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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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동기
1.1. 이리농과대학
1.2. 전주명륜대학
1.3. 군산대학관
2. 성장기
3. 격동기
3.1. 4.4시위
3.3. 의과대학의 설립
4. 침체와 발전기
5. 역대 총장
6. 관련 문헌



1. 태동기[편집]


종합대학으로서 국립전북대학교는 이리농림학교가 1947년승격된 도립이리농과대학을 모태로 하여 2년제 전주명륜학원과 군산대학관을 통합해 5개 단과대학, 16개 학과, 2700여 명의 학생으로 출발하며 뼈대를 잡게 되었다. 전북대학교 공식홈페이지의 역사 참조.

1.1. 이리농과대학[편집]


이리는 익산의 과거 명칭으로, 이곳에 1922년 개교한 관립 이리농림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명문교육기관이었다.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이 아닌 최초의 경성제국대학 합격생 김태준(예과 3회)[1]을 배출하며 전조선 최고의 실업학교로 꼽혔고, 이후에도 고형곤(예과 5회), 김영선(예과 14회) 등 유명 경성제대 진학생을 배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원고등농림학교으로 발전한 수원농림학교처럼 구제전문학교고등농림학교 승격을 시도하던 이리농림학교는 사범학교를 포함한 중등교육기관은 도립으로 전환한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1925년 관립(국립)에서 공립(전북도립)으로 전환되며 승격이 무산되었고, 1920년대 후반에 전국 각지에 5년제 농림학교가 등장하면서 그 희소성이 상실하였다. 이에 대응해 전라북도지사가 총독부에 요청하여 특성화과로 수의축산과를 설치하게 되었다(논문 참조). 1931년에는 이리농림중학교로 개칭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리농림학교를 도립 농과대학으로 승격 인가받기 위해 도내 유지들이 모금에 나섰고, 결국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1947년 10월 15일 도립 이리농과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2] 도립이리농과대학은 전북대학교의 모체로서 전주명륜대학과 군산상학관을 흡수하여 1951년 성립한 4년제 종합대학 국립전북대학교 출범의 중심이 되었으며, 직접적으로는 전북대 농과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1.2. 전주명륜대학[편집]


전주 객사는 원래 조선시대, 중앙의 관원이 내려오는 경우 이들이 숙박하는 장소였다. 해방 후 전주향교에서 전주객사 건물을 이용하여 법학, 국문학, 정치학 등을 강의하는 전주 명륜학원을 만들었고, 1948년 8월 1일 2년제 초급대학 인가를 받았다. 당시 합동강의를 하면 강당같이 큰 객사 건물에 다 모여서 유리창도 깨져있으며, 교수 연구실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야 했다고 한다.[3] 전주명륜대학은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시작된 후인 1951년 10월 6일 도립이리농과대학을 모체로 설립된 국립전북대학교에 흡수되어 전북대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이 되었다.

1.3. 군산대학관[편집]


해방 후 군산 지역 유지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사립 군산상학관이 1948년 9월 1일 문교부로부터 초급대학인 군산대학관으로 인가받았다. 군산대학관에서는 상법과 경제학을 교수했지만 운영이 영세하여 4년제 정규 대학으로 인가를 받지 못했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이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이 이뤄짐에 따라 군산이 수복되고 전선이 안정되어 휴전협상이 시작된 후인 1951년 10월 6일 도립이리농과대학을 모체로 설치된 국립전북대학교에 흡수되어 상과대학이 되었다.


2. 성장기[편집]


한국전쟁의 발발로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종 어려움과 인고의 시간을 겪은 후, 1951년 10월 7일, 비로소 국립전북대학교가 설치인가를 받았다. 개교기념식은 1952년 6월 8일에 이뤄졌으며, 설립 당시 5개 단과대학, 16개 학과, 학생정원 2700명으로 출범하였다. 국가가 인가를 내고, 국비로 토지를 제공받고, 건물을 짓고 하기에는 시간과 여력이 충분하지 못하였기에 기존에 있던 명륜대학, 이리농과대학, 군산 상학관을 통합하여 개교하게 되었다.

개교 초기,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정부의 지원은 불가능해졌고, 교지 마련과 운영은 오롯이 학교의 몫이었다. 그러던 중 익산의 유지인 전용진 선생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 후대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북대 농대에 자신의 땅을 기부하였다. 지역 주민들도 학교 부지마련을 지원했다. 당시 구 대한제국황실 재단이 현 덕진 캠퍼스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황실 재단이 기부채납 형식[4]으로 70여만평의 땅을 제공하였으며, 당시 기준으로 4백여만원을 대가로 지불하였다. 이 기금의 출처는 당시 전북대학교 후원재단에서 주민들의 기금을 모은 것이었다.[5] 그래서 가끔 전북대는 황립대학이라며 자랑하기도 한다. 서거석 총장님이 연설때 황립대학이라고 자랑한건 안비밀

덕진동에 부지가 확보된 다음, 익산과 군산의 대학을 이전하는 대에는 많은 진통이 있었으며, 특시 익산에 위치한 농대와 공대를 이전하는 과정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는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인데, 농대의 경우 35사단(!!)을 동원하여 학교를 이전했다고 한다. 공대의 경우 더 심각했는데, 농대 이전으로 흉흉해진 이리(익산)의 민심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으며, 급기야 1968년 발생한 시위에서는 7백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가해 경찰과 마찰을 빚었다. 이러한 시위는 학교 주변에 위치해있던 상가 번영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공대와 농대는 성공적(?)으로 덕진캠퍼스로 이전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다만 구 이리농과대학에 설립되었던 익산전문대학이 전북대학교에 통합됨에 따라 환경생명자원대학과 수의대학이 해당 자리로 이전한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3. 격동기[편집]


감사원장을 지냈던 한승헌 변호사와 문리대학 소속 최승범 교수가 대학본부의 요청을 받아 1954년 전북대학신문을 창간하였다. 예산과 공간조차 있지 않았던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학생들은 신문사를 꾸려나갔고, 그렇게 해서 인쇄되던 신문지면을 통해 학생들은 시국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였다. 당시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기사들은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글과 구호로 시대의 불의에 대항하였다.[6]


3.1. 4.4시위[편집]


1960년,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정투표의혹에 따라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고 마산시민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에서, 지식인이던 대학생의 입장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전북대학교 재학생들이 4월 4일 개강일에 맞춰 시위를 계획하였고, 학생들이 모였지만 교내시위로 한정되었다. 비록 한계점이 명확했지만, 4.19 혁명의 완성을 앞당겼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3.2. 5.18 민주화운동[편집]


전북대학교에서는 4.19 혁명을 전후로 해서 활발하게 학생시위가 이뤄졌다. 농성장에서 모여 시위를 하고 도민들에게 시국에 대하여 어떻게 논할지를 의논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1980년 5월 18일, 농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세종 열사는 18일 새벽, 학생회관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중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되었으며, 이는 5.18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이세종 열사가 산화한 자리는 지금도 제1학생회관의 1층 편의점 테라스 옆쪽에 기록되어있다. 이 외에도 현재 전북대학교 구정문 일대에서 활발하게 시위가 발발하였으며, 계엄군과의 대치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고 한다.


3.3. 의과대학의 설립[편집]


도민들의 의료환경이 좋지 않았던 1960년대, 의과대학 설립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어느 정도로 좋지 않았냐면 현재에는 그렇게 흔한 맹장수술이나 디스크 수술 같은 흔한 수술도 전북지역에서는 보기가 힘든 수준이었다고. 그래서 총동창회나 지역 유지, 도민들도 의과대학 유치에 힘을 보탰고, 그 결과 1966년 12월에 의과대학 설립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도내 사립대학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는 등,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1970년 12월 말, 의과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고, 71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어떻게 개교는 했으나 교수진이나 교육환경, 진료환경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이를 구축하는 것이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교수와 학생들의 의지와 열정은 단단하고 뜨거웠고, 이들은 서울대 학생들이 3시간 공부할 때 배에 해당하는 6시간 이상을 공부에 투자하며,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10시간씩 공부했다고 한다.


4. 침체와 발전기[편집]


2000년대 들어 지방대의 위기가 사회적으로 부상했다. 이는 전북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었고, 신입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게된다. 그러나 전북대학교는 각종 돌파구를 찾게 되는데, 해외대학과의 자매결연과 학술교류, 특성화 분야 육성과 산학협력의 강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고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서거석 전 총장의 주도하에 로스쿨 유치, 외부기관 연계연구소 설립, 도서관, 실크로드 센터 등의 교내인프라 확충이 이뤄졌으며, 대학 교수와 교직원들의 역량확충도 크게 이뤄졌다. 이는 곳 연구성과, 국책사업수주, 각종 평가지표의 순위 급상승으로 이어졌다.

인프라의 확충에 따라 설립된 여러 시설들 중에서 국내 최초로 고온플라즈마응용연구센터, 인수공통전염병연구소, LED농생명융합기술연구센터등이 개설되었다.
  • 고온플라즈마응용연구센터
초고온에서 고강도, 고기능성 부품소재를 제작, 연구 가능한 초고온 플라즈마 발생장치가 있으며 이는 국내 유일, 세계 5번째 규모에 달하고, 항공우주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 인수공통전염병연구소
국내 대학에선 유일하게 고도의 차폐시설을 갖춘인수공통 전염병연구소를 개소하여 사람과 동물류간공통 전염되는 병에 대한 연구 및 방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질병관리본부로 부터 고위험성 병원체에 대한 연구를 수행 인증받았다.
  • LED농생명융합기술연구센터
이리농과대 부지의 익산캠퍼스에는 LED농생명융합기술연구센터를 개소하여고부가가치 농생명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2020년에는 약학대학 유치에 성공했고, 2023년에는 글로컬대학 30에 선정되었다.

5. 역대 총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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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두헌

2대

고형곤

3대

정인승

4·5대

유영대

6대

이동술

7·8대

심종섭

9대

조영빈

10대

김원섭

11대

김수곤

12대

장명수

13대

신철순

14대

두재균

15·16대

서거석

17대

이남호

18대

김동원

19대

양오봉





6. 관련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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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이리농림학교는 전국 유일의 갑종 농림학교로서 김태준은 3년제 영변농학교에서 이리농림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2] 출처: 배움, 그 위대한 유산, 전주MBC[3] 출처: 배움, 그 위대한 유산, 전주MBC[4] 출처: 전북대학교 개교 70주년 교지[5] 출처: 배움, 그 위대한 유산, 전주MBC[6] 출처:배움, 그 위대한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