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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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戦国時代(せんごくじだい


파일:센고쿠시대 지도.jpg

1467~1573[1]
분열 이전
이후
무로마치 시대
에도 시대


1. 개요
2. 명칭
3. 센고쿠 시대의 시작과 끝
4. 사건 연표
5. 특징
6. 인기
6.1. 일본
6.2. 한국
6.3. 서양
7. 역사서
9. 관련 병칭(竝稱)
10. 용어
11. 대중 문화에서
11.1. 센고쿠 시대를 다룬 작품



1. 개요[편집]


戰國時代 / Sengoku Jidai[2]

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혼란기로, 잘게 쪼개진 수많은 각 세력들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대였다. 한국식 한자 읽기로 전국시대 또는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살려서 센고쿠 시대라 불린다.

천황의 권위가 이미 땅끝으로 떨어져 있던 상태에서 오닌의 난으로 인해 쇼군이 수장인 막부의 권위까지 추락하자, 각 지방의 다이묘(영주)들과 사무라이들이 내가 최고가 되겠다고 들고 일어나 치고받으며, 어제의 부하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하극상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지역의 지배자가 바뀌었으며 잘나가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하고, 별 볼 일 없던 세력이 순식간에 강성한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난세가 늘 그렇듯 기름장수 출신, 병졸 출신, 약재상 출신, 농민 출신[3] 등 미천한 출신의 인물들이 급작스럽게 출세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극상으로 새로이 나타난 다이묘뿐 아니라 기존의 슈고 다이묘 중 살아남은 다이묘[4] 혹은 이런 다이묘들이 서로 싸우다가 몰락한 틈을 타 스스로 다이묘로 성장한 옛 소규모 호족 등 이 시대의 다이묘들은 막부나 조정의 권위는 빌릴지라도 이들의 대리 지배자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졌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러 이전의 슈고 다이묘 등과 구별한다.

이렇게 분열된 일본 열도의 통일을 시작한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고, 그의 사후 일본을 일시적으로 통일시킨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이 두 사람의 시대는 특별히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또는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로 칭한다. 마지막으로 도요토미의 사후 재분열이 일어난 일본을 수습하고 통일을 완성한 자가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2. 명칭[편집]


다른 시대명이 지명 등의 고유 명사에서 유래한 것과는 달리 난보쿠초 시대와 센고쿠 시대는 일반 명사에서 뜻을 따온 명사이므로 표준어 대사전에도 전국시대로 실려 있으며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한편 중국의 남북조, 전국시대와 구분하는 의미, 또는 헤이안, 무로마치일본어 발음으로 된 다른 시대 명칭과 형평성을 맞추는 의미에서 난보쿠초, 센고쿠로 쓰는 경우도 있다. 영어 명칭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명과 마찬가지로 번역한 Warring states period와 일본어를 음역한 Sengoku period를 같이 쓴다.


3. 센고쿠 시대의 시작과 끝[편집]


시작과 끝에 여러 이설이 있다. 시작은 1467년의 오닌의 난부터라는 설과 1493년에 일어난 메이오의 정변부터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고, 여기에 호조 소운이 후호조 가문을 세운 1488년으로 잡는 사람도 있다.

종결 시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이 있는데 1573년 오다 노부나가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한 때까지라는 게 정설이긴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도 전국시대의 범주에 넣는 쪽도 있어서 오다와라 전투(1590년), 임진왜란 종료(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에도 막부 성립(1603년), 오사카 전투[5], 겐나엔부(1615년)까지라는 설이 있으며, 아예 노부나가가 상경한 1568년을 전국시대의 끝으로 보는 설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1641년 시마바라의 난 종결을 끝으로 잡는 것이다.

일반적인 일본 학계의 통설은 1573년을 전국시대의 끝으로 보는 편이다. 이 해는 다케다 신겐 사망, 무로마치 막부교토 축출, 아자이-아사쿠라가 멸망 및 오다 노부나가긴키 지역 패권이 확립된 해이기 때문에 일본 전국시대에서 상당히 중요한 해이다. 이후부터는 일본 열도의 패권을 놓고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로 이어지는 권력 다툼의 시대이기 때문에 난세라기 보다는 또다른 암투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치 중국 전국시대도 '진시황중국 통일'을 끝으로 보지만 그 뒤 안정기가 찾아오는게 아니라 이어 멀지 않아 초한전쟁이라는 또다른 난세가 닥쳐오는 것처럼 센고쿠 시대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1592년부터 펼쳐진 임진왜란도 해당 시점 이전을 센고쿠 시대의 종결로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당시 전쟁은 관백의 지위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가용 병력을 거의 대부분 동원해서 조선을 침공하였다. 권력자 한명의 의지로 대외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난세와는 거리가 멀다는게 주요 포인트다.

이에 따라 노부나가가 입경한 1568년부터 에도 막부가 성립하는 1603년까지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거하던 성의 이름을 따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따로 부르며 다른 말로 오다(田)-도요토미(臣) 시대라는 의미를 담은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라고도 부른다.

다만 이는 정치사적인 구분이고, 대중적으로는 일본의 '전국시대'라는 테두리 안에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성 전투 등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사건을 포함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후세의 기준에 맞춘 시대구분처럼 딱딱 완전히 대체되어 퇴장하는 것도 아니며 소설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전국시대'를 다루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멸문과 도쿠가와의 최종 승리를 안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4. 사건 연표[편집]




5. 특징[편집]


센고쿠 시대는 이 영주-무사-농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일본 영토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전국의 영주들이 가장 신경쓰는 게 바로 부국강병책으로, 먼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시켜야만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저수지와 개간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일본의 농지는 오닌의 난 이전보다 약 1.8배로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각 영주들은 검지(檢地)[6]를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개 다이묘가 자기 영지에 대해 제대로 된 검지를 실시한다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지는 쉽게 말하자면 세무조사를 통한 징세 꼬투리 잡기였기 때문에 수하들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는데, 실질적으로 지역 호족 연합세력의 수장 이상의 권력을 가지지 못한 다이묘들이 이렇게 부하들을 자극해봐야 좋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태합검지(太閤檢地)를 실시하자 내심 환영하는 다이묘들이 많았다. 부하들의 토지에 세금을 물려 영지 장악력을 강화하고 싶었는데 히데요시라는 가불기가 생겼으니까. 부하들이 투덜대도 히데요시 탓으로 돌리면 뭐 어쩌겠는가? 자기도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동원부담이 커지겠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자기 수익이 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리고 행정능력이 부족하던 시기라 고쿠 단위로 쪼개지는 것이 통치의 정밀함 측면에서는 더 나았다. 각 세력들은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사무라이들과 토호들을 가신단으로 편입시키고 연공을 일원화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전국시대가 끝난 후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 일본 전체의 석고는 1598년 태합검지 종료시 1,850만 석, 1604년~1610년 게이초 고초(慶長郷帳)에서는 2,200만 석까지 늘어나게 된다. 또한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승기를 잡기 위하여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개발하는 데에도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때마침 유럽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총과 같은 신무기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반복되는 전쟁이 군사력이든 농업생산력이든 높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긴장 상황을 유발하고 지속시켰기 때문에 이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큰 차이가 없었던 일본의 국력은 이 시기부터 한반도를 크게 능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종 이래 나라 전체를 뒤흔들 수준의 국가적 변동 없이 정체된 상황을 유지한 조선의 상황과 맞물렸으며 그 결과가 임진왜란이라는 대(大) 전쟁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즉 토호들의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는 한편, 수취를 하나로 통일하여 대영주가 아닌 이상 영주들은 무사들에게 농민들에게 일원적으로 받아낸 녹봉으로 지급하였고, 무사들을 성하 마을인 조카마치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소집과 감시를 편하게 하였다. 봉록을 받는 무사들은 전쟁의 빠른 소집과 감시를 위해 성하 마을에 살게 되고, 이런 거대한 소비 집단을 위해 직인, 상인들이 대규모로 마을에 살게 된다. 이로써 영주들은 농민과 무사, 상공업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수 있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 단위로 총동원 체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중간 단계가 생략된 연공의 일원화, 즉 조세의 일원화는 농민들에게 가중되는 부담이 줄어들게 했는데 이들 농민으로 하여금 공동의 운명체라고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고 여겼다. 만약 민심이 이반해버리면 다른 영주가 침공했을 경우 살아남기 힘들어지니까[7]. 어찌 보면 이후 에도 시대의 기반을 닦고 지역별 색채를 강화시킨 게 이 시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일본 각 지역에서 지역의 상징으로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는 이 시기 다이묘들이 많다.

여러 불교 종파들도 승병으로 군사력을 구축해 패권 다툼에 끼어 들었다.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잇코잇키), 진언종의 네고로지(根来寺), 천태종의 엔랴쿠지(延暦寺) 등등. 보통 한국에서는 승병을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든 승려들’[8] 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승병은 한국의 후삼국시대 때처럼 지금으로 말하면 정치깡패에 비견되는 무장 조직과 다를 바 없다. 을 거점으로 삼고 주변 마을, 적대 교파 약탈은 기본이고, 낭인들을 매수하여 머리만 깎아놓고 용병 조직처럼 움직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종교에 힘입어 잇키를 일으켜 영주를 내치고 영지를 차지해 거대한 교단 영지를 세워 대영주랑 맞짱뜨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원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중세 서양 기독교의 대주교, 주교들처럼 사실상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세속적인 군사세력이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의 권세가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자신에게 적대하는 아사쿠라, 하타케야마 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잇코잇키를 뒤에서 조장해서 아사쿠라, 하타케야마와 싸우게 하기도 했다.[9] 이로 인해 정토진종무로마치 바쿠후와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괜히 불교를 깨부수고 다닌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그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한국인 시각에서는 '한 지방의 절대 군주' 같은 자리로 연상하기 쉬운데, 대부분의 전국다이묘는 후한삼국지군웅들같이 그 지역 호족이나 토호, 유력 무사 등의 연합맹주와 비슷한 위치였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다이묘들은 양판소 영지물이나 전국시대를 다룬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자기 독단적으로만 통치를 할 수 있던 게 아니라 이런 지역 유력자들이나 가신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이들과의 합의나 협조 없이는 영지를 운영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거나, 심지어는 하극상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하다못해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이나 서국 제일의 다이묘라는 모리 모토나리도 결국 이 '지역 연합맹주'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토도 다카토라처럼 가신이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나, 가신이 다른 주군에게 옮겨가거나, 한 번에 두 가문을 섬기는 행동 등이 일상다반사였다. 어떤 가문에서 공을 세우고 그 전공을 치하하는 표창장 겸 경력증명서 역할을 한 문서인 '간조(感狀)'를 받아서 다른 가문으로 옮겨가거나, 주군에게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다거나, 다른 가문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거나 하면 가문을 옮겨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주군을 바꾸는 행동이 '배신'이라는 의리 없는 행동으로 여겨진 것도 아니었고 흠잡을 만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무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일할 곳을 찾겠다고 다이묘에게 말하면 다이묘가 오히려 다른 가문 다이묘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써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다이묘일수록 장수들의 인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배신도 넘쳐나는 상황이다보니 다이묘들도 서로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나름 고쿠타카를 지닌 다이묘라 하더라도 사나다 마사유키와 같은 소규모 다이묘를 이용해놓고 팽해버리는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중 소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규모있는 다이묘에게 보호요청을 하며 이 다이묘의 비호 아래에서 지내다가도 그 다이묘가 상대방 다이묘에게 위험해지면 바로 상대편측 다이묘에 붙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신의가 없다며 손가락질은 받을지언정 지역 안정화에 최적화된 인물이라 기용하였다. 이렇게 다이묘들끼리도 배신이 넘치다보니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정략결혼인데 자손들이 정략결혼을 진행한다. 신랑측 - 신부측 다이묘 둘 중 하나가 공격 받는데도 다른 한 쪽이 지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식도 버리는 이미지가 붙는데다가 다이묘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혈육은 지키고 싶기 마련이기에 정략결혼은 사실상 동맹이나 다름없는 제스쳐였다.

물론 토리이 모토타다,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킨 충신들도 많지만, 이렇듯 흔히 퍼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는 전국시대 무사의 실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고 오히려 주는 만큼은 확실히 일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용병'이나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직장인처럼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대부분이다.[10][11]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군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을 경시한 것도 절대 아니었으며[12] 무사도의 덕목으로써 한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치는 무사도 없던 것은 아니라서 이렇게 한 가문에서 오래 일한 무사는 '후다이(譜代)'라고 해서 가문의 측근 중신으로 중용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같은 일본인들을 외국에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 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 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13]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14]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15]
이 노예 수출이 역사에 남긴 흔적 중 하나가 네덜란드에 전승되어 오는 불쌍한 일본 도깨비 설화이다.[16]


6. 인기[편집]


중국사에서 실제 비중에 비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삼국시대조조 · 유비 · 손권이 활약하는 초기의 비중이 크고 이들이 다 죽은 후의 중후기의 관심도가 영 떨어진다면 이 전국시대는 반대로 초중기의 관심도가 떨어지고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약하는 중후반기의 관심도가 높다. 삼국시대의 끝은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더 혼란한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로 이어졌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끝은 에도 시대라는 결실을 맺었던 게 아마 그 이유가 될 듯.

6.1. 일본[편집]


바쿠마츠, 겐페이 전쟁 등과 함께 일본 역사시대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향유하는 두 시대 중 하나이다. 지역관광이나 여러 창작물에서도 아주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 소재기도 하다.[17]

그러나 일반 일본인들까지 전국시대를 잘 알고 일상적 대화 주제로 통하는 정도는 아니다. 일본에서 이 시대 인물 중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졌으며 3살 아이부터 80살 먹은 노인까지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전국시대 말엽의 소위 '3대 천하인'이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셋뿐이다.[18] 거기에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19]이나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 그리고 막대한 은혜를 베풀어줬던 주인을 배신한 사이토 도산[20] 정도가 유명한 편이고 만화나 게임 같은 전국시대 매체에서 그렇게 띄워주는 무장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기껏해야 자기 지역 출신 무장이나 자기 지역 영주를 지냈던 무장들을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는 식으로 아는 정도. 일본에서도 이 시대 관련 역사는 관심 있는 사람이나 파는 분야라고 한다.

대개의 개괄서에서도 이 3대 천하인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21] 일부 전국 팬들이 이걸 가지고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이란 식으로 물고 넘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개관적인 역사만 파악하려 한다면 이 시대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이들의 업적만 알아도 충분하다. 시대 전체적으로 따진다고 해도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등 3대 천하인 외 유명인은 대개 3대 천하인과 같은 시대 사람이라 밀릴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는 차라리 앞서 말한 호소카와 가쓰모토 · 야마나 소젠이나, 전국시대 중기에 중앙 정부를 좌지우지한 호소카와 정권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편.

한국의 전국시대 팬 중 일부는 모든 일본인이 이 시대 무장들을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정작 일본인들은 한국의 전국 팬들의 생각보다 전국 무장들에 빠삭한 역덕후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22]

실제로 2020년 일본 지상파 방송국인 TBS 테레비의 유명한 예능방송인 수요일의 다운타운(水曜日のダウンタウン)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 TOP 100을 설문조사한 적 있는데[23] 순위 안에 든 전국시대 인물은 위에 언급된 3명 뿐이었다.(지명도 10위 오다 노부나가 92.4%, 63위 도쿠가와 이에야스 75.7%, 67위 도요토미 히데요시 74.9%)


6.2. 한국[편집]


한국사로 치면 대략 조선왕조 초기~중기와 겹친다. 조선 시대의 국왕 시기로 치면 조선 세조 치세 말년부터 선조 치세 중엽까지가 해당된다. 한국사와 전국시대의 접점이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왜구(정확히는 후기 왜구).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양국 통교가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니 접점이 많진 않지만. 한편 중앙 정부가 사실상 붕괴하고 각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들고 일어난 사회적 분위기의 유사함을 따지면 우리나라는 남북국시대 말부터 후삼국시대가, 중국으로 치면 오대십국시대가 가장 유사하다.

저 시대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이후에 비해서도[24] 굉장히 안 좋았다. 왜구가 가장 심각한 요인이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 수시로 신하가 주군을 상대로 반역을 하거나 심하면 시역도 하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도 비슷하게 찬탈하는 등 도덕적인 측면에서 인식이 영 막장인 난세였기 때문이다.[25]

한국의 전국시대 팬들은 소설 대망을 통해 입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귀무자 시리즈를 접하면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으며, 진삼국무쌍 시리즈를 접하고 나서 전국무쌍 시리즈로 와서 전국시대를 파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26] 그래서인지 전국시대 인물들을 삼국지에 대입하려는 움직임이 자주 보이는 편이고 그나마 소설 대망도 '일본판 삼국지' 정도로 알고 읽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전국시대에 입문하는 한국인들은 삼국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국시대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는 편이고,[27] 더더욱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6.3. 서양[편집]


서양에서는 동양사의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가 낮지만 거의 유일하게 서양에서 어느정도 인기가 있는 시대가 센고쿠 시대다. 서양의 동양사 학계에서는 중국사의 비중이 일본사보다 근소하게 더 높지만 대중적, 혹은 아마추어 역사광들 사이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일본사, 특히 일본 전국시대다. 일본인들도 잘모르는 센고쿠 시대 가문, 무장들을 줄줄 외울 정도로 깊게 심취한 서양인들도 있다. 때문에 쇼군: 토탈 워 등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양 컨텐츠들이 여럿 나오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를 좋아하는 서양인들은 전국시대를 유럽 중세 시대 기사도오리엔탈리즘이 결합된 무언가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고 서양에서 인기가 많은 일본 갑옷일본도를 통해 센고쿠 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향도 있다. 부시도동양의 기사도로 치켜세우기도 하는데 사실 서양에 알려진 그 부시도는 20세기 초 니토베 이나조가 집필한 저서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주로 센고쿠 시대 종식의 시발점인 오다 노부나가의 인기가 가장 많은 편이고 일각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일본의 카이사르라고 치켜 세우기도 한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생애 자체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지만 "만약에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서 죽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는 대체역사적 담론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대체역사 담론은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이 대륙 정복을 한다는 대체역사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다 노부나가가 죽지 않았으면 조선명나라를 무찌르고 대륙정복에 성공했을거라고 주장하며 무능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비전을 망쳤다고 비난하는 와패니즈도 있다.


7. 역사서[편집]


삼국지 팬덤 같은 경우는 정사에 대한 토론도 많이 이루어지고 오히려 연의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건 연의의 내용이고 정사에서는 이러이러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데 반해 한국의 일본 전국시대 팬덤은 주로 요시카와 에이지, 야마오카 소하치, 시바 료타로, 이자와 모토히코 등 한국에 소개된 전국시대 관련 소설을 가지고 그대로 이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경우가 많은 경향이 있다. 특히 이 작가들의 소설도 나온 지 오래 된 작품들이 많아서 이후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반영되지 않고 이미 근거가 빈약한 설로 밝혀진 이야기들이 그대로 나도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장에 이 나무위키에서도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사실 한국어로 번역된 전국시대를 역사적으로 깊이 다룬 서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일본사 개설서에나 나오는 정도라서 일본어나 한자를 잘 모르면 깊이 파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은 일본어 위키피디아 등지에서 자료를 검색해서 번역하여 이 시대를 파악하기도 하고, 내공이 깊은 사람들은 이 시대 관련 원서들을 구매해서 읽기도 한다.

사실 이건 일본 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센고쿠 시대는 일본서기 같이 정사로 인정될 만한 역사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대일본사같은 통사에서 다루는식인데, 이 때문에 지방기록물을 참고해야된다. 중국,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정사 편찬에 관심도 여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것들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정사는 율령제가 잘 돌아가고 그래도 천황이 이 시대에 비해서 권력있던 시절에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율령제도 붕괴하고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가 된 천황과 중앙정부가 역사사 편찬할 재정과 인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 천황은 매우 곤궁한 편이었는데 돈이 없어 즉위식과 장례식을 며칠이고 미루는 일은 예사고 길가에 나갔다가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고 끼니를 굶거나 기운 옷을 입고 궁녀들은 매춘[28]을 하는 소문이 돌 정도로 최소한의 품위 유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러다보니 역사서 편찬은 커녕 조정을 간신히 유지하던 상황이었다.[29] 그렇다보니 이 시대의 참고할 만한 서적이라는게 대부분 각 장수들의 가문에 내려오는 일기나 기록물인데 이런 일기나 기록물들은 행장처럼 자신이나 가문을 띄어주기 위한 용도로 작성된것들이 많기 때문에 무용을 과장하는식으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30] 교차검증없이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본의 중세사~근세사 연구는 주로 지방 기록물들을 살펴보면서 교차검증을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정사서 위주로 살펴보는 한국사와 중국사, 베트남사와는 방향이 다르다.

비슷한 혼란기를 보낸 중국이나 한국은 통일한 서진고려가 이 시기를 다룬 정사를 편찬했지만, 일본은 이처럼 천황의 권력이 없다시피했고, 에도 막부는 다른 일본의 막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쪽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 전국시대만을 다룬 정사서는 출판하지 않았다.[31]


8. 센고쿠 시대의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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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병칭(竝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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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온 인물 묶음, 특히 사천왕이니 24장이니 하는 것들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창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구는 사천왕에 들어가지 못하니 듣보잡', '누구는 왜 사천왕에 못 들어가?' 란 식으로 크게 얽메이지는 말 것

특히 전국 과대사천왕이란 단어는 2ch의 전국시대 게시판에서 나온 말이다.





10. 용어[편집]




11. 대중 문화에서[편집]


일본사에 있어 헤이안 시대(겐페이 전쟁), 에도 시대(막부 말기)와 함께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사극이나 만화, 게임의 소재로 가장 많이 쓰인다. 특히 카드가 주로 등장하는 소셜 게임 장르에선 중국에 삼국지가 있다면 일본에는 전국시대가 있다고 할 정도로 단골 메뉴이며, 일본 사극을 보면 대부분 이 시대를 다룰 정도다.


11.1. 센고쿠 시대를 다룬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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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NHK 대하드라마[편집]


NHK 대하드라마에서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말기와 같이 사골처럼 우려먹히는 시대이다. NHK는 대하 드라마를 1963년부터 제작하였다. NHK가 매년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지는 않지만 꽤 자주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제작하는 편이다. 80년대처럼 시청률이 미친듯이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 최근에도 15~20% 정도는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굵직굵직한 다이묘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그런 다이묘들의 가신이나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이유는 전국시대 배경의 드라마가 다른 시대보다 시청률이 보장되어 있으며 전국시대 같은 경우 가장 혼란스럽고 치열한 외교전과 난세의 영웅급 활약을 펼친 유명한 장수들이 나왔기에 흥행요소가 전부 있다. 그야말로 일본 사극을 먹여살리는 최고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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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부터 언제까지 센고쿠 시대인지는 많은 이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센고쿠 시대의 시작과 끝 문단 참조.[2] 혹은 ‘Warring States period'도 쓰인다.[3] 신분의 벽을 허물고 난세에 출세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신분보다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신분이 가장 높은 덴노쇼군조차 힘을 못 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4] 호소카와 가문, 이마가와 가문 등[5] 《도해 전국무장》(圖解戰國武將)의 저자인 이케가미 료타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6] 토지 측량과 산출량 확인[7] 더구나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한 수단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고도 예민한 문제였다.[8] 사실 한국사에서도 나말여초의 승병, 무신정권 시대에 이의방, 최충헌, 최우 등 무신 권력자들이 기존 왕실과 문벌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을 억압하고 선종을 키우는 과정에서 교종 사찰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사원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일종의 호족과 같은 성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9] https://blog.naver.com/jo9796/222482950421[10]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해설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서적, 사극 등에서는 전국시대 사무라이 사회를 직장생활에 비유해서 해설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들이 장려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며, 그 전까지의 유교는 상류 계층의 학문 겸 제왕학의 일종이었을 뿐이다.[11] 이런 전국시대 무사들의 가치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예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항왜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시각에서야 이들은 매국노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은 오랜 분열기로 인해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국가관이나 정체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항왜들의 상식으로는 조선에 투항하는 것을 단순히 '원래 자신이 섬기던 주군'에서 선조라는 또다른 주군에게 옮겨가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12] 주군에게 도리와 충정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배신이 난무한 전국시대에서 영주들 개개인에게도 당연한 것이었다. 때문에 대세가 기울어 다케다 카츠요리를 배신하여 죽게 만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주군에 대한 도리를 지키고 전사한 유명한 무사를 배출한 무사 가문은 나름 대접을 받으며 이후 구직 활동에서 선조의 이름덕을 보기도 했다.[13] 심지어 흑인 노예의 경우처럼 구매자는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14]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 방영분. 31분 20초-33분 45초[15]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S.I., 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16] 네덜란드 앤트워프에 무역선에 딸려들어온 일본 도깨비가 갖은 핍박과 고초를 겪다가(이 설화에서는 도깨비가 별 힘도 못 쓰는 잡몹으로 그려져서 배가 고파서 가정집 부엌에 뒤지러 들어갔다가 하녀한테 빗자루로 두들겨맞아 쫓겨날 정도이다.) 결국 낙심 끝에 굶어죽고 말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 얼굴을 본따 "하나님의 기도로 잡은 악마의 형상입니다"라고 기와를 구워 팔아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다. 브런치 기사[17] 사실 우리나라 사극도 여말선초, 임진왜란 등에 편중되어 있긴 하다. 그마저도 요즘엔 잘 안 나오지만 [18] 비슷한 사례로 후삼국시대에서도 견훤, 궁예, 왕건만, 삼국지유비, 조조, 손권만 널리 알려졌듯이.[19] '적에게 소금을 보내다( 敵に塩を送る)'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속담의 유래가 되는 사람들이라 이들이 실제로 어떤 인물들인지는 잘 몰라도 이름 정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20] 3대 효웅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효웅이라고 하면 도산부터 떠올릴 정도.[21]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역사 편에서 이원복 교수도 마찬가지로 이 셋에다 오닌의 난의 원인인 아시카가 요시마사 일가와 양편의 실권자 호소카와 가쓰모토 · 야마나 소젠만 언급하고 3대 천하인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그림 중에 다케다 가의 문장 '마름모'와 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묘사를 보면 다케다 신겐 같지만 이름이 안 나온다.[22] 사실 한국도 후삼국시대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궁예, 견훤, 왕건 이렇게 3명 정도 아는 수준이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이순신, 선조, 원균 정도나 알고 조금 더 아는 사람들도 류성룡, 권율, 김시민이나 곽재우, 유정, 휴정 정도로 유명한 의병들이나 신립, 김명원 정도를 아는 수준이니 일본인들이 3대 천하인 빼고 잘 모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하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23] 동서고금 일본인 지명도 랭킹 TOP100 (古今東西日本人知名度ランキングTOP100)[24] 여전히 오랑캐라고 까기도 했지만, 그나마 좀 아는 부류들은 일본에서 서적을 수입해 보거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등 최소한 이전에 비해서는 나았다.[25] 당시 유교가 국가 통치의 이념이었던 조선에서, 특히 삼강오륜을 절대적으로 삼던 조선 사회에서 당시 일본의 이러한 행태는 '천한 것들'이나 일삼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괜히 '군신유의'를 운운했던 게 아니다. 훗날 에도 막부일본 제국이 통치에 있어서 유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도 앞서 말한 전국시대의 무질서한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아랫사람들이 각각 막부와 황실에 반기를 드는 걸 막으려는 목적이 강했다.[26] 특히 이 게임 시리즈 제작사인 코에이는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일단 고증은 철저하게 하는 회사로 유명하고 또 게임에서 등장하는 문장들 역시 실제 그 모습과 성격 그대로 구현하는 편이라 많은 참조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전국 바사라와 같은 허구투성이인 작품에서도 실제 모습을 바탕으로 이를 뒤틀려 해석하는 식이 대부분이다(단 그런 만큼 왜곡은 심하다.).[27] 전국시대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이하의 계파들이 그렇고,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임진왜란의 왜장들도 전부 전국시대 인물들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몇 세기 전의 일이 지금까지 민감하게 여기는 이유는 비교적 최근 일인 일제강점기까지 겹쳐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시기를 따져보면 더 뒤의 일인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가지고 중국이 까이는 빈도는 적은 것(더욱이 당시 중국의 주류 지배층은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었던것도 일조한다. 현대 만주족은 별볼일 없는 소수민족중 하나로 전락하였다.)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중국도 왜구를 토벌한 명나라의 장군들이 진짜 영웅 대접을 받은 건 중일전쟁 이후의 일이다.[28] 천황을 모시는 궁녀들의 대부분은 공가귀족 출신이었다. 즉 명문귀족의 부인 규수들과 따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의미다.[29] 고쿠다카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그래도 명색이 천황이란 게, 종교적으로 숭상받으며 자기들마저도 그의 권위에 기대야 하는 천황이란 게 사는 꼴이 하도 지지리 궁상맞다 보니 품위 유지비로써 도쿠가와 막부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옛다 하고 준 것이 천황을 비롯한 일본 조정이 가지게 된 15만 석 규모의 농지였다.[30] 물론 자신의 흑역사까지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쓴 경우도 없지 않기는 하다. 임진왜란 당시 자신이 처했던 비참한 상황까지도 잊지않고 그대로 써내렸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대표적인 예이며, 후세에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연구자료가 되고있다.[31] 대신 1대 쇼군인 이에야스부터 10대 쇼군인 이에하루까지의 언행과 치적을 편년체 형식으로 편찬한 도쿠가와 실기가 있긴 하다.[32] 1990년에 같은 원작을 기반으로 영화화도 된다.[33] 2009년에 토쿄 TV 계열에서 나카마 유키에를 주연으로 리메이크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