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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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田惠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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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4년 1월 1일[1]
평안남도 순천군
사망
1965년 1월 11일 (향년 31세)
서울특별시 중구 남학동 25번지 자택
학력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2] / 학사)
뮌헨대학교 (독문학 / 학사)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저서
4.1. 역서
5. 여담


1. 개요[편집]


그러나 가끔 나는 내 피부 속에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좁은 껍질 속에 감금되어 있는 정신의 중량이 확 느껴지고 파괴 의욕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지 일격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을 기다리는 그런 때다. 이 반 의식 상태를 활짝 갠 의식 상태로 바꿔주고 이 반 소망된 생활을 열렬히 소망된 생으로 만들 무엇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요술 지팡이를 기다리듯.

저서 「목마른 계절」 中


불꽃처럼 사랑하고 사랑하며 죽어가리[3]


대한민국번역가, 수필가, 독문학자.


2. 생애[편집]


1934년 1월 1일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조선총독부의 고급 관료였던 아버지 전봉덕[4]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순해(金珣海)[5] 사이의 1남 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골수 친일파인 덕분에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으며, 이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독일 유학까지 가는 밑바탕이 되었다.

1952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55년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로 전과하고 독일로 유학하였다. 1959년 뮌헨 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이 학교 조교로 근무하였다. 유학 중이던 1955년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달레나(Magdalen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한국에서부터 만나던 김철수와 독일에서 결혼해 딸 김정화를 낳았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당시 기준으로 대단한 특권이지만 생활비는 원활하게 조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6] 전혜린의 독일 시절 기록에는 번역으로 돈을 버는 과정에서 피로와 불안이 들어있다. 돈이 완전히 떨어져 일생에서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물배를 채우며 굶어봤다는 내용도 있다.

1959년 5월 귀국하여 경기여자고등학교, 공주사범대학 독어교육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이화여자대학교의 교강사를 거쳤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강사를 지낼 때에는 서울대학교 독문학 동아리인 독우회를 지도하였다. 1964년 김철수와 이혼 후[7] 성균관대학교 독문학과 조교수가 된다.

1965년 1월 11일 오전 9시경 서울특별시 중구 남학동 25번지 자택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별세했다. 향년 31세. 그녀의 시신은 서대문구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유해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헤르만 헤세 등 독일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사후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발간되었다.


3. 평가[편집]


요절한 천재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전혜린이 번역한 독일 소설들은 당시 호평을 받으며 '전혜린 신드롬'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사후 출판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집 중 하나로 여겨진다.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전혜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한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 여성의 심리로서 분석된다.


4. 저서[편집]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6년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1968년
  • 《목마른 계절》. 1994년


4.1. 역서[편집]


  • 프랑수아즈 사강 《어떤 미소》(Un certain sourire). 1956년
  • 에른스트 슈나벨 《안네 프랑크 : 한 소녀의 걸어온 길》(Anne Frank). 1958년
  • 이미륵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 1959년
  • 에리히 캐스트너 《파비안》(Fabian). 1960년
  • 루이제 린저 《생의 한 가운데》(Mitte des Lebens). 1961년
  • H.게스턴 《에밀리에》. 1963년
  • W.막시모프 《그래도 인간은 산다》. 1963년
  •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 1964년
  • 하인리히 노바크 《태양병》. 1965년


5. 여담[편집]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시절 독우회라는 독서모임을 이끌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노태우 정권 시절 실세로 꼽혔던 박철언이 독우회의 맴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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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33년 11월 16일[2] 법학과에서 전과하였다.[3] 정공채가 쓴 전혜린의 평전 '아! 전혜린'의 부제다. 그녀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잘 묘사했다.[4]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로 활동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미군정이승만 정부에서도 경찰 고위직을 역임했고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자 반민특위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경찰을 떠나 헌병 장교로 임관했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진상 은폐를 주도했다.[5]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화준(金化俊)의 딸이다.[6] 동란이 막 끝나고 도독한 것은 당시 대한민국 형편은 물론 여행자유화도 실행되지 않았던 실정에서 어지간한 권력과 재력이 바탕되지 않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이웃나라인 일본으로의 유학도 상당한 재화가 소비되는 일이었는데, 당시에 직항편도 없었던 독일로의 유학은 그 자체로 기득권임을 증명하는 징표였다.[7] 김철수는 후에 재혼하였는데 재혼한 부인이 평생 동안 전혜린의 제사를 지냈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도 제사에 참석하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