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폭격/2차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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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전쟁법 문제
4. 유럽
4.1. 전쟁 발발 시기
4.2. 전쟁 초기
4.2.2. 1939~40년 서부 전선
4.2.3. 로테르담 공습
4.3. 영국 본토 항공전과 런던 공습
4.4. 전쟁 후기: 독일
4.5. 전쟁 후기: 영국
4.6.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
4.7. 프랑스 폭격
4.8. 폭격의 효과
4.8.1. 결론
5. 아시아
5.1. 일본군의 전략 폭격
5.2. 미국의 전략 폭격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시 전략 폭격을 다루는 문서,


2. 상세[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의 거대한 축에 속하는 공중 폭격. 상위 항목인 전략 폭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당시에는 적진 후방에 주둔중인 군 부대는 물론, 공장, 철도, 항만 시설, 도심 등 적국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역시나 나치 독일군이 끊었는데, 폴란드 침공 당시 육군의 진격만 지원했던 게 아니라 이러한 제반 시설도 폭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목적은 역시나 폴란드의 전쟁 수행 능력 상실. 이후 프랑스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북해상의 독일 해군 전력을 무차별 폭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점차 세계구급 스케일로 커지고, 추축국 및 연합국의 전력도 증강됨에 따라 이러한 무차별 폭격은 점점 체계적으로 변해갔다. 적국의 군수 시설, 교통 시설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폭격의 목표물이 되어 전쟁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한 폭격이 본격적으로 실행된 것이다. 40~41년 사이 나치 독일런던 대공습(The Blitz)이 대표적인 예시[1]이며, 41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산발적인 폭격을 계속한다. 40년 이후 영국 공군 또한 독일 본토 폭격 시 목표물 지정에 대한 조건을 풀어버려 민간 지역에 대한 폭격을 지속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43년 미국이 본격적으로 서부 전선에 등장해 이에 엄청난 소티의 폭격을 퍼붓게 된다. 아직도 화제가 되는 함부르크, 드레스덴 폭격 작전도 이 당시 일어난 것이다. 이 당시 드러난 바에 의하면, 사실상 전략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사기 저하를 일으켜 승리를 취하는 이론은 잘못되었으나, 적국의 산업 기반을 마비시켜 패배에 이르게 하는 소모전으로서는 쓸 만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즉, 2차 세계대전을 최악의 총력전으로 만든 주범 중 하나.

유럽 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서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충칭(重慶) 폭격이 있었으며, 이는 43년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44년 10월에 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되자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된다. 반면 미군의 폭격은 도쿄 대공습으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선에서 2차대전을 종결시킨 원자폭탄을 사용한 전략 폭격이 등장한다.


3. 전쟁법 문제[편집]


전쟁 범죄로써 이를 보는 시각도 있으나, 2차 대전이 벌어졌던 당시에는 이러한 폭격 활동이 전쟁 범죄 항목에 들어가지 않았다. 즉, 법전을 업데이트 하기 전에 전쟁이 먼저 벌어진 것. 그리고 현재도 전략 폭격 자체가 전쟁 범죄인 것은 아니며 군사목표물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전쟁범죄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커티스 르메이아서 해리스는 말할것도 없고 패전국인 나치 독일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도 폭격으로 기소된 적은 없음은 당시 이를 전쟁범죄로 여기지는 않았음을 시시한다.[2] 그리고 처음부터 군사목표와는 무관한 민간인들을 죽일 목적이었다면 이는 전쟁범죄가 될 수 있지만 이는 폭격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단지 전략 폭격이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해지는 경우가 많은게 문제일 뿐. 그리고 전쟁법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이 면제되는건 아니며 이를 이용해서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물타기를 하는 치사한 이들도 존재한다.


4. 유럽[편집]



4.1. 전쟁 발발 시기[편집]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어난 항공 기술의 발전은 항공기들만을 가지고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는 항공기들의 한계 고도가 증가하고 속도가 늘어남에 따라 이것을 요격하기 위한 전투기들이 결국 따라잡지 못 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들었으며 영국의 수상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은 "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라는 드립을 치며 이러한 무적론을 더욱 지지했다.

전쟁이 발발했던 39년 9월에 미국의 루즈벨트는[3] 전쟁 참전국들(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에 메시지를 보내며 절대로 민간 시설을 폭격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 일단 그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찬성했고, 나치 독일바르샤바 폭격은 사실 이 도시가 군사 목적으로 요새화된 도시라는 변명과 함께 찬성의 뜻을 표했다. 영국의 경우 39년 8월 당시만 해도 역시나 군사 시설에 국한(혹은 군용 선박)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에도 민간인 피해를 유발하는 폭격을 제한하자는 제안을 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1940년 5월 이후[4] 영국도 방침을 바꿔 무차별적으로 독일의 민간 시설을 폭격하겠다고 공표한 후 독일의 루르 지방 제철소 및 공장을 폭격한다. 이 때 당시 프랑스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4.2. 전쟁 초기[편집]



4.2.1. 폴란드 침공[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mpol_bombing.jpg
프람폴 폭격 당시 사진. 왼쪽의 도시가 폭격 한 번으로 오른쪽의 석기시대가 되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 직후 공중폭격으로 폴란드의 제반 시설을 완파하기로 계획하는데, 여기에는 병원, 학교 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피난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바르샤바, 비엘룬, 프람폴에 행한 전략 폭격이 유명한데, 이 중 프람폴의 경우는 군대가 전혀 주둔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전략 폭격 전술 평가용 마루타였다. 군부대가 일절 주둔하지 않았기에 대공포 같은 방어 시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도시 규모도 작은 편이 아니라 폭격이 빗나갈 염려도 없었기 때문. 즉, 폭탄의 성능 실험도 함께 진행할 수 있었던 안성맞춤의 마루타였다.[5]

물론 이 작전의 대외적인 목적은 '폴란드 공군을 제압하여 독일 폭격의 가능성을 막는다'였고, 여기에 폴란드의 제반 시설을 파괴하여 증원군을 봉쇄하고 독일 육군을 돕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비록 앞에 언급된 루즈벨트의 제안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공식적인 바르샤바 폭격 작전은 취소되었으나, 지속적으로 도시 상공에 나타난 독일 공군기들은 시민들에게 기총 소사를 해댔으며 병원 마크가 달려 있는 건물을 폭격했고, 심지어 묘지에까지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전쟁 초반 폴란드 측에서는 병원 마크를 걸어두면 폭격을 안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당해버린 셈. 여기다 피난민 행렬에 기총 소사를 퍼붓는 행위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 나치 독일은 당시 바르샤바는 요새화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6]

지속된 나치 독일군의 전략 폭격은 폴란드 교통망을 마비시켜 폴란드군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 성공했으며, 민간 시설에 대한 지속적인 타격은 폴란드군의 지휘 체계 또한 흐트러뜨렸다. 조종사들의 실력은 수준급이었지만 숫적으로나 기체 성능으로나 열세였던 폴란드 공군은 독일 공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침공 첫 날 바르샤바에 행해진 독일군의 폭격은 해당 지역을 방어하던 폴란드 공군의 추격 여단의 분투로 막아냈지만 계속된 소모전으로 인해 추격 여단은 동부 지역으로 옮겨졌다. 폴란드 공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기체들이 추격 여단처럼 공중에서의 계속된 격전 끝에 소모되었다.

9월 13일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거주 지역에 독일 공군의 공식적인 폭격이 있었다. 이 때 명분은 이 당시 독일군 병사들에 폴란드군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즉, 완벽한 테러 폭격이었고, 50:50으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폭격해 이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실제로 9월 22일에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사령부에 요청한 전보 내용이 바로 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폭탄을 달라는 것이었으니… 이 요청은 당시 무시당했으나, 히틀러는 바르샤바에서 민간인들이 피난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를 봉쇄하고 지속적으로 폭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려 폴란드의 항복을 노렸다.

이 당시 프랑스군의 정보에 따르면 독일군의 폭격이 민간인을 노리지 않았다고 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을 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정보국은 이러한 폭격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설이 중론이며, 프랑스 침공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 당시 프랑스는 전쟁에 휘말리는 걸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러한 보고를 올린 프랑스쪽 요원은 이 폭격이 있기 전에 폴란드를 떠나버렸기 때문. 더욱이 이러한 보고가 처음 수면에 드러난 것도 1948년으로, 전쟁이 이미 끝나버린 후였다. 때문에 정치적인 입김이 매우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어쨌든 독일은 이렇게 폭격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바르샤바 시내에 지속적으로 민간인들에게 피난할 것을 요구하는 찌라시를 뿌려댔고, 서부 유럽 전선을 준비하느라 수송기인 Ju52를 동원해 폭격하기 시작하여 정확도가 더더욱 떨어지게 된다. 이게 문제가 된 이유는 폴란드 시민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도시 근처에 주둔중이었던 독일군들이 팀킬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폴란드군도 독일 영내의 공장 등 산업시설을 폭격해보기는 했으나 그 당시 썼던 기종이 PZL.23 Karaś 같은 단발 기종이었으므로 큰 효과는 없었고, 9월 17일 이후 소련군이 몰려와 동부에 그나마 남아있던 공군 시설물들을 전부 점령당하는 바람에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4.2.2. 1939~40년 서부 전선[편집]


폴란드 침공 직후 가짜 전쟁(Phony War) 기간 동안 영국이 먼저 선수를 쳐 독일의 해군 기지에 폭격을 가해 대략 독일군 수병 8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폭격을 Battle of the Heligoland Bight이라 부르는데, 결과적으로 따지면 영국의 실패였다. 이 때 영국 공군은 전투기 호위 없이 웰링턴 폭격기만으로 구성된 편대를 보냈다가 총 22대 중 12대가 파괴되었으며 3대가 파손된 전과를 기록한 반면, 독일군은 44대의 전투기들 중 완파된 것은 채 10대가 안 되었고 인명 피해도 영국의 57명 사망에 비해 2명 사망으로 경미했다. 이 전투는 2차 대전 중 최초로 이름이 붙은 전투라는 의의가 있기는 하지만 폭격기 무적론의 허구성을 매우 잘 드러내었던 전투였다. 영국군의 경우 이 때문에 전투기가 활동하기 힘든 야간에 작전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고, 독일군은 영국군을 얕보게 되어 전투기 전력은 충분하다고 생각된 나머지 폭격기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최전선 집중 투입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략을 42년도 말까지 유지하다 많은 물량으로 달려온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43년부터 부랴부랴 서부 전선으로 요격기들을 보내 막기 시작한다.

한편 독일의 경우 이 사건이 있고 1달이 지나서야 영국 함대를 폭격했으며, 그마저도 대충 해버려 별로 피해도 나지 않았다. 물론 영국 공군도 대참패를 겪고 폭격 보내는 빈도가 매우 줄어들어 한 달에 한 번 꼴로 건드리듯 말 듯 할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침공하는 척 하다 되돌아오는 짓들을 하고 있었으니 가짜 전쟁이라 불릴 만 하다.

일단 이 가짜 전쟁기간 동안의 영국군은 민간인 피해를 내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내륙의 목표물과 정박한 함선에 대한 폭격을 기피하고 있었다. 반면, 나치 독일은 일단 괴링의 명령에 의해 영국 군함에 대한 공격은 가리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만 히틀러의 명령은 일단 먼저 공격받지 않으면 영국의 함대를 폭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독일 영토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프랑스 침공이 벌어지기 직전에 알트마르크(Altmark) 호 사건이 벌어져[7] 그에 대한 보복으로 스코틀랜드 지방의 항구를 공격해 대전 최초의 영국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영국도 보복으로 현재 덴마크 부근의 실트(Sylt) 섬을 폭격해 병원 건물을 명중시켰으나 사상자는 나지 않았고, 독일군은 즉시 영국 해군을 폭격함으로써 보복했다.

프랑스 침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와중에 한 가지 야사가 있는데, KG51 소속의 독일군 폭격기들이 실수로 독일 영토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를 폭격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본디 목표물은 프랑스 도시인 Dole-Taveux였으나 항로를 잘못 든 나머지 독일 영토에 폭격을 해버린 것. 당연히 당시에는 연합군의 테러 폭격이라고 언급되었으나 56년 진위가 밝혀졌던 해프닝이 존재한다.

다만 프랑스 침공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랑스가 너무나 빠른 시간에 정복되었고 이 덕분에 독일군의 전략 폭격 피해는 다른 케이스에 비하면 상당히 미미한 편이다. 6주 동안 민간인 40명 정도의 피해를 입는 데 그쳤다.

한편 영국군도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이 진행되던 40년 5월 12일에 독일의 루르 지방을 공격하여 4명의 독일 민간인 피해를 입혔다. 이 때 주된 폭격 목표물은 주로 열차 선로, 다리, 행군 중인 군사 행렬 등 교통 기관으로, 프랑스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 정도였다. 물론 프랑스 침공 항목에도 나오듯이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4.2.3. 로테르담 공습[편집]


프랑스 침공 작전 당시, 아르덴 숲을 돌파하며 베네룩스 3국을 접수하기 위한 작전 중 독일 공군은 네덜란드의 조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네덜란드의 대도시인 로테르담을 폭격한다. 일단 독일측에서는 두 번의 권고를 내렸으나 네덜란드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독일군은 로테르담을 포위한 후 도심에 폭격을 가하기로 한다. 당시 포위 작전을 실행하던 지상군이 교전 중이었으나 이들을 지원하는 대신 네덜란드 민간인들을 폭격하기로 한 것. 다만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 네덜란드측에서 항복 문서가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로테르담 도심은 불바다가 된다. 물론 폭격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폭탄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독일측의 항변은 일단 폭격을 맞은 부분은 네덜란드군이 주둔한 부분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상은..

폭격에 동원된 병력은 He 111 폭격기 100대였으며 이 중 57대가 폭탄을 투하했다. 총 97톤의 폭장이 투하되었으며 도심 3 km 반경이 완파되었다. 이 중에는 민간인들을 수용한 4개의 병원과 21개의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한 번의 폭격으로 대략 1,000명의 민간인 인명 피해가 났고, 그보다 많은 인원이 부상을 당했으며 대략 78,000명이 살 곳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의 25,000 가구의 주택과, 2,320개소의 가게, 62개의 학교가 완파되었다.

전후 독일측 연구 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대략 30배 이상 피해가 과장되었다[8]고 주장되고 있다. 실제로 그 당시 파리에 상주하던 네덜란드 대사관의 자료는 100,000명의 사망자로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후 뉴욕에 상주하는 네덜란드 대사관의 자료에서 30,000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당시 세계 언론은 이 30,000 수치를 공식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수치도 엄청난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로테르담은 인외마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사건 직후 영국군도 방침을 바꾸어 민간인 피해를 되도록 피하던 기존의 방침을 뒤로 한 채 본격적으로 독일의 공업 시설을 폭격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도 루르 지방의 제철소 등을 목표로 폭격을 가했는데 당시 폭격 조준기 등이 좋지 않았기에 필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 독일의 주 산업도시들 역시 폭격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확도가 낮아서 산업 시설을 제대로 맞추지는 못 했고 도리어 독일 민간인들의 분노만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40년 6월에 프랑스군 폭격기 한 대가 베를린을 폭격하기도 했다. 다만 영국군이 본토 폭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은 프랑스 침공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국 본토를 폭격하지 않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최전방을 중요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4.3. 영국 본토 항공전과 런던 공습[편집]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굴욕적으로 강화 협정을 맺으며 프랑스 침공전은 나치 독일의 승리가 되었으나 영국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의 산발적인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3주 후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이러한 전략 폭격은 도버 해협의 영국 선박들을 공격 및 방어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당시 히틀러는 소모전을 벌이며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고, 본격적으로 런던 폭격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영국에 대한 테러 폭격은 터부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때는 일선 지휘관이 런던을 때리게 해달라고 요구하는것을 괴링이 말리는 양상이었다. 심지어 40년 6월 30일날 괴링이 이런 언급도 했을 정도니…

영국과의 전쟁은 미약한 방어력의 영국 공군과 산업 시설에 국한되어야만 한다. (중략) 승리를 위해서는 철저한 연구를 통한 목표 선정이 중요하다. 그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8월 이후 본격적으로 영국 공군의 비행장들이 타겟이 되기 시작했으며 야간 폭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8월 24일 우연히 항로를 잘 못 들은 독일군 폭격기들이 런던을 폭격하게 되고, 다음 날 영국의 폭격기들이 베를린 근교의 공항과, 지멘스사의 공장을 폭격하면서[9] 덕분에 괴링은 단단히 망신을 당했고 히틀러는 기존의 입장을 바꿔서 일선 지휘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런던 폭격을 지시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연출한 공군 대전략의 한 장면: #

이렇게 해서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부터 런던은 물론 영국의 모든 민간 거주 지역 및 산업 시설에 대해 본격적인 폭격이 시작된다. 거진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런던 및 버밍엄, 리버풀, 사우샘프턴, 맨체스터, 브리스톨, 벨파스트, 카디프, 코벤트리 등 여러 도시들이 불타올랐으며, 독일군의 발표(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더 높음)에 따르면 하루에 1백만톤이 넘는 폭탄이 런던 시내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영국의 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피해가 상당하기는 했지만 일단 폭격 자체는 공장과 항만시설 등의 산업 시설을 향해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서 해리스는 47년 언급에서 독일의 폭격은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도심을 완파하지는 못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항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민간 지역 폭격 작전은 결국 독일군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도시 지역을 폭격하는 동안 영국 공군의 비행장은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졌고 그동안 트롤링만 하던 12비행단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런던 공습이 한창이던 중에도 영국은 독일의 만하임을 폭격한다. 40년 12월에 행한 작전으로, 민간 폭격에 대한 일종의 시범 공격이었던 셈. 이 작전은 공표되지 않고 비밀에 붙여 진행되었다. 다만 목표 마커가 도심을 빗나갔고, 당연히 폭탄도 빗나가 버려 별반 피해는 없었다. 이 실패를 계기로 영국 공군은 전략 폭격 전술을 새로 고안[10]하게 된다.


4.4. 전쟁 후기: 독일[편집]


1936년 발터 베버(Walther Wever) 장군의 사망으로 인해 전략 폭격을 위한 기체 개발이 사실상 중단 상태에 이르게 된다. 특히 장거리 폭격이 가능한 4발 중(heavy)폭격기의 개발은 거의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을 정도. Ju 290, Do 19 등 시제기 단계를 넘어서서 슬슬 배치되고 있었던 중폭격기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규모 배치에서 멈추었고, 대규모로 실전 배치되었던 중폭격기는 He 177이었으나, 이 물건은 단점 투성이의 괴작이었다. 심지어 급강하 폭격용으로 오해받기도 했을 정도. 1942년 최초 실전 배치가 되었는데 프로토타입의 경우 유류관이 뜨거운 엔진 위에 배치되어 자연발화(...)하는 설계미스를 비롯한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배치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괴링마저 이런 불가마를 어디다 쓰냐며 까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최초로 1942년 4월에 작전 투입이 되기는 했다. 당시 영국이 장거리 폭격기로 가끔씩 독일 영토를 폭격하며 약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 이 작전을 배데커(Baedeker) 공습이라고 하는데, 엑세터, 베스, 노르위스, 요크 등 영국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는 계획이었다. 이 작전으로 총합 1,637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으며 거의 50,000채의 집이 불타올랐다. 결함기치고는 그럭저럭 활약은 했던 셈이었다.

이후 1944년 1월에도 영국에 한 차례 폭격(슈타인복 작전, Operation Steinbock)을 가하는데, 이 당시에는 독일 공군이 거의 망한 상황이라 폭격기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영국의 방공망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있었기에 그야말로 자살하러 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V1, V2를 이용한 폭격은 제법 실효를 거두었다. 비록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본격적인 폭격보다는 효과가 적어서 'Baby Blitz'란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는 했으나, 일단 아군의 인명 피해 없이 거의 공짜로 공포 효과를 불어넣을 수 있었으므로 발사 기지들이 장악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해 서부 전선을 형성한 이후에도 연합군 전선 후방의 도시들까지 포함해 계속 날려댔을 정도. 특히 V1의 경우 발군의 가성비를 보였다. 이 물건들의 공포 효과가 상당했던지, 당시 연합군측에서도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작전을 따로 발안했을 정도.

한편 동부 전선에서도 독일 공군의 폭격에 의해 거의 500,000명의 민간 피해[11]를 보았으며, 이는 연합군이 독일 본토 폭격으로 끼친 피해와 거의 동일한 정도였다고 전한다.


4.5. 전쟁 후기: 영국[편집]


영국 본토 항공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영국은 지속적으로 독일 영토를 폭격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 영내의 거주지들을 그야말로 석기시대로 되돌림으로써 전쟁 수행을 방해하며 공포 효과를 일으킨다는 전형적인 전략 폭격의 취지를 행한 것이다. 즉, 전쟁 초반의 나치 독일이 행했던 것을 그대로 갚아주는 꼴이 된 셈이다.

다만 폭격 작전이 지속되던 중 예산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제는 목에 칼이 들어왔던 시기가 지났으므로 일단 영국 공군을 축소하여 해군과 육군을 강화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지속적으로 독일 영내를 폭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즉, 소련이 탱킹을 하는 중 영국이 독일 영내에 쑥을 재배하면 결국 나치 독일은 GG를 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1942년 당시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대략 18개월이면 GG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전망했을 정도. 때문에 42년 이후에는 대다수의 생산 역량을 폭격기 생산으로 돌리게 되어 전투기 생산에 차질을 빚을 정도가 되어버린다. 물론 이 때부터 영국 공군의 주된 목표물은 민간 도시로 변경되고 본격 나치 독일 석기시대 작전이 실행되어 본격적으로 수 백대가 넘는 폭격기들이 편대를 이루어 야간 폭격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이러한 민간 폭격에 대한 실효성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었다는 것과 피해를 과장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처음 2년간(40~42)에 이루어진 폭격은 산업 시설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피해 복구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경우를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직접 당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 가지 방향으로 타파하고자 했는데, 하나는 융단 폭격을 퍼붓는 것으로 아서 해리스가 주장하는 방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핵심적인 시설을 골라 폭격하며[12] 폭격 조준의 성능을 높인다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실효성이 입증되어 43년도가 되면 철강 생산이 200,000톤이나 떨어지는 등[13] 독일의 산업 생산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며 43년과 44년 사이에는 전혀 항공기 생산량의 증대가 이루어지지 못 하게 될 정도가 된다.

특히 43년의 함부르크 폭격의 경우 티거 전차와 88mm 대공포의 생산량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고, 도시의 62%의 인구가 집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영국 공군은 베를린을 폭격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는데, 이는 전쟁을 조기(적어도 44년 봄)에 끝내려는 아서 해리스의 명령 때문이었다. 특히 43년 10월의 연설에서 현재 영국의 전략 폭격의 주 목표는 독일의 민간인들임을 확실히 했을 정도. 즉, 산업 시설에 집중하는 대신 민간인 지역(특히 베를린)을 폭격하여 노동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사기를 낮춘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반면 당시 미군의 조사에 따르면, 도리어 교통로를 폭격하는 게 직접 민간인들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것보다 낫다는 보고가 나온다. 즉, 교통로를 막아버려 전시 보급에 차질을 빚게 하는 게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 데 더 유용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굶겨 죽이는 게 직접 죽이는 것 보다 효과적이라는 결론. 특히 당시에는 석탄이 산업 시설을 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으므로 이것의 수송을 막으면 공장도 못 돌리게 만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게 포인트이다. 게다가 수송로를 막아버리면 석탄 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생필품의 유통도 막아버릴 수 있기에 직접 공장이나 민가를 때리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분석이었다.

이외에도 '댐버스터'로 유명한 채스타이즈 작전을 감행한다. 수력 발전소를 파괴하여 루르 지방에 공급되는 공업용 전기를 끊기 위한 작전이었다.


4.6.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편집]


1942년 중순에 영국에 배치된 제8공군으로 대표되는 미 육군 항공대는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정도였다. 즉, 민간 지역 및 산업 시설을 폭격할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던 셈. 이러한 미군을 본격적으로 전략 폭격에 밀어 넣은 조약이 바로 카사블랑카 훈령(Casablanca Conference)이었고, 이 조약에 체결된 이후 미 육군 항공대 또한 본격적으로 독일 본토 전략 폭격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미군의 경우 B-17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보다는 폭장량이 떨어졌지만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도배[14]가 되어 있었기에 포탑 화력이 더 뛰어났고 장갑판도 여러 군데 떡칠이 되어 있었기에 방어력이 더 우수했다. 덕분에 미군의 경우 밀집 편대를 이루어 주간 폭격을 실행하게 된다. 게다가 미군의 주장으로는 노던 조준기가 장착되어 있어 더 정밀한 폭격이 가능하다는 것도 있었다. 이 당시 미군은 '정밀 폭격(Precision bomb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현재 와서는 의도는 좋았지만 의도를 이룰 수 있는 기술력이 없었기에 융단 폭격이나 다를 바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노던 조준기의 정확도가 그 당시 주장만큼 나오지 않았기도 했고,[15] 카사블랑카 조약 후에는 영국과 동일하게 민간 지역을 융단 폭격하기 시작했기 때문. 물론 H2X 레이더등을 도입해 정확도를 높이려 하기는 했지만 기술 수준이 수준이라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정확도 자체는 떨어졌지만, 엄청난 물량이 있었으므로, 양으로 커버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즉, 한 발 한 발의 정확도 자체는 시망이었지만 워낙 많이 떨구다 보니 전략적인 효과는 충분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동부 전선의 전력을 서부로 돌릴 정도였으니 구라빨이었을지언정 제 역할은 한 셈이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폭격의 경우 이 때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단 한 번의 폭격으로 50,000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내고 실질적으로 도시 전체가 궤멸되는 상황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43년 중반부에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 공군 에이스들이 요격을 나오게 되었고 B-17 공략법이 점차 개발됨에 따라 슈바인푸르트 폭격 같은 참사를 맞이하게 된다. 강력한 방어 화력과 밀집 대형만 믿고 주간에 몰려갔다가 개털려버린 것. 이 때문에 43년 후반기에 P-51 머스탱이 본격적으로 호위 전투기로써 등장하기 전까지 소강 상태에 빠진다. 즉, 폭격기 무적론이 결국엔 밑천 드러나버린 셈.

이렇게 독일군 요격기들에 의한 피해가 심각해지자 일단 P-51호위기로 가세한 후 독일 공군을 사냥하는 낚시 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이를 대주간(The Big Week)이라 불리는데, 44년 2월 20일부터 25일 까지 수행했던 대규모 폭격 레이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폭격기 편대로 독일군의 어그로를 끌어 풀링해 들어오면 P-51이 뎀딜을 한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 덕분에 독일 공군은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보게 되었고[16], 이후 독일은 영공을 연합군에게 무료 임대를 주게 된다. 특히 이 당시 인적 손실은 독일 공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써 더 이상 숙련된 조종사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이후 독일 공군은 초짜들이 요격하러 올라왔다가 스펙부터 우월[17] 하고 실력도 더 좋은 P-51들한테 킬수만 바치는 꼴이 되어버렸고, 아르덴 대공세 시점에 이르러서 독일 지상군들은 하늘에 떠 있는 건 다 적군이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이렇게 독일 본토 폭격이 지속되다 1944년 5월부터 프랑스 연안 지역에 다시 인외마경이 벌어진다.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전초전 성격의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윈스턴 처칠아서 해리스 등을 비롯한 영국측 인사들은 반대를 표명했으나 결국 독일 공군은 애초에 제공권을 잃었기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근거로 아이젠하워에게 설득되었고,[18] 독일 영토 폭격은 잠시 중단되며 미, 영 공군의 주 목표는 상륙군의 전술 폭격으로 변경된다.

어쨌든 미국과 영국의 시도 때도 없는 폭격(미국은 낮에, 영국은 밤에)으로 인해 독일은 밤낮 없이 불타올랐고 점차 산업 기반을 잃어버릴 지경까지 가게 되며, 동시에 동부 전선에서도 삽질을 반복하고 막장이 되어간다.


4.7. 프랑스 폭격[편집]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는 대전 기간 내내 연합군의 지속적인 폭격에 노출되었다. 일단 1940년에 바다사자 작전을 준비 중이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항구가 폭격당해 많은 수의 상륙선이 격파되어 라인 강에서 쓰이던 민간 배들을 차출했던 사건도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항구는 독일 해군의 U보트가 출항하는 등 높은 전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산업 시설도 독일군의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덕분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는 파리 근교의 프랑스 공장들도 폭격의 주 목표가 되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나기도 했고 프랑스의 교통 시설, 철도, 도로, 교량 등도 주된 목표가 되었다. 문제는 이 또한 조준 장치가 부족한 관계로 민가에도 많은 폭탄이 떨어졌다. 연합군의 폭격이 있던 후 피해 보고는 주로 레지스탕스가 해 주었다고 한다. 마르세이유, 리옹 같은 경우는 각각 2,000, 1,000의 피해를 입을 정도로 봉변을 당했다. Royan같은 경우는 소이탄 폭격을 여러 번 얻어맞고 85%의 도시가 날아갔으며 3,000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냈을 정도. 즉, 점령지에서 핍박을 당하는것도 모자라 연합군에게 하루종일 폭격을 맞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자유 프랑스 공군(1941년에 설립되기는 했다)은 되도록이면 자국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저공 비행을 했다고 한다.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희생당한 프랑스 민간인은 1942~1945 사이에 67,000명으로 추산되며, 가장 많은 수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생겨났다. 영미군이 투하한 총 숫자의 22%에 해당하는 수가 프랑스에 떨어졌다.


4.8. 폭격의 효과[편집]


이러한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비효율적이었지만 효과가 있었고 당시 기술수준을 감안하면 최선에 가까웠다' 라고 평가된다. 다만 그와 동시에 '대규모 융단폭격보다 교통로 파괴가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된다.

일단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졌던 이유로 그냥 많이 뿌리다 보니 실질적으로 파괴해야 하는 목표물에 비해서 투입되는 비용이 컸고 공장에 맞는다 해도 건물만 부서지고 기계류에는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군수 분야가 아닌 분야에 있던 여유 노동력, 즉 가정주부, 길거리 외판원 같은 사람들까지 전쟁 물자 생산에 동원하거나 그냥 근로시간을 연장해서 보충할 수 있으므로 폭격을 했음에도 대상 국가의 생산 효율성이 증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실제로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공업 생산 효율성은 점점 증가했다. 전쟁 말기가 되기 전까지 독일은 1교대 생산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후 3교대 생산 방식을 도입해 폭격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더 늘어났다. 나치 정권은 집권 전은 물론 전쟁 중기까지도 현대의 상식 이상으로 독일 국민의 지지에 의존하는 정권이었었으며 당시 독일 노동력의 주축인 30~40대는 지옥같은 1차대전을 겪은 연령대였기에, 이들에게 '전쟁이 지난 대전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나치 정권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에는 총력전으로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적국 민간인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것도 쉽게 성립시키지 못했다. 1차대전 중의 초보적인 도시 폭격이나 그것이 발전한 영국 본토 항공전 등 폭격을 당한 도시의 시민들이 "우리도 전선의 군인들처럼 적과 싸우고 있다"는 동질감을 갖게 되는 사례도 있다. 영국 시민들은 더더욱 악에 받쳐 독일군을 증오하게 되었고 독일군의 전략 폭격은 이들의 생필품 유통을 방해할 수 없었다.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한없이 폭격당한 끝에 어느 정도 전쟁 수행 의지의 감소가 보였으나, 그때까지 퍼부은 폭격물량을 감안하면 효율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전쟁 수행 의지라는 요소는 수치화하여 측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어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도 애매하다.

반면 독일의 교통 수단과 자원 정제소를 파괴함으로써 희귀 금속 등의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전쟁 수행 능력에 차질을 가져온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합군은 단순히 독일 국민을 살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가장 핵심적인 볼 베어링 공장이나 대형 댐을 파괴하는 등 독일 군수공업의 중요 결절점을 파괴하려고 노력했고, 도저히 맞지를 않으니 지역폭격을 실시한 것이다. 군수공장을 파괴할 수 없다면 거기서 일하는 근로자라도 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휘관도 있었지만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민간인을 살륙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다.

다만 폭격 자원이 여러 목표에 분산되어 있었고 정확도도 높지 않았으므로 1944년 말에 들어서야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이쯤되면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 및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칸반도를 상실하면서 가용 자원과 공장이 크게 줄어들었기에 정말 폭격으로 인한 성과인지도 불분명하다.

국민의 전쟁 수행 의지 파괴에 있어서도 독일 본토 폭격은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대다수의 독일 대도시들은 그 당시 55~60%의 파괴를 당했고 독일 공군이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했기에 지속적인 폭격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즉 런던의 시민들은 도시 상공에서 벌어지는 공중전을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만 독일 시민들은 그런 게 없었다. 전후에 조사한 결과, 연합군의 폭격이 가장 심각한 공포 요인이었다고 답한 게 91%였다. 게다가 폭격의 피해가 심각한 곳의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다 수준의 상황이었다. 당연히 독일 공군은 이를 저지하지 못해 바가지로 욕을 먹었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나치당의 지지도가 14%나 떨어지기도 했다. 1944년 봄 당시 독일 국민들의 75%가 전쟁은 이미 졌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대신 나치 정권은 전국에 대공포탑을 지어 폭격을 방어하고 도시의 시민과 문화재를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대공포탑 중 가장 유명한 건 베를린 전투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은 베를린 동물원 대공포탑일 것이다. 물론 유보트 기지와 대서양 방벽을 짓느라 콘크리트 공급은 만성 부족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충분한 대공포탑을 짓는데는 실패했다.

몇몇 학자들은 이 당시 생산성이 늘어나 도리어 경제적인 상황은 나아졌다는 언급을 하지만 사실은 그 당시 생산 집계 자체도 상당히 부정확했다. 특히 1944년의 전차 생산량은 예정된 수치의 2/3밖에 안 되었다.

또한 사상자도 엄청나게 나와, 이 서부 유럽 전선에서만 최소 305,000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집계되었으며 78만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750만명이 살 집을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을 정도다. 이건 독일 본토에서만 책정한 최소 수치이고 독일측 자료는 최소 40만~60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영국에서는 독일군의 폭격 및 공습으로 60,595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프랑스에서도 연합군의 공습으로 67,078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지속된 북쪽 지방의 폭격으로 여기서도 5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유럽 전선에서 16만명의 연합군 승무원들이 사망했다.


4.8.1. 결론[편집]


전략폭격은 적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산업시설을 직접 점령하지 않고도 적의 군수물자 생산을 방해했다. 물론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폭격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를 방어하느라 전선의 루프트바페가 차출되어 간접적으로 독일군의 제공권 형성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은 낮에 기동을 포기할 정도로 싸우기 힘들어졌으나 나치 독일의 전쟁경제는 끝까지 작동했고, 결국 독일의 산업이 붕괴한 것은 45년에 이르러 전선이 밀리며 산업시설이 점령된 이후였다.

당시 예산을 집행하고 있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전략 폭격 때문에 산업에 큰 지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칼 되니츠 제독 또한 21식 U보트가 제때 투입되지 못한 것이 전략 폭격 때문이라는 언급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장을 주었을 뿐 폭격만으로 국민과 국가지도부의 전의를 꺾는다는 전략폭격의 기본 목표는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19]

전략폭격은 대공포와 비슷한 점이 있다. 대공포 자체는 전투기를 단 한 대만 격추하더라도 대단한 전과가 될 정도로 직접적 성과가 없는 병기다. 하지만 대공포의 존재로 인해 전투기는 비효율적 작전 행동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게 쌓이고 쌓여서 전쟁의 향방에 영향력을 주는 것이다. 전략폭격 역시 전쟁수행능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소모전의 도구로서 기능하며 독일을 고사상태로 몰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전략폭격을 두고 "자국의 GDP를 집어던져 적국의 GDP를 파괴하는 전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공격측에서도 막대한 자원과 인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전략폭격에 의해 발생한 대량의 민간인 사상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미비한 폭격 명중율을 수량으로 보충한 결과였으며,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민간인을 죽이기 위해 폭격을 한 것은 아니다. 연합군은 영국 공군 617 비행대의 체스타이스 작전[20]에서 볼 수 있듯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략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8회의 폭격 중 7회가 미8공군의 철도와 산업시설에 대한 폭격이었고 도심지 폭격은 영국 공군의 1회 뿐이었으며, 그 결과 영국 공군은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었다.

폭격의 효율화를 위한 명중율 증진 노력은 지속적으로 수행되어 베트남전에서는 레이저 유도폭탄이 사용되었으며, F-117의 정밀폭격으로 표적의 40%를 격파한 걸프전을 거쳐 정밀유도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한 코소보 공습,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2차대전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맞추기도 어렵고 잘 방비되어 있는 공업시설, 유전, 발전소, 댐, 항구, 교량 등을 막대한 자원소모와 희생을 감수하고 폭격하는 것보다 방어가 약한 철도나 도로의 중간점 수천 곳을 구석구석 반복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대의 분석일 뿐, 당시의 분석능력으로는 어떤 방식이 더 효율적일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5. 아시아[편집]


아시아 전역에서는 주로 일본과 미국의 전략 폭격이 이루어졌다. 영국군도 일단 유럽 전선이 정리된 이후 폭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준비 도중 전쟁이 이미 끝나버렸다.


5.1. 일본군의 전략 폭격[편집]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도 역시나 전략 폭격을 해 댔다. 1938년부터 43년 까지 중국의 대도시였던 상하이, 우한, 충칭 등의 도시에 5,000소티 이상의 폭격을 퍼부었다. 특히 난징과 광둥에 감행한 무차별 폭격은 당시 서방 국가들에게 일본 제국은 군사 목표물 보다 민간인을 더 우위에 두는 거 같다며 욕을 먹었을 정도였다. 중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과 호주에도 폭격을 가했음은 물론이다. 물론 진주만 공습도 포함된다.


5.2. 미국의 전략 폭격[편집]


진주만 공습으로 열받은 미국은 둘리틀 특공대로 불리는 이벤트성 폭격을 기획한다. 당시 동양의 듣보잡이라 생각했던 일본에게 폭격을 당하고 큰 피해를 입자 미국의 사기(군 뿐만 아니라 민간까지 포함)는 말이 아니었는데 이를 회복시키고자 감행했던 변칙적인 작전. 당시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이 폭격을 지휘했다. 영화 진주만 후반부에 나오는 그 폭격 맞다. 항공모함으로 B-25폭격기를 싣고 일본 근처까지 몰래 접근해 발진하여 중국이나 소련 영토에 불시착한다는 똘기 넘치는 계획이었다. 일단 폭격 자체는 성공했으나, 실질적인 피해는 전무했다. 그러나 이 폭격의 목적은 자국의 사기 진작에 있었으므로 전과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둘리틀 특공대 참조.

이후 이쪽 동네는 해전이 주가 되었던 전장이라 전략 폭격은 1944년 6월에 중국으로부터 B-29를 운용 가능하기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일본 본토가 B-29의 사정거리에 들어선 이후 일본은 초토화가 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제21폭격기사령부,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커티스 르메이 항목을 참고하자. 또한, 이 전장을 끝맺음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내린 사건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서도 참고하자.

독특한 사례는 Operation Starvation(기아 작전)이다. B-29를 총동원해서 일본 해역에 기뢰를 쏟아부어 연안수송로를 마비시키는 작전이었는데, 이러면 작전명대로 일본의 대도시에 지방의 식량이 수송되지 않아 대참사가 일어난다. 21폭격기사령부에서 46회 임무 1,529소티[21]로 12,135발의 기뢰를 26개 구역에 살포한 결과 고베 같은 경우 물동량의 85%가 감소했다. 다른 폭격이나 원자폭탄보다도 무서운 효과를 발휘했다는 평가까지 있으며, 가공전기 중에는 전쟁 초반부터 미친듯이 잠수함 작전과 기뢰 공습을 당한 결과 연안항로 원양항로 몽땅 끊어져 무기, 군인, 물자를 그대로 쥔 채 일본 전체가 기아선까지 굴러떨어지고 내년도에만 아사자가 500만 명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항복한 단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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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폴란드 침공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민간 폭격을 감행했다.[2] 리히트호펜은 미국에 체포되었다가 소련군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로 기소될 예정이었으나 폭격과 관련해서는 그런것도 없었다. 물론 얼마후 죽어버리면서 그마저도 흐지부지 넘어갔지만.[3] 당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중립 상태였다.[4] 나치 독일의 로테르담 폭격 사건 직후였다.[5] 이 폭격으로 도시 전체의 60~90%가 파괴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남아난 건 두 개의 작은 도로 뿐.[6] 말 그대로 변명인 것이, 바르샤바에는 이렇다 할 군사적 시설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9월 8일 독일군이 시 외곽에서 진주하여 공격할 때 바르샤바에는 4개 보병대대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패배하고 이 패배를 감추기 위해 바르샤바를 강력한 요새로 선전한 것.[7] 독일의 유조선이었던 알트마르크 호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배를 잃고 표류하던 영국 해군 포로들을 싣고 귀국하다 영국 해군의 구출 작전 및 공격을 받은 사건.[8] 다만, 앞에 언급된 수치는 이러한 부풀린 수치를 전부 차감한 것이다.[9] 피해는 미미했다. 폭격 자체도 부정확했고, 규모 또한 보잘 것 없었다. 당시 영국 공군은 독일의 공격을 막기에도 바쁜 상황이었고 이후 맹활약을 보여줄 고성능 중폭격기(아브로 랭카스터라던가)는 충분히 배치되지 않은 상태였다.[10] 간단하게 말하자면 융단 폭격 전술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11] 이는 영국 학계에서 나온 수치다.[12] 예를 들면 볼 베어링 공장.[13] 덕분에 안 그래도 철강 생산량이 부족했던 상황에 400,000톤이나 부족해지게 된다.[14] 반면 영국 공군의 아브로 랭커스터는 7.7mm가 방어기총이였다. 이 무장은 당시만 해도 항공기용 무장으로써 실효성이 의심되는 정도였다. 다만 랭커스터는 B-17보다 폭장량이 2배정도 높았다.[15]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훈련된 조작원이 사용한다는 가정 하에 CEP 30m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본토 위에는 엄청난 제트 기류가 불어서 고공 폭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저공에서조차 CEP가 500m로 벌어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래서...[16] 물론 그 와중에도 동부 전선에서 지속적으로 소모전이 벌어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17] 1943년 7월 생산한 Bf109G-6만 해당되는 이야기, 1943년 10월 부터는 독일군도 DB605A 엔진의 한계를 느껴 MW50을 사용 가능한 DB605AM 장착형 G-6를 생산하고 44년 4월부터는 슈퍼차저의 크기를 확장하고 MW50을 장착한 DB605ASM을 생산하고 있었다.[18] 몽고메리와 패튼을 데리고 다녔던 게 이해가 된다.[19] 반세기가 지난 걸프 전쟁코소보 분쟁에서도 공군력은 적군과 국가의 전력을 감소시켰을 뿐, 마무리를 위해서는 지상전력이 동원되어야만 했다.[20] 흔히 말하는 '댐버스터'. '독일이라는 엔진에서 전기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작전이라고도 설명되었다.[21] 이는 21폭격기사령부의 전체 출격수의 5.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