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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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 정치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하은(霞隱)이다.
2. 생애[편집]
1913년 12월 4일 경상북도 용궁군 내하면 지보리(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전옥영(全沃永, 1885. 7. 15 ~ 1958. 11. 26)과 어머니 영동 김씨(永同 金氏) 김남이(金南伊, 1886. 11. 9 ~ 1929. 11. 7)[2]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큰아버지 전병원(1876~1957)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개신교를 믿었다. 1929년 지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34년 이쿠분칸(郁文館) 중학교를 졸업했고, 1937년에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신학부에 진학해 1940년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1940년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 교수로 부임해 1947년까지 역임했고, 그 사이 1942년 12월 14일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성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개척교회를 설립해 목회자로서도 활동했다. 1943년 9월에는 항일투쟁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어 43일간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1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52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5년 동 대학원에서 기독교 윤리 및 사회학 전공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귀국해 한국아세아반공연합 사무총장을 지냈고, 자유당에 입당해 중앙정치회 부원장을 역임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야 무소속 민관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신문 사장, 공보실장을 지냈다.
1961년 3.15 부정선거로 기소되고 1962년 경향신문 폐간 건으로 구속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예천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정진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CBS기독교방송 사장을 지냈다.
3. 여담[편집]
- 극우 정치 목사로 유명한 전광훈은 3월 22일, 6월 18일, 10월 7일 세 번에 걸쳐 자신을 전성천의 7촌 관계라고 주장과 함께, 서울에 상경해 전성천 집에 3년 동안 머물며 이승만에 대해 배웠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 전성천이 남포 시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친일파라고 거짓말을 자신의 지지자들을 상대로 주장했다. 애당초 전성천은 용궁 전씨인데 전광훈 본인은 완산 전씨로 7촌 관계도 성립되지 못한다.
4.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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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2세 상(相)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남동생 전상진(全相鎭, 1919. 3. 11 ~ ?), 전상칠(全相七, 1921. 12. 5 ~ ?), 전상수(全相守, 1924. 10. 13 ~ ?), 전상근(全相根, 1927. 7. 7 ~ ?) 등은 항렬자를 썼다.#[2] 김동호(金東浩)의 딸이다.[3] 제5선거구[4] 제19지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