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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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19년 11월 24일에 출생했다. 무산군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삼수군 출신이라는 말도 있는데, 로동신문 부고에서 고향 언급을 안한 것을 보아 만주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 2군 산하에 소년련이 조직되면서 빨치산에 입대하였으며 김일성의 고난의 행군에 리을설, 리두익, 김익현, 조명선, 백학림 등과 함께 소년련 대원으로 동참했다.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어느날 젖은 바지를 입고 찾아와서 자기 둘째형[1]도 이미 빨치산이니 자기도 받아달라고 마구 떼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마른 옷을 입고 오는 청년들도 다 입대시키지 못하는데 너같은 젖은 옷 입은 장난꾸러기를 어떻게 입대시키냐고 농담을 하자 자기 어머니가 자신이 입대하지 못하도록 자기 바지를 일부로 물함지에 넣어서 적셨다면서 벌거숭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입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1939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88여단으로 재조직된 이후 상사로 진급, 분대장을 맡았다. 빨치산 동료 류정숙과 결혼했다.

해방 이후 귀국, 1949년 2월 7일에 허봉학, 김창봉, 서철, 전창철, 박금철 등과 함께 국기훈장 3등급을 수여받았다. 1950년, 6.25 전쟁에 연대장으로 참전, 10사단장까지 승진하여 싸웠으며 이후 군단장, 집단군사령관을 맡았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재선되었다. 1963년 12월, 사회안전성 부상 겸 호위총국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호위사령관이 되었다.

1969년 11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금별메달을 받았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4년 2월, 5기 8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어 1976년 4월에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2]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재선,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8년 부고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말이 없는 것을 봐서 중간에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83년 12월,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나중에 현무광에게 주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었다.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 최광, 김철만, 백학림,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황순희, 태병렬, 김룡연, 최용진,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유훈통치가 끝나고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실시되면서 대의원에 재선,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박성철, 리종옥, 김영주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불과 몇달만인 1998년 12월 29일 22시, 병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의 부고를 발표, "전문섭동지는 전후시기 당의 군사로선을 높이 받들고 우리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무장으로 보위하는데 적극기여하였다.(...) 전문섭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로 하여,불굴의 투쟁정신과 소박한 품성으로하여 동지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라고 아주 좋게 칭송해주었다.

김정일이 영전에 화환을 보냈으며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륙해운부장, 내각총리를 지낸 김영일이 그의 사위라고 한다.
  • 장남 전휘는 김평일의 절친으로 같이 김일성 특각 가서 술먹고 노는 사이였지만 김정일에게 찍히는 바람에 철직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그래도 김정은 시대에 제작된 전문섭 소개편집물에 전문섭의 손자 전문성이 군복을 입고 등장하는 것을 봐서 전문섭 일가는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 모양.

5.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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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문욱이란 설이 있다.[2] 그런데 1976년 4월에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추정컨대 정치국 회의 참석권한을 주고 정치국 위원으로 사업하게 하면서, 정식 임명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이루어지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된다면 1976년 10월, 5기 12중전회에서 임명이 추인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