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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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중요성
3. 배경설명
4. 설명
4.1. (전공자들을 위한) 더욱 상세한 설명
4.1.1. 앞선 시대에 대한 배경설명
4.1.2. 전시과 제도에서 사전의 성격
4.1.2.1. 토지 사유제론vs토지 국유제론
4.1.2.2. 두 개의 고려
4.1.3. 토지 사유제론의 위기
4.1.4. 4줄요약
5. 지급된 토지의 종류




1. 개요[편집]


고려 시대에 실시되었던 토지제도로, 직역하면 '밭(田)과 땔감(柴)을 나눠주는 규정(科)'이라는 뜻이다.

문무 양반 관료들 및 병사 등 직역 부담자들에게 일정한 토지의 세금징수권을 나눠줘서 급여로 삼는 규정이었다. 조선시대의 과전법과 유사하나, 과전법은 경기 일대로 한정했으나 전시과는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다.[1]

전시과는 신라 시대의 녹읍을 혁파하고 들어선 제도이지만 녹읍보다 더 문제인, 식읍은 전시과 체제에서도 존속했다. 그러다보니 안 그래도 복잡한 전시과가 식읍으로 인해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식읍은 단순히 수조권 뿐 아니라 지역민들의 노동력을 신하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고 심지어 개인적인 사병으로 쓸 수도 있었다. 전쟁공신이나 당대 실권자인 서희, 강감찬, 윤관, 최우, 기철식읍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시과 시행 이후 가장 많은 식읍을 받은 것은 강감찬(500 → 700 → 800 → 1,000호)이다. 식읍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 과전법을 시행하고도 한참 후인 조선시대 세종 18년까지 가야 한다.


2. 중요성[편집]


학부 교육을 받거나 역사를 연구하게 되면 굉장히 머리아파지는데, 전시과는 사실상 그 어려운 고려사 중에서도 가장 어려우며, 한국 중세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일제의 식민사학이 부정한 한국사에서의 중세를 증명하여 작게는 식민사학을 박살내고 크게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정리를 할 수 있고, 고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통일신라와 조선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내려있는 전통관습(가문, 종친회, 성씨, 동성동본 금혼조항, 남존여비, 남아선호 등)의 원인을 밝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배경설명[편집]


전시과제도를 설명하기에 앞서서, 고려정부의 예산 편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 6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보고한 바에 개간된 땅의 수가 50만 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공상(供上)은 풍족하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10만 결은 우창(右倉)에 소속시키고 3만은 4고(四庫)에 속하게 하였으며, 녹봉(祿俸)은 무겁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10만을 좌창(左倉)에 소속시켰고, 조정의 선비[朝士]는 대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경기의 10만 결을 떼어 지급하였더니, 그 나머지는 겨우 17만 결뿐이었습니다. [이 17만 결로는] 무릇 6도의 군사, 진(津)·원(院)·역(驛)·사(寺)의 토지, 향리(鄕吏)·사객(使客)·아록(衙祿)·녹봉[廩給]의 비용으로도 오히려 또한 부족하고 군수(軍須)의 지출로는 땅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사전을 외방에서 지급하고자 하니, 공상과 녹봉의 비용, 진·원·역·사의 여러 명목의 토지는 어디에서 나올 것이며, 방진(方鎭)의 병사와 해도(海道) 군사는 무엇으로 먹일 것이고, 만일 3~4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있게 된다면 무엇으로 진휼할 것이며, 천만의 군사를 먹일 비용은 무엇으로써 공급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고려사절요 권34, 공양왕 즉위년 12월, 조준의 개혁안 중 발췌.-


요약하자면, 전국 토지는 총 50만 결. 10만 결=우창(제사와 사신접대 비용), 3만 결=사고(왕실창고), 10만 결=좌창(녹봉), 10만 결=과전, 17만 결=군인월급 등 나머지 공무가 된다. 여기서 전체 50만 결 중 좌창과 우창에 소속된 20만 결은 국가가 직접 조세로 수취하는 공전(公田)인 반면 나머지 27만 결(전체의 약 60%)의 토지는 조세가 개인이나 각 기관에 귀속되는 사전(私田)이었다. 이러한 사전 토지를 전시과 토지라 하며, 그에 관련한 제반 규칙 및 제도를 전시과 제도라고 한다. 이러한 전시과 제도는 고려 개국 초부터 멸망 때까지 유지된다.(과전법도 수조권적 성격이 있으니 일단 포함)[2]

그 다음으로 수조권과 소유권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소유권은 우리가 흔하게 아는 소유를 뜻한다. 반면, 수조권은 수조권을 가진 사람(수조권자)이 소유권자에게 세금(조)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A라는 농부가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고 하자. 당연히 A는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무원인 B가 종이를 하나 들고 찾아와 "내가 월급으로 이 땅의 수조권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 국가말고 나한테 세금을 내면 됨.”이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A는 여태껏 국가에게 내던 세금을 B에게 주면 된다. 이처럼 국가, 지배층과 농민 사이에 수조권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는 관계를 수조권적 지배질서, 유식한 말로 전주전객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소유권에 입각한 지배질서를 지주전호제 라고 한다.

**정리**
전주전객제 → 전주: 수조권자 / 전객: 실제 토지의 주인이자 조를 바치는 사람
지주전호제 → 지주: 땅의 주인 / 전호: 지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주로 노비나 소작농)

학계의 일반적인 통설은 고대에는 수조권적 지배질서인 전주전객제가 우세하였지만, 생산량의 증가와 소유권의 성장으로 인하여 지주전호제가 점점 성장, 조선시대쯤에는 지주전호제가 우세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수조권적 지배질서인 전주전객제가 우세하였다라는 것을 기억하자.


4. 설명[편집]


고려의 이러한 수조권적 지배질서에는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첫째. 관료제 운영을 가능케 했다.
수조권은 법적으로 줬다 뺏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은퇴한 관료에게서 수조권을 몰수해서 새로 관료가 된 사람에게 수조권을 주는 게 가능했다. 이는 소유권 중심의 서양 봉건사회와 비교해보면 놀라울 만큼 유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재정운영에 있어서 매우 효율적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고려와 정반대였던 조선은 국가가 모든 조세를 수취한 다음 국가의 계획에 맞게 뿌리고 감시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고려는 각 기관에 토지를 준 다음 ‘스스로 알아서’ 써먹도록 했다. 중앙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지방 군현이나 개별기관의 자율성이 높아진다는 면에서도 발전적이다.

셋째. 조세 운송부담이 덜하다.
조선의 경우 전국의 모든 조세를 수도로 일단 가져온 다음, 지방에 뿌리는 형식이었다(평안도 함경도 제외). 하지만 고려의 경우 전체 조세의 60%를 개인이나 기관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 주었고, 중앙정부는 약 40%정도의 조세만 운송하면 되었다.

넷째. 고급관료들이 편해진다.
고려 중기부터 고려 고위층을 중심으로 노자의 도가사상과 도교가 널리 퍼졌다는 걸 주목해 보면, 수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즉 속세(농삿일)에 신경쓰지 않고도 먹고 살수 있다는 뜻이고, 수조권이 없다는 것은 아무리 고위관료라 해도 속세의 일(농삿일)에 신경써야 한다는 소리이다. 즉, 이 제도를 통해 고위관료들의 일종의 신선놀음이 가능해진 것이다.

반면, 이 제도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다.

첫째. 지역간 격차가 너무 크다.
(고려의 생산력이 높지 않았다는 시각에서 본다면)고려시대에는

1)농업 기술의 미발달로 생산력이 안정적이지 못했을뿐더러,
2)신라말기&후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인해 황무지가 너무 많았고,
3)통일신라의 경상도 집중 발전 전략 때문에 지역 간 격차가 몹시 불균등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보자. 오직 경상도 전라도만 매출이 흑자고, 나머지 지역은 전부 적자인 상태라고 가정해 보면, 이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이익으로 나머지 지역의 적자를 메꿔야 하는데 그걸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이러한 지역간 불균등은 너무나 심각해서 조선 세종 즈음이 되어야 간신히 '해소 가능한 수준'이 된다. 때문에 고려는 각 지방에서 알아서 조세를 수취하게 두어 가능한 최대로 효율성을 높이게 하고, 더불어 공격적인 황무지&산지 개간정책을 왕조 치세 내내 펼친다. 실제로 고려사를 보면 개간이란 말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교통로의 미발달.
고려시대 인구를 많게 잡아야 후기 기준 약 500만 정도로 잡는데, 고려전기는 아마 200만이 좀 넘었을 것이라 하면 한반도 전체 땅에 200만명~500만명쯤이 산다는 뜻이 되므로 지방간에 사람들이 만나기 힘들어지고, 자연스레 지역간 교류도 떨어지게 된다. 애초에, 고려시대에는 길이란게 드문 수준이었다(다만 통일신라 덕분에 바닷길은 있었다)

셋째. 지방세력의 독립성.
마을간 교통로가 없으니 서로 교류가 없고, 교류가 없는 이런 상태에서, 신라말기 중앙정부가 붕괴되니까 각 마을 하나가 그냥 작은 국가, 독립적인 사회 경제를 구축한 상태였다. 그냥 고려라는 거대한 나라와 싸우긴 부담스럽고, 세금 조금만 내면 이래라 저래라 안 한다고 하니까 고려의 지배를 받아들인 수준이다.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마을의 촌장이라고 친다면, 갑자기 시퍼렇게 어리고 사투리도 다르게 쓰는 사람이 관료랍시고 와서 자신이 중앙에서 파견되었으니 이제 땅 일부를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게 부임 기간 동안만 잠시 땅을 '빌려주면'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의 혜텍을 주겠다고 하는 것, 이 두 개 중에서 무엇이 합리적인지는 안봐도 뻔할 것이다.

즉, 고려 입장에선 지방과 굳이 트러블을 만들 바엔 그냥 걍 지방에서 알아서 하게 두어서, 조세 운반에 드는 노동력과 각종 비용을 절감하고 그 대신 해당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다만,전시과 제도에는 고려가 패망할 수 밖에 없었던 심각한 문제들이 존재했다.

첫째.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불안정적이다.
전시과(田柴科)제도를 정확히 설명하자면 전지(田地,논밭)와 시지(柴地,땔나무)의 수조권리를 관리에게 분급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이 중 전지(田地)는 말 그대로 논과 밭의 수확물을 수취할 권리이며, 시지(柴地)는 문자 그대로 설명하자면 땔나무, 땔감을 수취할 권리로, 쉽게 설명하면 나무를 벌목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것의 1차 목적은 관리가 벌목을 통해 이 시대에 연료였던 나무를 얻게 하기 위함이고, 2차 목적은 그러한 벌목을 통하여 개간을 장려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무는 곡식에 비해 부피가 크고 운송이 불편하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지급되었던 전지와 다르게, 시지(柴地)토지는 주로 개경 인근 경기도 지역의 땅을 분급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간으로 땅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인구증가가 더 빨랐다는 점이다.

즉,
최초로 전시과 제도를 성립
→ 개간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
→ 국가서비스 수요 증가 = 관료의 수요 증가
→ 관료를 늘이고 싶어도 기존 전시과 제도로는 분급해줄 토지가 부족
→ 제도를 개정
→ 개간으로 인한 인구증가
→ 국가서비스 수요 증가 = 관료의 수요 증가
→ 관료를 늘이고 싶어도 기존 전시과 제도로는 분급해줄 토지가 부족
→ 또 다시 제도를 개정
-> (이하 무한 반복....)

이뿐만이 아니다.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도 있다.

1) 수조권은 관리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반드시 반납하는 게 기본적으로 원칙이지만, 국가의 감독이 부실해질 경우 은닉이 가능해진다는 점.
2) 개경 인근의 경기도 권역의 토지를 분급해주는 시지의 경우 개간이 진행될수록 분급해줄 땅이 부족해진다는 점.
문제는 전지의 경우 다른 지역의 토지를 분급해 주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만, 땔나무를 수취하는 시지의 경우에는 운송의 어려움 때문에 경기도 이외의 지역을 분급해주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예를 들어, 강원도에서 개경까지 나무를 운송한다고 친다면 이 시대에는 나무 값보다 운송비가 더 비쌌다. 길이 없었기 때문에
3) 심지어 전시과를 받을 땅은 국가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신청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고위 관직을 독점한 자들이 정보를 통제하고 옥토를 독점‧세습하자 점차 문벌관료들과 신진관료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

이러한 한계점 때문에 고려의 전시과제도는 안정적인 발전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보완·개정된다.

1차. 시정 전시과: 경종원년(976년)
* 시대적 배경: 광종의 숙청으로 지배세력의 힘이 빠져서 가능했음.
* 주요 내용:
- 전(田)과 시(柴)의 분급량이 엇비슷.
- 시정 전시과의 실시는 이를 통해 지배층을 하나의 제도내에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차. 개정전시과: 목종 원년(998년)
* 시대적 배경: 이전 성종의 개혁에 맞춰서 제도를 정비.
* 주요 내용
- 전시(田柴)분급액의 감소
- 군인층이 토지분급대상에 포함
- 무반에 대한 문반의 우위
- 토지의 부족으로 실직(實職)위주의 분급
- 원윤(元尹)미만의 하위 향직소유자에게는 더 이상 토지를 분급하지 않음.

3차. 덕종 3년(1034)에 다시 개정.
*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음.

4차. 경정(更定)전시과: 문종 30년(1076년)
* 배경: 고려사회가 가장 난숙한 가운데, 쇠퇴의 조짐을 보임. 이에 대한 개혁적 조치로 전시과를 개정
* 주요 내용
- 극심한 토지의 부족으로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
- 전시(田柴) 급여액의 감소(특히 시지 분급 격감)
- 그에 비해 군인전은 오히려 증액. 또한 무반도 대우 상승. <-무과가 실시되는 것도 이즈음.

5차. 녹과전: 원종 12년(1271년)
* 배경: 몽고침략 이후 국토가 황폐해져서 현물 녹봉을 줄 것이 없어지자, 아예 토지를 나눠줘서 녹봉을 대신함. 분전대록(分田代祿)의 원칙
단, 전시과 제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녹과전과 공존했다고 보면 된다.

6차. 과전법(科田法): 공양왕대(1391년)
* 배경: 신흥유신들의 전제개혁(田制改革)결과.
이상의 6차례 개혁이 고려의 토지제도의 가장 굵직한 변화들이다.
파일:전시과1.gif
파일:전시과2.gif

둘째. 시장과 반드시 충돌한다.
위의 첫 번째 단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단점으로, 수조권에 기반을 둔 전시과 제도는 소유권에 기반을 둔 자유시장과 반드시 충돌하게 된다. 위에서 서술한 전주전객제와 지주전호제를 다시 떠올려보자. 소유권이 중요한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저 ‘전주전객제’는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진짜 토지의 주인인 농민은 토지의 손님이라는 뜻인 ‘전객’으로 불리고, 우리가 보기에는 손님인 수조권자가 ‘전주’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주전객제와 지주전호제를 곱씹어보면 아주 쉽게 고려 사회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먼저, ‘소유권’이라 함은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이다. ‘나의 노동력’이 더 많이 들어갈수록 소유권은 강화된다. 따라서 소유권은 생산력 수준의 발전에 따라 진보한다. 예를 들어서, 고대 사회의 경우 땅은 넓고 인구는 적다. 만약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쇠하면 그냥 다른 땅에 농사를 지으면 된다. 이 경우 정확히 어디까지가 내 땅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사람 땅인지 쉽게 알 수 없다. 즉, 소유권이 약하다. 하지만 발전된 중세·근대사회의 경우 인구가 많아서 땅이 적다. 만약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쇠하면? ‘다른 땅’같은 건 없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서든지 땅의 지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나의 노동력’이 많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 땅이 ‘나의 땅’이라는 확고한 의식이 있다. 즉, 소유권이 강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 둘 점은 수조권은 소유권 위에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소유권이 있고 난 뒤에야 수조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조권과 소유권의 상호보완반발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중세적 토지지배제도가 발전하게 된다.
내가 소유한 땅에 수조권을 받을 경우.(보완)
엄한 사람 땅에 수조권을 받을 경우.(반발)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보완 보다 발발이 더욱 강력해지는데, 생산력 수준의 발전으로 인해 소유권이 점차 강력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가 되면 수조권은 자연 소멸한다.

셋째. 제도의 허점이 너무 뻔하다.
위에서도 말했듯, 수조권은 원칙적으로 관직에 있을 때만 받는 것이다. 따라서 관직을 그만두면 반드시 반납을 하는게 원칙에 맞다.
하지만, 과연 그게 잘 지켜졌을까? 고려의 지배세력은 가문간의 폐쇄적인 통혼을 통하여 ‘문벌’을 형성하고 끼리끼리 놀았다는 사실을 고려하자. 그렇다면 만약 수조권을 회수하는 관리가 수조권을 반납하는 관리와 친인척이라면?

다만, 고려에는 이걸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있었는데, 다름아닌 '지배계층의 폐쇄적인 통혼'. 이 자체이다. 무슨 소리냐면, 만약 시골 촌장인 향리의 입자에서 본다면 자기 마을에 수조지가 있는 게 당연히 싫을 것이다.그런데 만약,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나쁜 수조지가 알고 보니 미반납수조지라는 사실을 향리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주현을 통해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중앙정부에 신고한다. 고려 지방통치의 특징 중 하나인 중간기구의 미성숙과 중앙정부와 주현의 직첩(直牒)·직통(直通) 관계는 바로 이와 같은 신고를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신정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안전장치,“지배계층의 폐쇄적인 통혼”은 완전히 붕괴되는데, 신분 계층간 이동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지면서 통혼조차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지방 향리들과 수조지를 가진 중앙 관료들이 혼사를 맺어 친인척을 형성, 문자 그대로 서로의 이익을 위해 영합해버린다. 즉, 더 이상 지방 향리가 자기 마을에 미반납수조지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적극적으로 은닉에 가담하게 되며, 특히 국가의 감독이 사실상 실종되었던 원간섭기에 이러한 지방과 중앙의 영합은 극에 달하게 된다.

넷째. 전시과 제도는 일반 백성에 대한 배려가 단 1%도 없다.
전시과 제도는, 아니 애초에 고려라는 국가는 지방과 중앙의 일종의 거래를 통해 성립된 국가이다. 중앙은 지방에 대한 보호와 출세에 대한 약속을, 지방은 약간의 세금을 내는 대신 지방통치에 간섭을 받지 않는 거래로 이루어진 국가이고, 이 거래에 일반 백성이 낄 자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지방 촌락의 민(民)들은 지방 향리에게 예속당한 존재였으며, 1년 365일 24시간 향리가 까라고 하면 까야 하는 존재였다. 법적으로는 분명 국가의 보호를 받는 양인이었지만, 고려는 지방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고 분명히 법제적으로 자유로운 민(民)들은 향리의 통치하에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노예 짓도 주인이 하나면 그나마 낫다. 만약 민(民)이 농사를 짓는 땅에 수조지가 설정되면? 농민 입장에선 사실상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놈이 한명 더 추가되는 꼴이다. 왜냐? 전술했던 “전체 조세의 60%를 개인이나 기관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 준다.” 즉, 수조권자의 수취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조권은 법정 수취량은 전체 수확량에 1/10 수취이지만 흉년과 풍년의 정도에 따라 그 양이 변화한다. 풍년일때는 더 많이 걷고, 흉년이면 더 적게 걷는다. 그렇다면 그 해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누가 결정할까? 수조권자가 결정한다. 그 해가 아무리 흉년이어도, 수조권자가 풍년이니까 많이 걷겠다고 말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조세를 걷는 모든 과정에 대한 감독과 지시도 수조권자가 하며, 그렇게 걷은 조세를 수조권자의 창고로 운송하는데 사용된 비용은 당연히 농민이 내고, 운송 비용에 대한 책정은 수조권자가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국가 행정의 효율화 라는 고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민(民)들이 희생해야 하는 부분들이었다. 즉, 고려는 그당시 기준으로도 이런 것들의 정도가 지나친 상태였다. 일례로, 아까 고려의 전시과제도가 토지의 부족 때문에 계속 변천되는 것을 서술했다. 수조권을 줄 토지는 부족하고, 수조권을 받아야 할 관료는 계속 누적되는 다소 심각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기존에 수조지로 설정된 토지에 중복으로 수조지를 설정한다. 물론 법적으론 한 땅에 최대 설정가능한 수조지는 오직 한 개 뿐이다. 그러나, 그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왜? 그래도 되니까. 결국 토지의 부족으로 인한 수조지의 중복 설정 + 수조지의 미반납으로 인한 누적 + 고려 후기 사원의 확대로 인한 사원전의 중첩 + 녹과전의 분급 + 고려후기 측근 정치로 인한 사패전의 분급 누적 등등으로 못해도 고려후기엔 한 땅의 수조권자가 5~6명인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수조지의 중복설정과 누적으로 인해 고려 후기 농민들은 심각할 경우 수확량 전부를 수조권자들에게 바쳐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즉, 농사를 지어봤자 자기 몫은 하나도 없는 셈인 것. 그리고, 이것이 잘 드러난 고려 후기의 시가 다름아닌 상률가이다.

한 토지에 5~6명의 주인과 한 해에 5~6번 거두는 것에 곤란을 겪게 되니, 부모는 얼고 굶주려도 봉양할 수 없고, 아내와 자식은 헤어져 흩어져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어디다 호소할 곳이 없어 유망하게 되니, 호구(戶口)가 하나같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녹과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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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토지에서의 징수가 이에 두세 번에 이르러 민(民)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나, 나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원통함과 분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고려사> 전시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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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토지[田]에 2~3명의 주인이 있어 각각 그 조(租)를 징수하여 민심을 해치고 있는데, 소재지의 관청과 안렴(按廉)이나 찰방(察訪)이 꾸짖어 금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슬프게도 이 외로운 사람들이 누구에게 의지하며 또 누가 이들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고려사> 권근의 상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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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田地)에서 조(租)를 거두는 사람들이 매년 한 토지에서 4~5번 거두어,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생업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한 것이 자못 많습니다. -<고려사> 정리도감의 건의서 중



그리고, 지금까지 이 문단에 서술한 것들은 사료가 없어서 수조권에 기반을 둔 전시과제도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알 수 없다. 즉, 사학자들의 추측이다. 이 문서 처음에 전시과 제도가 한국 중세사의 최종보스라고 했는데, 사실상 한국사 전체의 최종보스에 가깝다 왜냐? 한국사 전체에서 끌어와도 설명이 안 돼서 [3]


4.1. (전공자들을 위한) 더욱 상세한 설명[편집]


전시과 제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앞선 시대의 경제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시과 제도의 토지는 본래 통일신라의 토지였고, 더 나아가면 삼국시대의 토지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고려의 토지를 이해하려면, 신라와 삼국시대의 토지를 알아야 한다.

4.1.1. 앞선 시대에 대한 배경설명[편집]



4.1.1.1. 식읍&녹읍[편집]

한국 고대의 식읍&녹읍에 대한 이해는
1) 한국 고대사회 성격에 대한 이해, 즉 노예제 사회로 보느냐?
2) 특히 녹읍을 어떻게 보느냐? 인신적 지배가 있었느냐?
에 따라 완전히 갈린다. 특히 녹읍은 상당히 중요한데, 왜냐면 ‘녹읍’은 우리나라 토지제도에서만 볼수 있는 특징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다 적기에는 여백이 부족하여 최대한 간략히 이설들만을 정리하겠다.

{강진철의 견해, 12세기까지 고대사회}
[녹읍] 공동체 수장층이 전제권력에 포섭되면서 지배권을 인정받음. 토지와 노동력의 과실을 지배대상으로 함.
[식읍] 지위나 공훈의 대가
[관료전] 녹읍 부정의 전제.
[월봉(사조)] 기생관료층으로 위치 지우는 목적
파일:강진철.png

{김철준의 견해, 신라말까지 고대사회}
[녹읍] 족장들의 전통적 수취양식. 토지와 노동력의 과실을 지배대상으로 함.
[식읍] 공훈의 대가.
[월봉(사조)] 녹읍의 대체
[관료전] 정비되는 관료제도에 상응하는 경제기반 마련 – 녹읍과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출발
파일:김철준.png

{이경식의 견해, 통일신라부터 중세사회}
[식읍] 제가가 하호를 다스리던 사회의 유산. 봉호(封戶)지배
[녹읍] 1/10 조(租)의 수조권 분급
[월봉(사조)] 사조는 녹읍을 받지 못한 관료들에게 지급. 관료제의 정비에 따라 녹읍 분급을 중단하고 사조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가 실패.
[관료전] 공훈자에 대한 포상
파일:이경식.png

4.1.1.2. 신라촌락문서[편집]

민정문서 항목도 참고할 것.
신라촌락문서란 통일 신라시기 지방 경제 & 행정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1차 사료로, 신라촌락문서의 내용 중 연수유전(烟受有田(畓))과 정전(丁田)[4]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이 내용에 대한 해석또한 학자마다 다르다.

먼저 정(丁)을 단위로 국가 한 토지지급설(균전제론)이 있다. 박시형과 가네와카 도시유키(兼若逸之)가 주장자인데, 이 설은 허점이 많다. 그 다음으로, 민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특정의미의 정전을 설치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 설이 사실상 남한의 주된 견해이긴 한데, 학자별로 그 결이 조금씩 다르다.
➀ 강진철
* 촌락문서에서 호구수(戶口數)의 증감에도 불구하고 토지면적은 고정됨 <- 둘 사이에 하등의 대응관계가 없이 취급됨을 의미.
[정전제를 시행한 목적] : 농민들이 옛날부터 전래해온 자가경영 농토에 대하여 법제적 인정절차를 가하여 수취의 확보를 기도하거나, 통일전쟁이래 폐허화된 황무지를 급전의 형식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이 땅에 대한 강제적 경작의무를 부과한 것.
* 농민들은 자기보유지를 경작하는 자가경영농민인 동시에 한편으로 <촌락문서> 단계에서는 국가의 지배가 호구(戶口)단위가 아니라 촌락자체를 단위로 실현되어 공동체적 관계 유지

➁ 김철준
연수유전(답)은 이전부터 경작권이 인정되어 오던 땅.
[정전제를 시행한 목적] : 통일 이후 왕실의 전제력을 확립하기 위한 정치체제의 정비과정과 관련하여, 지방세력이나 그 지역에 있는 귀족들의 장원에 평민들의 토지가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

➂ 김용섭
통일전쟁으로 농지 황폐, 인구 감소된 특정지역에서는 정(丁)을 기준으로 국가가 토지를 지급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지만, 일반적 의미에서의 정전은 민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특정의미의 정을 정해주는 경우이다.
[정전제를 시행한 목적] : 정은 인정(人丁)즉 노동력을 뜻하므로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한 부세부과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4.1.2. 전시과 제도에서 사전의 성격[편집]


이론적으로 수조권에 기반은 전시과 제도는, 국가가 개인에게 수조권을 분급해줘서, 수조권자가 토지의 소유권자에게 수조하는 제도이다. 즉, 토지의 소유권이 먼저 있어야 수조권이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소유권의식에 기반을 둔 사적토지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다.

4.1.2.1. 토지 사유제론vs토지 국유제론[편집]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중세 한반도의 모든 토지가 국가의 토지라고 봤다. 그 이유는 한국사의 정체론-타율성론이었고,토지조사사업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초기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유물사관론자들도 토지 국유제론을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아시아 사회론이 토지 국유제론에 입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중세 한반도의 토지는 사유지가 우세하였다는 토지 사유제론이 대두하였는데, 이우성이 숭복사비문을 통해 통일신라에서 사유지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4.1.2.2. 두 개의 고려[편집]

숭복사비문 발견 이후 국사학계는 토지 사유제론이 대세가 된다. 하지만 고려 사회의 소유권의 발달 수준에 대한 이해에는 여전히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고려전기 고대사회론> 아직 소유권 미숙(1/4세(稅)). 농민들은 공동체 관계 유지. (강진철)
<고려전기 중세사회론> 소유권 성숙(1/10세(稅)). 농민층 분화 진행. (김용섭)

수조권에 기반한 고려의 전시과 제도는 토지의 소유권이 먼저 있어야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리(식읍&녹읍+신라촌락문서+사유제론)에 따르자면, 고려 전기 소유권은 덜 성숙했을 수도 있고 발전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전시과 제도는 작동을 한 게 확실하다. 즉, 현재로선 소유권이 성숙한 상태에서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고려와, 소유권이 미성숙한 상태에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고려, 이렇게 두 가지의 고려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고려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유권이 미성숙한 상태에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고려> - 강진철
소유권이 미성숙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토지에 수조권을 줄 순 없다. 애당초 다른 사람의 토지 자체가 없을 테니까. 따라서 수조권은 무조건 수조권을 받는 사람의 토지에만 덮어 씌여질 수 있다. 내 땅에 내가 수조권을 받는 거니까 걷는 것은 온전히 내가 가지고, 세금은 안낸다. 즉, 이 경우 수조권은 면조권, 즉 면세 혜택이 된다. 그렇다면 면세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대토지를 가진 사람들, 즉 후삼국시대 호족들이다. 호족들은 자기 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자식들은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므로, 고려는 귀족제 사회이다.

<소유권이 성숙한 상태에서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고려> - 김용섭
소유권이 성숙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토지에 수조권을 주는 게 가능하다. 즉, 이 경우 수조권은 온전히 수조권으로서 작동을 한다. 수조권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중앙에 진출한 관료인데, 이 관료의 출신성분은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수조권이 광범위하게 작동되기 때문에 관료는 토지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힘들다. 따라서 고려는 관료제 사회다.


이러한 두 고려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정리해보자
<소유권이 미성숙한 상태에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고려, 강진철>
고려전기에 휴한농법 단계이고, 농민의 소유권이 미발달, 미성숙했다.
국가의 세금은 공전조 1/4, 일반 수조권자들이 받는 사전조는 1/2. 때의 수조권은 아무 땅에나 설치되는 것이 아니다.

<소유권이 성숙한 상태에서 전시과 제도를 실시한 고려, 김용섭>
농업생산력이 발달했고. 농민의 토지소유권도 발달했다. 국가가 받는 것은 수확량의 1/10(지세).
1/4(특수하게 노동력을 더 들였을 경우), 1/2(일반적인 경우) 은 지대라고 보았다.
김용섭은 녹읍을 수조권 지배로 보았다.
16세기 직전법 단계에 가면 수조권이 소멸했다.

파일:강진철_김용섭_공전_사전_지대_지세.jpg

4.1.3. 토지 사유제론의 위기[편집]


이러던 중, 최근 고려의 생산량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서 토지 사유제론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데, 여말선초 시기의 압도적인 양의 사료들을 분석해볼때 고려의 생산량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결과가 나오고 있으며, 토지 사유제론으로는 여말선초 시기의 농업혁명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 사유제의 중요한 근거 사례로 제시된 ‘숭복사비문’도 그것이 극히 이례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비문으로 적어 놓은거다~ 라는 주장도 꽤나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애당초 ‘토지 사유제론’이 ‘국유제론’을 밀어내고 국사학계의 주류가 된 이유가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론’+‘식민사학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점도 이러한 토지 국유제론의 재대두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왜냐면 ‘내재적 발전론’은 현대에 들어와서 많은 반박을 당했고, ‘식민사학에 대한 저항’도 이미 유통기한이 끝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문제는 생산력이 낮았다는 입장에서 고려를 보는 입장은 기존의 토지 사유제론과 굉장히 모순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토지 사유론제는 높은 생산력 수준을 기초로 만들어진 설이기 때문인데,
* 생산력 수준이 높다 -> 토지 소유 의식 발달 -> 토지 사유제론
이므로 중세의 생산력이 낮았다는 주장은 토지 국유제론과 굉장히 일맥상통한다.
* 생산력이 낮았다 -> 토지의 소유권의식이 미발달 -> 모든 토지는 왕의 토지(왕토사상) -> 토지 국유제론 -> ???

지금까지 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기막힌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사료의 부족때문이다. 현재 학계는 이를 고려사의 여러 논쟁점들을 봉인한 '고려 다원사회론'으로 일단락지었으며, 후일 혹시라도 사료가 나온다면 상황이 바뀔수도 있다.


4.1.4. 4줄요약[편집]


1. 전시과 제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녹읍&식읍 + 신라촌락문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각각모두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학설이 갈림.

2. 현대에 들어서 ‘토지 사유제론’에 근거하여 전시과 제도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성공은 했지만, 정확한 작동원리는 사료의 부족과 생산력 수준에 대한 이견차로 인하여 명확히 해명되지 못함.

3.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토지 사유제론’은 전근대의 높은 생산력에 기초하는데, 막상 사료를 보니 한국 전근대는 생산력이 그닥 높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됨. 진짜 문제는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생산력 수준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임.

4. 자칫하면 그 동안 쌓은 탑이 초기화 될 수 있는 사태에 직면한 사학자들은 ‘초기화’버튼을 누르기보단, 더 나은 사료가 나올때까지 논쟁을 ‘보류’하기로 결정.



5. 지급된 토지의 종류[편집]


  • 과전: 문무관리에게 역의 대가로 지급한 토지. 수조권만 받는 토지로 지급받은 관리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 구분전: 하급관리, 또는 군인의 유가족에게 생계유지를 위해 지급한 토지.
  • 한인전: 6품 이하의 하급관리 자제들 중 관직에 나가지 못한 자들에게 지급해 준 토지. 지급 결수는 17결.
  • 공음전: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해 준 토지. 세습이 가능한 영업전에 속하며 2분의 1세를 징수했다.
  • 공전: 국가가 수조권을 갖는 토지로, 경작하는 농민들은 4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관청의 비용 충당을 위한 공해전, 왕실경비를 충당하는 내장전, 왕자와 왕족에게 지급되었던 궁원전, 학교 경비 충당을 위한 학전, 국경지대 군대의 경비 충당을 위한 둔전이 있었다.
  • 사원전: 절에 지급하는 토지로 면세를 받았다.
  • 외역전: 지방의 향리들에게 지급하던 토지로 향직이 세습되므로 사실상 세습되는 토지였다.
  • 군인전: 중앙군인 2군 6위에 근무하는 직업군인에게 지급한 토지. 자손이 군역을 세습할 경우에만 세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에 반납하고 구분전을 지급했다.
  • 별사전: 승려나 지관 개인에게 지급된 토지.

  • 식읍: 보너스 개념의 수조권인데 식읍에는 지역 노동력 징발권까지 있었다. 워낙 어마어마한 권한이기에 전시과 시행 이후에는 어지간한 공신, 실권자가 아닌 이상에야 받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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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정 전시과에 가면 기 지방의 토지로 한정된다.[2] 참고로 사전의 종류에는 관료들에게 지급된 양반전, 공신들에게 지급된 공음전, 군인을 위한 군인전, 향리를 위한 향리전, 관청에 지급된 공해전, 군사기관을 위한 둔전, 교육기관을 위한 학전, 왕실사원을 위한 장처전, 교통기관에 지급된 역진전, 수공업자에게 지급된 도위전, 지위전, 과거합격자를 위한 등과전, 유가족을 위한 한인전, 왕실에서 사용하는 내장전, 적전 등등 엄청나게 많다.[3] 실제로, 조선사를 연구하는 전문 방화범 유승원 교수나 조선후기경제사를 연구했지만 주화입마하여 뉴라이트가 된 이영훈 교수 역시 여기에 연관되어 있다. 그만큼 스케일이 크다. [4] 정전(丁田)이라 함은, 성덕왕 21(722)년 국가가 정(丁)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에게 일정한 급전원칙을 수립, 실시하였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