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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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에서 묘사된 전주 화약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화약의 내용과 결과



1. 개요[편집]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과 조선 조정이 1894년 음력 5월 8일 맺은 협정.


2. 배경[편집]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동학 농민군은 마침내 전주성에 입성했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기에 이르자, 한편 조선의 상황을 예의주시 하던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톈진 조약에 의거, 제물포(현재의 인천)에 병력을 진주시킨다.[1]

이에 놀란 조정은 다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하려 했다. 톈진 조약에 의거하면 조선의 변란이 진정될 때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신식무기로 무장한 경군(京軍)과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을 뿐더러[2] 동학군의 주력인 농민들에게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전개[편집]


전봉준은 음력 4월 19일 중앙군[3]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정장을 보냈는데 '억조(億兆)가 마음을 같이 하고 온 나라가 의논을 모아 국태공(흥선 대원군)을 모시고 부자 사이의 윤리와 군신 사이의 의리를 온전히 하여 아래로는 여민을 편안히 하고, 위로는 종묘 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장차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변치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살피옵소서'라는 내용이었다.

요약하자면 흥선대원군 돌아오고 탐관오리 때려잡아주면 얌전히 있을게요.

홍계훈은 동학 농민군을 때려잡으러 왔는데 정장을 받고 멈칫한다. 음력 5월 8일 홍계훈과 농민군 지도부는 강화를 맺는다. 이때 전봉준은 폐정개혁안 27개조를 내놓았고, 이에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 화약이 성립되었다.


4. 화약의 내용과 결과[편집]


1940년 출간된 역사소설 동학사에 따르면 동학 농민군이 당시 내세운 폐정 개혁 12개조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21세기 초 연구에서는 폐정 개혁안은 후대에 창작된 것이고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이 세를 얻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라 폐정 개혁안이 실제 존재한다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등 최근에 나온 논문이 많으니 참고해보자.

1. 도인(道人)[4]과 조정과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벌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7종의 천인[5]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동학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서둘렀으나 나주[6], 남원[7] 등에서는 관군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으며 1894년 7월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및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를 필두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犯闕)하여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친일내각을 세우자 개혁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이 때문에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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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산만에 진주한 청군이 진짜로 동학군을 진압하러 온 것에 비해, 일본군은 아예 한양을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라도에 있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한양 근처로 상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2] 경군으론 무리였다고 여긴 조정의 걱정과 달리 이 무렵에는 경군이 승기를 잡고 있었다.[3] 장위영(將衛營)과 친군심영(親軍沁營)[4] 동학교도[5] 일명 칠반천역(七般賤役)[6] 나주는 양반의 세력이 강해 원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동네였을 뿐 아니라 천혜의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군이 쉽게 관군을 격파하지 못하고 있었다.[7] 결국 남원에서 저항하던 관군은 김개남이 지휘하는 동학군에 의해 강제로 진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