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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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치에 대한 평가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범죄율 증가와 언플
3.2. 여성 인신매매 증가
3.3. 7.30 교육개혁조치
3.3.1. 기승을 부린 불법과외
3.6. 사립유치원 법적 모호
4.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4.1. 군종 차별
4.2. 미사일 개발 능력 지연
4.3. 팔당호 탱크 수몰사건 / 한라산 군수송기 추락사건
5. 경제에 대한 평가
5.1. 단기적인 안목에만 치중한 산아제한 정책
6. 개인적 논란
6.1. 민주적 정당성
6.2. 육군 내 사조직 결성 문제
6.3. 적반하장에 가까운 막말
6.3.2. '광주는 폭동' 발언
6.3.3. 김대중을 향한 막말 및 이중적 태도
6.3.4.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발언


1. 개요[편집]


전두환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서술한 문서.


2. 정치에 대한 평가[편집]


전두환 정부10월 유신으로 인한 박정희 정부와 더불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정통성 및 정당성이 가장 부족한 독재 정권이었다.[1] 정권을 잡은 계기부터가 12.12 군사반란5.17 내란이라는 반란이었고, 그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유혈 진압을 자행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이후에 이에 시민들이 저항하자 5.18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초등학생, 임산부까지 가리지 않고 백 단위의 반인륜적인 학살을 행한 것 등, 정권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각종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했다.


2.1. 독재와 철권 통치[편집]


"남한에서의 전두환에 대한 조롱은 재미를 위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생명에 위협을 주는 행위다."

"(Im Südkorea des Chon Doo Hwan geht es derzeit in der Tat nicht lustig zu, ist Spott lebensgefährlich.)"

1980년 6월 29일 독일 슈피겔 기사 中 #[2]


집권 초기 국보위를 굴려서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이 터졌을 때 군대를 동원해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공식 사망자만 160명을 넘어갔다. 게다가 이후에는 대한민국판 정치범 수용소인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을 탄압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987년까지 7년간 구속된 시국사범(양심수) 숫자는 인구의 0.03%에 육박하는 무려 12,000여 명이나 되었다.[3]

또한 자신의 최측근인 하나회 출신을 안기부장에 임명하며[4] 학림사건, 부림사건, 금강산댐평화의 댐 공작, 야당 의원 포섭,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처럼 아주 굵직한 만행들을 벌였다. 물론 김대중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감형되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김영삼은 자신의 집에서 가택연금되는 등 민주화 운동가도 많이 괴로워했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노동착취 등 인권탄압이 당연시됐으며 백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걸리면 아기 이름을 따 ‘아람회’가 되고, 금강에 놀러 갔던 사람들이 걸리면 ‘금강회’가 돼서 반국가단체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정권에 항의하는 의미로 죽음을 택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광주 5.18의 참상을 알리는 글을 쓰고 투신자살한 서강대생 김의기, 노동3권 보장과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에 관련된 전단을 배포하고 분신자살한 노동자 김종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뒤 투신자살한 서울대생 김태훈 등이 있다. 반독재투쟁을 주도한 박관현 전 전남대학생회장의 경우 옥중에서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하였다. 전남대생 기혁은 독재정권의 교육정책 반대 투쟁 중 자살하였다.

의문사도 박정희 정권을 거뜬히 능가할 정도로 많았다. 1980년 7월 26일에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임기윤 목사가 보안사에 연행된 뒤 숨졌고, 1981년 1월 2일에는 서울대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진래 학생이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제 입대당한 직후 자살로 위장한 타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학생운동가인 서울대생 노진수는 1982년 정권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같은 해 7월엔 연세대생 정성희가 강제징집된 뒤 보안사 녹화사업 과정에서 갑자기 죽었으며[5][6], 1983년에는 성균관대생 이윤성, 고려대생 김두황, 한양대생 한영현, 동국대생 최온순, 서울대생 한의철이 마찬가지로 강제징집된 뒤 의문사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여성운동에 앞장선 정은복[7]행방불명돼 의문사 처리됐다. 그 다음 해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군에 입대한 연세대생 임용준[8]이 녹화사업과 관련해 의문사당하였다. 85년 10월 11일에는 서울대생 우종원이 민추위 사건으로 대공과의 수배를 받아오다 경부선 철로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86년에는 신호수[9], 김성수[10], 87년에는 서울대생 김용권과 최우혁[11], 부산대생 이승삼과 박필호, 전남대생 이이동[12]이 군대에서 의문사하였으며 노조원 정경식,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환 등 전두환 시기에 의문사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한 뒤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한 부산대생 최종철, 재소자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다 교도관 폭행으로 숨진 삼청교육대 재소자 박영두, 경찰의 구타로 숨진 뒤 행려병자로 신분이 조작돼 해부용 시신으로 팔려나간 버스기사 문영수,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행으로 숨진 노동자 김상원, 예비군 훈련 도중 광주 학살에 대해 발언했다가 고문당해 죽은 장이기, 대통령 선거 군부재자 투표에서 야당을 찍었다고 부대에서 구타당해 숨진 정연관 등도 사망했다.

이런 전두환도 아는지 유럽의회의 인권침해국 명단에서 한국을 빼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유럽순방에 앞서선 회담에서 인권 문제가 거론되지 않도록 사전에 작업한 정황도 담겼다. 서독 방문을 앞두고는 행여 교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할까 봐 미리 '알박기' 집회 신고를 할 정도로 치밀했다고 외교 문서에서 드러났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1988년 1월 6일 방한한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과 면담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했고 이것이 한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정치권 내부의 절충주의 세력을 제압하는 등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도 어김없이 억압했다. 쿠데타 당시에는 삼김이 연금 조치 당했으며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유성환 국시론 파동이 대표적인 예시다. 정치깡패를 동원하며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2.1.1. 간첩 조작 [편집]


“전두환 정권은 평범한 의대생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다름 아닌 1984. 1. 21 신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간첩대책중앙회의'다. 1968. 1. 21. 김신조를 비롯한 일련의 북한공작원들이 청와대 뒷산까지 내려와 대통령의 신변을 위협한 것을 계기로 매년 1. 21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대통령 주재로 각 기관 대공관계자들이 모인다. 그 해의 대공 업무에 대한 계획보고와 대통령의 격려가 이어지는 자리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이 대책회의를 열며 각 군 지휘관, 치안 기관 관계자 등 수천 명을 모아두고 이런 말을 했다.

"저놈들이 안 내려오면 좀 답답하죠. 내려와야 우리 군인들 전과 올리고 훈장 타고 진급되고 이런 기회가 생기기 않느냐."[13]

내려오지 않는 간첩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정부, 전과와 훈장, 진급을 위해 간첩이 내려와 주기를 바라는 정부. 전두환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비단 일반 개인의 사사로운 발언이 아니다. 당시 국민으로부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권력이기에 사회적 불만과 정치적 불안을 이용하기 위한 시선전환용 성과가 필요했고, 이러한 전환을 위한 성과를 독촉한 것이다.

하지만 공안기관 입장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는 남파공작원을 잡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 대통령의 독촉은 결국 이전까지 점차 줄어줄던 간첩검거 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다. 내려오지 않는 간첩, 그래서 희귀해진 간첩, 이러한 상황에서의 공안기관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결과적으로 1980년대에 '만들어진' '양식된' 간첩이 많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전두환의 수상한 한마디.. 그후 모든 게 이상해졌다


간첩 조작 사건도 횡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히 옥살이를 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이는 이전의 독재 정권들인 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에서도 저지른 공통적인 악행으로, 전두환 시절에는 간첩 조작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 이상으로 '활발'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일어난 간첩조작 사건 중 대표적으로는 하술할 문단의 사건들 외에도 일가족 간첩사건, 재일동포 관련 간첩사건, 납북어부 간첩사건, 모자 간첩사건, 차풍길 간첩사건, 고정 간첩단 사건, 강희철 간첩사건, 김복재 간첩사건, 김양기 간첩사건, 최양준 간첩사건, 신귀영 일가 간첩사건, 오송회 사건, 재일교포 간첩사건, 김기산 간첩사건 등이 있다.

박정희의 사법살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 많았다면, 전두환 시기 사법살인은 상기한 것처럼 성과쌓기 용도로 행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 시기에 있었던 사법살인 사건은 5건, 사법살인 피해자는 7명에 달한다.[14]

특히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에서는 간첩 사건을 '수사'하려고 해도 증거가 있어야 간첩을 수사하지 증거가 없이 어거지로 혐의를 끼워맞췄기에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많다.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이라든지 선거가 언제 있을 것이라든지 하는, 외국인이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을 얘기했다는 것은 북한의 공작원에게 국가기밀을 제공한 것이 되었고,[15] 심지어는 거의 10년 전에 일본에서 만난 형에게 '짜장면이라는 음식을 중국 요릿집에서 파는데 무척이나 싸고 맛있다'고 말한 것까지 '서울의 물가시세 등을 탐지, 수집, 보고해 간첩짓을 했다'고 해석되었다.[16] 증거가 없으니까[17] 억지스러운 주장까지 동원해 증거를 만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2.1.1.1.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편집]

전두환 시기 최악의 사법살인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2.1.1.2.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편집]

항목 참조.

2.1.1.3. 학림 사건부림 사건 [편집]

전두환은 독서 모임을 가진 사람들을 정부를 비판한다는 반국가행위자들로 몰아 체포하여 재판에 세웠다.


2.1.1.4.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편집]

5.18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이 지시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시키려 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다.


2.1.1.5. 아람회 사건[편집]

전두환 정권이 대전과 충남 지역의 시민들이 친목모임에서 시국에 관해 논하는 것을 이유로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건이다. # 이 사건은 2009년 서울고법에서 무죄 또는 면소 판결을 받아내며 사건 발생 28년만에 명예회복을 이뤄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박 씨 등을 가둬놓고 가혹행위를 동원해 단순한 친목 단체를 반국가 단체로 둔갑시켰다며 사법부가 절대권력자의 요구에 굴해 소수자를 보호하지 못한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기도 했다. #2


2.1.1.6. 금강회 사건[편집]

1979년 5월 경부터 공주사대 학생들은 79학번을 중심으로 미등록 동아리인 ‘곰나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동아리 회원들로 중심이 된 유신철폐운동이 1979년 10월 13일 대자보의 형태로 전개된다. 이 일로 인해 지도부가 학사징계를 당하였으나 1980년 4월 16일 짧았던 서울의 봄을 기점으로 이들은 다시 금강회를 구성하여 민주화투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결국 1981년 11월 13일 금강회의 학생들은 좌경용공 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사회과학 책을 읽고 토론하던 학생들이었다. 경찰서로 연행된 대학생들은 몽둥이질과 통닭구이[18] 등 무지막지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리고 검찰 공소장엔 “<역사란 무엇인가>란 이념서적[19]을 탐독하고”란 혐의가 적시됐다. 전두환이 집권한 직후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대학가 서클과 젊은 교사 및 직장인들의 독서모임을 공산주의에 동조저한 용공분자로 몰았다. 피해자들에겐 이적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이적단체 구성 같은 혐의가 씌워졌는데 그 예로 영화 변호인으로 유명한 부산지역 부림 사건, 충남 금산지역 아람회 사건, 대전 한울회 사건, 82년 군산 오송회 사건, 광주 횃불회 사건이 대표적이며 모두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이다. ##2


2.1.1.7.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편집]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깃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들은 갖은 고문에 시달려야 했으며 특히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문기술자 이근안, 김수현, 백남은 등 고문경관 5명에게 겪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 2012년 말에 개봉한 영화 남영동1985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2.1.1.8.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편집]

한마디로 부부싸움 중에 홧김에 아내를 살해하고 혐의를 피하려고 월북하려 한 자는 납북 시도 피해자가 되고, 살인 피해자가 도리어 남편을 납북하려고 한 여간첩이 된 희대의 사건으로, 안기부가 반정부 여론을 막기 위해[20] 살인범+월북미수범 윤태식의 거짓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졸지간에 간첩이 된 살인 피해자 김옥분의 유가족은 연좌제가 적용되어 안기부로부터 심문과 끊임없는 감시를 당하고 사회적으로는 '간첩의 가족'으로서 집단따돌림을 당하며 가정이 완전히 파탄났다. 독재 정권의 처참한 윤리의식과 이들이 내세우던 '국가 안보'라는 것이 실제로는 '반체제 인사'[21]에 대한 탄압이었단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인 셈.[22]


2.1.1.9. 신호수 의문사 사건[편집]

공장 노동자 신호수가 간첩으로 몰려 타살된 사건이다. 2008년 진실화해위에서는 타살이 아닌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인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2.2. 국민탄압[편집]



2.2.1. 5.18 민주화운동[편집]


전두환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일어난 참극으로 유명하며, 그 과정에서 단 9일 동안 공식 수치로만 165명이 사망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2.2.2.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편집]


해당 문서 참조. 전두환 정권의 비호와 조직적인 은폐 속에 500여명에 달하는 원생이 사망하고도 철저히 감춰졌던 사건이다. #


2.2.3. 삼청교육대[편집]


한국판 정치범 수용소.[23]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2.2.4. 인천 5.3 운동[편집]


대한민국 제5공화국 민주화운동의 한 사건으로 6월 항쟁의 시발점이다. 1986년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인천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었는데,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319명이 연행되고 129명이 구속되는 피해를 입었다. 집회현장을 구경하던 일반 시민까지 무더기로 검거되고 수사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2.2.5. 10.28 건대항쟁[편집]


건국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전두환 정권을 '살인 정권'으로 규정하고 시위에 나선 사건이다. 전국 26개 대학의 2천여 명의 학생이 건국대학교에 모였는데,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제로 이들을 빨갱이로 보도한 뒤 경찰들을 투입해 1,520여 명을 연행하고 1,290명을 구속하는 악랄한 진압에 나섰다. ##2


2.2.6.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편집]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정권에 비판한다는 죄목으로 잡아가 전기고문물고문을 감행하여 살해한 사건이다.[24]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2.7. 6월 항쟁[편집]


전두환 정권의 공포 정치는 1986년 10.28 건대항쟁, 5.18 민주화운동 등 연이은 국민들의 반발로 1987년에 무너지게 된다.


2.2.8. 시위진압 체계화[편집]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이던 1980년 12월에 전경 설치법을 개정하여 기존의 대간첩부대인 전투경찰을 시위진압 전담 부대로 사실상 전환시켜 정부의 로봇으로 변모시켰고, 1982년에는 전경 설치법을 또 개정해 시위진압 등 치안보조 부문을 '의무경찰'로 분리시켰다. 경찰관 역시 시위가 터지면 민생치안 등 일반적 업무도 제쳐두고 시위현장으로 달려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85년부터 사복체포조 '백골단'을 만들어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정권은 대규모 민중봉기에 대비해 특전사 등 주요 부대에서 '충정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기까지 했다.


2.3. 노동, 종교, 언론 탄압[편집]


전두환 정권은 불교를 크게 억압하였다. 10.27 법난이 있었고 언론통폐합, 땡전뉴스, 보도지침, 언론기본법 제정, 프레스카드제 강화, 언론사에 안기부 직원 상주 등의 방법으로 언론자유를 훼손하는 강경책을 구사하는 한편 정권에 순응하는 언론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하는 유화책을 구사해 언론의 양심조차 썩게 만들었고, 언론사주조차 이에 발맞춰 언론사를 신문이나 찍어 파는 일개 공산품 제조업체로 변모시키기에 이르렀다.


노동운동계에서도 전두환은 박정희와 더불어 가장 많이 비판받는 대상이다. 상술했듯이 유신정권에 이어 많은 노동자들이 전두환 정권에 항의하는 목적으로 자살하였으며 시위 진압 중에 목숨을 잃거나 정부 요원에게 끌려가 고문 혹은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 12월 31일에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개정하여 '제3자 개입금지' 조항[25]을 추가해 외부 세력이 노동조합 설립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및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등의 행위를 전면 금지시켰고, 아울러 산별노조를 기업별 노조로 바꾸고 유니언숍제도 폐지시켰다.

이 조항은 전두환 퇴임 이후에도 정부와 기업이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목적으로 한동안 유지되다가 1993년 국제노동기구에서 정부에 대해 복수노조의 인정 등과 더불어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자 1997년에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폐지하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으로 새로 제정하여 기존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노동관계의 지원(40조)'로 바꿨지만, 해당 조항에서 노동조합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면서도 파업 당사자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당해 행정관청에 신고한 자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제3자 개입금지'가 아직도 존재한다며 시민단체와 노동계가 잇따라 반발하였다.

결국 2005년 노사관계선진화방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논의를 한 끝에 2006년 12월 30일에야 폐지되었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따위의 인권유린이 함께 병행되었다.

노동자들의 항의 자살도 잇따라 1984년 11월에는 민경교통 택시운전사 박종만이 노조탄압에 분신하고 1985년엔 건설노동자 홍기일이 8.15 광복절에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회사의 노조탄압을 규탄하는 전단을 살포한 후 분신했다. 같은 해 경원대생 송광영은 “학원안정법 반대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분신한 끝에 10월 21일 숨졌다.

1986년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경찰과 구사대에 맞서 분신하였다. 서울대생 이동수과 박혜정, 부당해고에 항의 분신한 삼환택시 노동자 변형진, 이경환, 강상철, 진성일, 김수배[26], 김성애[27], 박응수, 황보영국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으며 정상윤 등 인권이 열악한 현장 일선에서 뛰다 건강악화로 숨진 인권운동가들도 많다.


2.3.1. 사북사건[편집]


"사북사건의 사회적 충격을 빌미로 ‘신군부’는 1980년 4월 30일 긴급 계엄사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고 ‘불법행위 엄단’을 천명함으로써 확산되는 민주화의 열기를 차단하려 하였다.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신군부는 사북사건과 이어진 일련의 노동자 파업과 학원의 민주화 시위를 ‘혼란과 무질서’, ‘무법지대’로 규정하고 5.17 계엄확대 조치의 명분으로 삼았다." - 진실화해위 결정문(2008.4.8.)


전두환 정권은 전임 정권 때처럼 광산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 1980년강원도 정선군의 사북읍에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란 곳이 있었다. "한센인 다음에 광부"라는 자조적인 표현처럼 힘든 생활을 하던 광부들의 생활상은 <신아일보>의 1980년 5월 3일자 기사에서 “해발 800m의 지장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북광업소 광부사택은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방지대다. 160동의 연립주택에 760가구 3,000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란 내용으로 보도되었다.[28]

"이때 현장에서 사진 채증을 하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경찰관이 광부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사복경찰관이 노조 사무실 1층 창문을 넘어 노조사무실 앞마당에 대기 중이던 경찰 차량을 타고 달아나려 하자 주위의 광부들이 몰려 들었다. 당황한 경찰관은 그대로 출발하였고 이때 노조원 원일오 등이 차량에 치여 중상을 입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경찰 차량은 그대로 도주하였다." - 진실화해위


참다 못한 광부들은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회사 공작으로 시위가 취소되자 어용노조 위원장에게 사퇴를 촉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경찰이 광부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고, 몸싸움 끝에 광부 한 명이 경찰차에 깔려서 부상을 입었다.

광부를 다치게 한 경찰차가 조치도 없이 도망가자 흥분한 광부들에게 한 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으며, 광부들이 사북 지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사건 이후 오랫동안 폭동으로 취급되었으나 지난 2005년 사건의 주역인 이원갑씨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래서 진보 진영에서는 사북 항쟁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사건 진행 과정에서 회사 편에 선 어용노조원의 가족에게 성적 가혹행위를 하기도 하여 폭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사북 사태의 시작의 배경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탄광촌 특유의 인건비 착취와 열악한 환경 등 수십 년간 이어져 내려온 탄광촌의 적폐에 기인하고 있었다. 참여 정부 시절에 사북 사태를 조설한 진실화해위는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의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동원탄좌는 1980년 강원도 정선군 일대에 총 24개 석탄 광구를 보유하고 연간 약 160만 톤 전국 총생산량의 약 9%를 차지하고 종업원 수는 총 3,428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회사였다.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는 석탄 산업에 대한 국가의 육성정책에 따라 많은 보조금과 특혜조치를 받으며 외형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니 인력에 의존하는 낮은 기계화율과 부비끼(각목) 등 고질적인 임금문제, 불량사택과 낙후된 후생복지시설, 노동자들의 사회생활까지 감시하는 근로감독제도 '인감제도'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광부들의 불만을 촉발시킨 요인으로 지적된 ‘인감제도’에 대해 1980년 5공의 정부합동조사반 보고서는 이렇게 그 실상을 전했다.

"동원탄좌 회장의 친척이 운영하는 소비조합 구판장에서는 광부들이 회사 직원임을 증명하는 인감증만으로 외상구매를 가능하게 하였다. 광부들의 월급은 구판장 외상값을 회사에서 미리 제하고 지급되었다. 탄광지역이 원래 물가가 높았지만 당시 사택내 구판장은 회장의 친척이 소비조합을 운영하며 이권화하여 물건을 오히려 비싸게 팔고 타 상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심지어는 타 지역에서의 구매를 막기 위하여 산중에 있는 사택단지에 시내버스 노선을 개설하려는 것도 방해했다."


특히 진실화해위는 “특히 동원탄좌의 경우 임금인상 시기가 도래하면 임금인상의 기준이 되는 3개월 전부터 임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임금인상분을 상쇄하여 결국 임금인상 효과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편법을 사용하였다”고 지적했으며 그 사례로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후산부로 근무했던 윤0철의 노임지불명세서를 보면 기본금은 임금인상 시기인 3~4월을 기준으로 이전 3개월 동안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결국 3월의 실질 임금인상 효과는 전년 11월 대비 5~11% 내외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사북 사건 발생 직전 1980년 3월 14일 계엄사령관의 자문을 위하여 구성된 계엄위원회 19차 회의에서 당시 내무부 차관 서정화는 "광산의 경우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주택 및 급수시설을 포함한 생활 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인데다 요즈음은 체불 노임 때문에 이들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다"면서 "광산에서는 이러한 광부들의 입을 막기 위해 ‘덕배’라는 폭력조직 까지 동원하고 있다. 원성이 집단화 되지는 않고 있지만 체념적인 이들의 원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보고했다.

진실화해위는 “1979년 4월 3일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발단되어 1년여 동안 지속된 동원탄좌 노조의 파행사태는 사북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면서 “노조의 파행사태는 이원갑과 이재기의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선거를 둘러싼 노조 세력 간 내부갈등 이른바 노노갈등으로 표면화 되었으나 당시 어용노조에 대한 회사 측의 배후 조종과 노조지배 당시 주요 국가기관들의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개입 행사가 사태의 악화에 기여하였다”고 분석했다. 이 사건은 노조위원장의 사퇴로 종결되었다. ##2


2.3.2. 10.27 법난[편집]


"참으로 참담하였다. 이미 많은 스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는 스님에게 그들은 발길질과 쇠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떤 스님은 벌써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어떤 스님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발길질과 쇠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내려치니 시멘트 바닥에 피와 울부짖음이 낭자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거꾸로 세워 콧구멍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를 퍼 넣고 거기다 양동이의 물을 들어부었다. 이름 하여 고춧가루 물고문. 다짜고짜 고문을 강행하면서 나에게 몇 차례나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까마득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앞에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 했다. 정신이 드는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지를 밀쳐놓으면서 다그쳤다."


전두환 독재 정권의 불교 탄압 만행으로서, 불교가 전두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려고 하지 않자 본보기를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은 전두환은 경찰과 군부대를 절에 보내 승려들을 체포, 연행하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일삼았다. 30년이 넘게 흐른 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조사위에서 이것이 '국가권력 남용사건'으로 규정된 바 있다. #


2.3.3. 대불련 사원화 운동[편집]


1976년 민중불교론을 발표하면서 자기운동의 이념적 실천적 지향점으로 ‘민중불교’를 표방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꾸준히 민중불교의 이념을 모색했다. 그러나 기존의 보수적인 성향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각 대학의 불교학생회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대불련이 자기 이념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실천을 해오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에 소수의 진보적 대불련 회원들은 당시의 대불련의 보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미 보수화된 대불련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결합 모델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합의점을 도출해냈다. 이들은 이러한 인식과 민중불교 논의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목적의식적인 불교운동의 전개를 기획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획의 구체적 표출이 사원화운동이었다. 사원화운동은 ‘지역 사원을 민중운동의 근거지로 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불교로서 뿌리를 내리는 민중불교의 구체상’ 으로 정의됐다. 베트남 불교의 사원인 ‘파고다’가 지역사회(촌락공동체)의 생활 중심지였음에 착안하여 한국불교 현실의 비민중적 사원을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사원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현 단계 한국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서 불교야학과 노동자 포교 등을 제시했다.

이들은 사원화운동의 일환으로 ‘문화총림여래사’사업과 불교야학사업을 벌여나갔다. ‘문화총림여래사’의 경우 1981년 3월 7일 불교계의 보수성을 강력히 비판하며 새로운 불교운동은 사회 속에서 생생하게 발현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되어 ‘청년여래’ 라는 진보적 계간지를 발간하고 출판과 문화수익사업을 통해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근거지 역할을 했다. 한편, 불교야학사업은 당시 학생운동의 현장준비론의 영향을 받아 사찰 을 근거로 하여 민중과의 구체적 접촉, 의식화를 담당했다. 신설동에 있는 묘각사에서 인근의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야학을 실시했는데 교사들의 충원을 위해 묘각사에 정법대학생회를 만들어 대불련 출신들을 중심으로 의식화 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불교야학사업은 부산, 전주, 인천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불교야학의 고립, 분산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불련 각 지부와의 긴밀한 접촉을 통하여 ‘전국불교야학연합회’ 결성사업으로 확장되었다. 이때 생겨난 불교야학은 서울의 묘각사 • 여래사 야학과 천호동 보장사 야학, 전주불교야학, 부산의 89번 안내양을 대상으로 한 야학(동아대학교 불교학생회, 부산여대 불교학생회 침여) 등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불교운동을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이런 사원화운동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불교사회주의운동으로 낙인 찍고 1981년 12월 관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돌입하여 82년 2월까지 전국에서 1백여 명이 조사를 받았으며 그중 법우스님, 최연, 신상진 등의 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3년에서 1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조직 활동이 정체되면서 사원화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2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렇게 불교를 탄압한 전두환은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을 해버렸고,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는 것.


2.3.4. 언론통폐합[편집]


전두환 정권이 방송 공영화와 언론사 조직 개선을 명분으로 방송과 신문 겸영을 금지하고 지방신문을 1도 1지로 통합시켜 언론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의도로 벌인 언론 통제 조치.

이 조치에 따라 신아일보, 서울경제신문, 일간내외경제 등이 폐간됐고 동양방송, 동아방송, 기독교방송(보도부문)이 사라졌으며 2009년 미디어법 이전까지 지상파방송 여론 독과점체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2.3.5. 보도지침[편집]


보도지침은 언론기본법에 따라 구성된 문공부 홍보조정실이 언론에 대해 정치·경제·사회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보도하라고 내리는 지침이다. 이는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방식의 하나로, 현존하는 독재국가에서는 언론에 이러한 보도지침을 내려서 그에 따라 기사를 쓰도록 하고 있다.

한국의 보도지침은 전두환 독재 정권이 언론통제를 위해 각 언론사에 시달하던 지침을 말한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언론의 감시와 견제 기능이 무력화되자, 1985년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던 김주언은 보도지침의 존재를 폭로하고자 자료를 모아서 월간 잡지 <월간 말>에 넘겨주었고, 그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에 의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검찰은 보도지침을 폭로한 세 언론인을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국가 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을 들어 기소하였다.

종교 단체와 민주 단체 등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석방 운동을 벌였다. 사건은 국외에도 알려 영국의 인권 단체 엠네스티와 미국의 언론 단체 언론인보호위원회도 정부에 서한을 보내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결국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은 19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1995년 12월 12일 대법원 무죄확정 판결을 받았다. 2#3


2.3.6. K-공작계획[편집]


이 계획은 신군부가 집권하기 위해 1980년 3월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위해 꾸민 것이다. 당시 국민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언론장악이었기 때문이다. K-공작계획은 보안사의 이상재 준위가 팀장인 ‘언론반(언론조종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여기서 ‘K’는 King의 약자다. 즉,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인 것이다. #1#2

언론반은 신군부 핵심인 보안사가 80년 2월 신설한 정보처가 가동시킨 팀으로서, 검열 조종 업무와 공작 업무를 맡았는데, 검열 조종 업무는 시청 검열단에서 매일 실시하는 언론·출판 보도검열 업무를 조종하고 감독하는 일이고, 공작 업무는 설정된 임무 수행을 위해 각 언론기관의 주요 인사를 접촉하는 공작을 하는 것이다. #3#4

언론반은 차장급 이상을 회유하기 위한 반장 1명, 중진기자 이상의 여론을 수집하는 분석관(문공부 직원) 2명, 여론 수집 및 언론사 행사 일정을 파악하는 수집관 5명 등 모두 14명으로 구성됐다. 공작계획서에는 회유공작 결과 분석표가 첨부돼 있다. 이 분석표를 보면 중진 언론인을 접촉해 언론인들의 정치적 성향과 정책 주장을 분석하는 란이 있고, 비고란이 있는데 비고란은 접촉 횟수와 ‘양호’ ‘협조희망’ ‘적극’ ‘경계’ ‘소극’ 등으로 평가항목을 구분해놓았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의 하나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편집국장 면담을 잇달아 열어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또 이를 통해 사령관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 평가도 수집하고 분석했다. 신군부는 5·18 등 주요 사건 발생 시에도 간담회를 열어 언론협조를 요청했다. 계엄기간 중 검열된 기사를 계엄 이후에도 게재하지 못하도록 언론사 사주들의 각서까지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K-공작계획에 의한 언론인 접촉 공작은 80년 8월 하순까지 이어졌다. #5


2.3.7. 언론인 대규모 해직[편집]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K-공작계획을 통해 수집된 문서들은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 과정에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신군부는 1980년 8월 ‘국시부정’ ‘제작거부’ ‘부조리’ 등의 이유를 달아 언론인에 대한 대대적인 해직을 감행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해직된 언론인 711명을 3등급으로 나눠 각각 6개월, 1년, 영구적으로 취업을 못하도록 함으로써 고통을 가중시켰다. #


2.3.8. 땡전뉴스[편집]


뉴스 시보를 알리는 9시 종이 하고 울린 직후에 두환 대통령으로 시작되는 뉴스라고 해서 땡전뉴스라고 불렸으며, 정권에 장악된 언론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뉴스들은 전두환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2.4. 기업 탄압[편집]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2월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다.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및 산업합리화 정책의 미명 하에 1985년 5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총 6차례 걸쳐 부실기업정리가 단행되었는데, 해운업을 필두로 조선, 합판, 섬유,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전두환이 물러난 1988년까지 모두 78개의 기업이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되거나 3자 인수방식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국제그룹, 동명목재[29], 대한선주, 삼호그룹, 명성그룹 등과 같이 멀쩡한 기업에도 불구하고 정치 자금을 정권에 헌납하지 않았단 이유로 강탈하거나 해체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2.5. 우민화 정책[편집]


스포츠 발전이나 일부 문화를 발전시킨 치적은 우민화 정책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권력 체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법조계 시험 제도를 개편하는 한편 증가하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폈다. 3S정책과 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3S정책, 국풍81 등의 우민화 정책, 녹화사업의 경우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부정한 정권탈취와 비정상적인 폭력들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무서운 정책이다.


2.5.1. 3S정책[편집]


Screen (영상)
영화상영의 규제에 대한 검열이 과거보다 파격적으로 완화되었으며, 이에 따른 무분별한 저예산 에로영화가 영화관에서 집중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색영화 범람의 물꼬를 튼 것은 그 유명한 애마부인(1982년 2월)으로, 82년 극장개봉작 56편 중 무려 35편이 에로영화였다. 아래의 세번째 S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실질적으로 영화산업에 기여를 하지 못하고, 외국산 영화의 점유율은 여전했다. 한편 컬러수상기가 전면적으로 보급되어 이전 시대에 비해 다채로워졌다.

Sports(스포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1981년 8월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모든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시기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논리로 모든 반독재민주화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정권이 주도해서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민속씨름 같은 프로스포츠를 급조하였다. 세미프로리그였던 농구대잔치도 1983년에 출범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Sex(성 문화)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되어 그에 따른 여러가지 성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술집, 모텔, 유흥업소, 성매매 업소 같은 산업. 상술한 도색영화의 범람도 이 S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다. 더불어 유흥가의 급팽창으로 기생충처럼 따라붙는 조폭도 엄청나게 성장한다. 지금도 회자되는 3대 전국구 조폭 OB동재파(이동재), 양은이파(조양은), 서방파(김태촌)가 이 시절 이야기다.[30]


2.5.2. 사회정화운동[편집]


심지어 전두환은 오덕들, 특히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생 거대로봇물/SF물 덕후들에게도 안 좋은 소리를 들었는데, 전두환 초기 집권 시기인 1980년 8월에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한국방송협회에서 폭력적 프로그램을 배제하고 교양 프로그램을 늘리는 정책[31] 때문에 하록선장, 독수리 5형제를 비롯한 로봇물/SF물이 한동안 편성에서 사라지고 명랑물만 거의 독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경에 은하철도 999 등 '폭력적' SF물이 다시 방영되면서 아마도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32] 그러나 몇몇 오덕들은 전두환에 대한 반감으로 이 사건을 과장하여 전두환이 SF물을 국가적으로 금지해 탄압했다며 계속 우기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랜다이저 강제 폐지설 정도.


2.5.3.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편집]


1980년 9월엔 만화정화방안을 마련해 표현의 자유를 더욱 억압했고, 그해 11월 20일에 사회정화위원회에 의해 14명의 만화가들을 '불량만화가'라는 딱지를 붙여 불구속 입건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몇 안되던 TV 채널 자체도 정상적으로 방송되던 정규방송을 갑작스럽게 전격 중단하고 정부특별방송을 강행하는 등 보고자 하는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시청자들의 권리를 사실상 질식시켰다.(정부특별방송이든 다른 차원이든 기다리던 정규방송을 공공연히 무산시켜 상당수 시청자들의 분개를 초래하였다.)


2.5.4. 한수산 필화 사건[편집]


1981년 5월 중앙일보에 1년간 연재 중이던 소설가 한수산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33]가 정부 고위층을 모독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로 노태우 사령관의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다. 박정만 등의 피해자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대에는 언론 통제로 인하여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연재 중인 소설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지엽적 표현을 독재 정권의 자격지심 때문에 억지로 문제 삼아 인권을 유릴한 필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2.5.5. 무림파천황 사건[편집]


무협작가 겸 번역가 박영창이 연세대학교 신학과 학생으로 운동권 활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번역과 무협소설 창작을 하고 있었다.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고 제5공화국이 출범한 뒤, 박영창은 그의 무협소설 무림파천황에서 사파와 정파의 투쟁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을 넣었다. 그래서 졸지에 한국 무협소설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필화사건이 터져버렸다. 그 소설에 "강북무림"이 "강남무림"에 대해 "남진"을 주장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게 북한의 남진을 연상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잡아간 것이다.


2.5.6. 정치깡패의 난동[편집]


김태촌, 김용남 등의 정치깡패들을 양성하여 야당과 학생운동권을 공격하는 도구로 써먹었다. 특히 김태촌은 통일민주당 창당식에 깡패들을 끌고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


2.6. 부정부패[편집]


재임기간 내내 형제와 처가 사람들이 연루된 각종 권력형, 친인척 비리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명성그룹 사건, 정래혁 사건, 영동개발진흥 사건,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본부 비리가 일어났다. 전경환은 이 일로 기어코 구속되었다. 특히 사위 윤상현[34]석사장교소위 임관 후 고작 하루 내에 제대했다는 사실은 군비리 분야에 두고두고 화자되는 이야기.[35][36] 그뿐만 아니라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형 전순환과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 등이 전두환의 재임기간 중 비리를 저질렀다.

전두환 시리즈29만원 같은 풍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두환 본인도 매우 부패하기로 악명 높으며, 기업들에게 정치자금을 내도록 강요하여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뒤를 이어 정경유착의 훌륭한 예시를 보여주었다. 전두환 본인이 대통령으로 집권할 동안 조성한 비자금은 1996년에 확인된 바로만 무려 9,500억 원[37]에 이르며, 1조원대라는 주장도 있다.

이 인습이 차기 정부에까지 줄줄이 대물림되어 정치권과 재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대로 깎아먹었다. 이 모두와 연관지어 전두환은 IMF의 진정한 원흉이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했던 대만장징궈싱가포르리콴유가 얼마나 청렴했는지를 비교해 보자.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세월호 참사에 연루된 유병언 역시 전두환 집권기에 산업화에 기여했다며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을 정도로 답이 없는 정권이었다. # 유병언은 전두환과 전경환과의 친분으로 유람선 사업, 스쿠알렌 등의 제약 사업, 유기농 식품, 자동차 부품, 페인트, 컴퓨터 모니터 등의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재미를 보았다. 그 뒤에도 1980년, 1981년, 1982년에 각각 세 차례나 훈장을 추가로 받았다. #

이 때문에 흔히 전두환 정부 후기를 3저호황의 경제 전성기로 보지만, 전두환 정부의 부패가 호황을 조기종료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2.6.1. 대규모 비자금 조성[편집]


국고를 빼돌리고 기업에게 자금 출연을 강요하여 수천억 대의 비자금을 조성하였다. 전두환/추징금 환수 문서 참조.

1996년 전두환은 포괄적 뇌물죄로 추징금 2,200억 원을 선고받고, 600여억 원을 납부하여 추징금이 1,600여억 원 가량 남아있던 중에 2010년 10월 14일 300만 원만 납부했다. 전두환의 추징금 시효는 2010년까지이며, 납부하지 않을 경우 재산이 가압류된다. 하지만 추징금 중 일부를 납부할 경우 3년간 시효가 연장되어 재산 가압류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두환 일가가 약 1,700만 달러 이상의 비자금을 조성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전두환이 무주 리조트 등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들이 목격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으나, 본인은 남은 돈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2#3 전두환의 사후인 2023년 3월에도 전두환의 손자인 전우원전두환 일가의 비리를 폭로하며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2.6.2. 친인척 비리[편집]


그의 큰아들인 전재국친구네 아들 노재헌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부전자전이란 비난을 받았다. 추징금을 1000억 미납한 전두환 일가가 수백억 대 부동산 사업을 벌인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참고로 전두환 본인의 비자금으로 출판사를 세워서 전재국에게 주는데 이 회사가 시공사 ##2


2.6.2.1. 전경환 횡령사건[편집]

그야말로 5공비리의 끝판왕으로 손꼽히는 사건. 전두환의 친동생이자 5공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총재 겸 이사장을 맡았던 전경환이 재임기간인 약 7년동안 무려 76억원의 공금을 횡령한 사건[38]으로 전경환은 이 당시 검찰 수사 도중 일본 오사카로 비밀리에 출국하려다가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히는 등 나라망신을 제대로 시켰고 끝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후 특별사면되어 솜방망이 처벌로 그쳤다.

이후 이 사건의 여파로 지강헌유전무죄 무전유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39]


2.6.2.2.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편집]

노량진 수산시장 실제 주인 전기환씨로 판명
사라지기 전에 꼭 가야 할 이곳, 노량진수산시장
전기환씨 「압력」에 조사초점, 검찰 노량진 수산시장 관련 수사

전두환의 큰형인 전기환이 청와대 민정수석, 서울특별시장, 치안본부 간부, 현직고위 법관, 감사원 사무총장 등을 총동원하여 수산시장을 탈세와 수사로 협박하여 강탈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부 비리의 끝판왕이다. ##2#3


2.6.3.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편집]


정권 실세들이 대거 연루된 한국 역사상 최악의 금융사기 사건 중 하나이자 전두환 시기 부정부패 사건의 끝판왕격인 사건. 사채업자들이 전임 안기부 차장과 국회의원 경력, 미모, 언변을 내세워 정부 고위층과 유착한 뒤 금융사기를 벌여 자금난을 겪는 기업들을 부도나게 만들었다. 해당 문서를 보자.

참고로 이들 부부가 횡령한 금액은 1982년 기준으로 7,111억 원으로, 이는 당시 한국 GDP의 1.4%, 당시 한국정부 예산의 10%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하며, 더욱이 이를 2023년 4월 기준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면 약 2.9조 원이나 된다.


2.6.4. 평화의 댐 사기극[편집]


건설부 장관 등이 나서 정부 차원에서 북한서울 올림픽을 방해라려고 금강산댐을 건설해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뒤 1700억 원을 들여 댐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중 639억여 원은 국민 성금을 모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대국민 사기극을 펼친 것이다. 게다가 평화의 댐은 발전 기능과 홍수 조절 기능도 없어 애물단지 취급을 받음으로써 국민세금을 낭비한 바보댐이란 조롱을 받았다.


2.6.5. 범양상선 금융부정 사건[편집]


국내 최대의 해운회사인 범양상선[40] 회장 박건석이 1조 원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있으면서도 1,800만 달러(150억 원)의 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벌 비리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빗발치는 와중에 박건석 회장이 돌연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 회장이 사용한 비자금이 100억 원, 외화 도피자금이 150억 원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범양상선의 운항수입과 비교할 때 이 액수는 너무 적은 것이라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와 도피자금의 규모에 많은 관심이 쏠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의 입에 비자금이라는 용어가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으며, 이 사건은 5.26 개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2.6.6. 명성그룹 사건[편집]


전두환 정권은 명성그룹 회장 김철호가 1979년 4월부터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 대리인 김동겸을 통해 은행예금을 부정하게 빼내어 기업 확장에 사용해 21개에 이르는 재벌 회장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철호가 원리금도 상환하지 않은채 1천 66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횡령했으며 46억이나 탈세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김철호는 징역 15년에 벌금 92억 3,000만원, 윤자중 전교통부장관은 징역 7년 추징금 8천만원, 김동겸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2

하지만 당시 세간에는 김철호와 전두환의 장인이었던 이규동(대한노인회 회장)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일었다. 후에 김철호는 명성사건이 이런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전두환의 표적수사였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의 정치 자금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영동개발 사건, 명성사건은 모두 은행과 사채시장이 유착한 지하경제의 비리가 드러난 사건으로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3대 금융사기사건이었다. ##2#3


2.7. 국가원로자문회의 설립 추구[편집]


국가원로자문회의 자체의 목적을 보면 대통령이 조언을 구하고 대통령의 판단을 돕는다는 취지로써 이런 기구를 통해서 사회 지도층 인사를 여럿 만나는 건 좋은 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후 그 누구도 설치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라면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이 직전 대통령이라는 헌법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옆동네 일본이 헤이안 시대에 했었던 상왕(인세이) 짓거리를 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은 당연히 뒤따른다.[41]

물론 상왕까지는 아니고 퇴임 후 안전 보장이나 집권당에 무관하게 퇴임하면 허전하니 감투나 쓰고 있으려는 생각일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빼도박도 못할 명백한 상왕과 다를바 없는 직위라서 곱게 보는 사람들도 없었다. 게다가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걸 만들어 어떤 형식으로든 정치 권력에 관여되어있는 권력자로 남으려고 했는데 이를 노태우 정부에서도 철저히 외면하는 바람에 실패했다.[42] 1989년에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폐지됨으로써 현재는 헌법상의 규정으로만 남아 있다.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 예우법을 통해 권력 행사하려는 사실이 드러났다.#


2.8. 정적 탄압[편집]


전두환은 대선배와 마찬가지로 야당은 때려서 다스린다는 틀린 의식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 결과가 각종 정적 탄압이다.


2.8.1. 유성환 국시론 파동[편집]


한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이어야 했다고 말한 이유로 야당 국회의원이 수감된 사건이다.


2.8.2. 제헌의회그룹 사건[편집]


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서 한국 시민민주주의 운동권 세력 소속 학생들을 체포하여 피해자들을 국보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한 사건이다.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편집]



3.1. 범죄율 증가와 언플[편집]


간혹 네이버 뉴스 등 파시즘 환자들이 전두환 시절 때는 치안이 좋고 범죄자들이 없었다는 주장이 많은데,(심지어 노인층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이런 사기에 속기도 한다.) 전두환 시대에서도 범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살인, 강도, 강간, 방화와 같은 4대 흉악 강력범죄의 발생건수는 1979년(전두환이 집권 전)에는 5755건. 전두환의 마지막 임기년도인 1987년에는 9342건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4대 흉악 강력범죄의 연평균 증가율은 6.24%다.

이렇게 범죄율이 높아졌던 이유는 당시 검사+경찰들이 민생 안정이 아니라 권력에 빌붙어 먹기 위해 국민 탄압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사실 전두환 때 범죄율이 낮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시 언론이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가 치안율을 높이고 있다며 삼청교육대를 미화하는 뉴스를 비판적 사고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자료들을 보면 삼청 교육대가 범죄율을 하나도 줄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실 민주정부 이후 범죄율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과거에는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았다가 현재는 언론이 범죄 부분을 자유롭게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범죄율이 예전보다 증가한 듯 착각하는 것이다.


3.2. 여성 인신매매 증가[편집]


80년대에 여성이 납치, 취업 사기 등으로 집창촌에 팔려 가는 일은 신문 기사 사회면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일어났다. 박정미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985~91년 인신매매 형사 사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 피해자의 84%가 성 산업에 매매(성매매 업소로 팔려갔다는 의미)됐다”며 “80년대 전두환 정부의 유흥·향락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로 업계 규모가 커지면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한 인신매매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인신매매 괴담은 80년대 일어났던 사건을 기반으로 괴담화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3.3. 7.30 교육개혁조치[편집]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7월 30일에 7.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했다.

‘7·30 교육개혁안’의 핵심부분이라 할 당면 교육정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대학입시제도의 개혁: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성적을 대입예비고사 성적과 합산하여 선발에 반영한다.
②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의 축소조정: 교과목을 통폐합 내지 축소하고, 교육내용의 수준을 적정화한다.
③ 대학인구의 확대: 1980년도 대입정원 205,835명에서 1981년도에는 311,000명선이 되도록 계획하고, 이에 따라 1981년도 신규채용 교수 소요 인원수를 3,500명으로 계산하였다.
④ 대학의 주야간 구분제도의 폐지: 전일제 수업으로 시설 활용을 극대화한다. 즉 대학의 강의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설하여 대학의 시설과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일제 수업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⑤ 졸업정원제 실시: 130% 모집에 100% 졸업으로 입학자의 30%를 탈락시킨다.
⑥ 방송통신대학: 3년제 단기과정이던 방송통신대학에 5년제 박사과정을 신설하고 입학정원을 대폭 확대하여 1982년도에는 5만명으로 계획하였다.
⑦ TV 교육방송 확대실시.
⑧ 교육대학 수업년한 2년에서 4년으로 연장 등이었다.
[출처]

이 조치는 7월 30일에 발표된 즉시 그해 대학 입시에 적용되었다.[43] 이에 따라 당장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해 고3 학생들은 1학기가 끝난 상황에서 바뀐 대입 전형을 적용 받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입장에서는 대입을 고작 반년 남기고, 그간 준비했던 본고사가 폐지되었고, 새로 도입된 내신 제도로 예상치 못하게 학과 성적이 대입에 적용받게 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2년 반 동안 내신보다는 본고사 공부에 집중했던 학생들은 대입 시험이 고작 4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입 전형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상황에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44] 또한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경우, 기존에 있었던 실업계 동계 진학 특혜[45]의 폐지가 발표 당시 고2 학생들의 입시부터 적용되었다.[46]. 이 조치로 대학의 문턱이 낮아지고 대졸자가 늘어나자, 그만큼 고졸 학력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심화되었다. 자연히 실업계 고등학교는 점점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가는 곳으로 인식이 바뀌어 갔다. 특히나 이어지는 대학 정원 확대, 야간 대학 폐지와 맞물려 실업계 고등학교는 완전히 몰락하고 너도 나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 대학 입학 만을 추구하는 문화가 생성되었다.

대학 정원 확대는 고등 교육의 수혜자를 늘리고, 입학 인원 수보다 졸업 인원 수를 적게 하여 대학 내 경쟁을 활성화 시키며(졸업 정원제), 사립학교의 재정난을 타파한다는 취지로 실행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일단 대학들의 인원이 급작스럽게 늘어나면서 교수 부족 문제가 대두되었고 강의의 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신군부는 교수를 빠르게 늘리기 시작했는데 석박사가 이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이 여파는 오늘날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대졸 인원이 막 늘다보니 이때부터 대졸 취업난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화 되었다.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졸업 정원제도 폐지되면서 대학 정원은 더 늘어나고 이에 수반하는 문제들도 더 커졌다.

3.3.1. 기승을 부린 불법과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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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외 수업을 하다 잡혀온 사람들
7.30 교육개혁조치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낳았던 문제는 과외 금지이었다. 신군부가 강제 수단인 과외 금지령까지 끌어들였는데도 여전히 과외는 많았다. 사교육을 금지하고 수백 명씩 수용하는 학원만 허가하면서, 단과 학원이 크게 성공했다. 물론 이런 학원은 원칙적으로 재수생만이 수강 가능했고 고교 재학생들은 수강이 금지되었는데 가짜 신분증 등[47]을 통한 불법 수강이 흔한 풍경이었다. 사교육을 금지한다고 떠들었을 뿐이지, 할 사람은 다 했다는 것.##2

게다가 이때부터 대학 서열화가 공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전 수험생이 오로지 한날 한시에 동일한 시험을 치루고 해당 시험 점수만으로 서열을 매긴 결과 그 점수에 따라 수십개의 대학이 칼날같이 등수가 매겨지게 되며, 입시기관에서는 소위 배치표라는 이름을 이를 확대생산하며 동시기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더욱 증폭되게 된다. 70년대 본고사 시절에는 대학 서열화는 있었으나 입학전형이 학교마다 다른 관계로 칼같은 서열화가 아닌 대략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서열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정부 때는 서울대 - 전,후기 명문대 - 중위권대 - 중하위권대 등 그룹화된 서열화에, 중위권 이하부터는 특정대학이 어느 그룹인지 확정되지도 않은 느슨한 서열화였다.[48] 그러나 전두환 정부 들어서 학력고사로 일원화된 후부터는, 대학이 20개라면 1등부터 20등까지 칼같이 나뉘게 되고, 다음 학년도 수험생들은 이렇게 나뉘어진 배치표를 가지고 대학에 지원하며, 이것이 계속 내리반복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대학서열화를 만들게 된다.

게다가 이때부터 학벌 사회가 생기면서, 명문대가 대세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3년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2023년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저 생각이 그대로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제대로 굴렀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성공가도가 눈 앞에 나온다. 학점을 줄 때는 교수가 절대적이었다. 지금처럼 깐깐하게 학점을 보려는 인사담당자도, 관리하려는 학생도 없었다.[49] 자격증 취득도 물론 없었다. IMF 이전까지 한국 대기업들의 인재채용 방식은 학벌카스트의 최상단인 서울대를 시작으로, 각 대학별로 입사지원서를 차등분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명문대생들은 취업 시즌이 되면 학과사무실에 놓여진 각 대기업 계열사들의 입사원서를 골라 작성후 제출했고, 간단한 면접을 통해 선발되면 그것으로 평생 직장을 갖는 것이었다. 최상위 명문대는 그야말로 어디든 골라갈 수 있었고, 중견대학은 지원 가능한 기업들의 폭이 좀 더 좁아졌고, 하위권 대학에는 대기업들이 입사지원서 자체를 나눠주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런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주요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가 지원단계부터 박탈되었다. 이러니 명문대에 일단 가기만 하면 끝이라는 풍조가 더더욱 팽배해질수밖에 없었다. 비명문대 출신 학생이라도 학점, 대외활동, 공모전 등 대학생활을 통해 길러낸 직무역량이 우수하다고 판단되면 누구나 지원할수 있는 온라인 채용루트를 통해 최소한 인적성시험은 칠 수라도 있는 지금과는 상황이 아예 달랐던 것이다.

전두환 때는 2023년처럼 살벌한 경쟁사회가 아니었다.[50] 고교 입시는 2023년보다 훨씬 중요했지만, 적어도 노력한 만큼 보답을 받았다. 고교평준화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지역도 많았다. 인문계열 고등학교 입학 정원도 훨씬 적었다. 때문에 명문으로 인정받는 상위권 인문계열 고등학교에 가지못하면 일찌감치 경쟁에서 낙오하는 구조였다.

단, 위 2개 문단은 전더환 정부 정책의 한계라고는 볼 수 없다. 이미 그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라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51] 지금보다 대학에서의 경쟁이 낮은 이유도 앞단에서 언급된 3저호황으로 인해 취업문호가 크게 넓어진 탓이지 대학 학사제도의 탓은 아니다.

게다가, 대학생 숫자는 희소하였는데, 상위권 대학 출신은 더욱 희소하여 사회적으로 완전 우대받았다. 실제로 당시는 대다수가 고졸 내지는 중졸인 시절이었으니, 조금 깨이고 미래를 바라보는 청년들을 사회에서 대접해주는 풍토가 있었다.[52] "대학생의 의견", "전공자의 견해"라는 것이 매우 비중있게 여겨지며 심지어 매스컴도 타는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험생들이 사교육에 빠져들지 않고 정부 지침대로 법과 원칙을 지켜가며, 학교만 다니면서 SKY 대학에 간다는 것은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었다. 매년 학력고사 마치고 TV는 최상위 고득점자 인터뷰를 하였는데 판에 박힌 듯이 "학교 수업에만 충실한 결과" 라고 하였다. 정부와 언론은 진짜 공부잘하는 학생은 학원, 과외 받지 않고 오로지 학교만 다닌다고 홍보하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기조는 과외가 자유로워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의례적으로 나왔으며, 2010년대 들어서야 저런 틀에 박힌 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누구는 누구에게 과외를 받았더라 하는 입소문이 퍼졌고, 오히려 암암리에 고액 과외만이 성행할 뿐이었다. 전년도 출제위원을 모셔와 특강을 하거나 정부 단속을 피하기 위해 뒷돈과 뇌물이 성행하였다. 정부의 단속은 실효성 없었고 법의 테두리 밖의 새로운 시장만이 형성되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불법 고액 과외 시장에 조직폭력배들이 뛰어들기도 했다. 이들은 돈은 돈대로 바가지로 받고, 성적이 안 좋으면 학생과 학부모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으며, 여학생의 경우에는 성폭행까지 하는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결국 이들이 사교육시장을 장악해여 돈을 긁어모아 세력이 매우 커졌나갔고, 치안은 점점 나빠졌다. 이러한 조치는 1989년에 대학생들에게 과외교습이 허용됨에 따라 사문화되었다가 국민의 정부 시기인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 과외 자체가 합법으로 인정받았다.

3.4. 환경오염[편집]


1980년대에 원진레이온 사태의 내막이 드러나고 , 그밖의 온산공단 괴질병 발생사태(1985) 등 다양한 환경오염 사례가 발생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은 환경단체의 조직을 억압하였다.


3.5.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편집]


대한민국의 폭탄주 문화를 양산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사건으로, 국방위 소속 위원들과 육군 간부들이 술을 마시다 집단으로 난투극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국방위원들과 육군 수뇌부들의 불량한 행실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3.6. 사립유치원 법적 모호[편집]


한유총의 개학 연기 사태로 사립유치원 나쁜 뿌리가 주목받았는데, 원래 한국의 유치원은 1970년대까지는 대다수는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인 이순자가 아동에 대해 관심을 받았는데, 이에 계기로 유치원들을 육성하기 시작하기 했는데, 문제는 학교법을 모호하게 규제를 풀리게 하면서 학원들이 유치원 사업에 끼어들게 되고 사립유치원 힘이 커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의 유치원들은 70%가 사립이고 차기 정부들이 국공립 육성하려고 해도 사립유치원 힘 때문에 크게 육성하지 못한 원흉으로 꼽히고 있다.


4.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편집]



4.1. 군종 차별[편집]


역대 대통령들 중 육방부 끝판왕으로 군림했다. 반란 직후 노재현의 후임으로 공군을 달래고 하나회 내부에서 임명할 경우 내분거리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이던 주영복 장군대한민국 국방부장관에 임명하긴 했다. 하지만 그 외엔 해공군을 홀대했다.

해군의 국제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함정 시승할 일만 있으면 함장석에 골라 앉았는데, 어느 나라든 해군 함정에선 국가원수가 타더라도 함장이 최상석에 앉으며, 함교의 함장석 등을 권유받더라도 무조건 사양하는 게 예의다. 때문에 해군들의 원성을 샀다. 심지어 텔레비전 보다가 UDT/SEAL 활약이 나온다고 육군 특전사 출신으로서 참을 수가 없었던지 "왜 TV에서 UDT만 나와 오만가지를 다 하냐?"는 생트집을 잡아 UDT에선 전설로 통하던 조광현 해군 대령을 좌천시킨 적도 있다.

해군이 포항급 초계함같이 작은 배에 과무장하고 다녀 배의 안정성을 해치는 등의 요소를 만든 것도 전두환 대의 해군 홀대 풍조 때문이다. 게다가 해군은 함상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활동화(운동화)를 신는데, 목이 긴 육상용 전투화를 신지 않았다고 이를 트집잡은 적도 있다. 게다가 자신의 마누라수장 못 읽는다고 장교 동정복에 견장대를 달아 철제 계급장을 부착하고 하정복용 견장도 수장 형태에서 철제 정장을 단 걸로 바꾸도록 1986년 12월 20일에 규정을 개정, 해군 복제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를 창출해냈다.[53] 이 일명 이순자 정복은 1992년에 도로 환원되었다. 이 때문에, 제2연평해전 당시 유일하게 전사자 유가족들에게 조문갔던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싸늘한 시선만 받고 돌아왔다.

4.2. 미사일 개발 능력 지연[편집]


“포착 10분 이내 북한 미사일 기지 격파하라”

원래는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지대지 미사일 개발 사업으로 진행한 계획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NHK-1 백곰을 참고.

그러나 10.26 사태 이후 시간이 흘러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백곰 사업을 완전히 취소시켜버렸으며 단순히 사업만 취소시킨 것이 아니라 국방과학연구소 내의 미사일 관련 연구자들도 대거 숙청했다.

백곰 사업이 취소됨에 따라 이것의 후속 사업으로 준비하던 각종 미사일 사업도 줄줄히 취소되었으며 국내에 어렵게나마 모이기 시작한 미사일 연구개발 인력들은 대부분 흩어지고 우리나라의 미사일 개발 능력은 후퇴해버리고 만다. 나중에 민간 기업에 시설과 인력을 이전 시킨 일본의 사례를 알게 된 관계자들이 아쉬워했지만, 이미 해체된 부서와 사람들까지 원상복귀하기엔 한 발 늦은 상황.

이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장관급 국무위원 1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상황이 반전되어 백곰 사업의 후속 계획 일부를 재추진하여 현무 지대지 미사일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현무-1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면서 단일 모터, 관성유도 등의 기술은 백곰의 양산배치 모델에 적용될 예정이었던 부분들이 많았던 관계로 사실상 거의 5년 이상 지체시키고, 관련 인력과 기술을 숙청시키면서 이 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5년을 소모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도합 약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낭비되었다.

게다가 만약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라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자체적인 탄도탄 개발이 더 늦춰졌거나 혹은 개발 인력이 없어서 자체적인 개발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

그러나 백곰 사업이 박정희 정권시기 미국과 상당히 마찰을 겪게 했었다는 참작 여부가 있다.


4.3. 팔당호 탱크 수몰사건 / 한라산 군수송기 추락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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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27일 팔당호 주변에서 국군의 날을 앞두고 대규모 시범훈련중 연막탄으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있던 전차(탱크) 1대가 팔당호로 빠졌지만 훈련중단을 하지 않고 어떤 구조활동도 벌이지 않는 바람에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를 지켜본 전두환은 구조지시도 없이 훈련을 망쳤다며 기분 나빠하며 행사 끝날때까지 화를 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뒤집힌 채 수몰된 전차의 궤도가 드러나 있을 정도로 얕은 수심이었음에도 어떤 구조나 긴급조치도 없었다. 유족에게는 "훈련이 종료되고 전차가 집결지에 집결했는데 그제서야 1대가 낙오됐다는 걸 파악했다"고 거짓을 알렸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걸 영광으로 알라" 등 망언을 일삼았다. 훈련 중 벌어진 사고 소식은 신문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육완식 당시 특전사령관의 인터뷰 내용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도 그 상황을 보셨겠네요. 바로 정면이니까?"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죠. 잘 나가다가 전차가 물속으로 싹 들어 가버리니까. 기분이 안 좋았죠. 끝까지 기분이 안 좋아서 나갔어요."

"사고가 벌어지면 빨리 가서 구해라라고 얘기했을 법 한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그런 얘기 없었나요?"

"그게 없었어요. 내가 옆에 있었으니까 아는데..훈련 중지를 해야죠, 꺼내려면. 그래서 내버려 뒀어요."

"안타까워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언짢아했다?"

"예 기분 나빠했어요. 훈련을 망친 건데.."


1982년 2월 5일 제주공항으로 향하던 군수송기가 한라산 1천1백미터 고지에 추락하면서 탑승자 53명이 사망했다. 언론에는 대간첩 작전중에 사망한것으로 보고 되었으나 실제로는 '봉황새1호 작전'으로 제주도 순방에 나선 전두환을 경호하려고 악천후 속에 무리하게 출동시켜 일어난 사고였다. 이후 유가족의 현장진입을 차단한 후 몇 차례나 사고 현장을 폭발시켜 시신 수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병들의 시신을 훼손 시켰고 유가족들은 몰래몰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이후 사고 현장에 충혼비를 제작 했는데 이 역시도 장병들의 월급을 공제해 지었다고 한다.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거기 올라간다 그러면 군인들이 어디서 그렇게 소식을 잘 듣는지 못 올라가게 쫓아와. 금방 쫓아와요 (막아요?) 접근도 못 하게 했어요.”왜 이렇게 철저히 막아섰을까. 외부의 발길을 통제한 채, 군이 추락한 수송기를 안에 있는 시신과 함께 수차례 폭파시켰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장락 특전사 예비역 원사▶
“공군 EOD(폭발물 처리반)에서 나와 가지고. 공군 폭파팀에서 나와서 그 폭파를 3회에 걸쳐서 폭파를 시켰어요. 비행기를”

사고 난 지 이틀 뒤, 사고기 발견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작전명 변경부터 사고 수습까지 전 과정의 총책임자는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박 씨는 유가족이 시신을 거두러 현장을 수십 번 오가는 사이 육군 대장으로 승진합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퇴임 2년 전인 1985년 육군참모총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순직한 장병들을 기린다는 충혼비엔 이런 박희도 씨가 손수 지었다는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양윤경 기자▶
"네가 죽음으로써,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살고 조국은 지켜지리니 검은 베레는 죽어서 영원히 산다."
유가족에 따르면 더 황당한 건 충혼비와 원점비 제작비용이 장병들의 월급에서 공제됐다는 것.

이들은 "하사 7,000원, 중사 이상 15,000원, 장교 30,000원씩을 봉급에서 공제해 충혼비와 원점비를 제작하고 비문에 자신의 이름 박희도를 기재했다"며 유가족과 영령들을 우롱한다고 분노했습니다.

5. 경제에 대한 평가[편집]



5.1. 단기적인 안목에만 치중한 산아제한 정책[편집]


분명 80년대는 인구가 많았으나 인구감소가 예측될 정도로 출산율이 충분히 줄었음에도 불구하고[54] 심지어 당시엔 인구가 1,000만명이라면 우리가 미국처럼 살 수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저출산을 가속화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을 편 이유는 당시 곧 통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인구를 미리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5]. 결국 1996년(실질적으로는 1990년)에야 산아제한 정책이 중단되었으나 이미 출산율은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다만 이후의 출산율 감소는 산아제한보다는 사회적인 요인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2002년 이후의 1.3명 미만의 초저출산, 2018년 이후의 0명대 극단적 초저출산까지 전두환 정부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자시한 내용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문서 참조


5.2. 국제그룹 해체 사건[편집]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업에 대한 보복. 이 사건으로 국내 신발 산업이 약화되었으며, 동명목재 사건과 겹쳐서 부울경의 경기가 침체되어 현재까지도 해당지역의 경제악화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그룹 해체 사건 항목 참조.


5.3. 자동차공업 통합조치[편집]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 당시 국보위에서 국내 자동차 업계를 구조조정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다. 전두환 정부가 실시한 이 정책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학계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모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 오일쇼크 이전부터 국내 자동차 산업은 경제 규모에 비해 과잉 투자 및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받아왔고, 오일쇼크가 터진 이후 국내 자동차 산업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훗날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려던 시점에 터진 IMF 때만 현대차를 제외하고, 기아차, 삼성차, 쌍용차, 대우차가 줄도산하여 해외 기업들에게 줄줄이 팔려나간 예가 있다. 오일쇼크 당시 정부의 개입으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를 통한 강제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몇 개 회사는 실제로 도산했을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오일쇼크 당시 전세계적으로 자동차 회사들이 줄줄이 파산해가던 상황에서 국내 자동차 업계는 어쨌던 파산하는 회사 없이 위기를 넘기게 되었고 80년대 중반 마이카 시대를 맞아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6. 개인적 논란[편집]



6.1. 민주적 정당성[편집]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신 분이 아니라 통치를 하신 분입니다. 국민의힘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당 차원에서 조문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통치 행위를 계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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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前 국민의힘 대표[57]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 정당성이 낮은 인물이다. 똑같이 독재자로 평가되는 전임자들인 이승만박정희는 어쨌거나 집권 중 몇 차례 조작 없는 국민의 투표[58]로 당선되어본 적이 있다.[59] 이승만은 생전에는 독립운동가이자 국부로 존경받았기에 적어도 4.19 혁명 이전까지는 굳건한 지지층을 확실히 갖고 있었고, 상대 후보 신익희조병옥이 선거 기간에 급사하는 등 운도 상당히 따랐다. 때문에 3.15 부정선거로 조작한 것은 이승만의 표가 아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표였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문제가 있지만 이후 직선제로 3선을 했고, 지지율 감소와 김대중의 급격한 성장에 놀라 직선제를 유지하면 승산이 없다고 보고 유신 헌법을 제정하며 간선제로 전환한다. 아무튼 이승만의 경우 조봉암, 박정희의 경우 윤보선, 김대중과 대선에서 붙어 여러 차례 승리해봤기에 어느 정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윤보선은 간선제로 선출되었지만 의원 내각제였던 장면 내각 시기에 대통령직을 맡은 상징적 군사원수였으니 실권을 제대로 가졌던 전두환과 비교할 수 없으며, 최규하도 박정희와 동일하게 유신헌법 하에서 간선제로 선출되었지만, 애초에 임시 대통령 취급이었던 데다 그나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전두환에게 쫓겨나서 오히려 동정을 받는 편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경우 12.12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60] 관제야당을 동원한 대선으로[61] 당선되어 놓곤 엄청난 권력을 가졌으며, 그 권력을 전제적으로 남용함으로서 끊임없이 국가적 진동을 초래하였다.[62] 물론 간선제 그 자체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국도 대통령중심제+간선제로 성공적인 민주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승만의 경우 권력을 유지하려는 꼼수로 직선제 개헌(발췌 개헌)을 밀어붙인 바가 있고, 독재자들 대다수가 정권 연장을 위해 행하는 보여주기식 투표도 거의가 직선제 투표다. 조금 더 먼 역사를 따지자면, 나폴레옹 3세국민투표를 도구로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즉 국민투표나 직선제 그 자체는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니고, '더 민주적'인 것이라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전두환의 경우도 간선제라서 문제라기보다는, 사실상 당선자를 정해놓고 한 형식적인 선거였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것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간선제=독재로 공식화되어 간선제로의 개헌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퇴임 후에도 권력에서 멀어지기 싫어 국가원로자문회의같은 쓸데없는 기관을 헌법에 넣으려고 했고, 실제로 들어갔지만, 본인조차도 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고 현재는 완전히 사문화된 조항이 되고 말았다.[63] 이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는 보수 세력에서 확실히 옹호받으나, 민정당계가 사라진 현 시점 전두환은 보수 세력에서도 남 취급이며 법학자,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도 정당한 대통령으로는 절대 평가되지 않는다.

다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시대를 잘 탄 면도 있는 게,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갓 건국한 상황이라 모든 것이 중구난방으로 돌아가는 신흥 독립국의 흔한 레퍼토리였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6.25 전쟁 이후 초토화된 전반적인 국가 인프라와 불안한 민생 수습을 하느라 바쁠 시기에 베트남 전쟁라오스, 캄보디아, 에티오피아의 공산화 등으로 안보 위기감이 세계적으로 심각해진 것도 있고[64] 더욱이 유신 체제 시기이던 197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가히 기상천외하다 못해 기괴한 수준의 독재자들이 넘쳐났으니[65] 박정희가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이는 감도 없지는 않다. 허나 전두환이 집권했던 80년대의 경우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 사회적 상황도 어느정도 수습이 완료되어 쉬운 말로 중진국에 진입하였고,[66] 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막장 독재자들 상당수가 축출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시기[67]라 전두환이 다른 당대의 독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평가하는 것도 불가능한 데다가, 세계적으로 봐도 추세가 서서히 탈냉전과 자유주의로 넘어가던 시기에 이를 쿠데타라는 방법을 써서 억지로 과거로 회귀시킨 것도 모자라 오히려 집권 과정에서 백 단위의 사망자가 나온 민간인 학살까지 자행했으니 힐난을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는 비록 전두환과 뿌리가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민주적인 헌법과 적절한 절차 하에서 당선된 사람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정당성을 부인하는 경우는 없다. 노태우 본인도 그런 점을 활용해서 전임자와 거리를 뒀으며 차별화를 하려고 애쓰기도 했고. 김영삼부터는 정책적, 도덕적인 비판을 듣기는 할지언정 민주적 정당성 자체에 딴지를 걸 만한 인물은 없다. 심지어 최순실 게이트로 파면된 박근혜조차 어디까지나 대선 선거전 당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단 것이 문제였지, 선거 자체는 조작 없는 정상적인 선거로 당선되었다.

현 시점에서의 대한민국 정치 형세만 보더라도, 박정희를 구심점 삼거나 겉으로나마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는 정치인들도 상당하고, 그보다는 수가 적을지언정 이승만을 '국부'로 추켜세우는 국회의원도 심심치않게 보이지만, 전두환은 전혀 아니다. 그나마 전두환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 살아있던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는 한나라당 인사들이 종종 전두환의 자택을 찾아가곤 했지만, 민정계가 와해되고 정치적인 파워가 명을 다해버린 2010년대부터는 보수정당에서조차 외면당했다. 심지어 뉴라이트, 전광훈 같은 극우 인사들조차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추앙하려고는 해도 전두환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말할 덧도 없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찬양하지는 못할 정도로 전두환은 인터넷상의 극우들을 제외하면 모두에게 버림받은 상황이다. 물론 전두환의 악행들을 생각하면 완벽한 자업자득이지만.

6.1.1. 12.12 군사반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2.12 군사반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2. 5.17 내란[편집]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잡아넣었다. 이 같은 불법 행위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것이 5.18 민주화운동이다.


6.1.3.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편집]


전두환은 재임 기간 중의 불법적 행위로 인해 구속당하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죄목은 다음과 같다.

반란수괴 - 12.12 군사반란
반란모의참여 - 12.12 군사반란
반란중요임무종사 - 12.12 군사반란
불법진퇴 - 12.12 군사반란
초병살해 - 12.12 군사반란
내란수괴 - 5.17 쿠데타
내란모의참여 - 5.17 쿠데타
내란중요임무종사 - 5.17 쿠데타
내란목적살인 - 5.18 민주화운동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 비자금


6.2. 육군 내 사조직 결성 문제[편집]


육군 내에 장교들의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한 주요인물 중 하나로, 하나회가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만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나회 문서 참조.


6.3. 적반하장에 가까운 막말[편집]


1995년에 구속될 때도 구속영장을 받고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순순히 구치소에 들어간 친구 노태우와는 달리 고향인 합천으로 도주해버렸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반란에 맞선 순국자들이 잠든 현충원에 참배까지 하고 가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68]

위의 팔당호 탱크 수몰사건 당시 눈 앞에서 사람이 물에 잠겨 죽어가는데도 그저 훈련을 망쳐서 기분 나빠하는 반응만을 보여준 일화,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무차별적인 학살 명령, 1980년대에 이르러 간첩이 뜸해지자 각 기관 대공관계자들이 모인 대간첩대책중앙회의 도중에 '저놈들이 안 내려오면 좀 답답하죠. 내려와야 우리 군인들 전과 올리고 훈장 타고 진급되고 이런 기회가 생기기 않느냐.' 라는 발언으로 간첩이 없으면 무고한 사람 아무나 붙잡아 족쳐서 만들어 내라는 은유적인 지시까지 내리는 등, 지도자로써의 면모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인명 경시 성향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여러 망언으로 사후인 현재까지도 국민들에게 지탄받고 있다.

6.3.1.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편집]


1980년 9월 4일, 대통령 취임 이후 전두환은 광주를 방문하였는데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지난번 광주의 시끄러운 일(?!)은 역사흐름의 불가피한 진통이므로 (전남)도민들이 80년대 새역사창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면 나도 용기를 갖고 국민들께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는 망언을 하여 논란을 빚었다.[69][70]


6.3.2. '광주는 폭동' 발언[편집]


광주는…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나는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2003년 2월 SBS 인터뷰 中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에서 4.19 혁명, 6월 항쟁, 부마민주항쟁과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민주화 운동이다. 그런데 전두환은 이러한 5.18 민주화 운동을 두고 폭동이라 부르는 막말을 하였다. 그가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한 인식이 어떻고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발언이다.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고, 또다시 폭동이라고 하였고, 법적 절차도 검토하겠다고 막말을 하였다. 본인이 사격 명령을 안 내렸다고 해도 분명 진압군의 광주의 사격은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고, 전두환이 발포에 관한 이야기를 못 들을 리가 없다.[71]


6.3.3. 김대중을 향한 막말 및 이중적 태도[편집]


1980년 5월 9일 경주에서 열린 김유신 장군 추모제 금산대제(金山大祭)에서 '김대중은 가짜 김해 김씨이며 본명이 윤대중이다'라는 벽보가 붙었고 이로 인해 김대중의 성씨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이는 언론에도 보도되었고 당시에 보안사령관을 역임했던 전두환은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라는 발언을 하는 등 막말을 하였다.

일반인이 자기 지인들이랑 가십거리로 말한 것도 아니고, 보안사령관이라는 매우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저런 비하적인 말을 했다는 점이 실로 경악스럽다. 게다가, 저 당시에는 아직 김대중의 성씨가 정말로 김씨가 아닌지 확정도 되지 않았는데, 마치 확정이 된 듯이 말한 것 역시도 문제가 된다.

훗날 김대중은 정작 집권 후 화해와 용서 정신을 펼치면서 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포용하고 제대로 대접해주었고, 전두환은 김대중에 대한 평가를 180도 회전시켰다. 김영삼이 독재정권이었던 전두환과 계속 마찰을 빚고 싸우던 것과 달리 김대중은 (대선 당선자답게 김영삼을 직접 알현하며 구속당한 하나회 일원들을 사면 시켜줬을 만큼) 전두환과 현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대화를 펼쳤고, 노무현도 김대중-전두환의 이런 관계에 대해 호평을 하기도 했었다. 훗날 전두환이 김대중과 김영삼의 장례에서 행한 태도의 차이도 있을 정도로.[72]


6.3.4.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발언[편집]


제목 그대로, 2008년전두환"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는 막말을 했다.[73] 이는 전두환독재자로서 여러 만행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행위에 대해 반성은커녕 오히려 무용담 늘어놓듯 남 앞에 자랑하며 우월감을 과시하는 발언을 한 것이니 소시오패스가 따로 없다. 여담으로 옆에 있던 이순자도 해당 발언에 대해 대놓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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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는 전두환에 비하면 정당성이 있는 편이었다. 어쨌든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직접선거로 당선되었고, 1960년대 초반 당시는 혼란스러운 정국과 파탄에 가까운 경제상황 때문에 국민들의 염증도 상당했기 때문. 심지어 1972년에 친위 쿠데타로 개정된 유신 헌법조차 여러가지 비판이 있지만 일단은 국민투표로 개헌이 이뤄졌다. 반면 전두환은 두 차례의 쿠데타 이후 정통성이 제로인 체육관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고, 국민들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부풀어있던 시기라 전두환 정권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과정으로 보나 결과로 보나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박정희보다도 딸리는 독보적인 최하인 셈이다.[2] 참고로 이 기사에는 1980년 6월 첫 주에만 서울 한 곳에서 무려 2,100명(대부분 학생)이 체포되었다는 것과 전두환이 10.26 사건 2주 뒤에 당시 한국군 장성 연봉이 미화로 환산하면 1만 달러였던 시절에 100만 달러 가격의 서울의 고급 외교관 별장을 인수받았다는 내용도 나온다.[3] 이는 18년 동안 집권한 박정희 시절 양심수 수의 약 2.5배에 달하는 수치였다고 하며, 1970년대 대한민국의 양심수 수 총합이 정확히 2,704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셈.[4] 노신영은 제외[5] 참고링크1[6] 참고링크2[7] 주부아카데미협의회 회장 등으로 일하다 고정간첩 색출 조사를 받고 나온 뒤 사라졌다.[8] 불법으로 북한에 가서 물의를 빚었던 임수경 전 의원의 오빠.[9] 서울 서부서 대공과에 연행된 뒤 시신으로 발견됐다.[10] 정부 관계자에게 끌려갔다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나왔다.[11] 사회과학서적을 읽다 보안대에 걸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12]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3] 명색이 군대에서 별까지 달고 결국은 대통령까지 된 인간이 저런 말을 아무런 숨은 의도나 별 생각 없이 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건 대놓고 간첩이 없으면 무고한 사람을 족치거나 죽여서 간첩을 만들어 내서라도 잡아라 라는 메시지를 던진 거나 다름없다. 전두환이 얼마나 사람 목숨 알기를 우습게 아는 악랄한 독재자였는지를 드러내는 일화. 그런데 이 발언이 간첩 조작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한다면 발언의 의도가 더욱 심각해지는데, "정말로 인민군들 좀 내려와라."라는 외란선동(?!) 수준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말 이런 의도로 말을 했다는 건 아니지만 의도가 어땠든 군인 출신 대통령이 사전에도 없는 말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의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경악할 만한 일이다.[14] 정확히는 1983년에 2명, 1985년에 3명, 1986년에 2명이 사법살인을 당했다.[15] 1980년 2월 발생한 '원양어선 간첩단 사건'. 피해자 신모 씨는 형, 당숙, 사촌매제와 함께 조총련 간부로 알려진 재일교포에게서 돈과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넘겼다는 누명을 쓰고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009년 무죄가 선고되었다. #[16] 1983년 7월 재일교포 김모 씨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으로 간첩이 된 후 1984~1986년 2년 동안 가족을 사실상 인질로 잡힌 채 보안사에서 강제로 근무해야 했다. #[17] 이는 당연히 '범죄'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18] 전기통닭을 굽듯 사람을 꼬치에 매달아 놓고 돌려가면서 두들겨 패는 고문 수법[19] 실제로는 이념서적도 아니며,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읽어봤을 정도로 기본서 중 기본서이다. 한마디로 개념 자체가 없다는 말. 물론 그의 전공영역이 소련사였기 때문에 이것만 보고 불온서적 결정을 내린 측면도 있다.[20] 실제로 사건이 왜곡된 채 언론에 보도된지(1987년 1월 8일) 고작 6일 뒤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공론화된 것은 수지 김 사건이 언론에 공표된 지 11일 후인 1987년 1월 19일이었다. 물론 이 조작 사건으로도 자유를 향한 국민들의 갈망은 전혀 막지 못했다.[21] 심지어 김옥분은 '반체제 인사'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다.[22] 실제로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것은 독재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23] 과거에는 "노동교화소"라고 적혀있었지만 사실 정치범 수용소라고 봐야 된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명칭도 로동 교화소이다. 정치범 수용소는 국가원수 혹은 통치집단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 혹은 통치집단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잡혀오는 곳인데, 실제로 "전두환 반대파 및 김영삼, 김대중 등의 재야 지지자들은 1순위로 끌려갔다." 예를 들어서 보안사령관 재직 시절 하나회 축출을 시도했고 전두환의 집권을 반대했던 강창성은 2년 동안 4회 끌려갔다.[24] 그것도 고문후유증을 앓다가 옥중이나 석방으로부터 얼마 안 가 죽은 것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고문 과정에서 하나뿐인 목숨을 잃게 한 사건이다.[25] 노동조합법 제12조 2항, 노동쟁의조정법 제13조 2항[26] 회사측의 노조탄압으로 항의분신[27] 유언은 "산재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로 산재중앙병원에서 투신 자살하였다.[28] 이어 기사에서는 "산비탈에 옹기종기 서있는 연립식 주택은 10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무척 낡아 있어 2.5km 떨어진 시가지로 나가는 길은 경사 40도의 비탈길로 차량통행마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슬래브 단층인 연립식 주택 1동에 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한 가구가 방 2개 부엌 1개(8평)로 구조가 똑같으나 수리를 하지 않아 벽과 천장이 허물어져 물이 새고 수도도 설치되어 있으나 겨울철이면 물이 나오지 않아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욕탕은 1개로 그나마 여자용은 없어 주부들이 시가지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29] 특히나 이 두 기업은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이었다. 결국 부울경 지역의 경제를 쇠퇴시켰으며, 나아가 서울 공화국화를 가속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0] 물론 진짜 전국구 조폭인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 이화룡의 후계자 신상사 등은 따로 있었고, 이동재조양은, 김태촌은 그들의 행동대장일 뿐이었다. 사실상 전두환 정권의 앞잡이였던 이들은 노태우 시절에 벌어진 범죄와의 전쟁으로 세력을 잃고 점차적으로 몰락하다가 전두환 정권이 끝난지 무려 10여년도 넘은 노무현 정권 때에서야 이들의 뿌리를 완전히 뽑을 수 있었다.[31] 동양미래대 최성락 교수와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경래 씨의 논문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편성표도 같이 참고할 것.[32] 그러나 로봇물은 1987년 메칸더 V 방영 전까지 한동안 방영되지 못했다.[33] 1970년대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연애를 다룬 대중소설이었다.[34] 전두환의 딸인 전효선 씨와 85년 결혼했으니 전두환 친척권에 포함되는 셈이었다. 이후 유학을 떠나며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생활을 했으나, 2005년 부로 전효선과는 이혼한 상태.[35] 1988년 5월 14일 임관 후 당일 제대.[36] 사실 석사장교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듯이 소위 금수저를 위해 고작 6개월 복무시키는 군비리의 수단에 지나지 않은 장치에 불과했다. 전두환 장남 전재국도 이런 수단으로 6개월 단기복무를 했지만, 당일치기 제대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37] 2023년 4월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1조 9,750억 원에 이른다.[38] 참고로 저 당시에 76억원이면 현재 가치로는 무려 천억원에 가까운 돈이다. 참고로 저 액수는 재판에서 인정된 돈으로 한정된 금액이고 해외로 빼돌린 정황까지 있어서 실제로는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39] 지강헌이 동시기에 공범 2명과 함께 500여만원을 강탈하여 징역 7년 및 보호감호 10년 형을 선고받아 도합 17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전경환은 76억원을 횡령했는데도 자신보다 적은 형량을 선고받았다며 탈옥 후 인질극을 발인 사건. 당시 지강헌은 연희동의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에 찾아가서 항의하겠다고 말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두환이 대통령 취임 이전 국보위 위원장 시절에 보호감호제도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경환의 형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지강헌이 무장강도 짓을 벌여 갈취한 500만원도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이였고 지강헌은 돈을 갈취했을 뿐만 아니라 강도 및 특수상해 혐의, 그리고 여러차례 교도소에 수감된 이력이 있는 상습범이라는 점도 감안해야한다.[40] 계열사로는 훗날 '콜라독립 815'로 유명해질 범양식품과 범양냉방이 있었다.[41] 헤이안 시대 일본은 이 일로 내전까지 유발했었다.[42] 노태우 본인부터가 전두환과 달리 직선제로 당선된 사람이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과 자신은 다르다는 인식이 명백히 있는 상황임을 전두환이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출처] 굵은 글씨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교육개혁(敎育改革))에서 그대로 발췌.[43] 참고로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에서는 대입 전형은 발표 후 3년 뒤부터 적용되게 하는 3년 예고제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때는 1980년 7월 30일에 발표되고 반년도 안 되어 바로 그 해 대입을 치루는 학생들이 적용 대상이 된 것.[44] 참고로 1980년에는 본고사를 폐지하고 대입 시험을 예비고사로 끝냈지만, 예비고사는 본래 대학 진학 여부 만을 가리는 시험이었기에 이 조치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래서 다음해인 1981년 부터는 시험 자체를 변형하여 학력고사라는 이름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이 본고사를 폐지하고 대입 시험을 일원화한 조치는, 학력고사 하나로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줄세우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지적 받기도 한다.[45] 실업계 학생들이 대학을 자신이 나온 고등학교 학과와 같은 학과로 진학하는 경우 진학 T.O를 따로 주던 제도[46] 이 조치 이전만 해도 집이 가난하여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으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지역 명문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런 경우, 동계 진학 특혜 등을 노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명문 실업계 고교로는 대표적으로 전국적으로 알아주던 명문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전 직접 이사장으로 있었던 금오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외에도 지역의 명문으로 자리잡고 있던 상고들이 있었는데, 그 예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온 목포상업고등학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온 부산상업고등학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나온 동지상업고등학교 등이 있었다. 하지만 7.30 조치 이후 실업계 학교들이 전체적으로 몰락하면서 많은 명문 실업계 고등학교들도 대부분 인문계로 전향하였다.[47] 당시는 한 집에 형제들이 여러 명 있었던 시기라서 형이나 언니의 신분증을 적당히 조작해서 재수생으로 위장했다. 학원도, 사정당국도, 다 알면서 눈감아줬다.[48] 따라서 전,후기 명문대군에서, 중위권 이하군 안에서는 각 대학의 서열이 그때그때 바뀌기도 하고 별로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75년, 76년도 대학별 예비고사 평균점을 보면 1위 서울대-2위 연세대간의 점수차이가 2위 연세대-20위 전남대, 2위 연세대-25위 숙명여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서울대를 제외한 중상위권대 간의 점수격차가 심하지 않았다.[49] 학생운동을 하다가 잡혀가서 공부를 못하면, 학교에 결석해도 인정상 학점 A+ 준다. 심지어 강좌에 나온 학생에게, 시위 현장으로 뛰어들라고 부추기는 교수까지 있었다.[50] 그 당시 일본에서는 아예 대학을 레저 랜드라고 불렀다.[51] 서울대의 위상은 전두환 정부 시절보다 제국대학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50년대가 더 높았다.[52] 심지어는 경찰서에 잡혀가도 학벌 순서대로 처벌받는다. 일류 대학생인 경우 시위 주동자거나 심각하게 깽판을 친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 훈방조치. 나라의 장래와 국가 발전을 위해서 큰 일을 하라며 무슨 짓을 저질러도 관대히 용서해준다.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일류 대학 출신만이 대기업에 들어가며 또한 나라의 큰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 된다 생각해보자. 정말 그렇게 처리해줄 수 밖에 없다.[53] 소련/러시아 해군, 중국 해군 등 구 공산권 해군의 경우는 동정복에 수장과 견장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며, 서방권 중에서도 싱가포르 해군 등 동정복에 수장과 견장을 혼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다, 싱가포르 해군 같은 경우는 하정복용 견장이 육군과 동일한 계급장임을 들어 최악의 흑역사라 하는 것은 일방적이라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개정 의도가 심히 불손한데다 해군 구성원들의 의견 반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됐으며, 해군의 전통 및 관습 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만들어졌고, 무엇보다 결과물이 멋대가리가 심히 없기까지 하다는 점 등 충분히 최악의 흑역사로서의 요건은 다 갖추고 있다. 공산권 해군의 경우 견장 형태가 큼직한 고정식 금색 바탕이고, 통합 계급장 자체가 색상 조합만 바꾸면 해군 동정복에도 잘 어울리는 형태였으며, 무엇보다 종주국인 러시아의 전통적인 계급장 형태라는 점 등 상징성도 충분히 있는 등 이순자 정복과 절대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다.[54]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4년에 우리나라 출산율은 1명대(1.74명)로 떨어진 상태였다.[55] 이런 생각은 사실 전두환만의 생각은 아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전에 남북관계에 해빙 분위기가 돌자, 북한 장병들이 판문점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병사들끼리 '통일하면 집에 놀러오라'며 집주소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으며,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의 프리퀄 격 사건인 미군 폭행 사건 당시에는 이때 북한군 병사들과 친해진 남한 병사들이 미군을 폭행하던 북한군에게 "형, 왜 이래."라고 말하면서 제지하는 등, 당장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질거라는 기대감이 팽배해있었다. 1980년대에는 남북관계가 상당히 냉랭해졌지만, 여전히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서 북한과의 통일이 머지않았다는 예측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출산율이 대체 출산율 미만으로 떨어지던 1984년만 해도 동독과 소련이 건재했으며, 남북간에도 구체적인 통일 방안이 논의되는 시점은 아니었다.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밀하게 현실을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마냥 바람만으로 통일을 낙관한건 분명 잘못이다. 실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고 소련도 망하기 직전인 1991년에야 남북한의 UN 공동 가입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56] 이와 더불어 이준석은 정치와 권력은 국민적인 합의가 뒷받침이 될 때 비로소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고 덧붙였다.[57] 여담으로 국민의힘은 전두환이 총재와 명예총재를 맡았던 민주정의당의 직계 후신이다. 즉 전두환과 5공화국은 자신들이 소속되었고 창당했던 당에서조차 부정당한 것. 심지어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 중에 조문을 갔던 이들 또한 전두환과의 개인적인 인연, 과정이야 어찌됬건 전직 국가원수였기 때문에 인간적인 도리로 조문한다는 입장이였지 전두환을 존경해서, 진심으로 추모해서 간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심지어 국민의힘 소속은 아니지만 전두환과 오랜시간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했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진심으로 과거를 뉘우치고 사죄라는 모습을 보얐다면 전직 대통령으로서 멋있는 모습이였을텐데 참 씁쓸하다"라는 말을 남겼다.[58] 직선제,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에 의한 간선제[59] 이승만의 경우 처음에는 간선제였다가 직선제로 전환한 반면 박정희의 경우 직선제였다가 간선제로 전환했다는 재미있는 차이가 있다.[60] 11대 대선[61] 12대 대선[62] 그 일례로 상술했듯이 멀쩡한 TV정규방송을 인위적으로 공공연히 파탄내는 일이 도를 넘어섰다.[63] 지금도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존재하긴 한다. 하는 일도 없고,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파면되는 등 의장을 할 사람도 마땅치 않지만.[64] 물론 박정희는 이런 시대상을 핑계로 자신의 독재를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식으로 타당화했다.[65] 가장 악명높은 폴 포트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물론이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이디 아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호르헤 비델라 등이 집권한 시기가 이 1970년대이다. 박정희의 통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80년 역사상 가장 억압적인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다. 사실 박정희가 애초에 저들만큼의 학정을 저질렀다면 국가를 개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마냥 비토 여론이 더 컸을 것이다.[66] 실제로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GDP는 1715.4달러였는데,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약 6261달러다. 오늘날로 치면 (2023년 IMF 통계 기준으로) 자메이카와 동급인 셈.[67] 일단 박정희가 1979년에 암살되었으며, 같은 해 이디 아민, 폴 포트, 마시아스 응게마가 축출되었다. 이 셋은 전부 스탈린, 히틀러, 북한의 김씨 3대에 비견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들이다.[68] 이는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감형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한 행동으로 추측된다.[69] 전두환대통령 지방 나들이 1980.9.5 동아일보[70] 전두환대통령 지방나들이 이모저모 1980.9.5 경향신문[71] 차라리 증거라도 없었다면 모르겠으나, 이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당시에 광주에 방문하여 참상을 기록한 영상들이 컬러 영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전두환 본인 역시 광주 학살의 증거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막말을 내뱉는 것.[72] 두 장례 다 조문하긴 했다.[73] 해당 영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