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권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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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全仁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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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전인권(全仁權)
출생
1954년 9월 30일 (음력 9월 4일, 6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본관
정선 전씨
본적
함경남도 북청
가족
아버지: 전호준, 어머니: 고옥순, 큰형: 전세권[1], 둘째형: 전권
배우자 정혜영, 아들 전진환, 딸 전인영
학력
서울재동초등학교
명지중학교
명지고등학교 (중퇴)
데뷔
1978년 따로 또 같이 1집 <따로 또 같이>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2]

1. 개요
2. 생애와 활동
2.1. 들국화 이전 (1978~1984)
2.2. 들국화 시절 (1984~1987)
2.3. 솔로 시절 (1988~2011)
2.4. 들국화 재결성 (2012~2013)
2.5. 전인권 밴드 결성 (2014~)
3. 사건
3.1. 마약 복용
3.2. 표절 논란
3.3. 이은주 논란
3.4. 이웃집 기왓장 투척 사건
4. 최성원과의 파란만장한 관계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전인권.png
MBC <텔레콘서트 자유> 에 출연해 공연하는 모습

전인권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한국 대중음악과 록을 정립한 아티스트이다. 기왓장 던지기의 달인


2. 생애와 활동[편집]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토박이로 태어나서 현재까지도 삼청동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인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분가하면서 어머니, 형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중고교는 의외로 삼청동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명지중고교를 나왔다. 당시 서울 종로구 일대에는 지금은 강남으로 이전한 수많은 명문 고등학교들이 즐비 했었고, 특히 경기고등학교가 바로 삼청동에 있었다. 비평준화 시절이라 당시 서울 강북에 있던 어지간한 중고교를 다 떨어지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통학한 듯 하다.[3] 당시에는 청와대 뒷길도 막혀 있었고, 세검정은 개발도 되지 않은 시절이라 삼청동에서 명지중고교까지 통학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고교 시절에는 공부보다 미술을 좋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교 1학년 때 규율부 학생들과 싸움을 한 후 학교를 자퇴했다고 한다.

이후 음악에 심취하여 삼청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고 한다.


2.1. 들국화 이전 (1978~1984)[편집]


초년 시절 음악 감상실 '쉘부르' 출신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하곤 했다. 쉘부르는 이종환이 운영하던 통기타 업소로, 1970년대 초 통기타 진영의 중심이었던 '쎄시봉'의 쇠퇴 이후 새로운 통기타 가수들의 중심이었다.

1978년 강인원, 이주원, 나동민과 <따로 또 같이>로 활동하며 '맴도는 얼굴'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첫 솔로 음반을 발표하였으나 망했어요... 후에 인터뷰에서 불 태우고 싶었던 음반이라고 하였다.[4] 불 태울 것 까지야...

1980년대 초부터는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함춘호의 소개로 키보디스트 허성욱과 기타리스트 조덕환, 드러머 한춘근[5]을 만나 강릉시의 한 디스코텍에서 밴드를 처음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 쯤 되었을 때 허성욱의 부모가 찾아와 팀이 해체되었다.

1982년에는 허성욱과 함께 다시 통기타 업소인 '까스등' '모노'에서 통기타 음악을 했다. 이 때 '모노'에서 활동하던 최성원을 처음 만났는데, 최성원은 당시 '매일 그대와' 같은 자작곡으로 인정 받고 있었다.[6]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 세 사람은 <전인권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 봄 무렵에 음악적 견해 차이를 보이던 최성원과 전인권, 그리고 허성욱은 전인권의 모친상을 계기로 해산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인권의 회고에 따르면 전인권 트리오의 해체 사유는 다음과 같다.

'최성원, 허성욱과의 활동은 1984년 5월 어머니의 죽음과 각자의 의견차이로 당분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삼총사는 방배동의 '이트'라는 연주실을 연습장소로 택해 쓰고 있었는데 포크록을 하고 싶어하는 최성원, 클래식하길 원하는 허성욱 간에 가끔 마찰이 일곤 했다. 그러던 차에 암으로 오랫동안 앓아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고 성원이와 성욱이도 잠시 헤어져 있게 되었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 전인권 1990)


2.2. 들국화 시절 (1984~1987)[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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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준 35세(1988년)
하지만 같은 해 여름, 조덕환의 권유로 전인권, 조덕환, 허성욱 세 사람이 밴드를 재결성한다. 1984년 겨울에는 밴드 들국화가 결성되었으며, 1985년 6월에는 최성원이 재합류했다.

데뷔 앨범은 1985년 9월 발매되었다. 그동안 들국화의 곡들은 드럼 파트가 없었기 때문에 리듬이 강조되지 않아 포크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앨범 녹음 과정에서 드럼과 더불어 일렉기타 세션이 추가되었다. 결과적으로 들국화의 곡들은 이전보다 락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강화되었다.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 아시아나의 기타리스트였던 김도균의 회고에 따르면 들국화는 포크 음악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처음 볼 때는 들국화도 3인조였죠, 그런데 조금 독특한 멤버 구성이었습니다. 드럼 없이 어쿠스틱 기타(전인권), 일렉트릭 기타(조덕환) 그리고 베이스(최성원). 사실 처음 보는 형태였죠.[7] 매일 밤마다 연주를 하니까 항상 만나게 되고 또, 농담도 서로 자주 주고 받으며 아주 사이 좋게 지냈었습니다. 그 후 앨범을 내고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해졌죠. 사실 음악적인 스타일은 저희와는 달랐습니다. 제가 볼 때는 포크 음악으로부터 출발한 것 같습니다. 그 쪽의 선배들은 한대수, 김민기, 조동진 등 이런 분들로부터 내려온 라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rock 과 folk music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 서로 돕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밥 딜런 노래를 지미 헨드릭스가 부르는 등 같은 히피 시대의 동지들이죠...' 김도균 홈페이지. 지금은 없어짐.

들국화 1집은 발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성공하였으며 후에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판소리 명창들에게 창을 배워서 동굴에서 1년동안 득음 연습을 했다고 한다. 결국 국내외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창법을 지니게 되었다.

1980년대 당시엔 타고난 높은 톤의 목소리로 벨팅을 통해 3옥타브대의 고음을 쉽게 소화해내는 보컬이었다.[8] 당시에는 지금보다 목소리가 가늘고 톤이 높았기 때문에 양희은의 성대모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9] 김현식과 고음 대결을 해서 이긴 적도 있다는데[10] 이는 한영애의 '바라본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그 곡에서 코러스로 참여했는데, 거기서 초고음의 샤우팅을 내지르는 남성이 바로 전인권이다.[11]

타고난 미성과 피 나게 갈고 닦은 창법으로 당시에는 레드 제플린딥 퍼플, 스틱스 같은 외국 록밴드의 곡 커버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르고는 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사랑일 뿐이야', 들국화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Come Sail Away', 2집 '조용한 마음', 솔로 1집 '돌고 돌고 돌고', '사랑한 후에' 등에서 리즈 시절 맑고 시원했던 고음역대 보컬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들국화는 1987년에 해체되었다.

2.3. 솔로 시절 (1988~2011)[편집]


1988년에 1집 앨범인 '사랑한 후에'를 발표한다. '돌고 돌고 돌고'를 히트시키며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89년에는 <전인권과 가야> 밴드로도 활동하였다. 1991년 2집 '언제나 영화처럼'을 낸 이후에는 마약 사건으로 인해서 10년이 넘도록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0여년 만인 2003년에 3집 '다시 이제부터'를 발표하고 스카이라이프 CF에도 출연하여 인권이 라이프라는 유행어도 남겼다. KBS 신화창조의 비밀의 삽입곡으로 그의 대표곡인 '행진'이 선정되면서 다시금 재기에 성공하여 2004년에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12]을 연달아 발표했다.

하지만 솔로 시절 20년 중 후기 10년은 대마초와 자기관리 부실(...)로 목소리리즈 시절에 비하면 형편이 없어졌[13], 마약 사건을 넘어서 2005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배우 이은주와의 관계에 대한 논란과 스토킹에 가까운 편집증세 때문에 대중적 이미지가 완전히 바닥을 기어가게 되었다.

이렇듯 전인권 인생의 말기는 그야말로 막장으로 흘러가는 듯 했으나....

2.4. 들국화 재결성 (2012~2013)[편집]


2000년대 이은주 사건과 마약 복용으로 인한 투옥, 정신 병원 입원 등 전인권의 인생 말기는 그야말로 막장같이 끝나가는 듯 했으나... 꾸준한 치료로 인해 다시 가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당시 최성원의 말에 따르면, 막장이 되어가던 친구가 너무 안타까웠는데,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지금까지 들은 목소리 중 최고의 목소리를 들려줬다고 한다. 결국 2012년 10월을 기점으로 들국화가 드디어 재결성되었다. 이 때 아내와 재결성 재결합도 하고 정신병원에 감금된 동안 성찰도 많이 하면서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이글스 - desperado


딥 퍼플 - Smoke On the Water, 존 레논 - Imagine


들국화 - 사랑한 후에, 그것만이 내 세상. '사랑한 후에'는 전인권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 한다.[14][15] 그래서 그런지 '사랑한 후에'를 전인권만큼 부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16]

완전 부활이라고 해도 무방... 아니, 원숙미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2013년 10월, 드러머 주찬권의 죽음으로 들국화의 활동이 전면 중단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새 앨범을 위한 주찬권 드럼 파트는 녹음을 마친 상태여서 2013년 12월 주찬권의 유작이자 신보 + 리메이크 형식의 들국화 4집 '들국화'가 무사히 발매된다. 하지만 이후 들국화의 활동은 기대하기 힘든 상태다. 그 이유는 만나면 늘 다투기만 하던 전인권과 최성원의 사이를 중재해주던 주찬권의 역할이 사라지자 둘의 사이는 다시 악화되었고(재결성 후 자주 하던 카톡도 안 한다고 한다), 둘이서 투맨 밴드 하기도 좀 뭐하기도 해서... 자세한 건 들국화 항목을 참고.

2.5. 전인권 밴드 결성 (2014~)[편집]


주찬권의 죽음으로 들국화의 활동은 중지되었지만, 60대의 나이에 다시 불타오른 음악에 대한 열정을 멈추기 싫었던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 한 '전인권 밴드'를 결성한다. 현재까지 콘서트와 새 앨범들을 내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인권 밴드는 2014년 9월 정규 앨범인 '2막 1장'을 내고 2015년 12월 미니 앨범 '전인권 밴드 겨울이야기'를 냈다.

2015년 9월 밴드 활동과는 별개로 후배들(Zion.T, 윤미래, 타이거 JK, 강승원, 서울전자음악단, 갤럭시 익스프레스(Galaxy Express),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그레이프 티(Grape T))을 모아 싱글 앨범 '너와 나'를 발표했다.

2020년 11월 16일부터 싱어게인 심사위원으로 출연중이었지만...하차했다.

3. 사건[편집]


한국 대중음악의 거탑인 그이지만 그의 개인사는 논란의 사건들이 많다.

3.1. 마약 복용[편집]


전인권의 최대 문제라고 할수 있는 것이 바로 마약으로, 마약 전과 5범이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고등학생 때인 17세 때부터 마약을 시작했다고 한다.

1987년 10월, 김현식, 허성욱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어 들국화 해체에 영향을 주었으며, 마약 관련 구속만 네 번을 더 당했다. 즉, 대마초 흡연 혐의(1987, 1992), 필로폰 투약 혐의(1997, 1999, 2008)로 구속 횟수만 총 다섯 번에 달한다. 그 외에도 2004년 10월에는 울산병원 응급실에서 마약 성분이 있는 진통제 투약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전날 같은 약을 투약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병원의 기물들을 파손하고 병원 관계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었다. 당시 출동한 경찰이 간이 마약 조사를 실시했으나 무혐의로 훈방 조치만 취했다.


2007년에는 메스암페타민 복용 혐의로 조사 도중 필리핀으로 돌연 출국,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한국인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5개월 간 체류하다가 귀국했고, 인천국제공항에서 검거되었으며 필리핀에서 마약을 한 것은 사실이나 한국에서는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다. 한 차례의 항소 끝에 2008년 3월, 징역 1년과 추징금 546,000원을 선고받았다. 그 때 가요계 후배들과 동료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사진작가 김중만을 중심으로 이수만, 윤도현, 김장훈 등 16명이 천만원 정도를 변호사비로 모금하여 주었고, 윤도현김장훈은 변호측 증인으로도 출석했다. 김부선, 조덕배, 정경수 등은 탄원서를 제출하여 구속보다 치료를 위해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2008년 9월 6일에 출소했으며 2008년 10월에는 지난 2002년에 이별했던 처와 재결합을 하고 신곡을 작곡하며 콘서트를 준비하는 등 다시 일어서는 듯 하였으나, 지병인 대상포진으로 인해 첫 콘서트가 취소되었으며 다시 만난 아내와도 2009년 3월에 다시 결별하였다.

당시 전인권은 대상포진 치료를 위해 투여받던 모르핀에 중독되어 갔다. 한 번에 80알을 먹을 정도로 중독되었던 전인권을 어느 날 갑자기 다섯 남자가 집에 들이닥쳐 강제로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끌고 갔는데 바로 요양원이었다. 당시 헤어져 살던 전인권의 아내가 막장이 되어가던 전인권이 걱정되어 신고했으며, 전인권은 그곳에서 치료받다가 2011년 아내가 요양원에서 다시 데리고 나오면서 아내와 재결합했다. 당시 요양원에서 나올 때 전인권이 아내에게 "왜 나에게 잘해주는 것이냐. 앞으로 나는 혼자 살아야 할 텐데 지금 당신이 잘해주면 내가 더 힘들어지니 당신은 당신 길로 가라"라고 말하자 아내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전인권에게는 신앙이 되어 이후 마약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가족과 음악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마초 흡연 사건으로 2008년 1월 25일 KBS의 출연금지 명단에 올랐다가 2012년 5월에 해제되었다.[17] 그 뒤 2014년 3월 2일, 배철수가 일요일 밤 11시에 진행하는 KBS의 콘서트 7080함춘호와 함께 출연했다. 여기서 "이제는 몸 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전인권 본인이 직접 말했고, 배철수도 "전인권의 피부가 반짝거린다"고 말한 것으로 보면 전인권 자신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듯 하다.

2012년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지금은 절대로 마약에 손대지 않고, 가족들의 사랑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방송이나 콘서트에서도 "마약에서 완전히 손을 뗐으며 건강을 위해 금주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3.2. 표절 논란[편집]


2차례의 표절 논란이 제기되었으며 곡이 상당히 유사해 비판을 받았다.

3.2.1. 걱정말아요 그대[편집]


전인권의 대표곡인 '걱정말아요 그대'[18]독일 곡인 Bläck Fööss(블랙 푀스)[19]의 'Drink Doch Eine Met'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표절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한 구절 정도를 베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걱정말아요 그대'는 독일 원곡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그대로 베꼈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표절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인권은 처음에는 표절을 부인했다. 4월 26일 전인권은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표절 안해요. "라고 표절을 부인했다.

하지만 논란이 더욱 커지자, 4월 28일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사실상 표절을 인정하며 원작자 측과 합의하고 저작권료를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전인권은 페이스북에 "나는 곧 독일로 간다"며 "일단 그 곡을 만든 사람 입장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원하는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날(합의가 된날 이후) 로열티를 달라고 하면 적당 선에서 합리적으로 재판하든, 그쪽 입장대로 로열티가 결정되면 한국 저작권협회와 상의해서 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리고 앞으로는 이곡과 관련된 어떤 인터뷰도 거절하겠다고 말했다. # 합의하고 저작권을 지불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당연히 표절을 인정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언론 또한 그렇게 보도했다. 하지만 나중에 전인권은 실제로 독일에 가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표절 논란이 잠잠해지고 나자 전인권은 다시 표절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전인권은 합의한다고 해서 표절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또다시 표절을 부인했다.

전인권은 2019년 10월 콘서트 투어를 앞두고 이곡에 대한 표절에 관한 질문을 받자 독일 밴드 ‘블랙 푀스’ 측에서 "의도적이지 않은 것으로, 표절로 보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이와 관련된 아무런 물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또 독일 그룹 '블랙 푀스' 측은 이와 관련하여 국내외 어떤 언론에도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바 없다. 다만 독일 그룹 측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있고, 전인권이 "합의하고 달라는 대로 로열티를 주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당한 액수에 합의를 본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3.2.2. 우리[편집]


'걱정말아요 그대'의 표절 의혹이 진행되는 와중, 1995년에 발매된 들국화 3집 '우리'가 1984년 발표된 기독교 찬양곡 'I just want to praise you(주를 찬양하며)'의 표절이라는 의혹이 추가되었다.




들국화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다. 안찬용 서울장신대학교 예배찬양사역대학원 교수는 이 논란이 있기 전부터 찬양사역자들 사이에서 두 곡의 유사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있었다고 밝혔다. 추연중 CCM 전문 칼럼니스트는 8마디의 멜로디와 코드 진행에서 유사성이 발견된다고 밝혔다. 스포츠경향 기사.

후배 가수 김경호는 인터뷰를 통해 "'걱정 말아요 그대'보다 '우리'의 표절의혹건이 더 문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3.3. 이은주 논란[편집]


2005년 6월 15일 전인권은 4개월 전에 사망한 26살 연하의 여배우 이은주와 4년간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

이은주의 친한 언니인 하 씨는 '전인권 씨는 이은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은주의 스토커였다'라면서 하루에 20차례씩 문자를 보내고, 새벽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폭언을 녹음해 보내는 등 스토커 수준의 행동을 일삼았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은주의 친오빠는 팬클럽 카페에 글을 올려 '문자 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교류는 단순한 친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어찌하여 그렇게 착각을 하면서 이제 고인이 된 은주를 두 번 죽이시는지 가슴이 아픕니다'라는 심정을 전한 후 '그리고 그걸 기정 사실인 양 언론에 떠들어 대는 전인권 씨를 보며, 연민마저 느낍니다'라고 답답하고 씁쓸한 심정을 밝혔다.

이런 논란과 반론, 유가족 측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전인권은 수개월이나 이은주와 연인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국민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전인권은 콘서트에서 "제가 물의를 일으켜 신나죠?"라고 말하며 자신과 관련된 언론과 대중의 관심과 논란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중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

2005년 10월에는 '이은주를 위한 노래 부르겠다'라고 말하며 새 앨범에 두 곡이나 수록했다. # 말 그대로 대중들과 팬들은 경악했다. # 고인의 죽음을 심지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중들이 전인권에게 가졌던 호의는 모래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은주를 사랑했는가 안 했는가를 떠나, 이은주가 반박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구원의 여지가 없다.[20]

3.4. 이웃집 기왓장 투척 사건[편집]


2021년 1월 전인권 자택의 이웃집이 지붕공사를 했는데, 전인권이 조망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이웃집에 기왓장을 투척했다는 신고가 접수되어서 경찰이 전인권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 본인은 기왓장이 아니라 돌을 던진거라며 혐의를 일부 부인중이다.

4. 최성원과의 파란만장한 관계[편집]


그의 평생의 동료이자 음악적 경쟁자였던 최성원과는 말 그대로 애증으로 점철된 30년의 세월을 보냈다. 흥미롭게도 최성원의 별명 중에 '한국의 폴 매카트니' 가 있는데 전인권을 존 레논에 대입하면 꽤나 그 관계가 들어맞는다. 포크락을 베이스로 하여 대중친화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최성원과 락킹한 사운드로 시대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전인권. 각각의 음악 성향도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에 놀라울 정도로 대응된다. 또한 전인권이 이것저것 문제로 언론사에 구설수로 오르내리고 방황하는 동안 최성원은 가요계 원로로서 별 풍파 없이 안정적이게 지냈고. 심지어 들국화 시절 포지션도 최성원은 베이스 & 보컬, 전인권은 리듬 기타 & 보컬이였는데, 이것은 정확히 비틀즈 시절 폴 메카트니와 존 레논과 대응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주찬권의 역할인데, 주찬권은 링고 스타가 비틀즈의 링크(link)였던 것처럼 들국화라는 밴드를 지탱하고 전인권과 최성원을 연결시켜 주었으며, 둘 다 밴드의 드러머였다. 주찬권의 죽음 이후 전인권과 최성원은 다시 안녕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들국화가 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안 싸운 날이 더 적었을 정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고 한다. 그렇다고 심각한 게 아닌 사소한 이유.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쪼꼬렛 vs 씀바귀 물론 이건 농담일 것이고, 서로의 주관이 너무 뚜렷하면서 각자 음악적 역량 역시 뛰어났기에 충돌하다 보니 사소한 것 가지고도 싸운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전인권도 오랜 방황의 길에서 벗어났고, 최성원 역시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기에, 무엇보다 다들 이제는 산전수전 다 겪으며 웬만한 평지풍파에는 눈 하나 흔들리지 않을 내공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게 된 듯. 애초에 1980년대에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얼마 전 뉴스룸에서 전인권이 자신과 최성원은 안 맞는다며 앞으로 들국화 재결성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재결합한다면 베이스 대신 어쿠스틱 기타를 쳐줬으면 좋겠다고... 이유는 팀에 이미 베이스가 있기 때문. 이유가...

5. 여담[편집]


  • 자택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으며, 태어나서 현재까지 쭉 거주 중인 토박이이다. 방송에 몇 번 공개되었다.

  • 삼청동 토박이라고 발언했는데, 의외로 중고교는 명지중고교를 나왔다. 삼청동에서 명지고까지는 의외로 교통이 좋지 않아서 요즘도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당시에는 청와대 때문에 청운동 쪽 길도 대중교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삼청동에서 명지중고교를 가려면 신촌을 거쳐가거나 홍제동쪽으로 돌아가야 하고 버스도 몇 번 갈아타야 했다.


  • 들국화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인 '그것만이 내 세상'이 금지곡으로 지정된 적이 있었는데 사유가 다름 아닌 '창법 저속'. 물론 그시절 금지곡답게 진짜 이유는 운동권에서 자주 불렀기 때문에.


  • 타이거JK는 전인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본인의 6집 타이틀 곡인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에서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그 다음은 오른발의 차례 눈앞을 향해 행진 전인권의 열정 어태킹(Attacking)"이라는 랩을 만들어서 넣기도 했다. 이 랩에서 언급되는 '행진'은 물론 들국화 1집의 1번 트랙 곡이다.

  • 라디오에서 앞으로 자신만큼 발전할 가수를 묻는 질문에 원더걸스를 택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선미를 가장 눈여겨 본다고 말했다.[21]

  • FC 서울에서 하프타임으로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를 응원가로 쓰고 있다. 핸드폰 플래쉬의 불빛을 이용해 N, E, W석 전 관중이 함께 참여하는 응원인데 많은 서울 팬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2016년 8월 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슈퍼매치에서 초대 가수로 등장해 3만 6천여 명의 관중들과 함께 행진'걱정말아요 그대'를 열창했다. 수원의 서포터들은 전인권이 노래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패륜송을 대차게 불렀다 경기 지연에 선수들은 대기 전인권은 자신의 노래를 함께 불러준 FC 서울과 팬들에게 감동하여 감사를 전했고, 뜻깊은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이 노래가 FC 서울에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하프타임 시간 때문에 말리지 않았으면 한 곡 더 했을 뻔 했다. 다시 돌고 그리고 결국 후반 시작 지연에 영향을 주었다.

  • SBS 판타스틱 듀오에 출연하여 일반인 '송도 푸드트럭'과 함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열창해 7대 판듀가 되었고, 8대 판듀 결정전에서 '사랑한 후에'를 불렀으나 이문세&원일중 코스모스의 '그녀의 웃음소리 뿐'에 꺾여 내려왔다.


  • 한편으론 19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를 칭찬했다는 이유로 극렬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비난을 들었다.[22] 하지만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는 '누구를 지지하든 전인권 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전인권이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 등에 꾸준히 초청되는 것을 볼 때, 당시 문재인 캠프가 손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전인권을 겨냥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전인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팬클럽인 노사모에 가입, 활동도 했다고 밝혔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추모제에 참석, 본인의 페이스북에 노회찬 전 의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며 추모곡을 직접 불러 게시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했기 때문에 단순히 안철수 의원이나 정치적 노선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본인 나름대로의 인물 평가를 내린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 2017년 12월 31일 첫 방송된 집사부일체에서 멤버들의 첫 사부로써 출연했다. 강렬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반전 매력과 허당끼(?)를 발산하며 멤버들은 물론,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전인권과의 마지막 일정을 보여준 1월 14일 방송에서는 멤버들에게 '사랑한 후에'와 '제발'[23]을 불러주었고 이상윤육성재가 제발을 듣던 중 눈물을 보였다.[24] 이후 멤버들과의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뒤 방송 종료. 여담으로 이날 방송 이후 이상윤과 육성재는 가끔씩 이승기양세형에게 울었던 것과 관련해 농담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방송에서 그의 멤버들이 아침으로 먹은 허니파우더가 그날 저녁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찍었다. 매 식사는 누룽지만으로 때운다고 하는데 탈이나면 노래할때 배로 힘을 넣을수가 없기때문에 탈이 날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2018년 2월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하현우, 볼빨간사춘기 안지영, 이은미와 더불어 가수로서 출연하였다. 다만, 특유의 색깔 강한 허스키 목소리로 인해 독창은 괜찮았을지 모르나 다른 가수와의 합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악평이 주를 이뤘다. 비단 전인권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불협화음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 2018년 6월 24일 히든 싱어 5에 원조가수로 출연하여 밝히기를 '돌고 돌고 돌고'라는 노래가 자기가 교도소에 들어갔을 때 만난 도둑에게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고 한번 털어보랬더니 진짜로 털어가서 만든 노래라고 한다.

  • 들국화 1집 앨범에 찍힌 사진은 손가락을 물고 있는게 아니라 오징어를 씹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 전인화남매 지간이라는 헛소문이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관련 없는 사이다. 남매는 당연히 아니며, 그렇다고 사촌 지간도 절대로 아니다. 헛소문은 말 그대로 헛소문일 뿐이다. 더군다나 둘이 실제로 남매가 맞다면 본관이며 출생지며 다 같아야 하는데, 서로 전혀 다르므로 남매가 될래야 될 수가 없다[25].



6. 관련 문서[편집]




[1] 드라마 연출가(TBC, KBS에서 활동) 겸 연극 연출가.[2] 자신의 옛 이야기, 추천 음악, 공연 소식 등을 올리고 있다. 글을 읽어보면 전인권 특유의 화법을 느낄 수 있다.[3] 당시 명지고는 역사도 길지 않고, 종교 분위기가 강해서 당시 강북에서 후순위에 있었다.[4] 신해철의 라디오 프로였던 고스트네이션에서 말하기를 반주 한큐에 녹음, 보컬 한큐에 녹음 그리고 끝이었다고(...) 그때는 그랬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는데, 그래서 백두산이라든지 당시를 전후로 한 여러 밴드들도 같은 이유로 1집의 퀄리티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5]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의 드러머로 간다.[6] 전인권의 말로는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의 아티스트지만 은근히 터프하다"고 한다. "운전할 때 보면 정말 무섭다"고. 덤으로 본인의 무면허 운전 이야기도 했다[7] 트리오 시절의 들국화는 전인권, 조덕환, 허성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3인조였다가 최성원이 나중에 재합류하게 되는데, 김도균은 아마도 허성욱이 후에 들어온 멤버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8] IZM에서 2015년에 임진모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전인권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지금도 3옥타브 도#까지는 쉽게 올라간다고 한다.[9] 판타스틱 듀오에서 한 말.[10] 공감토크쇼 놀러와 방바닥 콘서트에서 확인할 수 있음.[11] 침고로 김현식과는 생전 매우 절친한 사이였으며, 장례식에서 김현식의 관을 운구한 사람 중 1명이 전인권이었다.[12] 그 유명한 '걱정 말아요 그대'가 1번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다.[13]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있긴 하기 때문에, 지금도 목소리에 불평이 제법 나온다.[14] 정확하게는 작사만 한 것이다. 원곡은 알 스튜어트의 'The Palace of Versaille'라는 곡이다.[15] 들국화 재결성 이후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다른 멤버들이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The Palace of Versaille'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야 이거 인권이더러 부르라고 하는 노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16] 그나마 음색이 전인권과 비슷한 하동균이 '불후의 명곡'에서 이 노래를 부른 뒤 큰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방송 후 그가 노래 부른 영상이 다시보기 1위를 기록했을 정도.[17] MBC에서는 명단에 없었다. SBS는 별도의 출연금지 명단이 없는 대신 자체 가이드라인을 통해 결정한다고 했다. 참고로 KBS의 출연금지 명단은 MBC에서도 준용한다고 한다.[18] 심지어 전인권은 자신의 자서전 제목도 '걱정 말아요 그대'라고 지었을 정도 이곡은 그가 큰 애착을 가졌던 대표곡이다.[19] '블렉 푀스'가 바른 표기법이지만, 대부분의 국내 언론이 '블랙 푀스'라고 표기했다.[20] 일례로, 비슷하게 미국에서는 가수 모비가 자서전에서 14살 가량 연하인 나탈리 포트만과 잠깐 사귀었단 식의 얘기를 했다가 포트만이 부인하는 바람에 사과를 한 적이 있다. 이 경우엔 나탈리 포트만은 멀쩡히 살아있기 때문에 반박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거고, 이은주의 경우 이미 고인이므로 어떤 입장표명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설사 진짜 둘이 연인이었어도 발언을 신중히 해야 하는 상황인데, 심지어 연인이었다는 객관적 증거는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할 얘기는 도저히 아니었던 것.[21] 실제로 선미는 원더걸스 해체 이후 가시나로 성공적으로 솔로가수로 데뷔했고 가시나 이후에 낸 앨범들 모두 1위를 차지했다.[22] 이미 전에도 전인권은 안희정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이유로 비슷한 일을 당한 전적이 있다.[23] 이상윤의 요청으로 불렀다[24] 전인권의 노래를 통해 위로가 됐기에 운 것 같다. 육성재의 경우 이전 방송분에서 이미 전인권에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나중에도 본인을 좋아해줄 지에 대한 걱정, 불안감 등을 전인권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이상윤 역시 육성재와 마찬가지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고민과 불안감 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직업인데 이를 전인권이 ' 제발 '을 통해 위로해주고 격려해줬기에 눈물을 보인 것이다.[25] 본관은 전인권은 정선 전씨고, 전인화는 문경 전씨이다. 또 출생지도 전인권은 맨 위에서 봤듯이 서울특별시 종로구고, 전인화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