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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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히브리어
קהלת (qōheleṯ)[1]
그리스어
Ἐκκλησιαστής (Ekklēsiastēs)[2]
라틴어
Liber Ecclesiastes
영어
Ecclesiastes
한자(한국어)
傳道書
중국어
訓導篇
일본어
コヘレトの言葉
기본 정보
전승되는 저자
솔로몬
기록 연대
B.C. 3/2세기경[3]
B.C. 931년[4]
분량
12장

1. 개요
2. 내용 요약
3. 특징
3.1. 헛됨의 강조
3.2. '전도'서로서의 특징
3.3. 다른 책과의 연관 관계
3.4. 형성 모델
4. 제목의 번역
5. 저자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7. 기타



1. 개요[편집]


2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5]

전도서 1장 2절 (공동번역 성서)


12아들아,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다. 책을 쓰려면 한이 없는 것이니, 너무 책에 빠지면 몸에 해롭다.

13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전도서 12장 12~13절 (공동번역 성서)


성경의 25번째/21번째 권.

타나크에 실려있는 책으로, 욥기, 시편, 잠언, 아가와 함께 교회 공통 5대 성문서(聖文書)에 속한다.

2. 내용 요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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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11: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어떤 것도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다.
  • 1:12-18: 나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었고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탐구하였는데, 해 아래 있었던 모든 일들은 다 헛된 것들이었고, 지혜를 추구하는 것 역시 괴롭기만 하고 헛된 일이었다.
  • 2:1-11: 웃음, 쾌락, 큰 일들을 벌이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해보는 것 역시 헛될 뿐이었다.
  • 2:12-17: 그러고 나서 나는 지혜를 추구해 보았고 지혜가 어리석은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결국 똑같은 운명이기에 지혜 역시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이 헛된 인생을 살기가 싫어졌다.
  • 2:18-26: 지혜로울지 어리석을지 모르는 후계자에게 결국 내가 이룬 것들을 물려줘야 하기에 그동안 내가 했던 수고는 헛된 것이었고, 이에 대해 억울하고 실망스러운 심정이 든다. 어떤 사람은 전력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을 헛되게도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넘겨주기도 하며, 사람이 일평생 수고해봐야 괴로움과 슬픔 밖에는 남는 것이 없기에 그 수고도 헛될 뿐이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먹고 마시고 수고하며 기쁨을 느끼는 것인데,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죄인에게는 수고하여 쌓은 것을 헛되게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넘겨주도록 하신다.
  • 3:1-11: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그 수고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하느님은 모든 일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일어나도록 하셨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나, 하느님이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다 알지는 못하게 하셨다.
  • 3:12-15: 사람에게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고, 먹고 마시고 수고하며 기쁨을 누리는 것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영원하고 아무것도 거기에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데,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경외하게 하려 함이며, 하느님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계속 되풀이하신다.
  • 3:16-22: 나는 재판하는 곳과 정의를 행하는 곳에 악이 있는 것을 보고, 의인과 악인을 하느님께서 때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는 것은 결국 마찬가지이니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고 동물의 영혼은 땅으로 내려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누가 알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살면서 자신의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고,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고 하여 누가 죽은 자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가?
  • 4:1-12: 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한 일들을 보니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보다 낫고, 가장 나은 자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아 이런 악한 일들을 보지 못한 자들 같다. 어리석은 자들은 팔짱을 끼고 자기 몸만 축낸다. 양손에 가득하고 고생하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안한 것이 낫다. 혈혈단신으로 수고해서 재물을 쌓는 것은 헛된 것이다. 둘이 합력하면 서로 도움으로써 더 좋은 결과를 얻기에 하나보다는 둘이 나으며,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 4:13-16: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은 결국 왕이 될 수 있기에 고집 센 왕보나 나으나, 다음 세대는 왕이 된 그 청년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것 또한 헛된 일이다.
  • 4:17-5:8(5:1-9)[6]: 언행을 조심하고, 하느님께 서원한 것은 갚아라.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며,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어딜 가든 가난한 사람이 억압받는 일은 있고, 높은 사람 위에는 더 높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땅에서 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있고, 왕도 그것으로 산다.
  • 5:9-19(5:10-20)[7]: 돈은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없고, 재산이 많아지면 근심만 많아지며, 재물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데다가, 고통스러운 인생을 마치고 죽을 때에 가져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먹고 마시고 수고하며 얻는 보람이 가장 좋은 것이고, 사람이 부요함을 누리고 제 몫을 받으며 수고함으로 즐거움을 얻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 6:1-6: 하느님에게 부와 명예를 받고도 정작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헛된 일이다. 자녀를 많이 두고 장수해도 평온하게 살지 못하고 제대로 묻히지도 못한다면,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죽기에 차라리 사산아가 그보다 낫다.
  • 6:7-12: 사람은 음식을 위하여 일하나 사람의 식욕은 채워지는 법이 없다. 가난한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그에게 유익한 것도 아니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을 것도 없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갈망하는 것보다는 나으나 이것 또한 헛된 일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이름이 있고,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려져 있으며,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자와 다툴 수도 없다. 말이 많은 것은 헛된 것만 더할 뿐이므로 유익하지 않다.
  • 7:1-12: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나으며,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기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헛되다.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므로 급하게 화내지 말라.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을 묻는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 지혜는 유산을 받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덕을 보기 때문이다.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하는데, 지혜는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에 지혜가 돈보다 더 낫다.
  • 7:13-22: 하느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좋을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시며, 사람은 자신의 앞일을 알지 못하므로, 좋을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라.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도 있고,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는데, 그러니 스스로 패망하지 않으려면 너무 의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너무 지혜자가 되려고 하지도 말라. 또한 기한 전에 죽지 않으려면 너무 악인이 되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은 자도 되지 말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지혜는 슬기로운 한 사람을, 성읍을 다스리는 통치자 열 명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종이 자신을 저주하는 것까지 들을 수 있으므로 남들이 하는 말에 마음을 쓰지 말고, 남을 저주했던 일이 많은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얘기다.
  • 7:23-29: 나는 지혜를 구하려고 해보았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했다. 지혜라는 것은 너무도 멀고 깊어 아무도 그것에 통달할 수 없으나, 그래도 나는 전심으로 지혜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 보려고 했고, 악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가 얼마나 미친 일인지를 깨닫는 데에 집중해 보았다. 그 결과,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쇠사슬과 같은 여자는 사망보다 더 쓰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남자는 그런 여자를 피할 수 있지만, 죄인은 그런 여자에게 걸려들고 말 것이다. 나는 지혜를 얻으려고 하나하나 더듬어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는 있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는데 사람들이 많은 꾀를 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8:1-14: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한다. 하느님에게 맹세한대로 왕의 명령에 복종하라. 왕의 명령을 지키는 이는 안전하며, 지혜자는 언제 어떻게 그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안다. 사람에게 불행이 크게 닥치더라도, 모든 일에 시기와 방법이 있다. 사람은 장래 일을 알 수 없다. 사람이 바람을 다스릴 수 없듯이, 죽을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고, 전쟁에서 벗어날 사람도 없으며, 악은 행악자들을 건져내지 못한다. 세상에는 권력자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때가 있고, 악인들은 죽어서 잊혀지게 된다. 악인들이 오래 사는 경우도 있으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형통할 것이고, 악인들은 단명하며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기도 하는데, 이는 참 헛된 것이다.
  • 8:15-17: 사람에게는 이 땅에서 수고하는 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다. 내가 전심으로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을 때에, 그리고 땅 위에서 밤낮 수고하는 사람의 수고를 살펴보았을 때에, 나는 아무리 지혜자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9:1-12: 의인들과 지혜자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고, 누구도 자신이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알 수 없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는데, 마음에 악을 품고 미친듯이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죽게 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고, 개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 산 사람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더이상 상도 받을 수 없으며, 금세 잊혀진다. 죽은 자들에게는 이제 어떠한 감정도 없고, 그들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참여할 수 없다. 하느님이 네 일을 기쁘게 받으셨으니 너는 가서 기쁨으로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항상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하느님께서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헛된 일생 동안 네 사랑하는 아내와 즐겁게 살아라. 이것이 네가 해 아래에서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몫이다. 네가 가게 될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서 하라. 발 빠르다고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강하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롭다고 먹을 것이 생기지 않고, 총명하다고 재물이 생기지 않으며, 배웠다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닌데, 오직 그들 모두에게 때와 기회가 있을 뿐이며, 사람은 자기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 9:13-18: 어느 힘센 왕이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작은 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성에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지혜로 성을 구해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지혜가 무기보다 낫긴 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는 멸시받는다. 어리석은 통치자의 고함치는 명령보다는, 차라리 지혜로운 사람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 지혜가 전쟁무기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
  • 10:1-20: 어리석은 짓 하나가 지혜와 명예를 망가뜨린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바른 쪽으로 쏠리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그릇된 쪽으로 치우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길 가다가도 모두에게 드러낸다. 통치자가 화를 낼 때에 자리를 떠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은 그의 감정을 진정시킨다. 어리석은 사람을 높이 앉히고 부자를 낮은 자리에 앉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거기에 빠질 것이고, 벽을 허무는 사람은 뱀에게 물릴 것이다. 돌을 캐는 사람은 그 돌에 치일 것이고, 통나무를 쪼개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위험을 당할 것이다. 도끼가 무디면 힘이 더 들기 마련이나, 지혜는 일의 능률을 올려 준다. 주문을 걸기도 전에 뱀에게 물리면 마술사는 소용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은혜롭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입술은 그 자신을 삼키고 만다. 어리석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처음에는 어리석은 것이다가 결국에는 사악한 말로 끝난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이 많다. 사람은 앞으로 닥칠 일을 모르며, 죽은 후에 일어날 일도 알 수 없다. 성으로 가는 길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왕은 어리고 고관들이 아침부터 잔치를 벌이는 나라에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 고결한 사람이 왕이고 고관들이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제때에 음식을 먹는 나라에는 복이 있다. 사람이 게으르면 들보가 내려앉고 그 손이 게으르면 지붕이 샌다. 잔치는 웃으려고 베푸는 것이다. 포도주는 즐거움을 주나 돈은 만사를 해결해 준다. 공중의 새가 네 말을 실어 나를 것이기에, 생각으로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 11:1-8: 장래를 생각하여 무역에 투자하되 분산투자를 하라. 구름에 물이 가득하면 비가 되어 쏟아지고, 나무는 쓰러지면 쓰러진 곳에 그대로 놓여 있게 되며,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하고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알 수 없으며, 어떤 것이 잘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침에는 씨를 뿌리다가 저녁에는 손을 거두지 말아라. 빛을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사람이 오래 살게 되면 항상 즐거워하는 것이 좋으나 어두운 날들도 많을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은 모두 헛되다.
  • 11:9-12:7: 청년들은 자신의 젊음을 즐거워하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되 이 모든 것들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근심과 악을 멀리하라. 청년의 시절이 다 헛되고, 병들어 인생에 낙이 없어지고 결국 육체는 흙으로 영혼은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청년들은 자신들의 창조자를 기억해야 한다.
  • 12:8-14: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할 뿐이니 이것들을 경계하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본분이고, 하느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

3. 특징[편집]


성경에서도 가장 어려운 용법이 많고, 거기다가 한국어 번역도 어렵기도 유명한 용언이 많아 문장 난이도 때문에 손에 꼽는 고난도 책으로도 유명하다. 링크. 개역한글 번역은 그나마 분위기가 좋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문장 난이도 때문에 읽기 힘들어 한다.

랍비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고, 저자는 익명의 인물로 자신이 솔로몬임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지만 성경 후대의 히브리 말에서는 자주 쓰이는 어휘들이 많다는 점과 여기 쓰인 히브리 말이 어휘에서뿐만 아니라 형태론과 구문론에서도 아람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사실로 저자의 활동 시기는 마카베오 시대 이전, 곧 기원전 3세기로 보는것이 설득력이 있다. 특이한 점은 1장에서 솔로몬을 지칭하는 문구와 2장에서 솔로몬을 지칭하는 문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참고로, 랍비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이 뜨겁게 사랑하던 젊은 시절에는 아가서를 쓰고, 한창 나라 통치하던 장년기에는 잠언을 쓰고, 나이 먹어 허무해진 말년에 전도서를 썼다고 하니, 솔로몬 저작설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3.1. 헛됨의 강조[편집]


1장 2절의 "헛되고 헛되다"를 위시하여 "헛됨"을 유독 강조하는 말씀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각 구절의 해석은 목회자나 신학자마다 달라질 수 있으므로 별도의 해설을 달지 않고 성서에서 뽑은 구절만 아래에 수록했다. (단, 성경에 있는 주석처럼 출처가 명확하면 예외)

1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2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 1장 1~2절


3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전도서 1장 3절


4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전도서 1장 4절


5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가삐 가고

전도서 1장 5절


6남쪽으로 불어 갔다 북쪽으로 돌아 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 온다.

전도서 1장 6절


8세상만사 속절없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

9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10"보아라, 여기 새로운 것이 있구나!" 하더라도 믿지 마라. 그런 일은 우리가 나기 오래 전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전도서 1장 8-10절


2웃음이란 얼빠진 짓이라, 향락에 빠져 보아도 별 수가 없었다.

전도서 2장 2절


12왕위에 오르는 사람이래야 선왕들이 이미 한 일밖에 더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했다.

전도서 2장 12절


16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일은 잊혀지고 말리라.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전도서 2장 16절


1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2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기 전,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그를 기억하여라.

(중략)

7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8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또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12장 1~2, 7~8절


13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 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전도서 12장 13절



3.2. '전도'서로서의 특징[편집]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구원이야말로 인생이 가져야 할 소망임을 역설하는 책이다. 물론 후술하듯이 이 책의 전도자는 섭리를 전달하는 자라는 뜻이지 포교자는 아니므로 이 책의 저술 목적이 포교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8]

겉보기엔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라며 인생무상만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12장의 결론에서 말하듯이 헛된 인생을 지내기 위한 지혜를 저자가 여럿 작성하여 잠언에 담았고, 그러한 잠언을 통해 세상을 살며 헛되지 않은 영원함, 즉 언젠가는 사라질 지상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행복할 천국의 삶을 추구하며 주님의 섭리에 따라 살라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 운명인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는 가르침이 들어있는 책이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뜻이 중심이자 핵심이며 그것을 잊고 세상 일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지혜조차도 창조주의 뜻에 따라 사는 삶 앞에서는 헛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전도서를 읽고 애초에 하나님이 인간의 인생을 일부러 비참하게 창조했다는 생각으로 넘어가면 이게 바로 영지주의가 된다는 것. 다만 전도서는 내용이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이유로 정경성에 의문이 제기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글이라는 이유로 전도서는 결국 정경으로 남게 되었다.

3.3. 다른 책과의 연관 관계[편집]


저자가 잠언의 저자이다 보니 잠언과의 연결이 매우 깊다. 대표적으로, 지혜마저도 헛됨을 역설하며 잠언 초반부의 나오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란 것을 또 한 번 강조한다. 아니, 애초에 12장의 마지막 구절은 솔로몬이 여러 잠언을 썼다는 자랑이 적혀있다.

전도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교만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이것은 잠언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며, 잠언 전체가 이 교만을 하지 말라는 법과 다름없다. 전도서의 가르침대로라면,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우쳤다 "믿고" 주장한들, 길에서 죽어가는 이를 모른 체하거나, 권력에 부역하여 양심을 속인다거나 언어가 어쨌건, 실제 행동과 드러나는 결과가 모순적이라면 애써 자기최면으로 얻은 진리조차 헛된 것이다. 그리고 잠언과 전도서 모두가 경고하는 이 교만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교만의 대표적 사례가 성경에 기술되어 있는데,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이야기.


3.4. 형성 모델[편집]


④ 이 책의 모순과 긴장들을 설명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는 이른바 인용 이론이다. 이 이론의 단초들은 이미 멘델스존M.Mendelssohn (1771)과 히치히F. Hitzig (1847)에게서 발견된다. 레비L. Levy와 고르디스R. Gordis는 이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고, 로핑크[9]

그리고 특히 화이브레이R.N. Whybray와 미쉘은[10] 세분된 논증으로 뒷받침했다.

인용 이론은 코헬렛이 자기가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견해들을 인용한다고 상정함으로써 긴장과 모순을 설명한다. 문학비평가들은 흔히 (종교나 지혜와 관련된) 정통적 관점에서의 부연敷衍으로 보는 것을, 인용 이론 주창자들은 대부분 코헬렛이 인용한 반대 견해로 판단하는바, 코헬렛은 이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판·배척한다는 것이다. 인용 이론이 자인하는 난제는, 인용문 대부분이 인용문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식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화이브레이, 미쉘, 그리고 바크하우스는 인용문들을 밝혀내기 위한 세분된 기준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미쉘은 1,3-3,15에는 "의식적으로 통일체로 구상한 논설"이 들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표명된 근본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은, 다른 견해들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바, 코헬렛은 이것들을 논박하기 위해 인용한다". 미쉘의 분석은 이렇다: 2,13-14a는 인용문, 2,14b-15는 코헬렛의 논평; 7,1-6a는 인용문, 7,6b-10은 논평; 7,11-12는 인용문, 7,13-14는 논평; 7,26.28은 인용문, 7,25.27.29는 논평; 8,2-5는 인용문, 8,6-8은 논평; 10,,8-10은 인용문, 10,11은 논평.

인용 이론은 코헬렛이라는 책의 이해에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두 가지 예만 살펴보자: (a) 7,1a의 언명("명성이 값진 향유보다 낫다")은 9,8b의 촉구("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와 긴장 관계에 있으며, 7,3("근심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은 애처로워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은 7,9("마음속으로 성급하게 근심하지 마라. 근심은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와 긴장 관계에 있다. 미쉘에 따르면, 7,1-6a의 염세주의적인 인간론적 언명들은 코헬렛의 견해가 아니라, 코헬렛이 인용하고는 7,6b-10에서 비판·일축하는 그의 반대자들의 견해다. (b) 7,26(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은 9,9("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와 긴장 관계에 있다. 로핑크·미쉘·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쇼르스A. Schoors에 따르면, 7,26은 코헬렛이 인용한 여성 적대적인 견해이며, 이것을 그는 창조 기사를 재해석하면서(7,29) 일축한다.

⑤ 인용 이론과 연계되는 해석이론rezeptionsorientiert 경향은 코헬렛의 긴장과 모순들을 논증 전략의 한 가지 의도적 방식으로, 즉 독자들을 텍스트 이해 구조에 참여시키려는 특별한 방식으로 여긴다(Th. Krüger).

해석이론적 경향과 연계됨으로써 인용 이론은 코헬렛 내부의 긴장과 모순들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롬써 이 책에 대한 양식비평적 진단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단은 코헬렛이 전통적 지혜와 비판적 관계에 있다는 관찰을 자체 안에 통합할 수 있다. 이미 레비는 코헬렛의 대화적 요소들을 '키니코스·스토아 학파'디아트리베Diatribe[(가상적) 논전] 어법의 모방'으로 해석했다. 알가이어A. Allgeier도 이 책의 형식에서 디아트리베를 연상한다: "디아트리베에서는 코헬렛과 아주 유사하게 담론과 바론이 교체되며, 또 코헬렛에서처럼 언제 반론이 시작되고 언제 응답이 시작되는지 겉으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2 (Das Buch des Predigers oder Kohelet'', Born 1925, 11)}}}. 최근에는 로핑크와 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가 이 책의 형식을 디아트리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시도했다. 이런 담론의 기원은 학교 강의이다. 디아트리베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논의가 하나의 공통된 근본 사상에 부속되어 있다. 이 근본 사상은 흔히 작품 앞머리에서 강령처럼 개진되며, 이어서 일상생활의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고 또 기존의 많은 전통적 주제와 모티브를 이용하여 설파된다. 이와 유사하게 코헬렛은 I부(1,3-3,22)에서 행복에 관한 자기 철학의 요강을 제시하며, 그 철학을 II부(6,10-8,17)에서 전철학적 행복관과의 대화를 통해 설명·심화하고, III부(6.10-8,17)에서 반대자들과의 가상의 대화를 통해 옹호하며, IV부(9,1-12,8)에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루트거 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Ludger Schwienhorst-Schönberger, "코헬렛",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663-665쪽[11]


전도서의 형성 모델은 논쟁적인 주제이다. 특히 전도서에 등장하는 문장들의 상호 긴장 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근래에는 전도서가 '인용 및 반대'의 구조로 쓰였으며, 이를 통해 디아트리베 어법을 펼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인용/반대 구조가 형성된다.

명성이 값진 향유보다 낫다(7,1a)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9,8b)


근심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은 애처로워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7,3)

마음속으로 성급하게 근심하지 마라. 근심은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7,9)


그리하여 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7,26)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9,9)


4. 제목의 번역[편집]


전도서는 시가서에 속하는 책으로 잠언 다음에 등장한다.

개신교 성경과 공동 번역 성서에는 '전도서'라고 되어 있으며, 가톨릭 성경(2005년판)에는 원래 뜻을 존중하기 위해 히브리어 '코헬렛'을 그대로 표기했다. 중국어 성경 이름은 전도서(傳道書)인데 이는 코헬렛을 ‘전도자’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전도자의 뜻에 오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정확히 하기 위해 영어로 중역하면 One who delivers providence, 즉 섭리(도)를 전달하는 자라는 뜻이 된다.

‘코헬렛’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그냥 이름 해석하느라 씨름하지 말고 원어를 때려 박자는 발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보석'이란 필명의 작가를 후대에서 보배로운 돌, 귀한 돌, 디딤돌, 동시대의 배우 정보석이다, 그게 아니라 감옥에서 보증금으로 풀려난 범죄자다... 등 쓸데없이 복잡하게 해석하지 말고 그냥 '보석'이라고 읽으면 된다는 식이다. 작가가 코헬렛이라 적은 건 분명하니 그냥 그렇게 읽자는 것이다.

코헬렛의 어원은 카알(모으다)이다. 동사인 ‘카알’의 분사형태가 ‘코헬렛’이다. 직역하면 ‘모으는, 소집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으고 소집하는 것일까? 문맥으로 보아 코헬렛의 목적이 되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청중’이다. 이렇게 코헬렛은 차츰 ‘모으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임에서 말하는 자’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히브리어 성경 이름이 ‘코헬렛’으로 정착된 것도 그런 이유다. 성경의 내용을 ‘코헬렛의 설교’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전도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인 것.

그리스어 성경인 70인역에서는 ‘에끌레시아스테스 Ekklēsiastēs’라 했다. 직역하면 ‘불러 모으는’이란 형용사다. 원형은 에끌레시아 ekklēsia로 ‘소집된 모임’이란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는 민중들의 모임인 ‘민회’를 ‘에끌레시아’라 했고 민회가 열린 장소를 ‘아고라 agora’로 불렀다. 후대에는 장소 뿐 아니라 모임 자체도 그렇게 불렀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 역시 엑끌레시아의 번역이다. ‘부름받고 나온 이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원어, 그리스어, 한자, 그리고 코헬렛의 각종 해석을 합치면 "섭리를 전달하는 현자(지혜자)가 청중을 에클레시아로 불러 모으는 책"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코헬렛을 전도자, 전파자, 조언자, 현자, 도인, 설교자, 발언자 등 무엇으로 해석하든 절대 "포교자"라는 뜻은 나오지 않는데, 전도라는 말이 사실상 포교와 동일어로 쓰이는 상황이라 전도서를 종종 포교서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전도서의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뿌리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섭리 전달의 시작과 같은 내용이지만, 이 책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조언할 뿐,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종교"를 믿으라 포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5. 저자[편집]


근본주의 계열이나 복음주의적 성향의 보수 신학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현대 신학자성서비평학자들, 고대근동학 전공자들은 전도서의 실제 저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훨씬 후대에 쓴 무명의 인물(혹은 현자)이라고 보고 있다. 혹은 솔로몬의 후대의 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도서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에서 '아들'이라는 것은 '후손'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 전도서에서는 '솔로몬'이 썼다는 직접적인 서술이 없기 때문에 솔로몬이 아니라 다른 왕이 썼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솔로몬이 무슨 이유로 이런 책을 썼겠느냐다. 못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하게 살았고 팔자 핀 신앙인이자 잘나가는 왕국의 왕으로서의 대표주자가 솔로몬이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사람이 어째서 죽기 전에 허무주의자로 돌변했느냐는 것이다.[12]

둘째, 전도서 내부의 구절들은 당대 이스라엘 왕가의 부패를 숨기지 않고 속속들이 비판하는데 역시 왕이 했다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13] 그리고 전도서가 허무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당대 그리스를 시작으로 소아시아에 팽배해 있던 쾌락주의와 연관된 내용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것이 쾌락주의인데, 결국 그것도 죽을 때가 되면 남는 것이 없으니 전도서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믿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사실 위의 두 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비평학과 고대 근동 역사학에서 중요시되는 문헌학적 근거다. 전도서에 사용되는 어휘나 표현 상당수는 솔로몬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정태현 <성서입문 하> (한님성서연구소, p. 343) 특히 많은 단어는 페르시아어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도서가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다 정복 이후에 쓰였음을 암시한다. (Seow, C.L. "Ecclesiastes" Coogan, Michael D.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p. 944) 현대의 성서비평학자들은 전도서가 페르시아 시대에 쓰였는지, 헬레니즘 시대에 쓰였는지를 논의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솔로몬 저작설을 내세우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이 아닌 보수주의 성서신학 같은 분야에서는 여전히 솔로몬 저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외에 전도서가 속한 케투빔의 특성상 꽤 오랫동안 정경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이 짓고 다른 사람이 후대의 언어로 엮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14] 물론 극소수 보수적 성서학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고대 근동학 전반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간혹 솔로몬 저작설을 부정하는 견해를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 정도로만 격하시키는 이들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된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은 성서학에 있어서 가장 최신의 권위를 담고 있는, 학문적으로 현재 가장 권위있는 주석 성서 중 하나이며, 총편집자인 마이클 쿠건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자들 대다수가 가톨릭, 개신교, 유다교를 대표하는 주류 학자들이라는 점 정도만 알아두자.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하느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을 보아라. 하느님께서 구부려놓으신 것을 펼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전도서 7장 13절

자막으로 나온다. 유전공학의 한계를 경고하는 의미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 4장 1절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전도서 4장 2~3절

  • 블루 아카이브: 아리우스 분교는 전도서 12장 8절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를 모토로 삼고 있다. 그러나 원래 전도서가 전하는 의미였던 겸허함과 성찰은 베아트리체가 학생들을 마음대로 이용하기 위해 허무주의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이 문구는 학생들을 지옥과 같은 삶을 당연시하도록 세뇌시키는 데 사용됐다.[15]

그렇다. 사람이란 산 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희망이 있다. 그래서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강아지가 낫다고 하는 것이다.

전도서 9장 4절

무슬림이었던 클루조는 자신이 이슬람교도라며 투덜댔지만 메컬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며 그 뒤 클루조도 이 구절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재판에 붙이시리라는 것만은 명심하여라.

전도서 11장 9절

자막으로 나온다. 전체적인 영화의 전개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은유한 단어로서 병사들이 자행하는 전쟁범죄를 뜻하는 것이다.

  • Turn! Turn! Turn!: 1960년대 미국의 포크 싱어 '피트 시거'의 곡. 전도서가 허무주의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내용 때문에 피트 시거가 이 전도서 3장에 곡을 붙였다. 미국 밴드 버즈가 이 곡을 록 장르로 리메이크하여 유행시키기도 했다.


7. 기타[편집]


  • 1장 2절의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의 히브리 원어는 '하벨(הבל) 하발림(הבלים), 하벨 하발림, 하발림 하벨, 하벨 하벨' 이다. 하벨(הבל)은 무의미함이라는 뜻의 히브리어고 하발림(הבלים)은 하벨의 복수형에 해당하는 단어다. 즉 원본에는 설교자는 말한다, 세상만사 부분이 없고 '무의미'의 반복이다.
  • 1장 9-10절의 내용이 대략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 thing under the sun is new)"인데 기독교와 관련이 없어도 자주 언급되는 격언이다. 기사
  • 다소 삐딱한(?) 신자들은 전도서를 보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전도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솔로몬이 '내가 여자도 여럿 거느리고 돈도 왕창 써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봤는데 의미없더라. 그러니 하느님만 섬겨라' 이기 때문. 심지어 좀 더 삐딱하게 보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봐야 하나님은 자기 좋으신 대로만 하신다. 어쨌거나 그분이 절대자시니 까라면 까야지'라는 해괴망측한 결론까지 도출해낼 수 있다[16] 물론 앞뒤 뚝 떼고 핵심의 핵심만 요약하면 그렇다는 거지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이 허락하신 몫을 자신의 삶에서 즐기는 것 또한 긍정하는 것이 전도서의 시각이다.

[1] 뜻이 애매하지만 전도자라는 뜻과 함께 지혜자, 곧 현자를 의미한다.[2] (교회로) 불러 모으는 자, 곧 전도자라는 뜻이 된다.[3]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등의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한국어판 (분도출판사 2012)1013쪽[4] 전통적 견해[5] 인생무상을 말하는 구절로, 개역개정 성서에서는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운율을 잘 살려 개역 성경의 명번역으로 꼽히는 부분이다.[6] 개신교 성경 기준[7] 개신교 성경 기준[8] 전도, 즉 섭리를 전한다고 하면 마땅히 따라와야 할 책이 이 전도서이지만, 실상 전도라는 말이 포교로 사용되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전도서가 자칭 "전도"에 사용되는 경우는 단 하나라도 없다 봐도 무방하다. 또한 전도를 하지 않는 유대교의 경전이라는 것만 알아도 알 수 있다.[9] Norbert Lohfink[10] Diethelm Michel [11] 굵은 글씨는 원문에서도 강조된 것이다.[12] 하지만 현대에도 부자들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허무를 느끼는 현상이 많이 알려져 있다. 삼한을 재통일하고 정치적인 이유였지만 하렘을 실현시켰던 고려 태조도 죽기 전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했다.[13] 그런데 이것은 유다 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냥 교훈을 주기 위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대의 유다 문화였을 수 있다.[14] 실제로 잠언서도 잠언들을 모아 후대에 엮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잠언 자체도 솔로몬이 진짜로 손댄 부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들이 많다. 애초에 성서에 기록된 솔로몬의 행적 자체가 대부분 역사적 사실성을 사회과학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렵다.[15] 블루 아카이브 세계관에서 허무주의적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고, 본래 전도서의 뜻은 여기서도 똑같지만, 그 겸허함과 성찰을 베아트리체가 제 목적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변질시켜 가르친 것이다.[16] 게다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살아보니 세상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더라. 하느님은 자살을 유발할 정도로 인생과 세상을 참 개떡같이도 만들어 놓으셨다.'로 가버리면 영지주의적 해석이 나온다. 이는 일반 신자들이 전도서를 읽을 때도 주의해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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