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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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출신 감독. 現 서울 SK 나이츠 감독.
대한민국 대학 농구의 최고 인기 시대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이다. 프로 시절에도 초창기에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아쉽게도 대학 시절의 명성만큼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국가대표팀에서는 실력과 명성에 걸맞게 활약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고교-대학 시절[편집]
경복고에서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 센터를 맡아 한 경기에 31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등 신입생 때부터 초고교급 기량을 선보이며 경복고를 일약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당시 최강팀이던 용산고[7] 에 밀려 여름까지 2차례 준우승에만 머물다가, 마침내 8월 종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며 경복고에게 19년만의 우승트로피를 안겨주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 198cm니 앞으로 더 크면 얼마나 굉장하겠냐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키는 결국 저 때 키에서 하나도 안 컸다.
2학년때는 새롭게 강호로 떠오른 이상민의 홍대부고와 골리앗 신입생 서장훈이 입학한 휘문고에 밀리면서 경복고는 춘계연맹전 준우승 한번에 그쳤지만, 전희철은 고교 최강의 센터로 인정받으며 동창 우지원과 함께 아시아 청소년대회 대표팀에 선발된다.[8]
3학년때는 서장훈-현주엽 1,2학년 콤비가 이끄는 휘문고의 아성에 밀리면서도 2번의 우승(쌍용기, 전국체전)을 더 따낸다. 특히 쌍용기 결승에서 전희철은 휘문고 떡대들과 치열한 골밑 다툼을 벌이면서 무려 29점을 올리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92학번 전체 랭킹 1위[9] 로 꼽히며 엄청난 스카웃 경쟁과 아버지의 설득 끝에 고려대로 진학한다. 특히 빅맨 양성소라 불리던 중앙대가 강하게 접근했지만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고려대로 결정했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입학 후 초등학교 동창이자 라이벌 용산고의 에이스였던 김병철과 함께 1학년때부터 주전멤버로 출전하지만, 당시 대학농구를 양분하던 연세대[10] 와 중앙대[11] 에 밀리면서 고교시절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이때 고려대 농구부는 아직 고교생 티도 못벗은 전희철-김병철이 곧바로 에이스 역할을 해야할 정도로 선배 멤버들이 부실[12] 했고, 특히 라이벌 연세대에게는 MBC배, 춘계, 추계 대학연맹전 및 정기연고전까지 연패를 거듭하다 1학년 마지막에 열린 1992-93 농구대잔치에서야 겨우 한번 이겼을 정도였다.[13] 농구대잔치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산업은행, 경희대 등에게 패하며 예선 9위(5승 8패)에 그쳐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14]
2학년때 고려대가
전희철이 3학년때, 슈퍼루키 현주엽-신기성이 가세하면서 고려대는 MBC배에서 이상민, 서장훈이 건재한 연세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17] 이후 전희철은 현주엽과 함께 대표팀에 불려다니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때 고려대 선수단 뎁스가 장난이 아니었던지라[18] 고려대는 이어진 연맹전 1,2차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시즌 3관왕을 달성한다.
1994-95 농구대잔치에서도 고려대는 내로라하는 실업팀들을 연파하며 정규리그 2위[19] 에 오르며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쥘 강력한 후보로 꼽혔다. 8강에서 중앙대를 가볍게 꺾고 플레이오프 4강에서 만난 상대는 전 대회 8강에서 중앙대에 패했던 왕년의 강호 기아자동차로, 전대회에서 허-동-택 트리오의 노쇠화로 무너졌던 이력이 있었고, 때문에 고려대가 기아를 물리치고 농구대잔치 결승전에 나가리라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전희철은 기아와의 이 시리즈에서 유독 높은 필드골 성공률을 자랑하며 고군분투했고 2차전에서 통렬한 드라이브인 덩크를 터뜨리는 등 임팩트를 남기긴 했지만,[20] 골밑을 장악하지 못하고 계속 자유투라인 근방의 2점슛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대학시절 내내 전희철의 이런 중거리 2점슛 성공률은 실로 엄청났고 이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주엽도 골밑을 돌다가 계속 외곽으로 빼주며 김병철-양희승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둘이 결론적으로 김유택-한기범에게 밀려나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 외곽이 다 터지는 날은 기아나 연세대나 노답인 팀이 고려대였으나, 모든 선수가 한날 다 터질 수는 없는 일. 2차전은 26점의 김병철을 비롯해 양희승 전희철이 모두 터지며 기아를 격파했으나, 결국 고려대는 기아에 1승 2패로 패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했고, 역시 패배의 원흉으로는 전성기를 지난 김유택-한기범 앞에서 정규 시즌의 위력을 보이지 못한 전희철-현주엽이 함께 꼽혔다.
4학년이 된 전희철은 한살씩 더먹은 베스트 5 신기성-김병철-양희승-현주엽과 함께 고려대 농구부를 거의 사기 수준의 강함으로 이끌면서 대학 농구를 제패했고,[21] 이어진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2년전 대회의 연세대에 이어 사상 2번째 정규시즌 전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특히 정규리그 서울방송과의 경기에서, 앞서가던 경기가 서서히 쫓기자 혼자 힘으로 드라이브인 2번, 덩크슛, 3점슛까지 혼자 9점을 몰아넣으면서 승기를 가져오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정규리그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막강한 나머지 당시 고려대는 농구대잔치 우승 후보 1순위였다. 특히 백코트 김병철(대회 3점슛 1위, 성공률 1위) 양희승 신기성의 외곽포는 전년보다 더욱 위력적이었고 전희철 또한 위에 기술된 바와 같이 커리어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4강에서 또다시 만난 허동택 트리오의 실력과 관록은 여전히 대한민국 최강이었고 여기에 역대급 스포인 김영만까지 가세한 상태였다. 이들의 위력 앞에 전희철을 비롯한 고려대 선수들은 정규 시즌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결국 기아자동차에게 1승 2패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만다. 특히 매 경기 접전이었던 전년 시리즈보다 더욱 김빠진 것이 3차전은 무기력 그 자체로 후반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노장 듀오 김유택-한기범을 상대로 전희철-현주엽 콤비는 해설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화려한 플레이를 연이어 선보였으나, 김유택에게 계속 손쉽게 득점을 내주는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 김유택을 상대로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다 손쉬운 골밑 점수를 헌납하는 장면을 여러차례 보여주는 등 정작 실속이 떨어졌다.
2.2. 동양제과 시절 (1996-1997)[편집]
프로농구 출범이 기정사실이던 1996년, 신생팀 동양제과 농구팀은 고려대를 창단 연고지명팀으로 선택하고 전희철, 김병철, 박준영(F,195cm), 김승민(G,182cm) 등 고려대 92학번 4명과 경희대 가드 김광운(181cm), 한양대 센터 이흥섭(200cm) 등으로 선수단을 꾸린다. 계약금 4억 5천만원을 받고 동양제과에 입단한 전희철은, 프로화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실업농구대회인 코리안 리그에서 화끈한 인게임 덩크를 포함해 내외곽을 넘나드는 전방위 공격력을 과시하며 지난 농구대잔치 준우승팀 상무[22] 를 비롯한 기존실업팀들을 연파한 끝에 신생팀 동양을 우승시키며 대회 MVP에 오른다.
이후 프로출범전 마지막 농구대잔치에선 발목부상으로 빠진 김병철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며 실업부 6위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지만, 전희철은 대회평균 29.3점을 올리며 대회 득점 2위[23] 및 신인상(실업부)을 차지한다.
2.3. 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7-2002)[편집]
그리고 출범한 KBL 원년시즌, 대구 동양 오리온스로 이름을 바꾼 팀의 주전 파워 포워드로 나선 전희철은 교체 없이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하다시피 하며[24] 시즌 평균 23.1점[25] -6.9 리바운드를 기록, 외인 가드 토니 매디슨(평균 29.1점), 김병철과 함께 팀을 리그 4위에 올려놓는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4강에서 만난 부산 기아에 전력차를 실감하며 물러났지만[26] 전희철은 프로 원년시즌 베스트 5에 오르며 외인들이 점령한 KBL에서 토종의 희망 같은 최고의 스타 반열로 올라선다.
두번째 시즌(1997-98), 새 외국인 선수 키넌 조던, 키이스 그레이를 파트너로 맞은 전희철은 평균 18.2점-5.0 리바운드로 기록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팀내 2옵션 역할을 유지하며, 대구 동양을 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6강 플옵에서 전희철은 평균 19.2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원주나래를 격파, 2년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하지만, 이후 4강전에서 전희철이 무릎부상으로 골골대면서 리그 1위팀 대전 현대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못한 채 3패로 광탈하고 만다. 시즌 후 전희철은 공익근무로 병역을 치렀다.[27]
소집해제 후 맞이한 1999-00시즌, 세계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패배를 쌓았던 오리온스에 복귀한 전희철은, 개막 2번째 게임이었던 대전 현대와의 원정경기에서, 대전 현대의 센터 로렌조 홀(203cm)의 팔꿈치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와중에도 그대로 붕대를 감고 뛰며 덩크슛을 터뜨리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KBL 컴백을 알린다. 하지만 이 시즌 전희철은 192cm의 떡대 루이스 로프튼에게 골밑을 맡기고 외곽에 나와 3점을 쏴대는 일이 잦아지면서[28] 토종 파워 포워드로서의 면모가 사라졌고, 팀은 시즌내내 포인트 가드 부재로 골머리를 앓다 결국 1게임 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00-01 시즌. 김병철, 김광운, 그리고 중고신인 박재일까지 상무에서 제대하면서 전희철은 비로소 오리온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려 팀은 이전 시즌보다 더욱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고 말았으며, 전희철은 평균 15점 5리바운드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외국인 선수들로만 채워진 다른 팀들의 골밑을 공격하는데 버거워하는 모습도 보였고 또 한번 부상을 당하며 시즌 중에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결국 팀을 나락에서 구해내지는 못 했다.
01-02시즌.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라이언 페리맨이 합류한 오리온스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지난날의 오욕을 털어냈고, 전희철은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를 오가며 14점 4리바운드를 기록, 단짝 김병철과 함께 오리온스 팀의 사상 첫 번째 우승을 이뤄낸 공신 중 한 명이 된다. 상대팀 스몰 포워드와 매치업 시 신장차를 이용해 1:1 포스트업으로 올리는 골밑 득점은 대구 동양의 대표적인 세트오펜스 옵션이었고, "Not 스몰 포워드" 전희철을 막기 위해 챔프전 상대팀 서울 SK는 한양대 센터 출신인 김종학(197cm)을 3번 자리에 내세우기도 했다.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전희철은 프로 커리어 첫 우승을 달성하지만, 오히려 우승을 해서 팀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01-02시즌 동양은 전체 샐러리캡 10억 5천만원 중 99.14%가 소진될 정도로 고액 연봉이 나가는 팀이었는데, 우승까지 하게 되면서 모든 선수의 연봉을 올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29] , 샐러리캡을 확보하기 위해선 누군가는 팀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팀내 최고액 연봉이었던 전희철[30] 이 결국 2년차 포워드 이현준(193cm)과 현금 6억원에 전주 KCC 이지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동양의 02-03시즌 샐러리캡[31] 이 정리된다.
2.4. 전주 KCC 이지스 (2002-2003)[편집]
02-03 시즌. 앞선 시즌에서 이상민을 필두로 추승균, 양희승, 정재근, 제런 콥, 재키 존스 등 장신선수들의 1:1 공격과 속공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토탈 바스켓볼의 위용을 보인 전주 KCC 이지스로선, 골밑 공격과 외곽 공격이 전부 가능한 전희철의 합류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게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희철은 KCC이지스의 복잡한 패턴 플레이에 전혀 적응 못 하고 그냥 3점 덜 들어가는 슈터로 전락,[32] 평균 10점 2.9리바운드의 식스맨급 기록만 남겼고, 팀은 9연패를 당하는 등 나락으로 떨어지며 최종순위 9위로 추락한다. 시즌 후반부터 전희철은 노장 정재근에게도 밀려 아예 벤치멤버가 되는 굴욕을 겪고, 이는 03-04 시즌까지 계속된다.
새 시즌에도 전희철이 3번으로서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신선우 감독은 이상민-추승균-찰스 민렌드-무스타파 호프의 주전 4명 고정에, 남은 한자리를 로테이션으로 기용하는 정책을 썼고, 이에 전희철은 다시 트레이드를 요청, 역시 새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조성원과 트레이드로 서울 SK 나이츠의 일원이 된다.
2.5. 서울 SK 나이츠 (2003-2008)[편집]
서울 SK에서 전희철은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장해 평균 14.7점 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이시즌 전희철은 하이포스트를 파고 들다 두 빅맨 아비 스토리-스테판 브래포드에게 뿌려주는 패스로 커리어 하이인 평균 3.5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색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팀은 6위와 압도적인 승차로 7위에 머물고 만다.
04-05 시즌부터 몰려든 자유계약출신 외국인선수들의 강력함에 전희철을 비롯한 토종 빅맨들은 대거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전희철은 출장시간이 매년 급격히 줄어들며 완전히 벤치멤버, 나중엔 2쿼터의 사나이로 불리는 굴욕을 맛본다. 나이가 먹으면서 이런 저런 잔부상까지 당하며, 한시즌 한시즌 지날수록 예전의 위력은 사라져 갔다.
07-08 시즌을 평균 3.7점 2.3 리바운드의 기록으로 끝내고 FA자격을 얻은 상태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다른 팀들 중 전희철을 원하는 팀은 없었다. 원 소속팀인 SK 나이츠에선 1억을 제시했지만 전희철은 1억 2천을 요구하며 제의를 거부,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서울 SK 나이츠에서 영구 결번이 되었지만, 문경은과 더불어 논란이 되고 있는 영구 결번 선정이다. 많은 농구팬들 사이에서 전희철은 서울 SK가 아니라 대구 동양의 레전드로 일컬어지기 때문.[33] 하지만 이후 12년이 넘게 SK에서 선수, 코치로 일했고 끝내 문경은과 함께 2018년 우승을 해내면서 영구 결번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거기다 친정팀이 매각 이후 과거를 부정하는 행보를 보이면서[34] SK만의 결번으로 확립되고 있다.
3. 시즌별 성적[편집]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맨발기준 196cm의 신장, 체격대비 뛰어난 스피드와 탄력을 바탕으로 대학 및 프로 출범 이전의 실업 시절에는 골밑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인게임 덩크로 하이라이트 필름을 곧잘 찍어내던 선수가 중거리에서 넣는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특기로 삼을 정도로[35] 슈팅 능력도 수준급이었으며, 3점 슛의 경우 포지션 불문하고 리그 최상위권인 40% 성공률을 기록한 시즌도 있다.
대학 시절에는 팀 내에 본인의 체격을 능가하는 장신 센터가 박재헌 정도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시기에 따라 출전시간을 거의 못 받기도 하던터라 전희철은 현주엽과 함께 골밑에서 플레이했다.[36] 한편으로는 골밑 몸싸움과 리바운드 같은 궂은 일을 다소 꺼린다는 비판도 이 때부터 받았으며,[37] 팀플레이에 미숙함이 있다거나 지나치게 운동능력에 의존하며 공격 기술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KBL에서 골밑에 있는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뿐일 때는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으며, 특히 프로 첫시즌에는 팬들이 기대하는 득점머신의 역할을 부족함 없이 수행했다. 그러나 공익 근무를 마친 후에는 계속된 잔부상으로 인해 많이 떨어진 운동능력, 외국인 선수들의 골밑 장악 속에 장점은 줄어들고 약점은 더욱 부각되어 기존의 위력을 잃어갔다.
원년 시즌의 활약과 이에 대비되는 이후의 모습들 때문에 KBL에서 외국인 선수 제도로 인한 희생양 하면 항상 꼽히는 선수. 한편으로는 공익 근무 이후 급격히 늘어난 부상들 때문에 공익 근무 당시 몸 관리가 부족했던 거 아니냐는 시각도 있고,[39] 기량 유지만 잘 되었더라면 슛 좋고 잘 달리는 장신 스몰 포워드로 자리잡고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쳤을거라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5. 국가대표 경력[편집]
아시아권에서 항상 한국 팀의 벽이었던 중국전을 보면 파워 포워드로 나섰을 때는 딱히 팀플레이로 만들어내는 효과도 없고 중국의 상대 선수와 비교해 우위에 있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수비 구멍만 되는 모습을 보였다. 수비적으로는 밀렸을지라도, 공격적인 면에서는 자신이 출전한 어떠한 대회에서든 최소 1인분의 몫은 해주었던 선수였다. 그렇기에 10년 이상을 국가대표팀에 중용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전희철하면 모든 국대 농구팬들이 인정하는 명경기가 2개 있다. 대표적인 경기가 1997년 ABC.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대표팀의 센터로 출전[42] , 준결승에서 중국[43] 을 상대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던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는 허슬 폭발 골밑 수비로 중국의 거대한 선수들과 맞서고, 센터 포지션임에도 정확한 외곽슛으로 중국팀의 센터를 끌어내 다른 한국 선수들이 골밑을 돌파할 공간을 만들고, 중국이 지역방어로 나오자 냅다 3점슛을 꽂아 비수를 꽂기까지 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중국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일본[44] 을 상대한 결승전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45] ,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승. 대회 MVP는 당연히 전희철의 몫이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선 스몰 포워드 자리로 출장, 중국 선수에게 밀리지 않는 높이로 외곽슛을 연달아 꽂으며 팀 승리의 공신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렇게 전희철은 아시아 정상을 두 번이나 차지한 몇 안 되는 한국 선수 중 한명이 되었다.
6. 지도자 경력[편집]
7. 어록[편집]
강력한 리더십과 탁월한 전술로 농구 팬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모교인 고려대 농구부에서 김동광 급이라는 평. 추가로 타임아웃 때 용어를 보면 예전 현역 시절 스승이었던 김진 감독을 소환할 정도다. 70년대생 감독 중 조상현과 함께 어록이 꽤 있다.[46] 무엇보다 선수단 장악력이 뛰어난 것이 가장 큰 장점. 간혹 선수들이 어이없는 플레이를 할 때 강하게 질책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역시 거부감이 느껴지는 독설이나 폭언이 아닌 진심어린 조언으로 과거 몇몇 감독과 달리 호평을 받고 있다.
7.1. 2021-2022 시즌[편집]
(고함)정신들 왜 안 차리는거야 게임을 하다가 져야 될 것 아니야 게임을 하다가! 뭐하는거냐고 대체 들어가서 턴오버 하면 게임 안 할거야? 턴오버 하면 수비 안할거냐고,뭐 할거야 들어가서
2021-22 시즌 12월 27일 kt전 3쿼터 작전타임 도중.
아니 마구잡이 농구 안 된다고 몇 번을 얘기해 막 쳐박어 그냥 막 막 막 야 어떻게 그걸 집중을 못하니 패턴을 하라는 건 그대로 하지도 않고 끝나고 난 다음에 빵빵 쏘지 말라니깐 그냥 다 던지고 끝나고 난 다음에 리바운드 참여 안해서 다 속공 먹고 게임 전에 하지 말라는 것만 다 해 지금!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거 세 가지 하지 말라했는데 그것만 한다고 들어가서! 어! 야! 나가면 뭐 할 거야 임마!!! 야 나가면 뭐 할 거야 지금!! 얘기 안 들어!!! (잠시) 침묵 하이 로우 잡아서 2대2를 하던지 리온 밀고 들어오는 거 봐줘 내가 얘기했어 지금 이대로 들어가서 하이 잡고 밀고 들어오고 안 되면 하라고 얘기했어
2021-22 시즌 3월 9일 모비스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야 왜 예상을 빗나가지 않냐 어? 야 내 예상이 빗나가질 않잖아 점수만 벌어지면 그래 도대체! 야! 게임이 끝날 때 끝나는 거지 게임 도중에 끝나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해! 야! 6분 시간이야. 6분. 또 6분 남았잖아 김선형 : 정리해 X2. 내가 정리할게 야야! 잘 들어! 지금 우리가 계속 공격 잘 될 때 봐봐 공이 끌어지면은 공격이든 수비든 타이트하게 들어가는데 공격할 때 공을 끌면 오히려 우리가 더 손해란 말이야 얘네가 지금 준비한 수비가 ?? 오잖아 파울 안 불려 무슨 얘기인지 알아?
2021-22 시즌 5월 8일 KGC전 챔피언결정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7.2. 2022-2023 시즌[편집]
무적 LG, 어떻게 할 거야!? 아니 나한테 불만들 있으면 얘기들을 해!! 표정들 그런 표정들 가지고 게임하지 말고 표정부터 졌잖아 무슨 게임을 할 거야!?
2022-23 시즌 2월 1일 LG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무섭냐? 야, 농구선수들이 림을 못 보면 무슨 농구를 할거야! 얘만 찾아? 얘 둘만 계속? 전부 다 볼 잡고 절절절절절!!! 아... 뭐 전부 다 파울은 투샷 파울이고 다! 슛만 일어나면 다 속공먹고. 뭐할거야 도대체! 말들해봐 뭐할거야!! 기량이 안되면 열심히 뛰던지 임마!!! 다들. 얼굴도 허얘져가지고...
2022-23 시즌 3월 12일 KGC전 3쿼터 작전타임 도중.
야! 결국 우리가 자초한 거야~! 전반부터~ 지금부터! 나머지 7분! 너희가,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게임인 거~ 야! 우리가 자초해서! 21점을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게임 끝내야지! 어떡해?? 심판 탓하지마!! 지금부터 심판 탓 단 한마디도 하지 마! 게임에만 집중해!! 심판 쳐다보고 딴짓하지 말고! 너 왼쪽 끝까지 붙여!! 파울 안 불어도 끝까지 붙여!!
2022-23 시즌 4월 18일 LG전 4강 플레이오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연속으로 다 리바운드 뺏겨준 거 아니야~! 어디로 뛰어?! 리바운드 잡고 뛰어야지~!! 아니 그렇게 박스아웃 해달라 하는데 지금 엇, 몇 개를 뺏기니? 타임 안 부를 수가 없잖아 지금 마지막 들어간 거 말고 그전에 세 개 네 개를 계속 리바운드 뺏기는 거 아니야!! 아니 이거는 누구의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니잖아! 팀 전체가 잡아줘야지 누구 하나 누ㅡ 막자 하잔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책임을 지고 잡아가 줘야지~! 한번 공격에 계속 두 번 세번째 공격해서 상대한테 공격권 줘서 어떻게 할 거야~! 어, 미리 처리를 해야 돼!
2022-23 시즌 4월 29일 KGC전 챔피언결정전 3쿼터 작전타임 도중.
7.3. 2023-2024 시즌[편집]
야, 게임 이길려고 뛰는거야! 지금?? 다 뭐하는 짓들이야?? 도대체?? 다 뭐하는 거야?? 야! 보고 참는것도 한계가 있는데... 팀을 대표해서 뛰고 있는게 이딴 식으로 게임을 해?? 어?? "하고자 하는 투지도 없고 XX들 뭐하는거야!! XX들아 다들" [48]
시간은 충분한데 정신상태가 안돼. 될 수가 없어!! 지난경기하고 오늘경기하고 다들 생각을 해봐! 이런 결과가 나오는거야! 기량이 문제인 거 같애?? 다 마찬가지야!!
2023-24 시즌 11월 26일 소노전 3쿼터 & 4쿼터 작전타임 도중.
1차
우리 자체적으로 찬물을 부어버리냐?? 어?? 아니, 점수 12점 이기고 지금 시간 2분 남았어? 게임 안할꺼야? 야, 퉁퉁퉁 로우포스트 들어와가지고 턴오버 가서 보고 있다가. (턴오버) 잡혀서 안된다니까! 야! 패턴 불러서 들어가! 언제 넘어가서 지금 얘만 다 쳐다보고 있는데 주는건 좋아. 플레이를 보이고 뭔가 흔들고 난 다음에 줘야 얘내도 수비가 흔들려 있지. 넘어가서 언제 공격할꺼야! 여기서부터 배스가 치고와가지고 덩크하는데 아무도 데드 안해주면 어떻게 할꺼니?? 늦추지 말라니까. 플레이 할 꺼 다하고~ 어? 너무~ 야, 주라고 하면 쳐다만 보고 있고~ 공격하라고 하면 와서 단발로 쏴버리고~ 섞어서 해야지~ 섞어서~
2차
드리블로 정리를 하지말라니까. 트랩을 걸든. 뒤로 몰린 상황에서 패스할 때 스틸을 노릴 때 (상대팀이) 아까 빅맨들 하고 주고 달리라고 했잖아? 왜? 야. 가드 세 명이서 턴오버를 이렇게 많이 해버리면 게임을 어떻게 들어갈꺼야? 아니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너희 세 명이 턴오버를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게임을!! 지금 턴오버러 다 먹은거 아니니? 자! 야! 그래도 리드하고 있어. 지금, 우리가 지금 우리 잘못이야! 전부 다. 상대가 잘하는 것보다 우리 잘못이잖아? 시간 끌다가 턴오버 당하고 패스도 . (그렇고). 또 얘기하는거야. 얘네가 프레스 붙으면 J 미트 아웃 주고 미트 아웃 잘 나와서 잡아주고. 다 스틸 들어오잖아. 야, 3쿼터까지 스틸하다가 (우리가) 뭐하는거냐고 4쿼터에.
2023-24 시즌 2월 3일 kt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야, 여기서 내가 봐도 (상대) 타이밍 다 보이고 스위치 하던지 말도 안하고 볼 저 쪽 싸인하다가 서로 (뒤)돌고 있다가 몇 개를 주는거야 지금 왜 정신들 안차려!? 야! 똑같은 거 몇번을 하냐고 도대체 몇 개째!! 아~! 야, 내가 화를 안내려고 해도 야, 보고 있는 사람도 다 화내겠다 어? 아니, 말이 되는 턴오버를 해야 될 거 아니야 이거 턴오버 아니야? 수비? 니네 둘다 안하는거여서 니네 "아차" 했지 지금? 미리 얘기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미리 앞 쪽 라인 세트 떨어져서 잡히는거 아니야? 안 쪽으로 헬프가서 잡으면 되는거 아니야? 어? 볼이 어디다, 어디 쪽에 있냐고 집중들 해 어? 야,야 집중들 하자고 똑같은 거 똑같이 해서 똑같이 지지말고 집중들 하자고 어? 알았어? 야! 야x2 아야야야 피스트 들어가 얘 볼 한 번 잡게 피스트로 들어가 봐봐 얼굴 피고 해 괜찮으니까, 집중하라고 야 뭐라고 하면 얼굴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임마!
2023-24 시즌 2월 4일 모비스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시간도 없는데 지금 몇 번을 뺏기는거야 리바운드를 1쿼터부터 리바운드 몇 개를 뺏겨!! 아니 운 좋게 운 없이 튀는거 말고 지금 다른 거 앞에 떨어지는 거 못잡는데 리바운드 게임을 어떻게 이길건데? 한번 공격 하고 3번,4번 수비하면 어떻게 하니 야, 골을 넣고 뭐 수비가 안되고, 그게 아니라 지금 패스를 몇 번을 주냐고 이게 무슨 정신적인 무슨 뭐 전술이고 뭐가 필요해 지금 골 넣으면 뭐할거야? 야,야야야야 너 저걸로 들어가봐 J야 얘 그냥 저 스트롱으로 들어가서 반대 부경이가 스크린 걸어가지고 반대 쪽으로 떨어지게끔
2023-24 시즌 3월 1일 가스공사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야! 그러면서 무슨 게임을 뛰어달라고 그래.
(김형빈을 보며) 쏠 때 힘들면은 옆에다 줘.
힘들어서 슛 안날라가면 쏘지 말아, 옆에다 줘.
체력을 키우던지.
슛 쏠 때부터 힘들어서 슛이 안날라가잖아.
(김형빈을 보며) 힘들어서 슛을 못쏴.
2023-24 시즌 3월 31일 KCC전 4쿼터 작전타임 도중.
8. 기타[편집]
- 우지원 선수와는 절친한 관계이다. 삼선중학교 농구부, 경복고등학교 농구부에서 6년간 함께 뛰었다.
- 고려대 농구부에 있던 시절 박한 감독의 무작전 농구 때문에 술자리에서 제대로 작전 짜인 농구 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하지만 전희철은 작전 농구의 극한인 신선우 감독 밑에서 전혀 적응 못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 1996년 <스타가 되기까지>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 현역 시절에 유난히 부상을 많이 당해서 유리몸의 이미지가 있는데, 경기 중 불의의 부상도 있기는 하지만 상대 용병의 거친 플레이나 운이 억수로 나쁘게 부상을 당한 경우도 많아서 전희철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많기도 하다. 그 예로 과거 전주 KCC 이지스의 전신인 현대의 용병이었던 로렌조 홀[49] 에게 대놓고 얼굴을 파리채 블록으로 얻어맞는다든가[50] 상대 선수와 같이 넘어지는데 안면에 니킥으로 얻어맞는다든가 오리온스 시절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라이언 페리맨 뒤에서 점프해서 착지하다가 치아로 페리맨의 머리에 정통으로 찍어버려서 치아 부상을 당한다든가 여러 가지로 불운한 경우도 많았다. 이 때 전희철도 그렇지만 페리맨의 머리 윗부분이 심하게 찢어진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했다.[51]
- 같은 SK 출신으로 조상현과 유독 이야기거리가 있다. 조상현은 방성윤과 3대3 맞트레이드 이후 FA로 풀리면서 LG로 이적했다. 현역 막판 시절 SK와 LG의 선수 맞대결이 있었고 이후 감독으로도 SK와 LG로 맞대결을 치르고 있다.
- 2013년 방영된 우리동네 예체능/농구편의 코치로 출연했다.
- 은퇴식과 함께 등번호 13번이 SK 나이츠에서 영구 결번이 되었다.[52] SK 나이츠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 해준 전희철이 영구 결번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한편, 팀에서의 활약을 떠나서 한국 농구의 전설인 선수에게 나이츠에서 좋은 예우를 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전희철은 문경은과 함께 12년 동안 선수와 코치로 SK에서 고생하면서 끝내 우승까지 해내면서 이러한 구단의 예우에 보답했다. 참고로 나이츠의 역사상 첫 영구 결번 선수다. 그리고 나이츠에서 선수+프런트+지도자로 20여년을 안식년 없이 개근하며 구단의 영구 결번 선정에 기꺼이 보답하고 있다.
- 김승현이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김승현의 플레이를 보고 어머니한테 끝내주는 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53]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대구 동양 시절이었던 2001-2002 시즌 챔피언결정전 7차전 종료 당시 우승에 너무 기쁜 나머지 농구공을 심판에게 주지 않고 관중석에 던지는 해프닝이 한번 있었다.
- 뭉쳐야 쏜다에서 특별코치 및 용병으로 출연했다. 경기에서는 KBL 외국인선수 규정을 적용하여 전희철과 문경은은 동시에 뛸 수는 없었는데 2쿼터에 투입되어 뛰는 도중 종아리쪽에 부상을 당하여 조기퇴근을 하는 바람에 문경은은 나머지 시간을 뛰는 고생을 해야했고, 감독인 허재에게도 나이가 좀 더 어린 코치가 어째서 더 몸이 약하냐는 비아냥(?)을 듣는 굴욕을 겪었다. 경기 외의 여담으로는 안정환이 대학시절 클럽 화장실에서 만난
소변 보는데 그늘이 지길래전희철을 쳐다보면서 키 x나 크네 라고 중얼거리다가 이에 화가 난 전희철에게 하마터면맞아죽을폭행을 당할수도 있었다는 썰이 풀기도 했다. 다행히 같이 있었던 현주엽이 중재하며[54]그때 내가 안말렸으면 쟤 얼굴이 내 얼굴됐지큰 일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 슬하에 딸 두명이 있는데, 두 딸 모두 무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희철에 따르면 둘째가 운동신경이 좋아 운동을 시키려다 무용을 시작했는데 첫째도 이후 같이 시작했다고 한다.
- 전자제품, 컴퓨터, 게임 등을 굉장히 좋아하며 직접 다룬다고 한다. VR 기기도 다루며 고가의 시스템 세팅도 직접 한다. 메모는 태블릿으로 하고 경기 영상 분석 프로그램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에 2년 정도 빠져 매뉴얼 북을 다 읽어가며 게임을 즐겼다고 하는데, VR 글래스를 착용한뒤 조이스틱으로 실제 비행기를 모는 것처럼 서울에서 이륙하여 자동항법장치를 걸어두고 한잠 잔 뒤에 LA 공항에 착륙하면 정말 재밌었다고. 사실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고가의 장비와 고사양의 PC를 반강제적으로 요구하므로 이 게임의 팬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전희철이 컴덕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2021년에도 방송사 취재에서 집에서 울트라 와이드 모니터와 VR기기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유로 트럭을 하고 싶은데 감독 생활에 지장 받을까봐 못 한다고.