11년에 달했던 통치 말기에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던 조그만 나라에서 5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해외로 탈출하며 인구가 25%가 줄 정도의 생지옥이 되었다.[8] 그리고 우상화 정책도 실시하여 1978년에 바뀐 적도 기니의 국가표어는 대놓고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 신은 없다(No hay otro Dios que Macías Nguema, There is no other God than Macías Nguema)"였을 정도였다. 그외에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응게마가 집권할 동안 저지른 학정이 도를 넘은 나머지 응게마에게는 무려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9]

결국 1979년 8월 3일에 적도 기니의 방위군 대장이자 강제수용소였던 '블랙 비치'의 소장이던 응게마의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쿠데타를 일으켜[10] 삼촌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후 동년 9월 29일에 처형하고는 정권을 잡았다.[11]

그러나 그 조카 오비앙 응게마도 삼촌보다는 온건하지만 여전히 폭압적 독재자로 2024년 현재까지도 45년째 집권 중이며, 장기집권한 독재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집권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12] 2006년에는 고문금지법에 서명하고 2022년에는 사형 폐지를 선포했으며, 1996년에 로또처럼 터진 석유 덕분에 경제적인 성과는 괄목할 만 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인권침해는 계속되고, 석유를 통해 벌어들인 국부는 오비앙 응게마의 친척들이 주무르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민주국가는 아닌 셈이다. 실제로 오비앙은 2013년 8월에 북한에서 주는 '국제김정일상'이라는 상의 제1회 수상자가 되었으며, 2017년에는 부정선거 이후 쿠데타 시도가 보고되자 이를 자작극 의혹까지 돌게 만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2004년에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실패했는데 여기에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아들인 마크 대처가 쿠데타가 성공하면 석유 채굴권을 확보해 돈을 얻고 싶다고 공범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마크 대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체포되었다.

2020년 8월 14일에 적도 기니의 내각이 총사퇴를 하였다. # 2021년 3월 7일에 적도 기니의 군막사에서 연쇄폭발이 일어나 105명이 사망했다. #

4. 정치[편집]




적도 기니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17점
2023년, 세계 172위
언론자유지수
50.35점
2023년, 세계 120위
민주주의 지수
1.92점
2023년, 세계 156위

대통령제 국가이며 대표적인 독재 국가이기도 하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초대 대통령이 폭정을 펼친 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그의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1979년부터 45년째 독재 형태로 대통령을 하고 있다. 그의 장남인 테오도로 은게마 오비앙 망게가 부통령을 하고 있는데 거액의 현금과 보석을 숨겨 브라질에 입국하려다가 적발되어 강제 귀국 당하기도 했다.


5. 인권 탄압[편집]


적도 기니는 부정부패와 인권 탄압 문제로 악명이 높다. 1960년대부터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마시아스 응게마,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로 이어지는 응게마 가문이 통치[13]하고 있으며, 북한, 에리트레아, 투르크메니스탄, 시리아 등의 국가들 다음으로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2023년 기준으로도 적도 기니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총합 5점(정치적 권리 0점 + 시민의 권리 5점)을 기록해, 195개국 중 190위를 기록했으며, 적도 기니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북한&에리트레아(3점), 투르크메니스탄(2점), 시리아&남수단(1점) 이렇게 단 5개국밖에 없다.[14] 아프리카에서 적도 기니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나라는 에리트레아와 남수단 단 2개국밖에 없다.

일단 적도 기니는 피의자고문하는 것이 정상적인 수사 수단일 정도라고 하며[15], 결사 및 집회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받아 정부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간주하는 토론을 위해 10명 이상의 개인 가정 모임도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데다가, 보안군들은 공공 장소에서의 모임이 아무리 소규모라 할지라도 빠짐없이 감시하고, 정당과 종교 단체는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법무부에 공식적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이 승인 절차에만 일반적으로 몇 년이 걸린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도 없어서 모든 간행물이 검열을 받는 것은 물론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을 비판하는 만화를 그린 만화가가 구금되기도 했으며, 특히 성직자가 유난히 표현의 자유에 제약이 많고, 전화 통화는 도청되고 이메일도 불법적으로 모니터링되고 있다. 물론 언론의 자유도 없어서 2006년 기준으로도 수도에 서점과 신문이 없을 정도였고, 라디오 방송국만 하나 있는데 이마저 응게마의 아들 소유에 시민들에게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짓밟힐 것이라고 경고하는 노래를 방송하고 2004년 총선에서는 야당 활동가들을 대놓고 국가의 적이라고 부른 전적도 있는 완벽한 어용 언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국경 없는 기자회가 평가한 적도 기니의 언론자유지수는 2019 ~ 2020년에는 165위, 2021년에는 164위를 기록해 매우 낮은 수치를 보여줬으나 2022년에는 141위로, 2023년에는 120위로 급상승해며 이전에 비해서는 언론 활동이 자유로워지긴 했다.[16]

그리고 적도 기니에는 이동의 자유도 없는데, 적도 기니 국민들은 해외 여행과 이민도 제한되고, 비록 마시아스 응게마 시절처럼처럼 대놓고 국내 여행까지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한 것은 결코 아니긴 하나[17] 도로마다 있는 검문소에 상주하는 부패한 경찰들이 수도 외부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돈을 일상적으로 갈취한 뒤에야 여행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박탈했다.[18] 늦어도 2001년까지는 문자 그대로 국내 여행을 하기 위해서도 허가를 받아야 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1995년에 UN이 작성한 보고서1996년/1998년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이는 반체제 인사에 한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19]

그리고 오비앙 응게마는 헌법으로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정하고 임기 횟수의 제한을 아예 없애버린 데다가 국가원수에 대한 탄핵을 대놓고 헌법으로 금지시키는 등 자신에게 영구 집권 가능성과 광범위한 권력을 부여하기까지 했으며 자기에게 반대하는 정치인 대부분을 숙청하여 550여명에 이르는 반 오비앙 활동가들을 투옥 또는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다가 사법부의 독립은 존재하지 않으며, 피해자는 사법부에 항소 등의 보호를 요청할 수도 없고, 해외에 망명한 정적에 대한 납치가 정부의 승인 하에 일어나는 데다가[20], 이렇게 납치를 당하는 사람들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되고, 2007년 6월에 UN 산하 기구인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 그룹(WGAD)은 적도 기니에서는 정치범이 민간 법원이 아닌 군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적도 기니에서는 부패한 경찰들이 사람들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뇌물을 갈취하는 일이 잦다.

보안군이 정기적으로 집을 수색하고 영장 없이 거주자를 체포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 일은 흔하고, 야당 소속의 국회의원들, 인권 운동가들, 반정부 인사들이 날조된 혐의가 적용되어 아무런 기소 절차도 없이 몇 달 동안 구금되는 일과 정적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음모를 조작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국제앰네스티 적도기니 연구원 마리스 카스트로(Marise Castro)의 말로는 적도 기니에서 신속한 처형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이런 상황인 만큼 적도 기니의 야당 정치인의 90%가 망명 중일 정도다.


5.1. 블랙 비치 교도소[편집]


교도소에서도 온갖 종류의 인권 탄압이 이어지고 있는데, 수도 말라보에 있는 블랙 비치 교도소는 마시아스 응게마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가장 열악한 교도소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아프리카 교도소가 열악한 건 어디나 같지만 여기는 정치범이나 흉악범들을 잡아 가두는 곳이라서 아예 사람대접을 안 한다. 가족 면회도 금지되어 수감자의 가족들은 수감자의 생사조차 모를 정도라고 하며, 의사는 고문으로 다친 사람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는 데다가, 음식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수감자의 가족과 동료 수감자들이 제공해야 하는 마당에 굶어 죽는 재감자가 나오고 있으며, 더럽고 습한 감방에는 침대는 물론이고 화장실조차 없고, 이런 감방에 남성과 여성이, 성인과 청소년이, 미결수, 정치범과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함께 수감되는 경우도 흔하며, 심지어 한 헌병대 구금 센터에서는 4m*1.5m, 쉽게 말해 고작 1.8평 정도의 좁고 화장실도 없는 감방에 17명(어린이 4명 포함)이 구금되었다는 사례도 보고되었다.

게다가 보안군들은 수감자 또는 용의자의 친척을 구금하여 수감자 또는 용의자들이 굴복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어린이, 임산부 가리지 않고 수용소에 가두고 있으며, 여성 수감자들은 교도관들과 다른 수감자들에게 교도소의 승인 하에 강간당하고, 심지어 독방에 갇힌 정치범들은 발에 족쇄를 찬 채 그 어떤 운동도 허락되지 않으며 길게는 4년 동안 독방에 수감되어야만 했다. 수감자들에게 가해지는 고문도 구타는 기본에 채찍질, 팔다리를 묶고 공중에 매달기, 더러운 물에 머리 담그기, 알몸에 끓는 물 붓기, 성기에 전기고문하기, 담뱃불로 지지기, 윤간, 성고문, 신체 절단 등 참혹하기 그지없다. 이 참혹한 교도소에서 사망한 사람이 있으면 교도소측은 가족들에게 사망 사실을 숨기고는 비밀리에 매장한 후 며칠 뒤에야 사망 사실을 알린다.

물론 교도소 처우마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2004년에 마크 대처가 관여한 쿠데타를 저지르다 걸린 영국 출신 용병들은 괜찮은 교도소에서 적당한 대우를 받다가 몇 년 뒤 조용히 영국으로 보내지는 등 나름 힘센 국가의 고위층들은 대우를 받는 편이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건 언제까지나 용병들의 배후였던 마크 대처가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지, 일반 영국인 용병이 이런 짓 하다가 잡혔다면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으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이 영국 출신 용병들의 지휘관인 마크 대처는 어머니가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였던 데다가 어머니가 보내준 보석금 덕분에 교도소 근처도 가지 않고 집행유예를 받았다.


5.2. 추가 자료[편집]



6. 경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적도 기니/경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섬나라인 세이셸,[21] 모리셔스를 논외로 치면 가봉, 보츠와나와 함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히지만, 실제로는 1인당 GDP 수치만 높은 편이지 빈부격차가 워낙 극단적으로 심해 '평균의 함정'을 고려하면 삶의 질이 매우 낮다.

과거에는 목재와 커피, 카카오 등 1차 생산물을 위주로 수출하는 최빈국이었다. 비록 독립 무렵인 1968년에는 세계은행이 추계한 1인당 GDP가 214$(2023년 환율로 약 1,866$)로 집계되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어느 정도 1인당 GDP가 높은 나라로 분류되긴 했으나,[22] 당시에도 대부분의 돈은 스페인인들과 스페인에 협조한 기득권층들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적도 기니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가야만 했다.[23] 게다가 마시아스 응게마의 쇄국 정책과 반지성주의적인 폭압 정치 때문에 서구권과의 무역은 사실상 단절되고 국가 발전에 쓸 만한 인재와 성장 잠재력을 모두 잃어버려 오비앙 응게마 집권 초반기인 1980년부터 1995년까지는 1인당 GDP가 100~200$대[24]박스권을 맴도는 극빈국으로 전락했다.

1996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253$(2023년 가치로 503.6$)도 되지 않는, 전혀 눈에 띌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아프리카의 소국인 이 나라에 석유가 발견되어 그야말로 대박이 나고야 말았다. 1996년에 유전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추산된 잠재 매장량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무려 3위였던 것. 당시 인구가 58만 명에 불과하던 소국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전이 발견되었으니 말 다했다.

이런 오일 파워에 힘입어 2000년대 중반에는 GDP 성장률이 18%대를 찍고 2012년 1인당 GDP가 22,343 달러에 달하는 등, 도저히 아프리카 나라라고 믿겨지지 않는 경제 지표를 자랑했다. 독재자 오비앙 응게마로서는 로또 맞은 셈[25]. 다만 2019년 기준으로도 수출의 89%를 석유 관련에 의존하고 있어 국제 유가에 따라 해마다 국내 총 생산의 변화 폭이 심하다. 세계 경제 위기에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뛰었던 2008년에는 적도 기니의 1인당 PPP가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뛰어넘기도 했다. 심지어 그 당시 적도 기니의 1인당 PPP는 미국보다 높았다. 아프리카 국가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적인 기록을 남긴 셈. 덤으로 UN 통계 기준으로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적도 기니의 1인당 GDP가 한국보다도 높았다.[26]

다만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떨어진 2015년 이후로는 국가 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1인당 GDP가 2008년 수준의 반토막이 나버렸다. 거기다가 2012년부터 적도 기니의 석유 매장량이 감소하는 추세이며, IMF에 따르면 적도 기니의 석유는 새로운 매장량이 발견되지 않으면 2035년에 완전히 고갈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2대에 걸친 응게마 일가가 국가 발전의 잠재력을 완전히 갉아먹었으니 석유가 고갈되면 에리트레아와 비슷한 극빈국 +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판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극단적인 빈부격차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원의 축복'을 전혀 누리지 못했기에 적도 기니 경제가 파탄나더라도 일반적인 주민들의 생활은 나우루, 베네수엘라 같은 폭락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

한때는 아프리카에서 한국보다 1인당 PPP가 앞서는 유일한 나라였지만, 2017년 10월 IMF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이 다시 적도 기니를 추월하면서 2017년 10월 기준 아프리카에는 한국보다 1인당 PPP가 높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IMF에서 나온 다음 표를 보자.

연도
적도 기니
대한민국
콩고민주공화국
1980년
$144
$1,689
$519
1990년
$295
$6,308
$227
1995년
$262
$11,779
$116
2000년
$1,970
$11,947
$397
2005년
$13,129
$18,657
$213
2008년
$23,347
$20,474
$310
2010년
$17,441
$22,151
$311
2015년
$11,120
$27,221
$456
2018년(추정치)
$13,350
$32,775
$478
2019년
-
-
-
2020년
-
-
-
2021년
-
-
-
2022년
-
-
-

당연히 기름을 노리는 서방 각국 매의 눈이 총출동해 있으며, 2004년에는 마가렛 대처의 아들인 마크 대처가 적도 기니 쿠데타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

그럼 아프리카의 소자원 부국으로 국민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하기도 불가능한 것이 상술한 것처럼 정치와 인권 실태가 막장 그 자체이다. 국민 소득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아프리카에서 천국 취급을 받았겠지만, 대통령 오비앙 응게마를 위시한 기득권층들이 해먹는 부패 정도가 워낙 커서 여기도 전국민이 고루 혜택을 받지 못하기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 게다가 그 정도가 매우 심해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나라의 거의 모든 돈을 갖고 있으며 대다수의 국민들은 먹고 살기가 많이 힘든 수준이다. 빈부격차로 악명 높은 BRICS, 멕시코 같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수도와 지방이 아예 다른 나라 수준인 북한조차 적도 기니와 비교하면 부의 배분이 잘 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09년 기준으로 적도 기니는 소수의 지배층이 국부의 98%를 차지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나우루, 베네수엘라와 함께 전형적인 자원의 저주의 예시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더군다나 잘 나갔을 때 나우루 국민들은 공짜 해외유학에 고급 승용차를 소유했고, 오히려 너무 잘 먹고 잘 산 나머지 빨래와 요리하는 방법까지 잊어버리게 되면서 옆 나라에 가서 배워야 했을 정도가 되었고, 베네수엘라 국민들도 무상의료를 받는다던지 국영 슈퍼마켓에서 생필품을 싸게 살 수 있다던지 국가로부터 어행비 보조를 받고 해외여행을 갈 수 있었기라도 했는데, 그런 혜택도 받아보기는 커녕 석유가 발견되도 이전과 전혀 나아질 바가 없는 삶을 사는 적도 기니 국민들은 훨씬 더 불쌍하다 할 수 있다. 그래도 적어도 내전을 겪은 적은 없고 나라가 사실상 분열된 상황까지는 아니기에 같은 대륙의 소말리아, 콩고민주공화국, 남수단, 차드 등의 파탄국가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2023년 기준 취약국가지수도 42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말라위, 르완다[27]보다 높고 방글라데시, 이란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마다가스카르는 1인당 소득이 이 나라의 1/20도 되지 않지만 동년 기준 취약국가지수는 49위로 오히려 적도 기니보다 낮다.

2024년 IMF 통계 기준 1인당 GDP는 6,500달러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코소보보다는 높긴 하지만 몰도바, 콜롬비아보다도 낮고[28] 세계 평균(13,870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만큼 이제는 표면상으로나마 할 수 있던 중진국 체면치레도 불가능해졌다. 남아공은 그래도 아프리카 GDP 규모 1위[29]인 만큼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할 수 있지만 적도 기니는 이조차도 완전히 불가능하다.

통화는 독립 직후 적도 기니 페세타를 거쳐 고유 화폐단위인 적도 기니 에크웰을 사용했으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1985년부터 중앙아프리카 프랑을 도입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적도 기니가 아프리카의 유일한 스페인어권 국가란 것을 감안하면 매우 독특한 점.


7. 문화[편집]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선 유일하게 스페인어 사용국이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비오코 섬은 스페인 문화가 남아 있고 스페인어가 사용되지만, 육지 지역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서 프랑스 문화와 함께 토착 문화가 남아 있다. 안노본 섬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다가 스페인에게 넘어갔지만, 포르투갈의 문화와 영향이 남아 있다.


7.1. 언어[편집]


(지위가 애매한 서사하라를 제외하면) 아프리카에선 유일한 스페인어 사용국이라서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다. 그 외에도 프랑스어도 공용어에 포함되어 있어서 프랑코포니 회원국이다. 또한, 팡어를 포함한 토착어도 쓰이는데, 나라가 작고 인구도 적어 다른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여러 부족들이 섞여 있으나 팡족(Fang)이 80% 이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에 쓰이는 것이다. 비오코 섬 지역에선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고, 육지 부분은 프랑스어와 팡어가 쓰이고 있다.

한때는 포르투갈어가 공용어인 적도 있었고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에도 가입되어 있다. 이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 이전에 포르투갈의 지배를 잠깐 받았던 것과 포르투갈어권인 상투메 프린시페가 인접국인 것을 구실로 가입한 것이다. 그러나 적도 기니에서 포르투갈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정치적 목적으로 명목상으로만 헌법에 잠시 등록했을 뿐이고, 2012년에 개헌하면서 포르투갈어는 공용어에서 빠지게 되었다.


7.2. 스포츠[편집]


이 나라가 작은 화제가 된 일이라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수영 100미터 경기에 나온 에릭 무삼바니 때문이다. 대회에서 꼴찌를 하고 자세도 너무나도 엉성했지만 그래도 완주를 했던 그는 정작 수영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온 아마추어였다. 이 나라에는 수영장이 고작 20미터짜리 호텔 수영장이며 거기서조차도 연습도 별로 못한 채로 나와서 성실하게 완주하는 자세를 보여 화제가 되었다. 링크 그 유명세에 독재자인 오비앙 응게마는 기분 나쁘게 여겨 호텔 수영장 훈련 시간조차도 금지시키는 짓을 저질러버렸다. 결국 2004년2004 아테네 올림픽에는 나오지 못했다. 이 부분은 2018년 9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7.2.1. 축구[편집]


적도 기니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가봉과 공동 개최하여 대회 8강에 올랐으나 씁쓸한 8강이다. 사실 공동 개최국인 가봉의 8강 진출이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둘 다 8강에 진출했지만 링크된 기사를 보면 적도 기니의 8강은 돈으로 이루어진 귀화 선수들로 이뤄졌다. 그나마도 잠비아에게 패하며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되려 튀니지, 모로코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대상으로 전승을 거두며 올라간 가봉이 더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하튼 8강전 상대는 바로 드록신이 있는 코트디부아르. 결국 드록바에게 2골 허용하면서 3:0 완패로 8강에서 탈락했다.

201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선 최종 예선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원정에서 당한 0:4 대패를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했다.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선 2차 예선에서 모리타니를 상대로 합계 3:1 승리하였으나 부정선수로 인하여 실격했는데, 모로코가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개최를 거부하고 결국 개최권을 박탈당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적도 기니 축구 협회는 허공에 놓인 개최권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결국 적도 기니는 개최국의 자격으로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진출한다. 그리고 홈빨을 내세우며 4강까지 진출했다.

8. 군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적도 기니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외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적도 기니/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여행[편집]


과거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 국민들에게 사전 비자를 요구하였으며, 비자 발급 받기가 매우 어려웠던 터라 세계에서 입국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다. 과거 비자 발급 비용이 500달러가 넘는 데다 비자 신청 시 정부 인증 초청장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비자 신청 난이도를 수직상승시키는 요인이었다.[30] 대한민국 주재 적도 기니 대사관이 없어 주중 적도기니 대사관을 통해 신청해야 하는 것은 덤.
그러나 최근 전자비자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비자 신청시 제출해야 하는 서류 목록에 초청장이 제외되었으며, 비자 발급 비용도 50달러로 크게 줄었기 때문에 입국하기 훨씬 수월해졌다.

11. 기타[편집]


이름이 비슷한 기니기니비사우, 파푸아뉴기니도 있는데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한) 현 아프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의 여파 때문이다.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한) 이들 '기니' 국가들의 공통점은 아프리카 서쪽 기니 만에 위치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의 식민 주체는 서로 다른 국가[31]였다. 때문에 지배국들이 각자의 식민 구역을 '기니', '적도에 위치한 기니(적도 기니)', '비사우에 위치한 기니(기니비사우)'로 구분해서 부른 게 아예 국명으로 굳어버린 케이스다. 파푸아뉴기니는 갓 진출한 유럽인들이 현지의 기후와 사람들이 기니와 비슷하다 해서 뉴 기니로 부른 게[32] 국명이 된 케이스.

리처드 린의 저서 '인종 간 지능 차이'에서 언급된 평균 IQ가 59로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가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책의 데이터를 리뷰한 심리학자 얼 헌트와 베르너 비트만에 의하면 해당 자료는 실제로 원본을 찾아보면 스페인의 발달장애 아동들의 평균 IQ로, 데이터를 잘못 인용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사실 해당 서적은 인터넷 등에서 널리 언급되는 국가별 IQ에 관한 내용의 근간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저자의 인종주의적인 활동들과 부실한 자료 집계 방식 등으로 인해 과학계에선 많은 비판을 받았다. 표준편차 15 기준으로 측정한 것인데, 이 정도면 평균적인 적도기니 국민은 경도 지적 장애인이이며 아예 외국어나 수학을 공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적도 기니는 다언어 사회로 90%는 현지어와 스페인어의 두 개 이상의 언어를 할 줄 안다. # 리처드 린은 아예 일하던 학교에서 퇴출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IQ가 세계 2위라는 내용 때문에 현재도 국뽕 관련 자료로 많이 퍼져 진실처럼 주장되고 있다.

영국의 소설가 프레더릭 포사이드(Frederick Forsyth, 1938~)의 1974년작 첩보 스릴러《전쟁의 개들(The Dogs of War)》에서 등장하는 가상국가 '쟝가로 공화국'이 바로 적도 기니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덤으로 포사이드는 소설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73년에 유럽인 용병들과 함께 모의했으나 실패한 쿠데타의 공모자라는 의혹도 있다. 참고로 마크 대처가 참여한 2004년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바로 이 책을 기반으로 한 모방범죄였다고 한다.

얓궃게도 보츠와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은 나라이기도 하다. 나라에 매장된 풍부한 천연자원[33]으로 한국, 싱가포르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빈부격차가 극심한 것은 서로 비슷하지만, 초대 대통령이 신흥 독립국 초대 지도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게도 독재가 아닌 민주적인 통치를 했고 이 덕분에 지금도 아프리카 본토에서는 비견될 상대가 없는 가장 민주적인 나라로 꼽히는 보츠와나와는 정반대로 적도 기니는 독립 직후에도 폴 포트도 능가하는 독재자에 시달려오고 이후에도 독재가 이어지다보니 아프리카에서도 에리트레아, 남수단 정도밖에 적수가 없는 가장 비민주적인 국가로 남아있다.

12. 지도[편집]


파일:external/www.guineaecuatorial360.com/mapa_guinea.jpg

안노본 섬은 저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적도 기니 본토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지도를 안노본 섬이 있는 곳까지 확장하기가 곤란해서 붙여넣기 형식으로 넣은 것.[34]

이 지도에선 안노본 섬이 비오코 섬보다 조금 작게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7km2로 2,017km2인 비오코 섬의 약 0.8% 정도로, 비오코 섬 안에 안노본 섬 118개가 들어갈 만큼 매우 작다.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안노본 섬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면적과 비슷하고, 비오코 섬은 제주도보다 약간 크다. 정확히는 제주도 면적의 1.1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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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중에서 팡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2] 대통령의 아들이다.[3] 수도인 코펜하겐유럽 본토(윌란 반도 북부) 유틀란트 반도가 아닌 동쪽의 셸란 섬 끄트머리에 있다. 다만 셸란 섬은 교량으로 유럽 본토(서쪽의 유틀란트 반도 및 동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연결되어 있어 그냥 본토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4] 다만, 가봉에 맞닿은 남쪽국경선은 정확히 북위 1°에 위치해 있다.[5] 스페인 제국아메리카 식민지 상층부를 형성한 본토출신 귀족들을 지칭하는 용어기도 하다. 이들은 적도 기니 농토의 대부분을 소유했다.[6] 라이베리아로부터도 1913년 노동조약을 통해 많은 수의 노동자가 적도기니에 유입되었지만 1930년 국제노동기구의 항의로 중단되었다.[7] 이런 영향으로 현재 적도 기니는 카메룬, 가봉과 완전한 국경을 확정하지 못하고 종종 분쟁이 일어나는 중이다.[8] 참고로 그 폴 포트도 집권할 동안 인구의 10%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응게마의 극악무도함이 더욱 독보이며, 더욱이 응게마 이상으로 한 나라의 인구를 대폭 줄인 지도자는 문자 그대로 인구를 절반으로 줄인 메리나 왕국(오늘날의 마다가스카르 지역에 있었다)의 라나발로나 1세 여왕 1명밖에 없다. 이를 Equatorial Guinea diaspora라 부른다. 이들과 함께 수만명의 나이지리아 노동자들도 함께 추방되었다. 떠난 적도기니인들은 인근의 가봉, 카메룬, 나이지리아에 정착했고, 이들은 식민지 시절 정착한 인구와 함께 현재까지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커뮤니티를 형성했다.[9] 그런데 후에 밝혀진 바로는 마시아스 응게마는 사실 마약 중독자에 문자 그대로의 사이코패스였던 데다가 온갖 정신병을 앓았다고 한다.[10] 사실 쿠데타의 직접적인 동기는 그의 막내동생이 체납당한 임금을 줄 것을 요구하다가 총살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이었다.[11] 쿠데타 직전 마시아스는 가족들을 평양으로 보내었고 자녀들은 스페인어를 잊어버릴 정도로 북한인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자랐다. 나중에 만난 모친과도 대화가 되지 않아 통역이 필요했다고 한다.[12] 사실 오비앙 응게마보다 오래 집권한 독재자는 피델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 3명밖에 없으며, 2022년 11월 20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도 또다시 당선되어 이론상으로는 집권 51년 차가 되는 2030년까지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응게마는 2006년부터 전립선암 합병증에 시달린다고 한다는 설이 있다.[13] 다만 일반적인 세습과는 결이 다르다. 마시아스 응게마를 테오도로 오비앙이 축출한 뒤 죽이고 본인이 새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14] 참고로 적도 기니보다 정치적 권리가 같거나 낮은 나라는 수단, 미얀마, 타지키스탄, 북한, 투르크메니스탄(각각 0점), 중국(-2점), 남수단, 시리아(각각 -3점) 8개국밖에 없으며, 적도 기니보다 시민의 권리가 같거나 낮은 나라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남수단, 시리아(각각 4점), 북한(3점), 투르크메니스탄, 에리트레아(각각 2점) 6개국밖에 없다. 시민의 권리 면에서 앞의 3개국은 내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거나 여전히 내전이 진행중이고, 뒤의 3개국은 현존하는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꼽히는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적도 기니의 인권 탄압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15] 다만 적도기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도국 경찰은 과학수사라는 걸 할 여력 자체가 없어서 수사관의 경험과 추측으로 사건을 풀어가는 게 보통이다. 제대로 풀리면 좋겠지만 중간에 막히면 피의자를 고문해서라도 답을 얻어내려 하게 된다. 정작 적도 기니는 공식적으로는 2006년 11월부터 고문 금지법을 시행한 상황이다.[16] 다만 이는 2022년에 언론자유지수 산정 기준이 바뀌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17] 애초에 독재국가 중에서도 이런 제도를 시도하는 나라는 북한,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 폴 포트 시기 캄보디아, 오늘날의 에리트레아 같은 정말 최악의 독재국가밖에 없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도 국내 일부 지역을 여행할 때 경찰의 승인을 받아야 가능하도록 했지만, 그것조차 나라의 모든 지역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18] 주로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와 같은 이웃 국가 주민들이 갈취 피해자가 되지만, 자국민이 갈취 피해자가 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19] 물론 이 때에도 검문소에 상주하는 경찰들이 뇌물을 요구하며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빈번했고, 특히 비오코 섬에 사는 부비족은 마을 사이를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20] 실제로 국제앰네스티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나이지리아, 가봉, 베냉, 카메룬에서 발생한 12건의 납치 사건에 대해 보고했다.[21] 1인당 GDP가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무이하게 세계 평균을 넘어 2만 달러대이다.[22] 세계은행의 통계가 처음으로 잡힌 1962~1964년에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당시 가난했던 대한민국보다도 턱없이 낮은 30~40$대로 잡히긴 했으나, 후술할 유전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도 않았던 1965년에 갑자기 219.5$로 뛰어오른 것을 감안하면 전술한 통계는 통계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환율 산정 방식을 대폭 변경한 것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23] 실제로 1968년 기준으로 인구가 30만 명 정도의 적도 기니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스페인인이 전체 국부의 25.5%를 차지했다고 한다.[24]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300~600$대에 불과하다.[25] 응게마는 나라에 부를 가져다 준 적도 기니의 석유를 '하늘에서 온 만나'라고 극찬했다.[26] 다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선진국 수준 1인당 GDP를 가진 일은 적도 기니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의 가봉은 적도 기니도 능가하는 기록을 세웠는데, 당시 가봉은 아프리카 국가인데도 최전성기에는 서유럽 선진국들과 일본보다도 1인당 GDP가 높았을 정도의 부국이었다. 사족으로 전성기의 적도 기니와 가봉의 완벽한 안티테제는 독립 초기의 몰도바인데, 당시 몰도바는 유럽 국가인데도 최암흑기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빈국들과 북한보다도 1인당 GDP가 낮았을 정도의 극빈국이었다. 물론 몰도바는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경제를 회복한 상태이나 아직도 유럽 최빈국 상태는 벗어나지 못했다.[27] 이쪽은 독재국가에 최빈국이기는 해도 아프리카에서는 안정적인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나라라 적도 기니보다는 훨씬 낫다.[28] 뒤의 둘은 적어도 세계 평균의 절반은 넘기고 있다. 몰도바는 2023년까지는 세계 평균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으나 2024년부터 상황이 좋아진 것이다.[29] 이마저도 세게 순위 38위로 홍콩보다도 작다.(...)[30] 다만, 일부 적도 기니 대사관의 경우 호텔 예약 확인서로 이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한다.[31] 기니는 프랑스, 적도 기니는 스페인,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32] 뉴욕도 뉴욕에 진출한 영국인들이 영국의 요크 지방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뉴 요크라고 부른 게 시초가 되었다. 그 이전엔 더 먼저 진출한 네덜란드인들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지방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었다.[33] 보츠와나는 세계 최상급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풍부하게 있다.[34] 실제 저 방향에는 상투메 프린시페가 있다. 상투메 프린시페 자체가 적도기니의 안노본 섬과 비오코 섬 사이에 고스란히 끼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