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다른 정치인 및 대통령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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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는 문서이다. 정치인 목록은 대통령 재임순으로 서술한다.

2. 국내 정치인(대통령)[편집]



2.1. 박정희[편집]


파일:전두환대대장시절.jpg
박정희는 전두환이 반평생을 섬겼던 그의 상관이었다. 박정희가 소장이던 시절에 전두환은 대위에 불과했으니 계급 차이가 상당했었다. 나이 차이도 14살이니, 당연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꼼짝 못했을 수밖에 없다.

5.16 직후 전두환은 대위(ROTC 교관)로 육사 생도들을 규합,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임으로써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두환에게 있어 박정희는 주군이자 은인인 셈이다.

소령 진급까지는 육사 11기생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빠른 선두주자는 전두환이 아닌 손영길[1]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총애 덕분에 소령은 짧은 기간 동안(1년 2개월)만 하고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2]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당시 장성급들도 못 건드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이 3명의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의 부하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중장이 소장의 부하로 활약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2.2. 노태우[편집]


파일:전두환노태우.jpg
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과 노태우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갔던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교류가 잘 없어요. 요 옆에 사는데... 서로 나이도 들고 그러면 오히려 더 화해가 되고 이럴 텐데 별 접촉이 없어요. 접촉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중략) 참 이상해. 정치라는 게 참 더러운 거야. 권력이라는 게... 그 사람하고 나하고 대통령 되기 전에는 제일 친한 사람인데, 제일 친한 친구였었는데,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나를 제일 많이 헤쳤어. 서로 잘 아니까, 그 사람한테는 좀 섭섭한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잘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있잖아요?

2003년 SBS <뉴스추적> 인터뷰 中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고,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쿠데타를 같이 일으키는 등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군정종식, 민주화 선언 등으로 5공화국과 차별화된 움직임을 보이는 과정에서 전두환의 과오를 파헤쳤고,[3] 종내는 그를 백담사로 보내버리자 이때 "노태우 그 놈이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귀싸대기 맞는다"는 말을 했었다.[4] 하지만 1996년 재판 당시 같은 자리에 마주했을 때는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 하며 어느 정도 감정은 풀었다고 한다.[5] 두 사람은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사면조치에 따라 같은 날 석방되었다.


2004년 1월 13일,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마지막 공식석상.

출소한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함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에 함께 참석했고,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과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 때도 함께 참석해 옆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 공식석상에 나온 건 2004년 1월 13일, 참여정부가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만찬이 마지막이었다.[6] 이날 만남을 끝으로 두 사람은 10여년간 일절 교류를 나누지 않고 지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 노태우의 건강상태가 나빠져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행사에는 모두 전두환 혼자만 나오게 되었다.[7]

그러던 2014년, 전두환이 노태우의 연희동 자택을 찾아가 문병하면서 극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때는 이미 노태우가 오랜 투병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정기 전 비서관과 김옥숙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대화했다고 한다.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 라고 물었고 노태우는 눈을 깜빡였다고 한다.

2021년 10월 26일 노태우가 사망하여 둘의 인연은 마감하게 되었다. 이순자의 말에 따르면 노태우의 부고를 들은 전두환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다만 다발성 골수종 투병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 직접 조문을 가지 못했고 아내 이순자와 장남 전재국을 대신 보냈다. 그리고 4주 뒤, 전두환도 역시 세상을 떠나고 이번엔 노태우의 아내 김옥숙이 장례식장에 근조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둘 사이의 기나긴 관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3. 김영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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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킨 인물로, 김영삼은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전두환에게 모진 수난을 당했으며 가택 연금에 수시로 협박도 당할 정도였다. 당연히 전두환이 농담으로라도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에 따라 사면해주긴 했지만 전두환을 매우 경멸하며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퇴임 후 일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이승만, 박정희는 꼬박꼬박 한국식 독음으로 불러주면서 전두환만은 일본식 독음으로 '젠또깡'이라고 칭할 정도. 그러나 사석에서 1990년 전두환의 측근인 박근 전 UN대사를 불러 노태우가 아닌 나와 손잡고 6.29 선언을 했더라면 백담사에서 고초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전직 대통령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해 "경제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나라가 절단났다"비판했다. 이후 빡친 김영삼은 집으로 가버렸다.

이후 이명박 정부였던 2010년에도 청와대에서 전직 대통령 연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김영삼이 이명박에게 대놓고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이다. 죽어도 국립묘지는 몬 간다."고 개망신을 주고[8], 뒤이어 만찬 시간에 전두환이 "와인(포도주) 더 없느냐"고 하며 와인을 찾자, 김영삼이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9] 하며 높은 언성으로 전두환을 호되게 혼내는 바람에 격노한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집에 가버렸던 얘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다. 참조 기사 그리고 전두환을 사면해 준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토록 사이가 나빴던 두 사람이지만, 노태우가 투병으로 인해 칩거에 들어간 2000년대 중반부터는 꼭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도 했다. 보통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순서대로 자리 배치를 해주는데, 가운데 사람이 못 나오니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 이러한 두 사람의 어색한 투샷은 2013년 박근혜의 취임식에서 마지막으로 포착되었다.

김영삼의 사망 후 전두환이 빈소에 가서 도의적인 조문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화해'를 하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침묵한 채 자리를 떴다. 그래도 조문을 와 주어서인지 전두환도 사망 후 손명순 여사 명의로 된 화환을 받았다.[10]

2.4. 김대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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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신군부와 전두환 정부에 대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두환은 5.17 내란 이후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뒤집어 씌워 전격 체포했고, 군사법원에서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전두환은 하는 수 없이 사형 집행을 포기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지만, 1982년 김대중에게 굴욕적인 석방 편지를 쓰게 만들고 그를 미국으로 사실상 쫓아냈다. 3년 뒤인 1985년 김대중은 귀국을 결정했지만, 전두환은 김대중의 귀국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을 김포국제공항에 보냈고 결국 김대중은 귀국하자마자 동교동 자택으로 압송되어 가택연금 됐다. 이 때문에 DJ는 1987년 6.29 선언이 발표되기 전까지 가택연금 상태로 정치활동을 제약당했으며 일상생활 전체를 감시당해야 했다.

민주화가 되고 1988년 제13대 국회 출범 이후 김대중은 1노 3김의 주축으로 5공 청문회를 주도해 전두환을 국회의 증언대에 세웠고 이 자리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 발포에 대한 책임이 전두환에게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내세워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선된 직후 YS를 만나 이들의 석방 및 사면복권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은 특별사면 되어 출소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전두환·노태우·최규하 전 대통령을 10여 차례 청와대에 초청해 국정에 대해서 의논하였으며, # 전두환도 이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한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정치적으로도 여러 차례 힘을 보태주었는데 2000년대 초반 새천년민주당 한광옥 대표가 예방했을 때는 "요즘 자꾸 몇몇 사람들이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비판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달빛정책이라도 내놓으면서 떠들어야 한다"며 김대중을 치켜세우기도 했다.[11]

여담이지만 김대중이 이희호 여사와 재혼하기 전 차용애 씨라는 사별한 아내가 있었는데, 차용애 씨가 바로 전두환의 먼 친인척 관계이므로 한때 먼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2.5. 노무현[편집]



국회의원 시절 5공 청문회 당시 청문회에서 전두환이 퇴장한 후 명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나 2004년 대통령 임기 중 설에 유인태 정무수석을 보내서 세배를 한 것, 전두환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서 만찬을 대접하고, 해당 행사에 참석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을 봤을 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해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은 하지 않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좀 더 버티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라고 한탄하며 짧게 애도의 말을 전하면서 둘이 어느 정도 화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6. 이명박[편집]


이명박이 17대 대선 후보 시절에 정치 원로들 예방 차원에서 만난 것을 빼면 딱히 접점은 없지만, 훗날 전두환을 만찬에 초청해서 극진히 예우하는 등 그럭저럭 원만했던 관계로 보인다.

굳이 접점이라고 따지고 들어간다면 박정희이상득인데 전두환은 박정희가 가장 아끼는 부하 중 하나였고,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현대건설 사장 자격으로 현장소장을 담당한 적이 있다.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은 육사 14기로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서울대로 갔는데, 육사 시절 동기가 이종구, 이춘구 같은 하나회였다. 이들과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가면서 정계입문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이 이상득이 민정계였기에 간접적인 접점은 있었다.

전두환 사망 당시 공교롭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수감 중이라 조문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조화는 보냈다.

2.7. 박근혜[편집]


아버지 박정희암살당하면서 박근혜가 청와대를 떠나게 되자, 전두환은 박근혜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6억을 건네주었다. 전두환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 박근혜 정부에서 전두환 추징금 환수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애초에 박근혜랑 전두환이 같은 보수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둘의 사이는 과거부터 정말 최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두환이 자신의 상관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박근혜도 사실상 탄압했기 때문.

전여옥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가 전두환을 방문해 "박근혜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했더니, '꼭 그래야겠는가'라는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거나 뭔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삼김 등 정계 원로들은 국정 농단의 예측 여부를 떠나서 최씨 일가의 존재는 알았다고 하며 전두환 역시 본인이 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최측근인 허화평이 10.26 사건 직후 조사차원에서 최태민을 불러다가 조사한 일이 있다고 밝혔던만큼 최씨 일가와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박근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정치경험도 많아서 머리는 상당히 좋은데 인간관계가 폐쇄적이기에 좋은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2.8. 문재인[편집]


여단장 시절인 1976년, 문재인에게 특전병 최우수 표창을 직접 준 적이 있다.
[1] 1964년에 하나회를 만든 주역이다.[2] 전술한 것처럼 1962년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박정희가 차지철과 전두환을 불러 국회의원을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차지철은 의원직을 맡기로 하고 전두환은 군에 남기로 했다. 전두환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이었는데, "아직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답변을 했던 것.이 '의원 문답' 이후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빨리 진급하게 되었다. 1961년 11월에 소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그로부터 불과 1년 2개월만인 1963년 1월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이 되었으니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기간이 무척이나 짧은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중에는 고위 지휘관이 턱없이 부족해서 닥치는대로 진급시켜버리는 바람에 이보다 빠른 경우들이 많이 존재하긴 했다. 참고로 미국에서도 진급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던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둘리틀 특공대제임스 둘리틀이다. 둘리틀의 경우, 에서 준장까지 1년 조금 넘는 기간밖에 안 걸렸다.[3] 시대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고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고 한다. 친구 사이라지만 2인자로 지내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4] 하지만 노태우의 입장에선 전두환이 군 주요인사들을 자기 심복들로 깔아놓은 것도 모자라, 퇴임 이후에도 뭔가 이상한 기구를 만들어 대놓고 자신이 막후 실세가 되겠다는 식으로 나온 터라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낸 것은 배려를 한 것이다. 구속시킬 수도 있었던 일을 백담사로 보내서 조용해질 때까지 숨어있게 했기 때문이다.[5] 좀 더 상세한 대화는 다음과 같다. "자네 구치소에서는 계란 후라이 주나?", "안 줘.", "우리도 안 주는데⋯"(...)[6] 당시 참석한 인원은 전노 2명과 김대중까지 3명이었다. 김영삼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7] 사실 2007년에도 공식석상이나 메스컴에 나오긴 했으나 이때는 이미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그래도 초기라서 그런지 지팡이를 짚으면서 홀로 걸을 수 있고, 어눌하지만 대화까지는 가능한 수준.[8] 사실 이 시점에 생존한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 전부였는데 노태우는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이 불가능했던 상황이라 초대할 사람이 이 둘뿐이었다.(...)[9] 과장이 아니라 두 말을 전부 반말로 했다. 사실 김영삼이 전두환보다 연상에 정치 경력도 훨씬 선배라 반말을 못할 건 없었다.[10] 사실 김영삼의 영결식 때에도 전두환이 조문을 와서 손명순 여사와 김현철의 손을 잡고 애 많이 썼다며 오랫동안 위로를 해주는 등 김영삼 일가와 전두환 일가 두 가족간의 사이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 전두환의 아들들과 김영삼의 아들들이 동년배이기도 해서 무조건 적대적일 이유는 없긴 하다. 아버지들끼리는 견원지간이더라도 대통령의 자녀들은 갈등의 당사자도 아니고, 같은 입장에서의 동병상련 덕에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다.[11]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두환의 정치적 영향력이 많이 남아있을 때였다. 당장 민정계 인사들도 자유민주연합한나라당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일부는 김대중에게 등용되어 새천년민주당에 소속되어 있기도 했다. TK권에서는 여전히 전두환에 대한 지지세도 많이 남아있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정계 대부분이 축출되고, 2006년 자민련 해산으로 민정계가 와해되면서 전두환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명을 다하게 된다. 기존 전두환이 가지고 있던 TK의 정치적 파워는 2004년 총선을 통해 급부상한 박근혜가 가져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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